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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탈북 과정/탈북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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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북한 내륙 이동과 도강
2.1. 코로나19 봉쇄 이후
3.2. 몽골 경유
3.3. 태국 경유
3.4. 기타 동남아 국가
4. 해외 주재 중 탈북
5. 군사분계선(휴전선) 전면돌파
5.1. 관련 사례
6. 북방한계선(NLL) 해상 탈북
6.1. 관련 사례
7. 전투기


1. 개요[편집]


이 문서는 탈북 과정의 탈북경로에 관한 문서이다.

2. 북한 내륙 이동과 도강[편집]


주민의 이동을 통제하는 보위부의 '10호 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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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북한/인권#s-"display: inline; display: 앵커=none@"
거주이전·이동의 자유 침해@앵커_1@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려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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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주민들은 탈북은 커녕 다른 지방으로 이동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평양 시민의 경우 평양시민증만 있으면 북한 내륙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지만 북중국경 지역은 예외에 해당한다. 내륙 지역 주민들은 북중국경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부터 힘들다. 려행증을 받지 못하면 길목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검문 초소를 통과할 수 없다. 그렇다고 려행증을 발급 받으면 자신의 행선지가 노출되니 탈북하려고 길을 떠날 때에는 려행증이 오히려 독이 될 수가 있다.

내륙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 자신이 태어나서 평생 살아온 고장을 떠나 처음 가보는 북중국경 지역에서 목숨을 걸고 강을 넘어 탈북할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다.[1] 보위부 스파이의 존재로 인해 탈북에 대한 정보를 물어볼 수도, 공유할 수도 없다. 애초에 황해도, 강원도 같은 북한 내륙 지역은 북중국경에서 주로 활동하는 브로커들이 찾아가기도 힘든 지방이어서 탈북에 관한 정보를 접하기가 쉽지 않다. 통일부 북한이탈주민 재북 출신지역별 현황에 따르면, 황해도와 강원도 출신 탈북민은 전체 탈북민 중 1~2%에 지나지 않는다. 내륙 지역일수록 탈북은 엄두도 못내 시도 자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코로나19 이전 압록강변경비가 심하지 않았던 20년 전 두만강 밀수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브로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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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양강도는 중국을 통해 외부 문물을 접하기가 쉽고 두만강을 통한 밀수가 일상화되어 있으며 무산군, 혜산시, 회령시, 온성군 같은 지역은 바로 옆에 두만강을 끼고 있어 탈북하지 않은 집을 찾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탈북이 일어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내륙 지방과 비교해 함경도, 양강도 주민들은 보고 들은게 많으니 '탈북'이라는 행위에 거부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이탈주민들의 약 75%가 북중국경을 접한 함경북도양강도 지역 출신이다. 함경도 출신 탈북민이 많으니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위한 대북송금도 활발하고, 이를 중개하는 브로커업도 성행한다. 중국 휴대전화를 사용해 대북송금을 중개하는 브로커들은 밀수와도 관련이 있고 그 밀수 루트를 통해 도강도 일어난다. 밀수와 관련이 없는 사람도 수소문하면 브로커 찾기 어렵지 않으며 같은 도내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유로 국경지역까지 가기도 쉽다. 평안북도자강도압록강 하류를 끼고 있으나 압록강 하류는 강폭이 넓어 맨 몸으로 도강이 불가능하고 자강도는 산맥에 둘러싸여 있는 군수공업지대이기 때문에 통행이 훨씬 엄격해 이 지역 출신 탈북민의 비율도 3%에 지나지 않는다.#

도강은 강폭이 좁고 유량이 적은 압록강 상류와 두만강에서 주로 일어나는데 밀수가 이뤄지는 루트로 가면 천(川)에 가까울 정도로 수심이 낮고 비용도 저렴하나 국경경비대도 당연히 이 사실을 알기에 감시초소가 집중되어 있어 위험하다. 무작정 도강을 시도하면 경계 근무를 서던 국경경비대의 총에 맞을 수 있으니 브로커는 도강 예정 시간에 근무를 서는 국경경비대를 매수해[2] 도강을 하는게 가장 안전하게 넘는 방법이다. 국경경비대가 많이 없어 경계가 허술한 곳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탈북민의 도강 경험담을 보면 거의 머리만 내놓고 강을 건넜다는 증언이 많다. 중간에 일이 잘못될 경우를 대비해 해당 지역 보위부를 매수하기도 한다.[3]브로커는 북한에만 있는게 아니라 중국측에도 브로커가 대기하고 있어 탈북자들이 강을 넘으면 인계한다. 브로커들은 보위부의 도청을 우려해 미리 정한 암호를 사용해 통화한다. 만약 북송된 탈북민이 보위부의 심문을 받고 브로커의 정보를 불면 브로커도 살기 위해 도강해서 탈북해야 한다.

도강을 해도 끝난게 아니라 중국쪽에도 높은 둑과 철조망이 쳐져 있어 이걸 넘는 것도 문제다. 중국쪽은 CCTV도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국경쪽 도로에는 중국 공안의 검문소[4]도 있기 때문에 활보하고 다니면 중국 국경경비대에 체포된다. 최대한 빨리 북중국경에서 멀어져야 하기 때문에 산으로 들어가 중국 내륙쪽 마을을 찾거나 중국측 브로커 있다면 브로커가 준비한 차량을 타고 은신처로 이동한다.


2.1. 코로나19 봉쇄 이후[편집]


2019년 3월2022년 4월
파일:2019년_회령_철조망.webp파일:2022년_회령_철조망.webp
코로나 봉쇄 전후 함경북도 회령시의 국경. 감시초소가 추가로 설치되고 완충지대가 새로 생겨난 것을 볼 수 있다.[출처]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김정은은 방역을 명분으로 기존보다 주민들의 이동 통제를 더 엄격히 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북중국경 전역에 2-3중에 달하는 콘크리트 담벽과 철조망을 새로 설치했으며 감시초소마다 CCTV도 설치했다. 호수와 군사시설이 없는 곳은 모조리 철조망이 쳐졌다. # 압록강, 두만강, 백두산 기슭은 기본이고 기나긴 서해안, 동해안마저 모조리 철조망이 새로 생겼다. 철조망 사이에도 완충지대를 설정하여 강에 접근조차 힘들게 되었다. 2023년 말 기준으로, 북중국경의 북한 쪽에는 이중 철책이 처져 있다. 감시초소 또한 저 두 개의 철책에 각각 있는 상황이다. # 국경경비대 또한 뇌물을 받고 사람을 넘겨주는 것이 발각될 시 총살형에 처해진다. 국경 지역에서 활동하던 브로커들도 도강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이상 탈북 브로커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고 보위부의 집중 단속도 벌어져 브로커의 90%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렇게 된 이후 도강은 거의 불가능해진 상태이고, 2020년대에 한국으로 입국하는 탈북민들은 코로나 사태 발생 전 중국으로 넘어갔거나 해외로 파견되어 해외에 체류해있던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알려진 바로는 2023년에는 오직 2명만이 국경경비대와 직접 거래해 한국 돈으로 따지면 2천만 원을 주고 중국으로 넘어와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중국[편집]


파일:BBC 로고.svg
'공화국 역사상 초유의 일'... 죄수와 간수의 동반 탈북 사건
BBC News 코리아
(2020년 2월 21일)
  • 브로커의 도움을 받는 유형
북한이탈주민들은 탈북 과정에서 외부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탈북 난이도가 달라진다. 먼저 탈북한 가족이 돈을 벌어 믿을 만한 브로커를 고용하거나 북한인권단체, 기독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강을 넘자마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브로커의 차량을 타고 은신처로 이동한다. 이후 은신처에서 며칠간 함께 중국 내륙을 통과할 인원이 모일 때까지 기다린다.[5] 중국 내 브로커는 한 명만 있는게 아니라 여러명이 각자 구간을 맡아 릴레이 방식으로 탈북민 집단을 이동시킨다. 공안에게 체포될 때를 대비해 브로커끼리도 접점을 두지 않아 한 장소에 탈북민들은 대기시키면 다음 브로커가 와서 데려가는 식이다. 브로커 총책은 탈북민 출신이거나 기독교 선교사들인데 직접 활동하지는 않고 한국에서 전화를 통해 모든 것을 조율한다. 이들은 중국 정부와 북한 보위부에도 알려져 있어 요주의 인물로 감시하고 있기 때문에 체포되거나 납치될 위험이 있어 함부로 중국에 입국하지도 못한다.[6] 중국 내 여러 검문소를 피하면서 중국 대륙을 최대한 빨리 횡단하면 태국 이민국수용소까지 빠르면 2주 내에 도착할 수 있다. 이렇게 중국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탈북에 성공한 사람들을 '직행'이라 부른다.

중국 내 숨어있는 대다수 탈북민의 경우에 해당한다. 브로커가 중국에 돈을 많이 주는 일자리가 있다고 북한 여성을 속인 후 인신매매로 중국에 넘기거나 아무 계획없이 무작정 도강했는데 인신매매당한 경우이다.[7] 중국의 남초현상으로 한족 시골 노총각들이 북한 여성을 아내로 사오려고 하기 때문이다. 탈북민은 중국에서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신분을 보장받을 수가 없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중국 남편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결혼 뒤에도 이웃의 신고나 중국 공안의 검문에 잡히면 언제든지 북송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결혼생활은 불안의 연속이며, 중국인 남편의 가정폭력에 시달려도 도망치거나 피해 호소를 할 수 없다. 반면에 자신을 사간 중국 남편이 괜찮은 인품[8]을 가졌고, 어찌되었든 중국 시골의 생활수준이 북한보다는 훨씬 낫다는 현실에 수긍하게 되면 중국에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며 살아간다. 중국 공안에서도 중국 가족의 반발을 의식하여 2010년대 후반부터는 아이를 낳고 정착하여 사는 북한 여성은 신상만 파악하고 한국행을 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면 북송시키지 않는다고 한다. 이들은 중국 시골에 살면서[9] 처음에는 정보가 없어 한국행은 생각하지도 못하다가 중국어를 익히고 스마트폰[10]으로 외부 세상과 접하게 되면서 한국의 실상을 알게 되고 중국 내 다른 탈북 여성들과 틱톡위챗 단톡방[11] 등으로 연락을 하면서 브로커와 선이 닿아 한국 입국을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케이스의 탈북 여성들은 한국 국적을 받고 정착했어도 중국에 있는 남편, 자식과 주기적으로 연락을 하거나 한국으로 데려오기도 한다. 탈북민 70~80%가 여성인 이유가 결혼을 통해 중국에 정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이라도 중범죄를 저지르거나 한국행 시도 중 체포 시에는 자식이 있고 아무리 오래 살았더라도 가차없이 북송된다. 잡히는 위치가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동북 3성 지역이라면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남부지방이라면 그대로 끝이다. 또한 매매혼 말고도 유흥업소 등에 팔려 가서 감금 상태로 혹사당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감금당한 채 온갖 고생을 다 겪다가 선교사, 인권단체 등의 도움을 받아 대한민국으로 탈출한다.

  • 신분증을 사서 중국에 정착한 유형
위 유형과는 다르게 중국으로 넘어갔지만 인신매매 당하지 않고 인연을 잘 만났거나 중국어를 할 줄 알거나 중국에 친척이 있어 도움을 받아 취직해 정착하는 극소수의 경우이다. 처음에는 한국으로 갈 생각 없이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한국행을 결정한다. 이들은 중국어를 할 줄 알기에 브로커에 속아 인신매매를 당하지도 않고 친척의 도움을 받아 돈을 벌어 호적을 사서 중국인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조선족인 척 중국 현지 한국회사에 취직해 한국인들과 일하기도 한다. 중국에서 잘 적응했지만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가는 경우이다. 여유가 있기에 브로커를 고용하거나 중국인이 무비자로 갈 수 있는 제주도로 들어오는 방법을 쓴다.

중국 동북 3성에는 탈북민으로 위장한 보위부 스파이도 활동하고 있다. 북송된 탈북민이 보위부에게 포섭되어 각종 훈련을 받고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 내 탈북민들을 신고하는 것이다. 연변 일대에는 한국으로 보내주겠다며 돈만 챙기고 공안에 신고해서 북송시키는 브로커로 위장한 보위부 스파이인 '강은아'라는 여자가 탈북 브로커들 사이에서 악명이 자자하다. 한국 국적을 가진 탈북민 출신 브로커들도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보위부의 함정에 걸려들어 북한으로 납치되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 선교사가 탈북을 이끄는 경우, 브로커 비용을 받지 않는 대신 2~3개월간 성경 공부를 시킨다. 심지어 1년 넘게 숙소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성경 공부를 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1990년대~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에서 탈북민을 공부시켜 다시 북한으로 보내 선교한다는 황당한 계획을 준비하는 선교사도 있었다. 과거에는 중국의 아지트에서 탈북민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켰으나, 이들이 공안의 표적이 되어 단체 북송되는 경우가 빈번해져서 이제는 교육 장소를 동남아로 옮겼다. 북송된 탈북민은 보위부 조사 과정에서 기독교와 접촉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100% 정치범수용소행이다. 왜 성경 공부로 시간을 끌어서 잡히게 만드냐는 비판도 있지만 선교사의 입장에서 북한 사역을 한다는 명목으로 종교계로부터 기부금을 지원받아 탈북비용을 충당하기 때문에 일정 성과가 있어야 하며, 수천만 원을 들여 탈북민을 구출했는데 한국으로 온 뒤 모른 채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선교회가 성경 공부를 시키기 위해 탈북민과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도 있어 보도가 된 적도 있다. 어찌됐든 기독교 선교사들은 중국 내 탈북민 구출에 큰 축임은 부정할 수 없으며, 숨어사는 탈북민의 입장에서도 한국으로 보내준다는데 기독교던 뭐던 가릴 처지가 아니다. 중국 내 감시가 심해지면서 탈북 비용이 크게 증가해 예산상 구출할 수 있는 건 몇명 뿐인데, 연락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탈북민만 수백 명이라고 한다.

2020년 코로나19 봉쇄 이후, 그 이전부터 삼엄해진 국경 감시 때문에 중국 루트가 거의 막혀간다는 복수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국경의 감시가 전자 장비까지 동원될 정도로 고도화되고, 북한도 탈북을 좌시하지 않으며,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하고자 중국 정부의 이동 통제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2022년 중국의 코로나 거리두기 정책이 극심했을 때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더욱 탈북이 어려워진 이유를 설명했는데, 과거에는 중국 대륙을 장거리로 이동하기 위해 버스와 기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나 변두리 기차역에서조차 안면인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현금 없이 위챗으로 결제를 해야 하기에 개인정보 및 백신패스 관련 정책들이 큰 난관이 된다고 한다. 탈북자들은 모두 신원 미상으로 표기되므로, 한 성에서 또다른 성으로 이동[12]을 하거나 교통수단을 이용하기도 상당히 어려워지게 된 것. 그렇기 때문에 중국 내륙 이동을 검문소를 피해 차량으로 하게 되면서 탈북 비용이 증가했다.

중국에서의 탈북 과정은 워낙 다양한 사례가 존재해 모든 사람의 삶이 다르듯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대표적으로 조선족에 대한 인식이 있는데, 한송이처럼 탈북 여성을 인신매매로 팔아먹는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 탈북 과정 중 조선족 브로커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중국어를 모르는 탈북민이 조선족의 도움이 없었으면 탈북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케바케이다.


3.1. 대한민국 직행[편집]


파일:2002일본영사관 진입.jpg
2002년 김한미 일가족
일본 총영사관 진입 사건
[13]
2000년대 초반에는 중국에 들어온 탈북민이 주중 대한민국 대사관에 현지 경비를 뚫고 들어가 대사관에서 신변보장을 받는 방법을 썼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대사관 주변에 공안의 경비가 강화되자, 2002년 3월에 베이징에 있는 스페인대사관에 탈북민 25명이 진입에 성공하면서 제3국 대사관과 외국인 국제학교로 집단 돌진하는 방법이 유행했다. 이러한 탈북 시도가 국제적인 이슈가 되자 중국 공안에서 모든 대사관 정문의 경비를 강화하면서 막무가내로 뚫고 들어가는 건 불가능해졌다. 담을 넘어서 들어가는 것도 전기 철조망이 쳐져있어서 불가능하다. 2002년 중국 선양 주재 일본 총영사관은 아예 공안이 대사관 안으로 들어와 진입에 성공한 북한이탈주민을 체포하는 것을 방기하다 국제적으로 욕을 바가지로 먹은 바가 있다.

비행기와 배를 이용한 대한민국 직행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를 건너야 하는 다른 길에 비하면 거리가 짧고 고생하지 않지만, 출입국심사나 보안 검사 중에 걸리면 도망칠 길도 없이 바로 체포되어 북송이기 때문에 매우 위험성이 큰 루트다. 이 경우 탈북민의 한국행 의도가 명백하므로 관리소행이 확실하다. 그래서 이 방법을 선택한 탈북민들은 배와 비행기가 출발할 때까지 안심할 수 없다.[14] 그마저도 이 방법은 중국이 전산화가 되기 전인 2000년대까지의 이야기이고 전자여권으로 교체가 완료된 2010년대부터는 아예 불가능해진 방법이다.

브로커를 통해 위조 여권을 구하거나 사망 신고를 하지 않은 사망자의 호적을 사서 위명여권을 발급받은 뒤, 중국인이 무비자로 입국 가능한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으로 입국해 제주국제공항 출입국사무소나 제주지방경찰청 등지에서 자수하는 방법도 있다. 제일 비싸지만 안전한 방법이다.

브로커가 여객항이나 공항의 출입국심사관을 매수한 뒤, 안전하게 출입국심사를 통과하고 밀입국하는 방법도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탈북민은 다른 밀입국 시도자와 비교하면 뒤탈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을 위조여권으로 통과시키면 인천공항에서 다 걸리고 중국으로 송환되면서 도장을 찍어준 출입국 관리 직원도 엄벌을 받을 확률이 높은데 탈북민은 위조여권으로 밀입국해도 한국 정부에서 문제 제기를 하지도 않고 사용된 위조여권은 회수되어 탈북민이 중국으로 다시 올 일도 없기 때문에 안전하게 큰 돈을 벌 수 있는 완전범죄가 될 수 있다.

중국 현지에서 어선을 빌린 뒤 서해상에서 한국 선박과 접선하여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 갈렙선교회의 김성은 목사가 최초로 시도하여 성공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후 이 방법을 사용한 다른 사례가 없는 걸 보면 불가능해진 듯 하다.

  • 관련 사례
    • 주성하 - 1998년부터 여러 차례 탈북을 했지만 계속 북송되어 감옥만 6곳을 체험했다고 한다. 브로커에게 1만 달러를 주기로 하고 위조 여권을 받아 2002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대한민국에 입국하였다.
    • 박충권 - 두만강을 넘은 지 3일 만에 브로커로부터 한국 여권을 받았는데, 위조도 하지 않은 어떤 한국 여성의 여권이었지만 브로커가 출입국심사관을 매수했는지 얼굴을 확인하지도 않고 통과시켜줬다고 한다. 이후 단둥에서 배를 타고 인천항을 통해 2009년 한국으로 입국했다.
    • 천국의 국경을 넘다 2 (2011)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상술한 갈렙선교회가 촬영한 다큐멘터리이다.


3.2. 몽골 경유[편집]


파일:탈북_몽골루트.jpg
몽골도 북한이탈주민들을 인도적으로 대우하는 민주주의 국가이므로 2000년대 초반부터 몽골 루트도 꾸준히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몽골로 넘어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중국 내몽골(네이멍구)부터가 또 다시 국경지역이기 때문에 뻥 뚫린 내몽골 사막에서 중국 국경경비대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중국 철조망에 다가가기도 쉽지 않다. 중국 철조망을 넘었더라도 탈북민 앞에 보이는 건 고비 사막으로, 매우 혹독하기 때문에 여기서 길을 잃어 변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태국 루트와는 다르게 여기는 길을 인도하는 브로커도 없고 무작정 사막을 넘으라고 내려두고 가는 경우도 있다. 철조망을 여러 개 넘고 사막을 횡단해 몽골 국경수비대에 체포되면 탈북 성공이지만 광활한 사막에서 무사히 발견되는 것 자체가 생존의 문제다. 이때는 순찰로로 쓰이는 차도를 찾는 게 핵심이라고 한다. 순찰로만 찾으면 언젠가 국경을 순찰하는 차량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사히 주몽골 한국대사관으로 넘겨진 북한이탈주민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보호 하에 울란바토르에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한다. 사막을 건너야 하는 몽골 루트의 위험성은 영화 크로싱경계에서 묘사된다.



3.3. 태국 경유[편집]


파일:탈북메콩강지도.jpg
메콩강 일대

2019년 혜산시의 5인 가족이 중국동남아를 거쳐 탈북하는 과정
(비욘드 유토피아)

북한이탈주민 평균 70%가 태국 루트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입국한다. 중국 대륙을 횡단하여 윈난성 쿤밍(곤명)에 도착하면 이제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로 밀입국한 뒤 차를 타고 내륙쪽으로 더 깊숙히 들어가다가 내려서 직접 밀림을 헤쳐서 메콩강으로 가야 한다. 태국,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사이에 있는 이 내륙 국경 밀림지역을 현지 브로커를 따라 10시간이 넘는 산행을 해야 하는데 산 몇개를 넘는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동남아쪽 브로커들은 주로 현지 범죄조직 소속으로 이 일대는 마약으로 악명이 높은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이다. 즉, 탈북민 밀입국에 마약 밀수용 루트를 쓰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그나마 말이 통하는 브로커와 동행했지만 동남아에서는 범죄자일지도 모르는 브로커와 밀림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메콩강은 10분 정도 배를 타고 건너면 성공이다. 이때는 브로커없이 탈북민들만 쪽배를 타고 건너게 되는데 "굳이 강을 건너야 하게 만든다"며 불평하지만, 지도를 보면 태국으로 가기 위해선 어느 국가를 경유하던 메콩강을 건너야 한다. 또한 브로커 입장에선 태국 국경을 같이 밀입국하다 걸리면 벌금형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하므로 태국 땅에 안 들어가는 게 당연하다. 이 강을 건너는 탈북민들은 오래전부터 메콩강을 일명 '악어강'이라 불렀는데 사실 악어가 서식하진 않는다. 이러한 별칭의 유래는 브로커가 강을 건너는 탈북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지어냈다는 설이 유력하다. 실제로 2018년에 메콩강을 건너다가 배가 침몰해 탈북민이 익사한 사례가 있다.

메콩강을 건너 태국 땅에 도착하면 마침내 자유를 찾은 것이다. 태국은 인근 공산권 국가와는 달리 탈북민을 추방하지 않고 난민 자격을 인정해 대한민국을 포함한 원하는 나라로 이동하는 것을 허용하기 때문에, 탈북자들은 태국까지만 도착하면 매우 기뻐하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고 한다. 아무나 보이는 곳에 들어가서 경찰을 불러달라고 하면 현지인들은 이 상황에 매우 익숙해서 태국 경찰을 부르고 북한이탈주민들은 경찰서로 이송된다. 이후 태국 법원에서 불법입국죄로 벌금을 부과하면서 제3국 추방 명령을 내리는데, 벌금을 내면 바로 방콕 이민국수용소로 이송되지만 낼 돈이 없는 사람들은 현지 감옥에서 진짜 범죄자들과 함께 한두달 옥살이를 한 뒤 이민국수용소로 보내진다.

기독교 선교사를 통해 동남아로 들어오는 경우, 메콩강을 건넜더라도 바로 이민국수용소로 가지 않고 기독교 선교사가 운영하는 단체 숙소에서 2~3개월 정도 성경 공부를 한다. 과거 중국에서 하던 성경 공부를 비교적 안전한 동남아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방콕 이민국수용소에는 먼저 들어온 탈북민들이 대기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여러 소문과 정보가 공유된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산 탈북민들은 한국에 대해 익숙하지만 바로 북한에서 넘어온 탈북민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일부 탈북민들은 한국행을 희망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는 경우도 있다.[15] 이곳에선 매점을 이용할 수도 있고 비교적 자유롭게 전화도 할 수 있어서 탈북이 성공했음을 알릴 수 있다. 안남미가 밥으로 나오기 때문에 입맛에 맞지 않아 고생한다고 한다. 선교단체와 주 태국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탈북민들의 여러 편의를 봐주며 특식으로 도시락을 준비해 제공할 때도 있다. 대기하는 인원에 따라 한 달 안팎[16]으로 수용소 생활을 한 뒤, 한국대사관에서 임시 여권 발급 절차가 끝나면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입국한다.

  • 관련 사례
    • 비욘드 유토피아 (2023) - 갈렙선교회가 5명의 일가족을 탈북시키는 전체 과정을 볼 수 있다. 아들을 탈북시키다 보위부의 함정에 걸려 도강 단계에서 실패하는 사례도 그대로 나온다.
    • 메콩강에 악어가 산다 (2017)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 북한이탈주민 출신 유튜버 박유성이 동료들과 함께 자신이 지나왔던 탈북 여정을 다시 체험해보는 다큐멘터리이다.
    • 윤설미
    • 정유나
    • 이외 대부분의 탈북 사례


3.4. 기타 동남아 국가[편집]


북한과 친한 공산권 국가인 라오스, 베트남이나 독재 국가로서 친중파가 많은 캄보디아, 미얀마는 탈북자를 단속하는 국가여서 그 고생을 하고 거의 다 도착했는데 이 지역에서 체포되어 북송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이들 국가로 밀입국해서 한국 대사관에 들어가도 수개월~1년 동안 대기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빠르게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태국을 최종 목적지로 한다.

라오스는 한국 정부가 직접 나서자 갈등하다가 북송을 취소한 적이 있는데, 중국보다야 대화의 여지가 더 있다지만 손놓고 있으면 라오스에서도 북송된다. 2013년 라오스 탈북 청소년 북송사건이 있었는데, 주라오스 대한민국 대사관은 탈북자들의 신병이 억류되어 있던 18일 동안 단 한 차례도 영사면담을 하지 않았다. 결국 청소년 9명은 북송되었다. 한편 북송된 청소년들은 북한의 선전에 이용되고 있다.

베트남의 경우, 베트남 경제에 한국이 큰 부분을 차지하니 예전보다 한국에 훨씬 우호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2004년 베트남은 체류 중이던 468명을 한국 정부가 베트남과 직접 교섭하여 이틀에 걸쳐 2차례 전세기편에 태워서 한국에 대거 입국을 성사시킨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이후 베트남 지역을 경유하는 탈북 루트는 현재 사실상 봉쇄된 상태다.[17]


4. 해외 주재 중 탈북[편집]


  • 유럽
탈북하기 가장 쉬운 경우에 속한다. 해당 국가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을 찾은 뒤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북한은 유럽 모든 나라에 대사관을 두고 있지 않으며 대사관이 있는 국가의 안전대표(보위원) 한 명이 여러 유럽국가를 관할한다. 따라서 기숙사 생활을 하는 유럽 북한 유학생들은 보고를 위해 휴대전화도 가지고 있으며 감시에서도 자유롭다. 주재국 정부당국이 주의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므로 중국이나 동남아에서처럼 납치나 북송 같은 양아치짓을 시도할 수도 없다. 북한대사관은 인원이 한자리 수 정도밖에 되지 않으므로 외교관들은 그냥 기회를 봐서 대사관을 빠져나오면 되며 주재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면 탈북을 도와줄 수 있다. 사실상 평양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유일한 족쇄이다.
  • 중동/아프리카/동남아
보통 해외 파견 노동자, 외교관들로 한국대사관으로 들어와 탈북한다. 탈북 외교관 1호인 고영환 박사는 콩고에서 유럽을 거쳐 40일만에 한국으로 들어왔다.# 탈북작가 림일은 1997년 쿠웨이트로 해외 노동자로 파견되었다가, 현지 한국 대사관을 통해 귀순했다. 중동/아프리카는 유럽 국가만큼 탈북이 쉽지는 않지만 이곳 역시 보위부의 감시가 허술하고 한번 도망치면 그 넓은 나라에서 한정된 인원으로 추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계획을 잘 세우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다만, 붙잡히면 몽둥이로 사지를 부러뜨리고 깁스를 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안정제를 투여해서 재우고 환자로 위장해서 중국까지 북송한다고 한다.
  • 북한식당
북한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은 식당 건물에서 단체생활을 하고 식당 밖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탈북이 힘들다. 식당 자체에 담벽과 철조망이 쳐져있고 식당 지배인과 보위원이 상주하고 있어 항상 감시당한다. 외출도 특별한 때에만 가능하며 조를 이루어서 해야 한다. 식당에서 몰래 나오더라도 외부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10대 후반~20대 초반의 북한 여성이 여권도 없이 동남아와 중국을 혼자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외부 조력자가 없으면 탈출이 어려운 경우이다.

외교관, 해외주재원, 북한식당 종업원, 파견노동자, 유학생 등이 본인의 결심만 있다면 탈북하기 가장 쉬운 루트에 속한다.[18] 중국, 러시아를 통해 다른 나라로 밀입국하는 형식의 탈북과는 물리적 난이도가 다르다. 대신 외교관이 아닌 이상 가족들은 북한에 남아있고 홀로 탈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비교적 고위층에다가 한국행이 명확하기 때문에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어 평양에 남아있는 가족들은 오지로 추방되고 감시가 심해 북중국경으로 탈북한 일반 북한 주민들과는 달리 연락조차 힘들다. 주성하 기자가 겪어본 사례에 따르면 종종 해외 북한유학생들로부터 탈북을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는데, 주성하 기자는 그때마다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가족보다 더 소중한 가치는 없으니 가족들도 같이 데리고 오거나 한달 동안 생각해보고 그래도 탈북하고 싶다면 도와준다고 대답해준다. 그러면 절반은 탈북을 포기한다고 한다.

김정은 집권 이후로 해외 파견 중 탈북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대북제재가 시작되면서, 본국으로 송금해야 할 충성자금을 마련하지 못한 외교관들이 처벌의 두려움을 견디다 못해 탈북을 결심한다. 또한 잘못을 저지르거나 연좌제로 송환을 앞두고 탈북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장성택 처형 사건으로 인해 해외에 나와있던 장성택의 측근들이 줄줄이 송환되자 위기를 감지하고 탈북한 사람이 많다.



4.1. 러시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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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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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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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두만강을 넘어 러시아로 직접 탈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북한과 러시아가 국경을 맞댄 곳은 라선시 하나뿐인데, 이곳은 경제특구 지역으로 북한 내에서도 접근이 곤란한데다 라선시 일대가 두만강 하류인지라 강폭이 워낙 크기 때문에 도강이 어렵다.

북한 사람들은 러시아에 외교관, 무역일꾼, 건설노동자, 벌목공으로 파견되었다. 90년대부터 시베리아에 벌목공으로 나간 사람들은 엄청나게 고된 벌목장을 이탈하여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십여년 이상 러시아에서 살아 한국말을 잊어버린 채 한국으로 입국한 사례도 있었다. 이들이 그나마 북송되지 않고 불법체류자로 머물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는 탈북자를 체포할 강력한 이유가 없었고 중국과 달리 인구가 희박한 극동지역에서 그에 필요한 행정력도 없기 때문이다.

2022년 기준 러시아에 파견된 북한노동자의 수는 수천~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건설노동자들은 노동력이 부족한 극동지역에서 러시아 건설회사에서 하청을 받아 건설작업을 한다. 하루 2~3시간만 자고 일하는 경우가 허다하며 러시아 원청회사에서 지불한 급여의 10% 정도만 자신의 몫으로 지급된다. 5년간 일해도 손에 쥐는 건 2,000달러가 전부다. 현역 군인들이 러시아 노동자로 파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군복무를 하는 군인 신분이기에 민간인처럼 월급을 주지 않아도 공짜 노동력으로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정도 경험이 쌓인 건설노동자들은 '청부'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건설수주를 받아 집단적으로 건설 노동을 하지 않고 따로 사회에서 수익성 높은 건설이나 인테리어 일감을 구해 정해진 액수를 바치면서 자유롭게 일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북한 노동자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스마트폰을 구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한다.

러시아 파견노동자들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과 유튜브와 뉴스를 접하게 되면서 북한의 실상과 자신이 노예처럼 일해왔다는 것을 깨닫고 탈북을 결심한다. 스마트폰은 브로커와 직접적으로 연락하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검색할 수 있기 때문에 탈북에 중요한 수단이다. 러시아에서 탈북한 해외노동자가 말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스마트폰은 한국어 언어 옵션이 있는 걸로 구한다. 2. 인터넷에서 모스크바 주재 유엔난민기구를 검색하여 연락처를 찾는다. 3. 유엔난민기구에 전화를 하면 북한 담당 변호사가 받을테니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유엔난민기구와 연락할 때 러시아 경찰이 도청을 하므로 주의해야 한다.[20] 접선장소를 정할 때도 수시로 위치를 바꾸도록 한다. 4. 러시아어를 못한다면 주변 한인식당이나 상점을 찾아 도움을 요청한다. 5. 한국 영사관과 대사관 전화번호를 검색해서 알아낸 후 도움을 요청한다. 한국 영사관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직접적인 도움은 주지 못한다. 유엔난민기구를 통해 망명이 접수되면 러시아에서 바로 오지는 못하고 제3국을 통해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다.

러시아에 나와있는 선교사들과 구출활동가들도 이들의 유엔난민기구를 통한 망명 신청을 돕는다. 러시아 북한노동자들에게 제일 가까운 한국 외교공관은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대한민국 총영사관이다. 하지만 북한도 바보는 아니므로 그만큼 더욱 경계를 철저히 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2023년에 탈북한 러시아 북한노동자의 증언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 한국 영사관은 북한측에서 상시 도청 중이기 때문에 탈북을 희망해 전화를 걸었던 여러 북한노동자들이 적발되었으며 절대 이곳과 전화를 하면서 구체적인 본인의 신상을 밝히면 안된다고 한다.

러시아가 중국보다 탈북이 쉽긴 하지만 극동지역은 지역정부와 경찰이 북한 대사관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탈북민을 불법적으로 납치한 뒤 북한 당국에 넘기는 경우가 지속되고 있어서 계획없이 무작정 탈북하면 안된다고 한다. 납치된 탈북민은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영사관 지하에 감금되어 한꺼번에 북송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로는 한러관계가 나빠짐과 동시에 북한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는 상황이므로, 탈북민들이 러시아에서 탈출을 시도하면 북송당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존에는 공산권출신 국가 치고는 의외로 범죄 혐의 또는 북한의 송환 요청이 없는 한 탈북자 강제북송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다곤 하나, 2016년 러시아도 북한과 탈북자 강제송환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고 이미 우크라이나전 발생 전에도 탈북자를 북송한 전적이 있었다.#

2024년부터 북한 당국이 러시아 북한노동자들의 휴대폰 사용이 탈북의 주요 원인인 것을 알았는지 암묵적으로 눈감아주던 휴대폰을 몰수하기 시작 시작했다. 또한 2020년 이후 행방불명자로 처리했던 해외노동자들의 한국 입국 여부를 파악해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연좌제로 처벌하고 있다.

  • 관련 사례
    • 2016년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북한 무역대표부에서도 한 외교관이 탈북했다.#
    • 2023년 1월 25일, 러시아에서 일하던 북한 노동자 9명이 유엔난민기구의 도움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했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대북 소식통은 "이들이 현재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고 밝혔으며,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터지면서 동요가 일어 한국에 들어오려고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5. 군사분계선(휴전선) 전면돌파[편집]


파일:귀순자유도함.jpg
GP 주변에 설치된 귀순자 유도함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를 뚫고 한국으로 귀순하는 경우이다. 가장 빠른 시간 내에 도보로 탈북이 가능한 경로이지만, 3만 명의 북한이탈주민 중 휴전선을 이용한 사람은 극소수이다. 군사분계선은 극도로 위험하고 일반 주민들에게는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은 경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휴전선으로 탈북하는 사람들은 북한군 민경부대 출신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휴전선 인근에서 복무하면서 비무장지대의 지형 조건과 북한군과 한국군의 경계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휴전선 주변은 역사상 육군 밀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다. 조선인민군 육군의 70% 가량이 250km밖에 안 되는 원산시 이남 및 휴전선 근처에 전진배치되어 있다. 최고 2,200V 전압의 전기 철조망 또한 탈북을 방해한다. 전기가 흐르지 않는 시간대를 파악해 건너거나 쇠막대기를 이용해 전기를 땅으로 흘려보낸 뒤 철조망 밑으로 구덩이를 파고 통과해야 한다. 수십m 이상의 폭을 자랑하는 지뢰지대도 큰 문제다.[21] 한반도의 휴전선은 전 세계에서 지뢰 밀집도가 높은 지역 중 하나다.

북한군의 감시를 피해 비무장지대에 들어서면 한국군측에도 민경부대가 기다리고 있다. 물론 한국군은 귀순하는 탈북자인 줄 알면 보호해주지만, 대한민국 민정경찰의 GPGOP, 잠복호 근무병들은 넘어오는게 무장공비인지 탈북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조건 사살 태세로 근무한다. GP나 GOP 쪽에 탈북자들을 안내하기 위해 푯말과 전화기를 두긴 했는데, 관리는 영 부실하다. 애초에 넘어오는 탈북자들은 그런게 있는 줄도 모르기 때문에 철책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귀순한다. 귀순한 북한 군인들은 처음 마주한 한국 군인들의 체격을 보고 놀란다고 한다. 절차상 총이 겨눠진 채로 몸수색을 당하고 포박해 끌고가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낀다고 한다.

예전에는 휴전선으로 귀순한 탈북자에게 바로 식사를 줬다고 하는데, 강냉이밥과 염장무만 먹다가 갑자기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수도 있어 최근에는 일선 부대에서는 물 이외에는 제공하지 않고, 국가정보원에 인계하고 건강검진 후에 식사를 제공한다. 한편 2000년대 중반 중부전선을 통해 발생한 귀순 사례에 따르면 그냥 교대근무자들이 먹는 밥을 퍼다 줬다는 얘기도 있다. 근무 병력들이 먹기 싫은 밥을 대충 퍼먹고 잔반처리하는 것을 본 탈북병사의 한마디가 "인민이 용서치 않을 겁네다"였다고 한다.


5.1. 관련 사례[편집]


  • 1953년
7월 31일, 북한군 대위 안창식이 휴전 이후 최초로 귀순했다. '월남 귀순 용사'라고 불렸다.

  • 2002년

  • 2008년
    • 4월 27일, 보위부 중위 이철호가 경기 파주의 군사분계선을 넘어 귀순했다. 이 사건은 '노크 귀순'으로 유명해졌다.
    • 10월 26일, 부사관 1명이 강원도 철원군 철책을 통해 귀순했다.

  • 2010년
    • 3월 2일, 병사 1명이 강원도 동부전선에서 귀순했다.




  • 2017년
    • 6월 13일, 2017년 GP 경계 실패 논란 - 저녁 7시 55분경 귀순자가 발생했다.
    • 6월 23일, 밤 9시 30분쯤 중부전선에서 북한 군인 1명이 또 귀순했다.
    • 11월 13일,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 - 하전사 오청성이 차를 타고 돌진해 판문점을 넘어 귀순했다. 그 과정에서 총을 여러방 맞아 목숨이 위태로웠으나, 치료를 받고 다행히 살아났다. 유엔군사령부에서 해당 사건의 CCTV 영상을 공개하여 전 세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 12월 21일, 오전 8시 4분경 19세 초급 병사 노철민이 부대에 배치된 지 3개월 만에 총을 휴대한 채로 귀순했다. 탈북 이유는 누명을 쓰고 상관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한 것이 주요한 계기라고 밝혔다.[22]


  • 2019년
    • 7월 31일, 오후 11시 38분경, 함흥시에서 탈영한 북한 병사가 DMZ로 접근해 에서 뛰어내려 임진강을 타고 내려와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GP측에서 귀순했다. 해당 병사는 2022년 주성하 기자의 유튜브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1#2#3#4



6. 북방한계선(NLL) 해상 탈북[편집]


파일:귀순표지판.jpg
백령도에 설치된 탈북 유도 표지판

대한민국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아래에 있는 전화기의 신호 단추를 누르시면 안전지역으로 안내하겠습니다.”

― 탈북 유도 표지판에 적힌 문구

전마선, 목선 등을 타고 서해 혹은 동해로 빠져나와 NLL을 넘어 대한민국 영해로 진입하는 경우이다. 1987년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간다며 일가족을 이끌고 귀순한 김만철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동해안으로 빠져나올 경우 해류에 따라 일본쪽으로 표류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으로 떠내려갈 경우 해상보안청 경비함에게 포착돼 구조된다. 일본은 탈북자가 원하면 대한민국으로 보내준다. 바다를 통해 한국에 귀순한 탈북자를 탈북자 사회에서는 '직통생'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해상을 통한 탈북을 막기 위해 일종의 조업허가권인 '바다출입증'을 발급해서 아무나 바다로 들어갈 수 없게 제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 바다출입증을 받으려면 경계 근무를 맡은 관할 군부대의 초소, 대대, 여단에서 도장을 받고 담당보위원과 군() 보위부, 또 담당안전원, 분주소[23], 군(郡) 안전부 도장까지 필요해 최소 8개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허가를 받을 때마다 뇌물은 필수이다. 당연히 출신 성분이 좋지 않거나 어업과 관련없는 사람들은 바다출입증을 내주지 않아 해상 탈북은 시도조차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바다출입증을 받아도 난관은 남아있는데 형제나 친척 등 가족이 한 배에 탈 수 없고 특히 여성은 무조건 배에 태울 수 없게 하여 가족 단위의 탈북을 막고 있다. 어선 자체도 소형 목선으로 만들고 빠른 속도를 내지 못하도록 경운기에나 쓰는 엔진만 달 수 있도록 하여 원양 항해를 제한한다. 또한 북한에서는 개인이 배를 소유할 수 없으므로 수산사업소나 군부대 부업선 명의로 배를 등록해놓고 일정 수입을 바친다는 계약을 한 뒤 실질적인 선주 역할을 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배는 수산기지 소속 부두에 정박되어 있으며 이곳의 경비초소가 출입하는 인원을 검사하고 배의 모든 입출항이 파악된다. 즉, 해상 탈북을 위해 배를 출발시키려면 수산사업소 경비가 지키는 항구로 몰래 숨어들어가서 배를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어부도 아닌 가족들을 데려가서 몰래 배에 태운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배를 타고 탈북한 북한이탈주민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이들의 공통점은 해안 입출입을 통제하는 군인, 경비원들과 친해져서 경계심을 흩뜨려 놓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자주 호의를 베풀어 몇년에 걸쳐 친해지는 것이 핵심이라고 한다.

상술한 것처럼 배를 타고 항해하는 것보다 가족들을 배에 태워 출항시키는 과정이 훨씬 어렵다. 고기잡이와 상관없는 노인과 아이를 어선에 태웠다는 건 탈북 의도가 명백하기 때문이다. 일단 배를 띄워서 바다 한가운데까지만 가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북한 경비정들은 해상 순찰을 나가도 연료가 없어 정해진 곳에서 닻을 내려 정박한 뒤 시동을 끄고 시간만 보내고 돌아오기에 레이더가 작동하지 않아 작은 목선은 들키지 않고 내려올 수 있다. 그렇게 NLL 이남으로 넘어와 대한민국 해군이나 해경 함선과 만나면 탈북 성공이다.

배를 타지 않고 바다를 헤엄쳐서 온 탈북민은 한국땅이 시야에 들어오는 황해남도 주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단 서해 바다쪽은 수심이 얕아 썰물 때를 노려 바다에 뛰어들면 황해남도 연안군쪽에서 교동도로 헤엄쳐 탈북에 성공한 사례가 여럿 존재한다. 언뜻보면 바로 한국땅이 보이고 거리가 짧아 상대적으로 수월해보이지만 막상 바다로 뛰어들면 조수간만의 차가 커 조류가 강한 서해에서 수영해서 오는게 쉬운게 아니라고 한다. 썰물 때를 놓치면 조류를 극복하지 못하고 북한쪽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2023년에는 NLL을 수영해서 넘어오려다 강화도 해안에서 익사한 채 발견된 북한 남성도 있었다.# 동해쪽은 수심이 깊고 중간에 경유할 섬도 없어서 수영으로 탈북하는 건 불가능하고 성공한 사례도 없다.


6.1. 관련 사례[편집]


  • 1955년
    • 5월 17일, 북한 주민 유기방이 가족 8명을 데리고 강화도에서 귀순했다. 선박을 이용해 가족 단위로 탈북한 최초의 사례.

  • 1987년
    • 1월 15일, 새벽 1시 북한 주민 김만철이 일가족 11명을 데리고 청진을 떠나 탈북, 일본과 대만을 거쳐 2월 8일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 2003년
    • 4월 6일, 북한 일가족 3명이 전마선을 타고 강릉시 주문진항 앞바다에서 귀순했다.
    • 7월 4일, 황해남도 해주시에 거주하는 북한 민간인 2명이 연평도 서해상을 통해 귀순했다.

  • 2004년
    • 10월 19일, 북한주민 남녀 2명이 어선을 타고 연평도 근해에서 귀순했다.

  • 2005년 3차례



  • 2008년 2차례


  • 2010년 4차례





  • 2016년
    • 7월 16일, 일본 야마구치현 나가토시에서 20대 남성이 발견되었는데, 목선을 타고 청진시에서 출항하여 15일 밤 일본해로 뛰어든 후 헤엄쳐 해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9월 한국으로 이송되었다.#
    • 9월 18일, 황해남도 청단군 보위부 2과(정보과) 상위였던 이철은이 친구와 함께 20시간 동안 헤엄쳐 귀순했다.






7. 전투기[편집]


상당히 이례적인 사례들로 북한 공군 조종사들이 전투기를 몰고 그대로 귀순하는 경우다. 이 경우 거액의 보로금[24]이 지급된다.

  • 관련 사례
    • 노금석 상위(1953년, MiG-15)
    • 이운용 상위, 이인석 소위(1955년, Yak-18)
독특하게 2인용 훈련기를 2명이서 타고 귀순한 사례로 연락 임무를 받고 황해도 해주 앞 바다에서 임무 도중 남한에 일가친척이 있어서 귀순할 생각이 있던 이운용 상위가 기수를 남쪽으로 돌리고 권총으로 이인석 소위를 같이 귀순하라고 협박했는데, 알고 보니 이인석 소위도 일가친척들이 남쪽에 있어 귀순할 생각이 있는 걸 알아내고 우선 서로 권총을 겨눈 건에 대해 사과(…)한 뒤 인천 상공을 지나 서울 여의도 공항에 내려 귀순했다.#1#2
가장 유명한 사례로 당시 경계경보가 울려서 당시 국민들이 혼란에 빠진 적이 있다.
[1] 한국에 입국한 탈북민들은 북중국경 압록강, 두만강만 넘으면 탈북에 성공한 줄 알았다고 한다. 중국-태국을 거치는 대장정을 거쳐야 한다는 걸 북한에서 알았으면 탈북은 시도도 안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2] 코로나19 이전 기준 한 명을 넘기는데 한화로 천만 원이었다고 한다.[3] 그렇다고 해서 도강이 안전하지는 않다.[4] 북중국경을 여행하는 여행유튜버의 영상을 보면 항상 중국 국경경비대가 검문하는 것을 볼 수 있다.[출처] 휴먼라이츠워치[5] 단체로 움직여야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6] 혹은 이미 중국에서 옥살이를 해서 입국이 불가능한 경우이다.[7] 혹은 북한에서 살기 힘들어 자기를 중국에 팔아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8] 인신매매로 팔린건데 무슨 괜찮은 인품이냐 하겠지만 전근대적 사회에서 살아온 북한 여성의 가치관으로 바라봐야 한다.[9] 대부분 동북 3성 지역에 산다.[10] 인터넷이란 개념을 모르는 탈북민들은 단순 검색만 하면 알 수 있는 정보도 방법을 몰라 몇년 간 허송세월하는 경우도 있다.[11] 중국 내 탈북민부터 한국 입국에 성공한 탈북민까지 들어와 있어 헤어진 가족들을 찾거나 브로커 정보를 공유한다고 한다.[12] 동북 3성 지역에서 중국 중부나 동부, 서부, 남부 등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에 해당된다.[13] 일가족은 체포되었지만 중국, 일본, 미국, 한국 간 외교전 끝에 한국에 입국했다.[14] 대한항공 등의 한국 국적기를 탄 순간부터 대한민국 항공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한국 국적기에 타기만 해도 탈북은 성공한 것이다. 설령 타 국적기를 탄다해도 현실적으로 고작 탈북자 한 명 잡겠다고 이미 이륙한 비행기를 다시 회항시켜서 체포하는건 사실상 불가능하다.[15] 이 경우 1년 이상 수용소에서 기다려야 하고 미국에서 탈북민은 수많은 난민 중 하나라서 한국만큼 다양한 정착 지원도 해주지 않는다.[16] 2000년대까지만 해도 수 개월을 대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국 정부가 태국 정부와 직접 소통하면서 기간이 짧아졌다.[17] 이때 이만갑 출연진 중 한 명인 유현주 씨가 탈북했다. 입국일이 7월 27일이었는데,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탈북의 7.27~"이라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18] 물론 여기서 중국은 해당하지 않는다.[19] 탈북 후 이정호로 개명[20] 변호사들도 이걸 알아서 전화번호를 수시로 바꾼다고 한다.[21] 가장 위험한 요소로 1953년 정전 이후 비무장지대의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형상의 변화 등의 이유로 지뢰가 어디로 쓸려내려갔는지 한국측도 북한측도 아무도 모른다.[22] 귀순을 유도한 분대장은 30박 31일 휴가를 받았다고 한다.[23] 파출소[24] 군함·전투폭격기: 5억원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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