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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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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align=right><tablewidth=450><tablebordercolor=#292929><colbgcolor=#29176e><colcolor=#ffde09> 대한제국 참정대신
한규설
韓圭卨 | Han Kyu-seol ||
1. 개요[편집]
조선 말기의 무신(武臣)이자 을사조약 당시 참정대신(현재의 부총리, 그러나 당시에는 의정대신이 공석이라 실질적으로는 국무총리 서리에 가까운 기능을 하고 있었다.)을 지냈던 인물.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이다.
1905년 일본의 을사조약 체결 강요 당시에 탁지대신(현재의 기재부장관) 이용익과 함께 공개적으로 반대했던 둘뿐인 인물 중 한명이다.
갑신정변 당시에 살해당한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 한규직(韓圭稷)의 동생이다.
2. 생애[편집]
한규설은 1848년 2월 29일 한성부 남부 대평방(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교동)#에서 부사(府使)를 지낸 아버지 한승렬(韓承烈, 1817 ~ 1860. 9. 26)과 어머니 해주 오씨(1814 ~ 1904. 4. 4)[2]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한원식(韓元植, 1790 ~ 1866. 8. 27)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3]
1876년(고종 13) 증광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판서, 한성판윤, 포도대장을 지내다가 1905년 대한제국 의정부 참정대신[4] 이 되었다. 그 해 을사조약 체결 당일 어전회의 직후 대신 8인과 하야시 일본 공사,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모인 회의장에서 조약에 반대의견을 피력한 이후 회의 도중에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엄귀비의 거처에 뛰어들어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졸도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참정대신의 자리에서 파면된다.[5][6]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받았으나 거절하였다. 작위를 거절 혹은 박탈당한 인구는 그 많은 작위 수혜자 중에서 불과 8명이다.
1920년에는 월남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설하여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키는데 기여하였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59년 영화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에서 배우 송억이 맡았다.
- 1972년 영화 <의사 안중근>에서 배우 최남현이 맡았다.
- 1980년 MBC 8.15 특집극 <의친왕>에서 배우 한인수가 맡았다.
- 1984년 KBS 대하드라마 <독립문>에선 배우 김봉근이 맡았는데, 1996년 SBS 3.1절 특집드라마 <안중근>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나왔다.
- 1984년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선 배우 백인철이 맡았다.
- 1990년 KBS1 8.15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선 배우 이대로가 맡았다.
- 1995년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선 배우 김호영이 맡았다.
- 1996년 연극 <제국의 광대들>에선 배우 강계식이 맡았는데, 이 작품은 그의 팔순 기념작이다.
4. 기타[편집]
장지연은 그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에서 한규설 이 놈도 을사늑약을 못 막은 주제에 무슨 낯으로 살아 숨쉬는가?라며 폭풍같이 깠다.[7] 정작 장지연 자신은 경술국치 이후 말년에 자포자기하여 변절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부분.
한규설이 살던 한옥은 국민대학교에서 구입, 해체하여 정릉 소재지로 옮겨 짓고 학생들의 예절 교육관으로 쓰고 있다. 외부 손님의 교내 탐방 코스, 다도 수업 등에 쓴다. 원래 99칸의 큰 집이었다고 하나, 국민대학교의 위치가 산 중턱이라 일부만 옮겨 놓았다.
한규설의 아들 한양호는 당시 경성 서대문 무악재 위의 인왕산 자락에 경성여자상업학교를 설립했다. 오늘날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서울문영여자고등학교, 서울문영여자중학교의 전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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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양공파 29세 규(圭) 항렬.[2] 오치현(吳致賢)의 딸이다.[3] 한원식은 한규설의 친조부이다. 한원식의 형 한의식(韓義植, 1786 ~ 1839. 6. 16)에게 아들이 없어서 한원식의 독자 한승렬이 한의식의 양자로 입적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한원식의 제사를 받들 이가 없어서 한승렬의 차남인 한규설이 도로 한원식의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4] 의정대신의 다음 직위로 부총리에 해당.[5] 고종실록, 고종 42년 11월 17일[6] 고종실록, 고종 42년 12월 16일[7] 원문은 "아, 4천년의 강토와 5백년의 사직을 남에게 들어 바치고 2천만 생령(국민)들로 하여금 남의 노예되게 하였으니, 저 개돼지보다 못한 외무대신 박제순과 각 대신들이야 깊이 꾸짖을 것도 없다. 하지만 명색이 참정대신이란 자(한규설)는 정부의 수석임에도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면하여 이름거리나 장만하려 했더란 말이냐. 김청음(金淸陰)처럼 통곡하며 문서를 찢지도 못했고, 정동계(鄭桐溪)처럼 배를 가르지도 못해 그저 살아남고자 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제폐하(고종)를 뵈올 것이며 그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와 얼굴을 맞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