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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진군(황해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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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북한 황해남도에 위치한 군. 광복 당시에는 옹진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나[2] , 북한 치하에서 1954년 남동쪽 절반이 강령군으로 분리되어 반도의 서남단만을 관할하게 되었다.
2008년 북한 인구조사에서 옹진군과 강령군(구 옹진군+벽성군 3개면)의 인구를 합치면 26만 명에 달한다. 남북이 통일되면 옹진'시'로 승격될 가능성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놀랍게도 저 인구조사 결과는 북한군을 제외한 것으로 알려져있다.[3] 그러나 북한 치하 황해도는 도시화율이 손꼽힐 정도로 낮고, 통일 후 이촌향도 문제가 가속화될 수 있으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물. 하지만 옹진반도가 옹진군에 수복되는 것이라면 다를 수 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금광과 온천업으로 지역경제가 튼실한 동네였다. 북한의 2010년대에도 금광은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러나 북한 정부가 워낙 경제적 수완이 떨어지는 터라 이걸 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민간이 금광을 법에 규정되지 않은 방식으로 자생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2. 역사[편집]
통일신라에서 한산주에 소속시키고 고을 이름을 옹천(甕遷)이라 이름붙였다. 고려에서 현재 쓰이는 옹진으로 바꾸었다. 본래 이 지역에 독을 엎어 놓은 듯한 나루가 있다고 해서 고유어로 독나루라고 불리던 것이 한자로 훈차되면서 옹진, 즉 독 옹(甕), 나루 진(津)으로 된 것 이다.
옹진반도의 대부분은 38선 이남에 있어서, 광복 이후 6.25 전쟁 이전에는 대부분의 지역이 남한령이었다. 38선 분할로 인해 옹진군 교정면, 가천면 대부분[4] , 옹진읍 극히 일부 지역이 북한령이 된 대신, 38선 이남에 있던 벽성군 해남면, 동강면, 송림면(연평도 포함)[5] , 장연군 백령면(백령도, 대청도, 소청도)을 더하여, 옹진읍 온천리에 있었던 옹진군청에서 관할하였다. 또한 옹진군과 연백군을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그러나 바다로 남한 타 지역과 분리되어 있어 옹진반도는 사실상 섬이나 다름이 없게 되었다. 남한 본토와의 연락은 서울(당시 김포군) 김포비행장~옹진 간 부정기 공로(空路) 및 인천~옹진 부포 간 부포항로가 있었다. 참고로 1950년 3월 신문기사에서는 옹진군의 인구를 '18만 군민'으로 표현하였다.
사실상 섬과 같아졌던 이런 문제 때문에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는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38도선을 행정구역별로 재조정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하면 황해도는 소련군정에, 경기도는 미군정에 이양하자는 것이다.[6] 이것이 성사됐다면 개성시 송악산 이북 지역과 장단군, 연천군 전역은 남한으로, 그리고 서해 5도를 포함한 옹진은 북한으로 넘어가는 셈이이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만약 실현되었다면 개성 시가지를 방어하는 배후지는 차지할 수 있었겠지만, 서해 5도가 전쟁 중 인천의 방벽이 되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1949년 6월에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대규모 공격이 있기도 했었다. 결국 6.25 전쟁 당시 옹진반도 전투로 북한에 점령되었고 휴전 협정 이후 서해 5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완전히 북한 치하로 넘어갔으며 서해 5도는 옹진군 소속으로 남았고 군청 역시 인천으로 옮겼다. 당시 행정구역은 경기도였고 1995년에 인천광역시로 편입되었다. 옹진고등학교도 부천으로 옮겨 가서, 현재의 부천시 범박동에 있는 시온고등학교가 되었으며, 동남면 용호도의 수산학교도 인천으로 옮겨가 현재 인천해양과학고등학교가 되어 있다.
옹진군이 고향인 실향민들은 개전 초기 옹진지구 전투 당시 군과 함께 인천으로 피난한 경우가 적지 않다.[7] 그래서 인천광역시에는 옹진군 출신 및 그 후손들이 상당히 많이 거주한다. 또한 1.4 후퇴 당시 황해도나 평안도에서 바닷길로 피난한 사람들 역시 옹진군 도서지역에 집결하여 남쪽으로 내려갔다.
3. 경제[편집]
일제 치하부터 있던 금광이 있다. 누군가에겐 생존의 유일한 수단이라는 증언이 있을 정도다. 대단히 어려운 사람들만 금광 인부로 일하기 위해 온다고 한다. 인부들은 1달에 28일 일하고 30달러 번다. 놀라운 것은 북한의 채광 기술이 일제를 못 따라간다는 주장이 있다는 것이다. 국영경제는 이미 몰락한 지 오래기에, 알아서 개인이 국가가 나서지 않는 채광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