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임 지위 |
- [ 펼치기 · 접기 ]
조선귀족 朝鮮貴族 | - 【 펼치기 ・ 접기 】
수작 | 후작 | 백작 | 완순군 · 의양군 · 창산군 · 청풍군 · 박영효 · 윤택영 | 민영린 · 이완용 · 이지용[1] | 자작 | 고영희 · 권중현 · 김성근 · 김윤식 · 민병석 · 민영규 · 민영소 · 민영휘 · 박제순 · 송병준 · 윤덕영 · 이근명 · 이근택 ·이기용 · 이병무 · 이완용[2] · 이용직 · 이재곤 · 이하영 · 임선준 · 조민희[3] · 조중응 | 남작 | 김가진[4] · 김병익 · 김사철 · 김사준 · 김영철 · 김종한 · 김춘희 · 김학진 · 남정철 · 민상호 · 민영기 · 민종묵 · 민형식 · 박기양 · 박용대 · 박제빈 · 성기운 · 윤웅렬 · 이건하 · 이근상 · 이근호 · 이봉의 · 이용원 · 이용태 · 이윤용 · 이재극 · 이정로 · 이종건 · 이주영 · 이항구 · 장석주 · 정낙용 · 정한조 · 조동윤 · 조동희[5] · 최석민 · 한창수 | 습작 | 후작 | 백작 | 이달용 · 이덕용 · 이덕주 · 윤의섭 · 박찬범 · 이병길 | 고중덕 · 고흥겸 · 송종헌 · 이영주 | 자작 | 고희경 · 권태환 · 김호규 · 민병삼 · 민충식 · 민형식 · 민홍기 · 박부양 · 윤강로 · 이규원 · 이종승 · 이창훈 · 이충세 · 이택주 · 이해국 · 이홍묵 · 임낙호 · 임선재 · 조대호 · 조용호 · 조원흥 · 조중수[3] | 남작 | 김교신 · 김덕한 · 김세현 · 김석기 · 김영수 · 김정록 · 남장희 · 민건식 · 민영욱 · 민철훈 · 민태곤 · 민태윤 · 박경원 · 박서양 · 박승원 · 성주경 · 윤치호 · 이규환 · 이기원 · 이능세 · 이동훈 · 이범팔 · 이병옥 · 이원호 · 이인용 · 이장훈 · 이중환 · 이풍한 · 장인원 · 정주영 · 정천모 · 조중구 · 조중헌 · 최정원 · 한상기 | 승작 | 후작 | 백작 | 이완용 | 고희경 · 송병준 | 반납 | 김석진 · 민영달 · 유길준 · 윤용구 · 이용구 · 조경호 · 조정구 · 조희연 · 한규설 · 홍순형 | {{{-2 [1] 1912년 도박죄로 구속되어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2] 1872년생 이완용(李完鎔)으로 1858년생 이완용(李完用)과 동명이인임.
[3] 1927년 파산자로 선고되어 조선귀족령 제8조 1항에 따라 1928년 2월 29일부로 자작의 예우가 정지되었지만 자식이었던 조중수에게 자작 작위가 승작됨.
[4] 1919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협조해 습작 불능 처리됨.
[5] 재산 분쟁으로 일시적으로 예우 정지.
※ 오등작 중 일제강점기 조선귀족에 공작은 없었으며, 그에 준하는 작위와 관련한 정보는 왕공족 문서 참고.
※ 취소선 표시는 작위를 박탈당한 인물을 뜻함.
- 작위 박탈 사유 [ 펼치기 · 접기 ]
- 윤치호 : 1913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됨에 따라 작위 박탈
- 김사준 : 1915년, 조선보안법 위반 사건에 연루되어 작위 박탈. 신한혁명당의 간부 중 하나인 성낙형이 고종을 망명시키고자 했는데, 김사준이 이를 수락하고 실행에 옮기려다 일제에 발각되어 김사준을 비롯한 고종 망명 사건 관련자들 다수가 검거
- 김윤식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이용직 : 1919년, 독립 청원서 제출로 인해 작위 박탈
- 민영린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김병익 : 1919년, 아편 흡입죄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민태곤 : 1941년 12월, 도쿄에서 조선민족독립운동 사건으로 구속되어 작위 박탈
}}} |
|
|
구한말의 관료이자 정치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순약(舜若)이다.
민씨 일족에 속해 빠른 승진을 거듭했는데 호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목숨은 건졌지만 집이 불타는 일이 있었고, 1894년에는 다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홍종우를 보내
김옥균을 암살하도록 했다.
1904년 농상공부 대신에 오를 때까지 요직을 거쳤고 경술국치 이후 일제로부터 매국 공채 5만원을 받았다.
1852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태어났다. 본래 민철호(閔哲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이후 민규호(閔奎鎬)에게 입양되었다.
1878년 문과에 급제해
여흥 민씨 가문의 일원으로 승진을 거듭했다. 1881년 대교에 임용되어 남학교수 동부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우승지 이조참의, 조사오위장 겸 보덕, 대사성, 춘천부사 등을 지냈지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목숨은 건졌으나 살고 있던 가옥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는다. 2년 후인
1884년에는
갑신정변을 무난히 극복한 공을 인정 받아 계속해서 빠른 승진을 이어나가게 된다.
1886년 종2품으로 승진하여 이조참판, 예조참판, 부제학, 대사성, 도승지, 공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9년에는 정2품으로 승진하여
형조판서, 내무협판,
이조판서,
예조판서,
병조판서,
홍문관 제학,
궁내부 특진관,
규장각 학사 겸 일강관, 전선사 제조, 양지아문 총재관, 판돈녕,
학부대신, 궁내부 대신,
농상공부대신,
중추원 의장, 규장각 지후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894년 홍종우를 통해 망명 중이었던
김옥균을 암살했다. 같은 해 6월 23일부터 28일까지
한성판윤을 지냈다. 하지만
7월 갑오개혁 때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897년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다.
1909년 일본관광단 일원으로 일본시찰을 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귀족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1911년 1월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7년 3월 10일, 65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자작 작위를 민영소의 아들인 민충식에게 습작되었다.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민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선정되었다. 두 명단에는 민영소의 자작위를 습작한 민충식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각주]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9 07:34:37에 나무위키
민영소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