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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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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 건국자 이외에 대한 내용은 칭기즈 칸(동음이의어) 문서
1. 개요[편집]
이 그간의 1,000년, 아니 3,000년 동안 이와 같은 땅을 가진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구려. 원문[9]칭기즈 칸(
그는 몽골 초원의 허허벌판 위에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일 제국을 건국했으며, 13세기의 구대륙을 제패하여 세계사의 흐름을 크게 바꾼 입지전적 인물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중국 대륙에서 원나라를 개창한 이후 칭기즈 칸에게 태조라는 묘호를 올렸다.
2. 칭호[편집]
칭호인 칭기즈 칸은 1206년부터 칭하기 시작했다. 테무진보다 세력이 더 컸던 의형제 자무카는 내심 칸이 되기를 기대했으나, 주르킨 씨족 등의 강력한 지지로 테무진이 칭기즈란 칭호를 받고 칸이 되었다. 이후 자무카는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해 멋대로 온 세상의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구르 칸에 올라 칭기즈칸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상당히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결국 진압되었다. 자무카는 패주하는 도중 부하의 배반으로 칭기즈 칸에게 붙잡혀 사형당한다.
당시의 몽골어로는 칭기스 칸이라고 부르는 것이 실제 발음에 가장 가깝다고 한다.[11] 오고타이 칸 이후로는 '칭기스 카간', 13세기 후반 이후로는 '칭기스 카안'으로 불렸다고 한다. 현대 몽골어로는 발음이 '칭기스 하앙'[ˈt͡ɕʰiŋɡɪs χaːɴ]에 가깝게 발음한다. 몽골 문자로 표기할 때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칭기스 카간'으로 표기하는 것이 표준이다.
현대 몽골어로 '칭기스(Чингис)'는 위대하다를 뜻한다. 어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라시드 앗 딘은 '칭'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는 뜻이며 '칭기즈'는 '칭'의 복수형이라고 기술했다. 또한 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칭'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 수 없고, 호수나 바다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인 tangiz에서 온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칭기즈 칸은 사해의 군주,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가 된다. 이 외에도 중국어 천자(天子)나 새가 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성어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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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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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족 관계[편집]
제1오르도 관리
- 제1황후(皇后): 광헌익성황후 홍길랄씨(光獻翼聖皇后 弘吉剌氏)
- 장남: 주치(朮赤)
- 차남: 차가타이(察合台)
- 장남: 무투겐
- 4남: 카라 훌레구: 차가타이 칸국의 초대 칸
- 장남: 무투겐
- 3남: 태종 오고타이(太宗 窩闊台), 몽골 제국의 제2대 대칸
- 장남: 귀위크 칸: 몽골 제국의 제3대 대칸
- 4남: 예종 툴루이(睿宗 拖雷), 몽골 제국의 임시 대칸
- 장녀: 창국대장공주 코첸 베키(昌國大長公主 火臣 別吉), 창충무왕 패독(昌忠武王 孛禿)에게 하가(下嫁)
- 차녀: 연안공주 체체 이켄(延安公主 撦撦亦堅), 토랍이길(土拉而吉)에게 하가(下嫁)
- 3녀: 조국대장공주 알카이 베키(趙國大長公主 阿剌海 別吉), 불안석반(不顔昔班), 북평왕 진국(北平王 鎭國), 조무의왕 패요합(趙武毅王 孛要合)에게 하가(下嫁)
- 4녀: 운국공주 투멜룬(鄆國公主 禿滿倫), 적굴(赤窟)에게 하가(下嫁)
- 5녀: 아아답로흑 공주(阿兒答魯黑 公主), 태출(泰出)에게 하가(下嫁)
- 황후(皇后): 홀로륜 황후(忽魯倫 皇后)
- 황후(皇后): 활리걸담 황후(闊里桀擔 皇后)
-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후(皇后): 첩목륜 황후(帖木倫 皇后)
- 황후(皇后): 역련진팔랄 황후(亦憐眞八剌 皇后)
- 황후(皇后): 불안홀독 황후(不顔忽禿 皇后)
- 황비(皇妃): 홀승해 비자(忽勝海 妃子)
- 황비(皇妃): 야간 비자(耶干 妃子)
- 황비(皇妃): 야축 비자(耶逐 妃子)
제2오르도 관리
- 제2황후(皇后): 홀란 황후 올와사씨(忽蘭 皇后 兀洼思氏)
- 6남: 활렬견 태자(闊列堅 太子)
- 황후(皇后): 고야별속 황후(古兒別速 皇后)
- 황후(皇后): 역걸렬진 황후(亦乞列眞 皇后)
- 황후(皇后): 탈홀사 황후(脫忽思 皇后)
- 황비(皇妃): 야진 비자(也眞 妃子)
- 황비(皇妃): 야리홀독 비자(也里忽禿 妃子)
- 황비(皇妃): 찰진 비자(察眞 妃子)
- 황비(皇妃): 합랄진 비자(哈剌眞 妃子)
- 황비(皇妃): 내만녀 비자(乃蠻女 妃子)
- 8남: 출아철 황자(朮兒徹 皇子), 요절(夭折)
제3오르도 관리
- 제3황후(皇后): 야수 황후 탑탑아씨(也遂 皇后 塔塔兒氏)
- 제5황후(皇后): 야속간 황후 탑탑아씨(也速干 皇后 塔塔兒氏)
- 황후(皇后): 홀로합랄 황후(忽魯哈剌 皇后)
- 황후(皇后): 아실륜 황후(阿失侖 皇后)
- 황후(皇后): 독아합랄 황후(禿兒哈剌 皇后)
- 황후(皇后): 찰합 황후 이씨(察合 皇后 李氏)
- 황후(皇后): 아석미실 황후(阿昔迷失 皇后)
- 황후(皇后): 완자홀도 황후(完者忽都 皇后)
- 황비(皇妃): 혼도로알 비자(渾都魯? 妃子)
- 황비(皇妃): 홀로회 비자(忽魯灰 妃子)
- 황비(皇妃): 날백 비자(剌伯 妃子)
제4오르도 관리
- 제4황후(皇后): 공주황후 완안씨(公主皇后 完顔氏)
- 7남: 찰올아 황자(察兀兒 皇子), 요절(夭折)
- 황후(皇后): 홀답한 황후(忽答罕 皇后)
- 황후(皇后): 합답안 황후 속륵손도씨(合答安 皇后 速勒遜都氏)
- 황후(皇后): 알자홀사 황후(斡者忽思 皇后)
- 황후(皇后): 연리 황후(燕里 皇后)
- 황후(皇后): 독해 황후(禿該 皇后)
- 황비(皇妃): 완자 비자(完者 妃子)
- 황비(皇妃): 금련 비자(金蓮 妃子)
- 황비(皇妃): 완자태 비자(完者台 妃子)
- 황비(皇妃): 노륜 비자(奴倫 妃子)
- 황비(皇妃): 묘진 비자(卯眞 妃子)
- 황비(皇妃): 쇄랑합 비자(鎖郞哈 妃子)
- 황후(皇后): 모개 황후(謨蓋 皇后)
- 황비(皇妃): 숙량합 비자(肅良合 妃子) : 고려인(高麗人)
- 황후(皇后): 아복합 황후(阿卜哈 皇后)
- 황비(皇妃): 팔불별걸 비자(八不別乞 妃子)
- 황비(皇妃): 탑탑아녀(塔塔兒女)
- 5남: 올로적 황자(兀魯赤 皇子)
- 황비(皇妃): 불명
- 9남: 올로찰 황자(兀魯察 皇子), 요절(夭折)
- 6녀: 고창공주 야립 가돈(高昌公主 也立 可敦), 파이술 아아특 적근(巴而術 阿兒忒 的斤)에게 하가(下嫁)
- 7녀: 포역색극 공주(布亦塞克 公主), 공주(公主)의 외모가 추해 부마(駙馬)가 그녀를 좋아하지 않자 칭기즈 칸이 크게 노해 부마를 죽였다.
48명의 황후 및 황비들에게서 총 9남 7녀를 두었다.
해당 명칭들은 원나라에서 쿠빌라이 칸이 올린 것이다. 황후는 몽골어로 칸의 여성형인 '카툰'이라고 불렀으며, 내명부인 오르도를 관리했다.
알려진 딸들은 이키레스족의 보투 쿠레겐과 결혼한 코친 베키, 오이라트족의 투랄치 쿠레겐과 결혼한 체체겐(치체겐), 칭기즈 칸의 딸 중 가장 지략적인 공주로 부친을 대신해 내정을 관리하고, 전장을 나간 적도 있다고 전해지며 웅구트족의 셴구이와 결혼한 알라가이 베키, 옹기라트 부족(황후족)의 싱쿠 쿠레겐과 결혼한 투말룬, 역시 옹기라트 부족의 차우르 세겐과 결혼한 알탈룬이 있다.
현재 칭기즈 칸의 자손으로 밝혀진 사람은 직·방계를 통틀어 1,600만 명이 넘는다.[12]
6. 여담[편집]
-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전염병이나 화살에 맞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다거나 벼락 맞아 죽었다거나 말에 떨어져 죽었다거나 심지어 복상사했다고 전해질 정도로 여러 설들이 많은 편이다. 칭기즈 칸에게 원한을 품은 여인이 자신의 중요 부위에 날카로운 비수를 넣어두고, 성관계를 할 때 칭기즈 칸의 성기가 잘려 죽었다는 야사도 전해진다. 그러나 일단은 《원조비사》에서 기록된 대로 말에서 떨어진 후 그 부상과 합병증으로 죽었다는 설이 정설로 취급된다.
- 여러 의미로 볼 때 사실상 몽골의 시조다. 칭기즈 칸의 통일 이후 《대(大) 야삭》(ᠶᠡᠬᠡ ᠵᠠᠰᠠᠭ / Их Засаг)이라는 사실상의 법률과 문자가 만들어졌다. 현재 영어로는 'Yasa'나 'Yasaq' 등으로 칭해지지만, 현대 몽골어 발음은 '이흐 자슥'에 가깝다. 고전 몽골어 표기는 'Yehe Zasag'(예헤 자삭). 또 부족 국가 수준이던 몽골인들의 동질감이나 정체성도 이전보다 뚜렷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에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제1의 공항인 칭기즈 칸 국제공항 등에 그 이름을 기리고 있다.
- 칭기즈 칸의 친위대인 케식(한자로는 겁설, 怯薛)은 몽골 기병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유명하며, 몽골을 주제로 한 게임이나 매체에서는 심심치 않게 들어간다. 이 친위대는 원래 1203년 칭기즈 칸이 다른 부족의 자객을 막으려고 창설한 부대인데 원래 100명에서 시작했던 게 전성기까지 10,000명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 자식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이었는데 다른 것보다 주치가 문제였다. 반대로 호라즘 왕조의 잘랄 웃 딘의 경우 할머니에게 암살당할 뻔한 것을 정작 그가 제거된 후 후계자로 옹립될 예정이었던 동생이 이를 거부하고 형에게 달려가 알린 덕분에 목숨을 건졌을 정도로 형제 간 사이가 좋았다. 잘랄 웃 딘의 활약을 칭기즈 칸이 보고 "저런 아들을 둔 아버지는 행복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전승이 있는데, 형제간의 우애를 알았다면 더더욱 부러워했을지도? 주치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냐는 문제로 2남인 차가타이와 갈등이 있었고 이런 와중에 오고타이가 칸이 되었다.
- 아시아의 약 8%(전 세계의 0.5%)의 남성 인구는 같은 Y염색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염색체의 기원이 딱 징기스칸이 활동하던 시절인 11~13세기 정도로 수렴되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염색체의 공통조상을 칭기즈 칸으로 지목한다. 이에 대한 반박하는 학설도 있으나(#) 이 반박자료도 문제가 있는데, 혈통 논란으로 당대에도 말이 많았던 맏아들 주치의 후손들이 다른 후손들과 Y염색체가 다르다는 조사결과를 뭉개버렸다는 점이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초반부에 주인공의 집을 밀어버리는 철거업자가 칭기즈칸의 후손이다. 그래서 항의하는 주인공을 무시하고 1분 1초라도 빨리 주인공의 집을 철거하고 싶어했다. 본인도 칭기즈칸의 후손인걸 모르고 있는 평범한 영국인으로, 평소엔 선량한 사람이지만 현관에 도끼를 장식하고 싶어한다든지, 가끔씩 피와 연기와 말울음 소리의 환상에 시달린다든지, 털모자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인다던지 하는 증상을 보인다고.
- 하지만 한국과 일본 등지에는 없다는데 있을 리가 없는 게 칭기즈 칸 생전에는 고려에 대한 침공은 없었다. 1218년 거란의 잔당 소탕을 명분으로 고려에 진입한 것이 고려와 동맹을 맺기 위해서 의도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고려사》 <조충전>에 칭기즈 칸의 명령으로 형제 맹약을 맺는다고 적혀있기 때문. (#1, #2) 수부타이만 고려 근처에 가서 종이를 받아왔을 뿐이며 당연히 일본은 구경도 못했다. 고려와 몽골의 전쟁은 오고타이 칸 때 발발하였으며, 이후 충렬왕/충선왕/충숙왕 대의 결혼도 왕비가 황금씨족인 덧이라 부계 피를 물러 줄 수 없으니 칭키즈칸이 물려줄 Y유전자는 없다. 결정적으로는 왕씨 몰살까지... 후손이 없다라고 단정 짓는 건 불가능하지만 역사적으로도 없는 쪽이 더 부합한다.
- 칭기즈 칸의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미스터리인데 보르항 산 등 여러 후보지가 있지만 전부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 대해선 좀 으시시한 전설이 하나 있는데, 칭기즈 칸의 무덤을 옮기는 과정에서 마주친 살아있는 모든 것을 몰살시켰다는 것이 그것. 칭기즈 칸의 무덤은 묻은 후 파헤쳐지는 것을 막기 위해 기병대가 수없이 짓밟음으로써, 무덤을 평지로 만들어 아무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돌아온 기수들도 미리 준비해둔 자들에 의해 몰살되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전설일 뿐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아 학계에서도 실체성 논란이 있다. 부정하는 쪽은 학살자 칭기즈 칸을 미워한 자들이 만든 근거없는 낭설로 보는 편이다. 화려한 무덤이 아닌 유해를 그의 충복이 소박하게 평범한 몽골식 장례로 치렀다는 말도 있다.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소박했던 무덤이 자연스레 사라지거나 잊혀졌다는 주장이다. 칭기스 칸이 생전에 사치를 싫어하고 유목민의 전통을 지킨 것을 상기하면 이쪽도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당시 몽골식 장례는 시신을 말에 실은 후 달려나가서, 말이 지쳐서 멈춰선 곳을 파 돌로 시신 주변을 두르고 묻는 것이었다고 한다. 천하를 제패한 대칸의 장례로는 너무 소박한 것 같지만 몽골인이었던 칭기즈 칸의 장례로 어떤 의미로는 가장 적절하다고도 볼 수 있다. 아예 칭기즈 칸이 화장이나 풍장 등을 해서 무덤 자체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이것도 사서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분명 어떤 곳에 묻긴 묻었다는 기록이 제법 남아있어 참 이도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다.[13] 일본이 중일전쟁 시기 무덤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일본이 칭기즈 칸의 무덤을 그렇게 찾으려고 했던 이유는, 칭기즈 칸이 일본인(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이었다는 일본 내 사이비 역사 속설을 증명(?)하여, 당시 중국 및 몽골 침략을 억지로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14]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대신 몽골의 고고학 기술이 발전했다고 한다. 2차대전 이후에도 여러 고고학자들과 트레저헌터가 명예와 부를 위해 힘을 합쳐 칭기즈칸 관련 고서 등을 보고 후보지들을 추려내, 후원금으로 산 최첨단 장비로 조사했으나 누군가 다치거나 발굴 작업 노동자가 죽는 등 을씨년스러운 일이 제법 벌어지는 바람에 결국 포기하고 철수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칭기즈 칸을 거의 신앙처럼 받드는 상당수 몽골 사람들은 이런저런 외부 간섭이 불편하기도 해서인지 칭기즈 칸의 무덤을 찾는 것 자체를 불길하다고 여겨 꺼리는 분위기도 있는 모양. 더 나아가 이들이 발굴단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는 설도 있다. 결국 한 몽골 대통령이 무덤 발굴 및 탐사 금지를 주장하면서 법제화한 이후, 칭기즈 칸 묘를 찾으려는 고고학자나 트레져헌터들의 활동은 대거 불가 딱지를 먹게 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냉전이 끝난 1990년대 이후 많은 탐사대들이 몽골 일대를 탐사했다. 특히 유명했던게 모리 크라비츠라는 미국 학자였는데, 2000년대 초반엔 그럴듯한 장소가 발견되어 탐사 작업까지 들어갔지만 결국 전염병 등 이런저런 이유로 탐사를 중지한 바 있다.
- 카네기연구소와 막스 플랑크 협회에 따르면 칭기즈 칸은 본의 아니게 지구 환경을 급격히 개선시키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주도한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 당시 아시아-유럽 구대륙 세계 인구의 1/20을 학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당시에 급증하던 이산화 탄소 배출량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그 양이 약 7억 톤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2009년 세계에서 배출된 온실가스의 총량과 맞먹는다. 인구수를 단기간에 극단적으로 많이 줄인 덕분에 지구 온난화는 무려 200년이나 더 미뤄졌다는 주장이다. 이 시기에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이토록 어마어마했던 이유는 상당부분 송나라에 기인하는데, 송나라 경제가 번영하고 석탄 산업도 활발히 전개되면서 인구도 1억에 가깝게 늘어나고 이산화탄소 배출량 역시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남송의 경우에는 석탄을 대량으로 채굴해 작업용, 난방용으로 때기도 했다. 물론 코크스나 증기기관을 쓴 건 아니라서 효율은 낮았고, 송나라가 여러 기술 발전을 이뤄냈지만 이후의 영국처럼 산업혁명의 기반을 닦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해서, 부유한 중세 농경국가 수준이었다. 그래서 중국은 물론 한반도 등 근처 지역의 대기 오존에까지 악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을, 칭기즈칸이 등장하면서 의도치 않게 차단했다는 것.[15]
7. 이름 표기[편집]
8. 어록[편집]
이 말은 대중 사이에서 코난의 영화화 버전에도 쓰일 정도로 Bad Ass하다고 여겨졌다.[18] 전문은 "사람의 쾌락은 배신자를 복종시키고 적을 모두 멸망시켜 그 소유물을 약탈하고 그들의 종복들에게 소리 높여 울게 하여 그 얼굴이 콧물과 눈물로 얼룩지게 하고 우스꽝스럽고 우둔한 그들의 말에 걸터앉으며 그들 처첩의 배와 배꼽을 침대나 이부자리로 삼고 그 장밋빛 뺨을 즐기며 입 맞추고 그 붉은 입술을 빠는 데 있다"로, 페르시아의 사료에서 나온 말이며 잭 웨더포드 같은 칭기스 칸 옹호파와 일각에선 페르시아의 기준에서 나온 자료이니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고 있긴 하다. 허나,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정복당한 나라들이 그를 얼마나 무자비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는지 잘 알려주는 말이다. (“The greatest happiness is to vanquish your enemies, to chase them before you, to rob them of their wealth, to see those dear to them bathed in tears, to clasp to your bosom their wives and daughters.”)"가장 좋은 삶이란 너의 적들을 쳐부수고 그들이 네 발 앞에 쓰러지는 걸 보며 그들의 말과 재산을 빼앗고 그들의 여자들의 울음 소리를 듣는 것이다."[17]
페르시안 사서 중
"모두가 내 발 밑에 쓰러지기 전까진 승리했다고 말하지 마라."(#)
이 말은 죽기 전 아들에게 했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사서에서는 죽기 전에 금나라 정복을 완수할 작전을 얘기하고 죽었다고 한다."하늘의 도움으로 너희를 위해 커다란 나라를 정복했다. 하지만 세계를 정복하기에 내 삶은 너무 짧았다. 그 일은 너희에게 달린 일이다."
"나는 수많은 잔혹한 행위를 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내가 한 일이 옳은지도 모르고 행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
"다시 태어난다면 평범한 사람으로 평범한 게르(Ger, 몽골식 천막)에서 살다 평범하게 늙어 죽고 싶다."
죽기 전에 말했다는 이 말 역시 위에서 나온 페르시아 사서(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서 나온 말로 전문은 "우리가 죽은 뒤 내 부족의 자손이 비단 바탕에 호화찬란하게 금실로 짠 옷을 몸에 걸치고 맛있는 안주와 좋은 술을 제멋대로 마시며 좋은 말을 타고 미녀를 품에 안고도 그것을 가져다준 것이 그 아버지와 제 형임을 말하지 않거나 우리와 그 위대한 날을 잊어서는 안 된다.""나의 자손들은 훌륭한 옷을 입을 테지, 맛있는 것을 먹고 준마를 몰고 아름다운 계집을 안을 테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덕분인지도 모르는 채."[19]
이들 외에 부하라 점령 후 지배 계층에게 설교를 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건 주와이니의 사서에서만 나오는 말이다. 내용은 신이 그들에게 자신과 같은 재앙을 내린 것은 그들의 왕이 너무나도 부도덕하고 음란했기 때문에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칭기즈 칸 이야기는 이런저런 설이 막 엇갈리며 모든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진위 여부의 논란이 있다.
수레바퀴보다 큰 놈은 모조리 죽여라.
8.1. 인터넷발 칭기즈 칸 어록[편집]
참고로 "집안이 못났다고 실망하지 마라" 식으로 전개되는 칭기즈 칸이 했다는 말은 사실 '김종래' 라는 기자가 그의 일생을 토대로 칭기즈 칸이 글의 화자인 독자를 격려하는 내용의 가상의 글을 만들어서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이라는 책에 쓴 것인데 어느샌가 그 얘기가 쏙 빠지고 칭기즈 칸의 어록이 되어버렸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출처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감동적인 역사 인물의 실제 어록이라면서 인쇄해 들고 온 지인을 보고 멘붕했다고 전해진다.“한국의 젊은이들아!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푸른 군대의 병사들아.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어려서는 이복형제와 자랐고, 커서는 사촌들의 시기에 두려워했다. 가난하다고 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시든 나무마다 시린내, 누린 나무마다 누린내가 났다. 나는 먹을 것을 위해 수많은 전쟁을 벌였다. 목숨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유일한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하지 마라.
나는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는 곳, 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는 곳에서 자랐다. 내가 세계를 정복하는데 동원한 몽골인은 병사로는 10만, 백성으로는 200만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볐고, 그들을 위해 의리를 지켰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땡볕이 내리쬐는 더운 여름날 양털 속에 하루 종일 숨어 땀을 비오듯 흘렸다.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나는 전쟁을 할 때는 언제나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이겼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극도의 절망감과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나는 사랑하는 아내가 납치되었을 때도, 아내가 남의 자식을 낳았을 때도 눈을 감지 않았다. 숨죽이는 분노가 더 무섭다는 것을 적들은 알지 못했다.
군사 100명으로 적군 10,000명을 마주칠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죽기 전에 먼저 죽는 사람을 경멸했다.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가고 있었다. 적은, 밖이 아닌 내 안에 존재했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깡그리 쓸어 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스칸이 되었다.”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 도입부.
거기다 덤으로 나중에 불멸의 이순신 붐이 일어나면서 또 이걸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순신 어록' 이란 게 유포되어 이순신이 역적 가문 출신이었다는 오해가 생기기도 했다. 아무튼 징기스칸 버전과 이순신 버전이 하도 퍼진 나머지 10년 전만 해도 어른들이 한마디씩 언급하거나 심지어 학교나 군대에서 관련 자료까지 준비해서 가르치기도 했다.
칭기즈칸이 홧김에 자신의 매를 죽이고 "분노로 한 일은 실패하기 마련이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가 국내 인터넷에 퍼져 있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반박문
9. 대중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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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같이 보기[편집]
- 동방 3왕가
- 몽골
- 몽골 제국
- 미나모토노 요시츠네 - 일본에서는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죽지 않고 몽골로 건너가 칭기즈 칸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설화가 그렇듯이 사실상 근거 없는 뇌피셜에 불과하다.
- 보르항 산
- 세계정복
- 유목 제국
- 칭기즈 칸 광장
- 칭기즈 칸 국제공항
- 칭기즈 칸 찬가
- 케식
- 황금씨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