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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윤(1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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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밀양군에서 제4대 국회의원(민주당)을 지낸 김정환은 그의 장조카이다.
2. 생애[편집]
1897년 9월 12일 경상남도 밀양군(현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의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태영(金泰永, 1857. 7. 7 ~ 1904. 11. 3)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인영(朴仁永, 1858. 8. 17 ~ 1939. 8. 20)[5] 사이의 3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애국지사 전홍표가 교장으로 근무하던 사립 동화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경성부 중앙학교에 입학, 졸업하였다. 그는 전홍표 지사로부터 배일사상을 철저히 고취받아 뒤에 독립운동에 뛰어들 동기를 얻었다.#
1917년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방안을 모색하며 만주로 망명하였고, 3.1 운동을 목격하고는 신흥무관학교로 향했다.
1919년 11월 9일, 그는 중화민국 길림성에서 김원봉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고, 창립단원으로서 의열단의 모든 거사를 계획하고 실행을 지휘, 대외 교섭, 자금 관리를 총괄하는 의열단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5인 참모부의 일원으로 활동하면서 의열단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축했다.
1920년 2월, 상하이에서 폭탄을 구입하여 국내로 반입한 후 황상규·윤세주 등의 동지들과 함께 국내에서 자금책으로 활동하다가, 경기도경찰부(京畿道警察部) 경부 김태석의 밀정 김진규(金珍奎)와 안태익(安泰翊)의 밀고로 동지들이 체포되고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일본 경찰의 엄중한 경계망을 뚫고 상하이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김원봉과 다시 합류하였다.
이후 그는 최수봉에게 의열단 가입을 권유하였으며, 그해 12월 27일 최수봉이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전개했을 때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일본 경찰에 수배되었으나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상하이로 도피하였다. 또 1922년 3월 김익상·이종암 등이 다나카 기이치 일본 제국 육군대장을 저격하고자 계획할 때에도 의사결정에 깊이 관여했다.
그후에는 상하이로 돌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1926년 1월 김원봉이 의열단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군사교육을 받기 위하여 상하이 황푸군관학교에 입교하겠다는 제안을 강하게 만류했으나, 결국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의열단 간부 다수가 군관학교에 입교하면서 조직은 해체되었다.
그는 이에 실망하고 이후에는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는 데 전념하였으며, 복건성 하문도(厦門道) 사명현(思明縣)[6] 에서 머물다가 복건성 하문도 남안현(南安縣) 22도(都) 하소(霞蘇)[7] 에 있던 설봉사(雪峯寺)로 들어갔다.
1927년 10월 19일 이 절에서 3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3. 사후[편집]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95년 손자 김기봉(金基鳳, 1944. 8. 16 ~ )·김기우(金基宇, 1947. 7. 28) 등이 소문을 좇아 유해를 찾으러 설봉사에 방문했으나, 이미 김상윤 사후 68년이란 세월이 흘러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승려가 없을 뿐 아니라 30여년전 문화대혁명 시절 사찰의 모든 기록과 기물이 온전하지 못했다는 당시 주지스님의 증언이 있어 결국 설봉사의 흙 한 줌만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2005년 6월 11일, 출생지인 상남면 기산리 마을 입구에 '독립투사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투쟁기념비'를 세우고 1995년 당시 설봉사에서 가져온 흙을 기념비 밑에 묻었다. 그리고 2015년 3월 28일 설봉사를 다시 찾아 후손들이 '초산 김상윤 선생 기적비'를 건립하였다.
2020년 6월 17일에는 당초 경상남도 밀양시 하남읍 귀명리에 안장되어 있던 부인 여주 이씨 이동연(李東連, 1892. 8. 20 ~ 1949. 7. 5)의 유해가 국립서울현충원 제1충혼당 1층 108실 183호에 이장되었고, 이때 김상윤의 위패가 함께 봉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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