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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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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76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ElectoralCollege1876.svg


틸던 184인 (49.9%)
(50.1%) 185인 헤이스


1876년 11월 7일
1876 대선

1880년 11월 2일
1880 대선
}}} ||
선거 일시
11월 7일 8시 ~ 11월 8일 6시 (UTC)
투표율
81.8%[1]
선거 결과
후보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러더퍼드 B. 헤이스
부통령 윌리엄 A. 휠러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새뮤얼 J. 틸던
부통령 토머스 A. 헨드릭스

선거인단


185명
184명
전국 득표


47.9%
4,034,142표
50.9%
4,286,808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파일:Hayes-Wheeler.jpg

공화당





1. 개요
2. 주요 이슈
2.1. 공무원 개혁과 재건 시대의 종료
2.2. 율리시스 S. 그랜트 행정부의 부패 척결 문제
3. 후보 선출
3.1. 공화당
3.2. 민주당
4. 본선
4.1. 선거 분쟁과 1877년의 타협
5. 결과
5.1. 주별 결과



1. 개요[편집]


미국의 제19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진행된 선거로, 미국 역사상 최고 투표율(81.8%)를 기록한 선거이자 역대 최소 선거인단 격차(1인) 차이로 결과가 결정된 선거다.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 후보가 선거인단 과반수를 확보해 당선, 제19대 대통령이 되었다.

역대 최고 투표율 외에도 부정선거 의혹 등 여러 논란과 여러 기록을 함께 남긴 선거로 현재도 미국 정치사를 이야기할 때 자주 회자되는 선거다.

2. 주요 이슈[편집]



2.1. 공무원 개혁과 재건 시대의 종료[편집]


이 시절까지만해도 미국은 공직자를 엽관제를 통해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따라서 선거 승자가 자신에게 배정된 공직을 자신의 지지자들과 후원자들에게 배분하는 것이 일상적이었다. 특히 1830년대까지만 해도 오히려 선거를 통해 주기적으로 공무원이 교체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평가가 당대에는 통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공무원 채용 제도가 부정부패를 촉발한다는 비판이 터져나왔고, 1868년 대선에서 승리해 대통령이 된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 역시 나름대로는 공화당 당내 유력자들의 공무원 추천을 거절하고 개혁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하는 등 조치를 취하고 소기의 성과를 거뒀지만 다름 아니라 그랜트 본인이 임명한 측근 인사들이 부패 스캔들에 대거 휘말리면서 효과를 제대로 보지 못했고, 공무원 제도 개혁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동시에 재건 시대(Reconstruction era)도 종막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랜트 대통령은 미국 흑인에 대한 투표권 보장을 공시한 수정헌법 15조를 비준하는 대신 남아있던 재건 3주(미시시피, 버지니아, 텍사스)에게 연방 복귀 및 주로서의 자격 회복을 제안했고 이들이 이를 수락하면서 남북전쟁 당시 연방을 이탈했던 모든 주들이 연방에 입성했다.

물론 이는 남부 백인들에 엄청난 반발을 초래했는데, 이들은 그랜트의 협상에 응한 남부 백인들은 스캘러왜그(Scalawag)로, 북부 출신 이주민들은 카펫배거(Carpetbagger)로 비하하면서 레드 셔츠(Red Shirts)나 화이트 리그(White League)같은 준군사 사조직을 결성해 이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르거나 흑인들 상대로는 인종 범죄를 저질렀다. 그랜트 행정부와 공화당에서는 나름 이들을 막기 위해 1871년 한층 강화된 인권법을 통과시키고 이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규정하는 등 적극 대응하였으나 현지에서 제대로 된 협조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한계가 있었다.

어찌됐건 이런 과정 속에서 남부 백인들 중 다수가 박탈당했던 선거권을 회복했고, 1876년 대선은 이들이 본격적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될 첫번째 전국 단위 선거였다.

2.2. 율리시스 S. 그랜트 행정부의 부패 척결 문제[편집]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 본인은 남북전쟁의 전쟁 영웅으로 명예를 중시했고 개인은 비교적 능력이 있고 청렴한 편이었으나, 문제는 그가 기용한 인사들이었다. 정치인 출신이 아니다보니 친척 등 주변 사람들을 측근으로 대거 기용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부패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그랜트의 지지율 하락에 일조하고 말았다. 그랜트로서는 어찌보면 믿는 도끼에 발등이 제대로 찍힌 셈.

여담으로 그와중에 주변 청탁을 거절하고 그랜트 대통령의 신뢰를 지켜준 인물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다. 반대로 말하면 어머니를 빼고는 죄다 그랜트의 뒷통수를 친 것이다.

여튼 그랜트는 퇴역한 전쟁영웅이 아닌 현직 대통령이었고, 이 모든 인사 참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후임은 그랜트 시대의 부정부패의 고리를 척결할 것이 누구가 될 것이냐였는데 이 와중에 뉴욕주지사 새뮤얼 J. 틸던이 부상하게 된다.

틸던은 민주당 소속이기 때문에 여당으로서의 공동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무엇보다도 태머니 홀의 지도자로 뇌물과 후원을 통해 뉴욕 정치를 장악했던 같은 민주당의 윌리엄 M. 트위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그를 120건의 사기 및 기타 위반 혐의로 처벌하는데 크게 기여한 바 있기 때문. 더불어 뉴욕주지사를 지내면서 운하 이용료 및 관리비를 과도하게 책정해 폭리를 취하던 소위 커널 링(Canal Ring)을 해체하기도 해서 부패상을 처리할 적임자로 평가받았다.

그랜트 행정부의 부패 이미지로부터 벗어나려는 공화당도 역시 부패 문제와 거리가 멀고, 전국 정치와 거리를 두고 있으며 청렴하다는 평가를 받는 오하이오 주지사 러더퍼드 B. 헤이스가 새롭게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3. 후보 선출[편집]



3.1. 공화당[편집]


당초에는 그랜트 대통령이 3선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많았다. 1873년부터 시작된 대불황, 연이은 측근들의 부패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아직 전쟁영웅으로서의 그랜트의 국민적 인기는 대단했기 때문. 하지만 그런 그랜트의 꿈을 막아선 건 다름 아니라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이면서, 동시에 그랜트처럼 전쟁영웅이기도 한 조지 워싱턴이었다.

그랜트가 3선에 도전한다는 건 워싱턴 대통령이 세워놓은 '재선의 미덕'이란 불문률을 공개적으로 깨는 것이기 때문. 그랜트 주변 그룹은 3선 출마를 종용했지만, 1875년 연방 하원에서 그랜트의 3선 출마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찬성 233표, 반대 18표로 통과시키면서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끝내 그랜트는 3선의 꿈을 접었다.

대신 그랜트 대통령이 자신의 후계자로 자신과 임기 내내 함께한 해밀턴 피시 국무장관[2]을 지명했지만 피시 본인이 고령으로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전당대회를 앞두고는 전직 연방 하원의장이었던 제임스 G. 블레인이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처남 밑에서 일하던 제임스 멀리건이 부패 의혹을 제기하면서 한때 위기에 처했지만 결국 1차 투표때만 285표로 과반에 겨우 100표 모자란 1위를 차지하며 후보 지명을 앞둔둣했다. 하지만 앞선 부패 의혹 등과 반대파의 결집으로 6차 투표까지도 후보 지명에 필요한 표를 확보하지 못하더니 7차 투표에서는 오히려 반대파의 대결집으로 오하이오 주지사이자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러더퍼드 B. 헤이스에게 대역전패를 당하면서 후보직을 내줘야만 했다.

하지만 블레인은 억울할만도 했던 패배를 받아들이고 헤이스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고, 헤이스는 공화당의 깜짝 후보로 대선에 출마하게 됐다. 본인으로서도 상당히 의외의 결과였겠지만, 본인의 청렴함이 당시 공화당 내 정치 역학 구도와 맞물려 예상하지 못한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3.2. 민주당[편집]


경제 위기와 그랜트 행정부의 부패를 바탕으로 2년전 중간선거에서 남북전쟁 이후 16년만의 첫 하원 탈환을 이뤄낸 민주당은 대선 승리로 화룡점정을 찍겠다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20년만의 대통령 배출에 대한 기대에 찬 민주당 전당대회는 미주리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는데 현장에만 5천명에 가까운 관중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마치 8년전 대선 정국을 거꾸로 뒤집은듯 공화당이 7차에 걸친 투표 끝에 겨우 후보를 확정지은 반면 민주당은 단 두 번의 투표로 새뮤얼 J. 틸던을 당의 대선 후보로 공식 지명한다.

당시 전당대회에 참석한 사람이 남긴 평에 따르면 틸던은 민주당의 창립자인 앤드류 잭슨 대통령 이후 당의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본선에 나서는 후보였다고 한다. 당시 민주당이 정권 탈환에 대한 열망으로 얼마나 단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증언이다.

4. 본선[편집]


양당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건 정책 종료 및 공무원 개혁을 공약으로 들고 나오다보니 차이가 크지는 않았고, 결국 선거전은 지독한 네거티브 공방으로 휘말렸다. 당시 관례에 따라 헤이스와 틸던 양 후보는 직접 선거 운동에 나서기보다는 2선으로 물러나는 형태를 취했고 민주당은 공화당을 부패 정당으로, 공화당은 민주당을 남북전쟁 원죄당으로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민주당에서는 남북전쟁 원죄론에 대해 지겹다는 반응을 보이며 "피 묻은 셔츠를 그만 흔들라."[3]고 조롱했고, 공화당에서는 링컨 시절의 승리 공식을 재현하기 위해 인종주의 성향이 강한 남부 민주당원과 북부의 온건 민주당원을 분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는데 아무래도 그랜트 행정부의 부패상에 대한 책임론이 있다보니 공화당이 수세 속에 선거전을 치렀다.

특히 양당 모두 북부 접전지인 뉴욕, 인디애나와 함께 남부 3개주(사우스캐롤라이나, 루이지애나, 플로리다)에 집중해 유세를 진행했는데 남부 주에서는 승리 가능성에 기세 등등해져 흑인의 투표권 억압에 한층 더 노력하는 민주당의 '미시시피 전략'을 어떻게 재건 공화당 주정부가 제어하느냐가 관건으로 점쳐졌다.

결국 모두의 우려대로 혼돈의 선거답게 이번 대선은 마지막까지 진흙탕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았다.

4.1. 선거 분쟁과 1877년의 타협[편집]


대부분의 주에서 선거 결과가 가려지는 사이 틸던이 전국 득표에서 민주당 후보로서는 프랭클린 피어스 이후 처음으로 과반 득표에 성공해 우세를 점한 상황이었지만 당선에 필요한 과반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상기한 남부 3개주에서 결과가 가려지지 않고 있었다.

워낙 두 후보간의 표차가 적고, 당선증이 누구한테 가느냐까지 걸려 있는 상황이라 수작업으로 재검표가 계속되었는데 재검표가 될때마다 승자가 바뀌는 바람에 계속 결론이 정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틸던은 당선에 단 한 명이 부족한 184명, 헤이스는 166명을 확보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오리건에서 공화당의 헤이스가 승리했지만 오리건 공화당에서 선거인단(3명)을 지정하는 과정에서 공무원인 주 우체국 국장을 지명하면서 논란이 한층 더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에선 정치적 중립성 문제때문에 공무원은 선거인단이 될 수 없게 되어있어 이 한 명을 교체해야되는 상황이 되었는데, 선거인단이 잘못 지명됐을 때 이를 정정할 수 있는 권한은 주지사에게 있었고 당시 오리건의 주지사가 민주당 소속이었던 것.

이 한 명이 민주당 선거인단으로 교체된다면 그대로 틸던의 당선이 확정되는 상황인지라 오리건 주지사는 선거인단에 민주당 지지 성향의 선거인단을 끼워넣으려고 했고, 틸던은 당연히 이를 지지했다. 공화당에서는 이를 오리건 주민들의 의사에 반하는 위법행위라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결국 남부 3개주와 오리건 선거인단 1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의회1877년 1월 29일에 선거특위(Electoral Commission)를 설치하고 이 문제에 대한 해결에 나섰다. 처음에 공화당에선 이에 반대해 그랜트 대통령이 이 문제를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의회를 통해 이를 해결하는 데 동의했다.

당연히 두 후보 모두 남부 3개주(19명)와 오리건 선거인단 1명이 모두 자신의 것이라 주장했다. 틸던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진다면 틸던 204명, 헤이스 165명[4]이 되어 제임스 뷰캐넌이 퇴임한 1861년 이후 15년만에 첫 민주당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고 헤이스의 주장이 모두 받아들여진다면 헤이스 185명, 틸던 184명으로 공화당이 1860년 대선 이후 5번 연속 선거에서 승리하며[5] 한번 더 정권 연장에 성공하게 된다.

특위는 중립성을 위해 민주당 7명, 공화당 7명 동수로 구성하고 무소속 연방대법관인 데이비드 데이비스가 위원장으로 취임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던 일리노이 주의회에서 그 데이비스를 연방 상원의원으로 선출해 민주당 8: 공화당 7 상황을 만드려 시도했다.

하지만 데이비스는 민주당의 뜻과 달리 상원의원 직을 받아들이는 대신 선거특위에서 빠지기로 했고, 이에 대해 복수하듯 공화당은 남은 자리를 상원 다수당 자격으로 채우면서 역으로 공화당 8 : 민주당 7이 되었다. 민주당으로서는 제 꾀에 제가 빠진 셈.

결국 당론에 따른 표결이 이뤄지면서 20명의 선거인단은 모두 헤이스에게 돌아갔다. 당시 특위 구성에 대한 법률에 따라 상·하원에서 특위의 표결 결과를 모두 기각하지 않는한 그 결과를 인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민주당이 장악한 하원에서 이에 반대했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에서 이를 수락하기로 하면서 특위안이 인용. 헤이스가 미합중국의 제19대 대통령이 되었다.

민주당과 남부에서는 당연히 난리가 났고, 민주당은 최후의 저항 방법으로 필리버스터를 꺼내들고 여차하면 폭동도 일으킬 것이라고 위협했다. 공화당 역시 선거 분쟁이 오래 이어지는 것이 좋지 않을 것이라 판단해 양당은 타협안을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헤이스가 아래와 같은 타협안을 받아들이면서 마무리되었다.

1. 남부의 군정을 종료한다.

1. 민주당원에게 일정한 수의 각료를 배정한다.

1. 남부인의 연방 공직 임명을 가능케 한다.[6]

1. 재선에 출마하지 않는다.


새뮤얼 J. 틸던과 민주당 강경 지지층에서는 이를 부정선거라 주장하며 끝까지 이를 받아들이려하지 않았지만, 당의 계속되는 압박에 결국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패배를 인정했다. 이후 틸던은 홧병이라도 난듯 정계를 은퇴해버리고 만다.

민주당이 제꾀에 제가 빠진 측면이 있지만, 상원 다수당을 장악한 공화당이 사실상 선거 결과를 결정지어버린 셈이기에 부정선거 음모론이 당시에도 횡행했고 헤이스는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Rutherford"를 비꼬아서 "RutherFRAUD"(사기)로 불리는 등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남부에서도 백인들이 불법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이때만 해도 공화당 지지가 높던 흑인들의 투표를 방해했기에, 흑인에 대한 투표 방해가 없었다면 새뮤얼 틸던이 선거인단이나 득표율이나 둘 다 깔끔하게 졌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분석된다. 현대의 한 예측에 따르면 불법적인 폭력이 없었을 경우 이들 주 3개 중 2군데에서 공화당이 이기고 1군데에서 민주당이 이겼겠지만 다른 주에서 공화당이 이겨서 헤이스가 정당하게 당선됐을 것으로 분석되기도 했다. Who Won the 1876 Election? Issue 9 of Buttons and Ballots, in Spring 1997.

5. 결과[편집]


투표 결과
파일:ElectoralCollege1876.svg
후보자
러더퍼드 B. 헤이스
새뮤얼 J. 틸던
선거인단 수
185명 / 369명
184명 / 369명
전국 득표 수
4,034,142표 (47.92%)
4,286,808표 (50.92%)
대통령 당선인

파일:President_Rutherford_Hayes_1870_-_1880_Restored.jpg

러더퍼드 B. 헤이스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스 후보가 전국 득표율 열세를 선거인단 투표로 뒤집고 미합중국의 제19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로서 공화당은 대선 5연승 및 3차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더불어 헤이스 당선인은 선거인단 기준 역대 최소 격차(1명)으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진기록을 남겼다.

사실 선거특위를 통해 확보한 선거인단 20명을 제외하고도 헤이스는 상당히 어려운 선거전을 치렀는데 그나마 북부에서도 진보 성향 그린백당이 표를 소수 갈라먹으면서 이전 대선에 비해 한층 더 힘들었다. 그린백의 전국 득표율은 1% 수준이었지만 공화-민주 양 후보간 격차가 그보다 더 적은 수준었기 때문.

여튼 본인의 청렴함과 온건한 이미지로 이전 그랜트 행정부와는 다소 거리를 둘 수 있었고, 덕분에 북부 접전주 중 뉴욕을 제외한 오하이오(1.14%p 차), 펜실베이니아(2.37%p 차), 위스콘신(2.39% 차), 일리노이(3.54%p 차)에서 승리하면서 당선될 수 있었다. 특히 헤이스 역시 그랜트 정도의 전쟁 영웅은 아니지만 대령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해 소장까지 승진한 바 있는 참전유공자이기 때문에 북부에서 말그대로 남북전쟁과 링컨에 대해 공화당에 진 마지막 빚을 갚을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 선거의 결과로 남부에서는 군정이 최종 종료되고, 각 주정부가 남부연합 출신이거나 이에 동정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던 인종주의자들(소위 리디머)에게 넘어가면서 짐 크로 법 등 흑인의 권리를 제약하는 여러 악법들이 차례로 입법되더니 남부에 거주 중인 흑인들은 목소리를 냈다가 린치를 당하거나 죽임을 당해도 어디에 억울함을 한탄할 수 없는, 다시 한번 비통한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의 최종 패자는 바로 남부에 거주 중인 미국 흑인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민주당의 틸던으로서도 상당히 이색적인 기록을 많이 남겼는데, 1824년 대선 당시 더 많은 득표를 하고도 낙선한 앤드루 잭슨 대통령 이후 52년만에 처음으로 전국 득표에서 앞서고 낙선한 대선 후보인 동시에 2020년 대선까지를 기준으로 놓고 봤을때 역대 전국 득표에서 앞서고 낙선한 5명 중 유일하게 득표율 50%를 넘기고 낙선한 후보가 되었다. 또한 재밌는 가십거리지만 틸던을 시작으로 역대 같은 케이스들의 낙선자가 모두 민주당 소속이다. 1876년과 현재의 민주당이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의 정당이 되었음에도 같은 사례가 반복되는 건 우연의 일치라지만 참 희한한 부분이다.

5.1. 주별 결과[편집]


주(선거인단 수)




비고
앨라배마 (8)
새뮤얼 J. 틸던
102,989표
(59.98%)

러더퍼드 B. 헤이스
68,708표
(40.02%)
민주당 획득
아칸소 (6)
새뮤얼 J. 틸던
58,086표
(59.92%)

러더퍼드 B. 헤이스
38,649표
(39.87%)
민주당 획득
캘리포니아 (6)
새뮤얼 J. 틸던
76,460표
(49.08%)
러더퍼드 B. 헤이스
79,258표
(50.88%)

공화당 수성
콜로라도 (3)[간]
새뮤얼 J. 틸던
24표
(32.43%)
러더퍼드 B. 헤이스
50표
(66.57%)

공화당 획득
코네티컷 (6)
새뮤얼 J. 틸던
61,927표
(50.70%)

러더퍼드 B. 헤이스
59,033표
(48.33%)
민주당 획득
델라웨어 (3)
새뮤얼 J. 틸던
13,381표
(55.45%)

러더퍼드 B. 헤이스
10,752표
(44.55%)
민주당 획득
플로리다 (4)[분]
새뮤얼 J. 틸던
22,927표
(49.01%)
러더퍼드 B. 헤이스
23,849표
(50.99%)

공화당 수성
조지아 (11)
새뮤얼 J. 틸던
130,157표
(72.03%)

러더퍼드 B. 헤이스
50,533표
(27.97%)
민주당 수성
일리노이 (21)
새뮤얼 J. 틸던
258,611표
(46.66%)
러더퍼드 B. 헤이스
278,232표
(50.20%)

공화당 수성
인디애나 (15)
새뮤얼 J. 틸던
213,526표
(48.65%)

러더퍼드 B. 헤이스
208,011표
(47.39%)
민주당 획득
아이오와 (11)
새뮤얼 J. 틸던
112,121표
(38.28%)
러더퍼드 B. 헤이스
171,326표
(58.50%)

공화당 수성
캔자스 (5)
새뮤얼 J. 틸던
37,902표
(30.53%)
러더퍼드 B. 헤이스
78,324표
(63.10%)

공화당 수성
켄터키 (11)
새뮤얼 J. 틸던
160,060표
(61.41%)

러더퍼드 B. 헤이스
97,568표
(37.44%)
민주당 수성
루이지애나 (8)[분]
새뮤얼 J. 틸던
70,508표
(48.35%)
러더퍼드 B. 헤이스
75,315표
(51.65%)

공화당 수성
메인 (7)
새뮤얼 J. 틸던
49,917표
(42.65%)
러더퍼드 B. 헤이스
66,300표
(56.64%)

공화당 수성
메릴랜드 (8)
새뮤얼 J. 틸던
91,779표
(56.05%)

러더퍼드 B. 헤이스
71,980표
(43.95%)
민주당 수성
매사추세츠 (13)
새뮤얼 J. 틸던
108,777표
(41.90%)
러더퍼드 B. 헤이스
150,064표
(57.80%)

공화당 수성
미시간 (11)
새뮤얼 J. 틸던
141,685표
(44.49%)
러더퍼드 B. 헤이스
166,901표
(52.41%)

공화당 수성
미네소타 (5)
새뮤얼 J. 틸던
48,587표
(39.16%)
러더퍼드 B. 헤이스
72,955표
(58.80%)

공화당 수성
미시시피 (8)
새뮤얼 J. 틸던
112,173표
(68.08%)

러더퍼드 B. 헤이스
52,603표
(31.92%)
민주당 획득
미주리 (15)
새뮤얼 J. 틸던
202,086표
(57.64%)

러더퍼드 B. 헤이스
145,027표
(41.36%)
민주당 수성
네브래스카 (3)
새뮤얼 J. 틸던
17,413표
(35.30%)
러더퍼드 B. 헤이스
31,915표
(64.70%)

공화당 수성
네바다 (3)
새뮤얼 J. 틸던
9,308표
(47.27%)
러더퍼드 B. 헤이스
10,383표
(52.73%)

공화당 수성
뉴햄프셔 (5)
새뮤얼 J. 틸던
38,510표
(48.05%)
러더퍼드 B. 헤이스
41,540표
(51.83%)

공화당 수성
뉴저지 (9)
새뮤얼 J. 틸던
115,962표
(52.66%)

러더퍼드 B. 헤이스
103,517표
(47.01%)
민주당 획득
뉴욕 (35)
새뮤얼 J. 틸던
521,949표
(51.40%)

러더퍼드 B. 헤이스
489,207표
(48.17%)
민주당 획득
노스캐롤라이나 (10)
새뮤얼 J. 틸던
125,427표
(53.62%)

러더퍼드 B. 헤이스
108,484표
(46.83%)
민주당 획득
오하이오 (22)
새뮤얼 J. 틸던
323,182표
(49.07%)
러더퍼드 B. 헤이스
330,698표
(50.21%)

공화당 수성
오레곤 (3)[분]
새뮤얼 J. 틸던
14,157표
(47.38%)
러더퍼드 B. 헤이스
15,214표
(50.92%)

공화당 수성
펜실베이니아 (27)
새뮤얼 J. 틸던
366,204표
(48.25%)
러더퍼드 B. 헤이스
384,184표
(50.62%)

공화당 수성
로드아일랜드 (4)
새뮤얼 J. 틸던
10,712표
(40.23%)
러더퍼드 B. 헤이스
15,787표
(59.29%)

공화당 수성
사우스캐롤라이나 (7)[분]
새뮤얼 J. 틸던
90,897표
(49.76%)
러더퍼드 B. 헤이스
91,786표
(50.24%)

공화당 수성
테네시 (12)
새뮤얼 J. 틸던
133,177표
(59.79%)

러더퍼드 B. 헤이스
89,566표
(40.21%)
민주당 수성
텍사스 (8)
새뮤얼 J. 틸던
104,755표
(70.04%)

러더퍼드 B. 헤이스
44,800표
(29.66%)
민주당 수성
버몬트 (5)
새뮤얼 J. 틸던
20,254표
(31.38%)
러더퍼드 B. 헤이스
44,091표
(68.30%)

공화당 수성
버지니아 (11)
새뮤얼 J. 틸던
140,770표
(59.58%)

러더퍼드 B. 헤이스
95,518표
(40.42%)
민주당 획득
웨스트버지니아 (5)
새뮤얼 J. 틸던
56,546표
(56.75%)

러더퍼드 B. 헤이스
41,997표
(42.15%)
민주당 획득
위스콘신 (11)
새뮤얼 J. 틸던
123,926표
(48.19%)
러더퍼드 B. 헤이스
130,067표
(50.57%)

공화당 수성

[1] 역대 최고 투표율이다.[2] 신미양요 당시 국무장관이기도 했다. 그외 도미니카 공화국 병합 등 여러 외교 치적을 쌓아 명성을 높였다.[3] 전쟁을 정치적으로 그만 이용하라는 뜻이다.[4] 166명에서 오리건에서 확보한 3명 중 1명이 틸던에게 가기 때문.[5] 앤드루 존슨은 부통령으로 당선되어 링컨의 암살로 직을 승계한 경우라 대선 후보로 승리하진 않았다.[6] 당시 남부 백인들은 연방에 충성 서약을 하지 않으면 참정권 등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간] 주의회에 의한 간선제[분] A B C D 선거 분쟁으로 인해 선거특위에서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