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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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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이자 제15대 영부인.
미국 유학을 다녀온 여성 민주운동가 출신으로서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시절 여성가족부의 전신인 여성부가 설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한국 여성의 인권과 권리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1세대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다녔다. 이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미국 램버스 대학교에서 사회학 학사학위, 미국 스칼렛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한, 당대 보기 드문 엘리트이다.
2019년 6월 10일 숙환으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에서는 장수한 기록이며, 2004년 7월 20일에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배우자 홍기가 사망한 지 15년 만에 사망한 대통령 배우자다.
2. 생애[편집]
"여자도 공부 많이해야 한다"는 모친의 뜻에 따라, 서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올라와 1936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이화여고의 전신) 입학하였다. 보통 학교 재학 당시 반장을 하는 등, 솔선수범의 아이콘이었다고 한다. 18살 때 모친이 사망하여,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 여성의 삶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어떤 것이 여성인 나를 위한 길인지 생각한 뒤에, 스스로 결심하게 되는 3가지가 있었다. 그것들은 바로 첫 번째는 '결혼하지 말자', 2번째는 '건강하자', 3번째는 '공부를 많이 하자'였다고 한다.[4]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42년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의 전신) 문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에 따라 이화여전을 졸업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이때 잠시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으로 일한다. 1946년 9월, 이번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시 입학해 영문학을 전공한다. 2학년 때 전공을 옮겨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에 교육학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서울대학교 재학 당시에는 그 당시 많은 청년들이 그랬듯이 광복군출신 이범석이 창단했던 조선민족청년단에 가담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으로는 엄청나게 높은 수준[5] 의 교육을 받은 축인데 1943년도에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 수가 5,504명, 그중에 여학생은 고작 1,255명이었다. 1944년도 자료에 따르면, 조선에 거주하는 여성들 약 1,260만명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은 약 3,600명 정도로, 상위 0.02%에 해당한다.
서울대 재학 시절 당시 여학생이기에 편협한 시선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이희호는 총학생회 사범대학 대표,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맡았다. 엄청나게 활발하고 여성 운동에 관심이 많았으며,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탈피하고자 노력했기에, 교내에서 '다스'[6]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기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할 때 "내가 히히호호하고 크게 웃어서 이름이 이'희호'에요"라고 재치 있게 소개했다고 한다.[7] 또한 사회참여운동에 관심이 많아 연극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대학교 1학년 때 <Foolish>라는 연극을 공연할 때는 이희호가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고, 연출도 다 했다고 한다. 항상 웃기는 역할까지 다 맡는 등 활달한 타입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한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였는데, 피난길에서도 이태영[8] , 김정례 등 1세대 여성운동가들과 적극적인 여성 운동을 펼쳤다. 1950년에는 대한여자청년단, 1952년에는 여성문제연구원 등을 창설하였다. 여성문제연구원은 훗날 여성문제연구회로 명칭을 바꿨고, 훗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2대 회장[9] 을 맡기도 한다.
대한여자청년단에서 활동하던 무렵, 미래 남편이자 인생의 동반자가 되는 김대중과의 운명이 시작된다. 1.4 후퇴로 피난민들을 배로 후송하기 위해 인천에 있던 해운회사 사장의 도움을 받는데, 바로 그 사장이 김대중이었다. 이후에 김대중이 부산으로 사업 거점을 옮기면서 대한여자청년단 간부들과 만나는 자리를 가지는데, 이때 처음으로 둘이 만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당시에 이희호는 옛 서울 지역 대학생 모임이었던 면학동지회(면우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는데, 이 모임에 김대중이 간헐적으로 참석하면서 교우하게 되었다. 그러나 곧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미국 유학하는 동안 미국 감리교 교회에서 지원을 받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하여 공장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램버스대에서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스카릿대 대학원에서 차별받는 흑인공동체 문제에 관한 현장연구로 석사 취득 후에 1958년 귀국한다.
이후에 이희호가 2살 연하의 김대중과 결혼할 때, 여성계 선배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초엘리트 여성운동가 이희호가 너무 아깝다며 통탄했다. YWCA 선배들이 눈물을 흘리며 왜 (이희호의) 소중한 인생을 (김대중의) 초라한 삶에 맡기냐고 물었다고 한다. 후일 이희호는 김대중과 결혼한 이유를 묻자, "잘생겼잖아요"라고 대답했다.
2018년 문재인 정부 시절, 일명 판문점 회담으로도 불리는 2018 남북정상회담이 마무리된 이후 이희호는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을 받길 바란다는 덕담을 전했다. 이에 대해 당시 문재인 전 대통령은 노벨상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넘기고 대한민국은 평화만 얻으면 된다는 대답을 했다.
결론적으로 이희호의 덕담은 실현되지 않았고,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일시적으로 화해 무드에 들어갔던 당시 남북관계도 이희호 사망 이후 2020년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냉각되었다. 남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남북 평화를 바랐던 이희호의 행보를 돌이켜 본다면 여러모로 안타까운 대목이다.
3. 사망[편집]
이희호는 유언으로 "하늘나라에서 국민들과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 합장됐다.지금까지 남편 김대중과 나를 사랑해준 국민 여러분들께 감사하다.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길 바란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 또한 동교동 사저는 대통령 사저 기념관으로 쓰고, 노벨평화상 기금은 대통령 추모 사업 기금으로 사용해달라.
2023년 기준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신 대통령 배우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고인이다. 6공 전직 대통령 배우자들 중 노태우의 아내 김옥숙, 김영삼의 아내 손명순, 노무현의 아내 권양숙, 이명박의 아내 김윤옥, 문재인의 아내 김정숙 모두 전원 생존 중이며,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대의 대통령 배우자이자 전두환의 아내 이순자 역시 생존 중이다.
4. 평가[편집]
4.1. 긍정[편집]
- 한 차례의 출마 불발, 세 차례의 낙선으로 살림이 망가진 데다 아이까지 2명이나 딸린 남자가 열렬한 웅변조로 구애하는 걸[17] 승낙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제적 어려움, 남편의 투옥, 자식들에게까지 미치는 시찰 및 탄압을 감내하며 일생 동안 동반자이자 좋은 도반[18] 같은 역할을 하는 덕을 쌓았다. 물론 이렇게만 언급한다면 애 딸려 있고 무직이고 변변찮은 남자에게 단순하게 헌신하기 위해 시집 간 엘리트 여성으로 보이겠지만, 이미 김대중은 1961년에 인제군에서 당선된 경력이 있었다. 즉, 전도유망한 정치신인이었으며 이후 지역구를 목포로 옮겨서 연달아 3번 당선되니 변변치 않다는 건 다소 과한 평가다. 또한, 김대중은 남녀차별이 심각하던 때조차 여성운동가들 사이에서도 꽤나 치우치지 않은 여성관을 갖고 있기로 유명했다. 분명 당시 엘리트 여성에게는 있기 힘든 결정이었음이 맞지만 단순하게 일반 사람들처럼 선상에 두고 볼 일은 아니다. 실제로 김대중이 청혼했을 당시 "그에게 정치는 꿈을 이루는 길이며 존재 이유였다면 나에게는 남녀평등의 조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 중의 하나였다.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보다는 서로가 공유한 꿈에 대한 신뢰가 그와 나를 동여맨 끈이 되었다"[19]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교통사고로 다리가 불편했던 김대중은 김영삼처럼 달리기 운동으로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따금 수영이나 조금 하는 수준으로, 옥고에 사고까지 겪으며 고초를 겪은 몸으로 85세까지 장수하였다. 옆에서 헌신적으로 음식 대접, 덕담이나 격려, 세세한 조언 등 세심한 배려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결과다.
-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 후 재기를 노리는 DJ가 정계 복귀를 결심했을 당시에는, 재택근무비서 장성민에게 "왜 애 아빠를 말리지 않느냐?"고 꾸짖었을 만큼 크게 반대하였지만, 남편이 울타리 밖에서 여권과 언론이 날선 비판으로 "거짓말쟁이" 틀을 씌우려 할 때는 "군인들이 헌법을 고칠 때는 그들을 찬양하던 사람들이 시대가 흘렀다고 얼굴을 바꾸며 비난을 하니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대외발언으로 옹호해 지지층 이탈을 줄이고자 노력, 자신이 단순 배우자가 아닌 정치적 동지이기도 하다는 것을 대외에 알리는 효과를 거두었다.
4.2. 부정[편집]
여러 친인척들이 구설에 올라 야권의 대정부 공세의 빌미가 되었다.
- 남동생 민주사랑회 회장 이상호는 알선수재 및 미성년자 원조교제 혐의로 법정구속되었다.
- 이어 이희호의 조카[20] 이형택은 수십조원을 관리하는 공공금융기관인 예금보험공사의 전무로 있으면서 기록한 공적자금 실적이 환수율이 15%에 불과해,[21][22] 방만한 관리[23] 를 했다는 의혹을 받게 되었고, 이용호 게이트 수사과정에서 산업은행에게 부실 건설사를 250억에 인수하도록 압박 + 국정원의 보물탐사 + 벤처기업 주가조작의 혐의로 구속돼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
- 이희호의 조카 이형작은 경기은행 퇴출 관련 수사가 이루어질 당시 해외도피 의혹을 받았고, 이희호의 처조카 사위 이윤복은 국민의 정부 시절 생긴 강원랜드 서울지사 사장으로 임명되는 특혜를 받았다.
- 강원랜드 메인시스템 입찰에서는 이희호의 친아들인 김홍걸의 후견인이자, 김대중 일가의 재산관리자으로 주목받은 조풍언이 대주주로 있는 대우정보시스템이 승리하였다. 조풍언은 김대중 정부 동안 26건의 군납을 따냈으며, 김홍걸의 미국 저택의 주인이기도 하였다.
5. 신앙[편집]
맨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종교는 개신교이며, 교파는 감리회이다. 애초에 집안 자체가 개신교 집안에 이희호 본인도 모태신앙으로써 어린 시절부터 신앙심을 키워왔고, 한 때는 주일예배와 수요예배는 물론 평일예배 전체에 참석한 적도 있을 만큼 매우 독실했다고 한다. 세례는 1937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웃해 있는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받았다. 애초에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던 것도 미국 북감리회의 추천과 지원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하고 여성 운동가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활동이 바빠져 그 정도까지 열성적으로 교회에 나가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교회 사업, 주일학교, 여름성경학교 등에 관심을 가지는 등 꾸준히 교회 관련 일을 해왔다. 이후 1962년에 김대중과 결혼하여 동교동으로 자리를 잡아 온 이후부터는 창천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고 사망 직전까지도 창천교회의 장로였다.[24] 다만, 고령으로 시무장로에서는 은퇴한 상태였다. 창천교회는 이희호와 꽤 인연이 깊어서, 1998년 서명회와 2008년 <동행> 자서전 출판 당시 책 사인회도 창천교회에서 진행했을 정도다. 창천교회는 이희호와의 인연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4주기까지는 추모 예배를 드렸다.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대중은 가톨릭 신자였고, 이희호가 낳은 김홍걸만은 어머니와 같이 창천교회에 출석하는 개신교 신자이다. 이복형들은 아버지처럼 가톨릭 신자들이다. 혼인성사 당시 관면을 본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은 이희호와 막내아들에게 각자의 신앙 생활에 충실할 것을 당부하였고, 이는 가정 내 그리스도교 일치와 이해의 좋은 예로 평가받는다.
이희호가 일본에서 연설했을 때는 기독교적인 표현이 60차례나 넘게 등장해 화제가 된 바 있으며, 장례식 역시 개신교식으로 엄수되었다.
6. 그 외[편집]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과도 생전 매우 가까웠다. 아무래도 민주당계 정부 초기 10년의 대통령 배우자인 데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사이가 매우 가까웠고, 비슷한 시기에 남편이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이희호는 이 인연으로 봉하마을 대통령 묘역에 김대중이 노무현의 사망 소식을 전해듣고 한 말인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심정이다'를 직접 친필로 적어 보냈다. 현재도 이희호의 친필은 국민박석 끝 부분에 다른 정치인들이 적어놓은 친필 박석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 때는 무안도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이후에도 봉하마을을 자주 찾았다. 권양숙도 동교동을 자주 방문했으며, 이희호 사망 몇 시간 전 병실을 찾아 마지막 인사를 나눴고, (노무현의) 아들 노건호와 함께 조문과 사회장에도 참석하였다.
-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의 새 당대표를 뽑는 선거에서 옛 동교동계 출신 박지원 후보를 적극 지지하였다. 2015년 8월 5일,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 지원 등을 목적으로, 4일짜리 일정으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 2016년 1월 4일, 안철수가 이희호를 방문해 약 20여 분 동안 비공개 면담을 했다. 이 면담을 취재하였던 중앙일보는 이희호가 안철수에게 "정권교체의 주축이 되어 보세요!"라는 말로 안철수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었다며 대서특필을 했으며, 안 의원 측도 이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희호 측[25] 에서 이 보도는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중앙일보측에 정정 보도를 강력히 요구하고 나서는 일이 일어났다. 이 기사를 본 김홍걸은 어머니 이희호에게 사실 관계를 물어보았고, 기사를 본 이희호는 "아이구 맙소사"라며 몹시 당황해 했다는 것이다. 논란이 일자 안철수는 그간의 입장을 뒤집고 "여사님에게 폐가 될 수 있으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라며 즉답을 피하기 시작했다. 이희호 측은 중앙일보에게도 정정 보도 요청을 끝내 거부할 경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해 진실을 밝혀내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결국 월간중앙이 안철수측으로부터 받았다는 녹취록을 공개하였는데, 비공개 면담에서 이희호는 대개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고, 안철수 의원이 "꼭 건강하셔서 내년 대통령 선거에서 꼭 정권을 교체하겠습니다."라고 한 말에 "그렇게 하세요!"라고 화답만 한 게 전부라는 것이 드러났다. 중앙일보와 안철수측이 이희호의 당연한 화답을 좀 과도하게 부풀렸던 것도 그렇고, "왜 비공개 면담을 하는 자리에서 허락도 받지 않고서 함부로 녹음을 하였으며, 왜 그걸 또 언론에 흘리기까지 했느냐?"는 질타가 안철수 의원과 국민의당 쪽에 쏟아지자, 안철수측은 "수행원 중 한 사람이 무심코 녹음을 한 것 같습니다."며 이희호 측에 공식 사죄하고 문제의 수행원을 해임하였다. 다만 녹취자와 유출자는 별개 인물로 보인다. 유출자는 결국 찾지 못한 듯 하다.
- 뜬금없이 닥터 드레와 재혼을 했다는 가짜 뉴스가 나돈 적도 있다.[26] JTBC의 정치부회의에서도 다룬 내용인데, 의외로 진짜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듯 하다. 이 가짜 뉴스를 퍼트린 70대 유포자는 벌금형에 처해졌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고령의 영부인인 이희호와 해외 유명 뮤지션 닥터 드레가 재혼한다는 상황부터가 어처구니가 없는데, 거기에 루머 유포자가 70대의 고령자였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일베를 포함한 전 커뮤니티 사이트를 뒤집어놓았다.
- 2019년 4월 20일에 의붓아들 김홍일 전 의원이 숨졌는데, 이희호도 그 전부터 지병이 악화되어 안 그래도 위험한 상황이라 이 소식을 전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28] 아무리 의붓아들이라지만 그래도 사이가 나쁜 건 아니었기에 아들의 사망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충격으로 지병이 악화될 수 있는 건 불보듯 뻔한데다, 이것이 아예 지병 악화로 인한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어서 알릴래야 알릴수가 없었던 셈이다. 사실 비슷한 사례는 꽤 많은데, 지병 악화로 건강이 위험한 상황일 경우 그 상황에서 가족 중 누군가가 먼저 사망하면 충격으로 인한 상태 악화로 급사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주변에서 그 상대한테는 끝까지 비밀로 하는 게 불문율이다.
- 기사(중앙일보 190609)에 따르면 병세가 위중해져서 그 '금귀월래'[29] 를 철저하게 지킨다는 박지원 전 의원이 8일(토요일) 밤에 급히 서울로 복귀했다고 한다.
- 기사(한국일보 190610)에 따르면 가족 측에서는 권노갑 전 의원(현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 장상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민주당 대표를 공동장례위원장으로 한 사회장을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 남동생 이상호가 원조교제를 저질러 체포되었으나, 당시 77세라는 고령이어서 풀려난 전력이 있다. 사실 지금도 대한민국 사회에선 범죄자가 고령일 경우 살인이나 내란 같은 스케일이 큰 범죄를 저지른 게 아니라면 집행유예로 처리하고 풀어주거나 혹은 실형을 선고하더라도 죄질에 비해 약한 처벌을 하는 등 좀 봐 주는 경향이 있다.
- 한국 역대 대통령 배우자 중 최장수 기록을 세운 인물로, 대단히 장수하여 96세까지 생존하였다. 1922년 생인 이희호는 장수로 유명한 지미 카터보다도 2살 연상이다. 덤으로 역대 최고령 대통령 배우자라는 기록도 있다. 박정희 정부 이후 최규하 전 대통령의 배우자인 홍기 다음으로 가장 나이가 많다.
- 사카린 밀수 사건을 추궁하러 국회에서 남편 김대중이 대정부 질문을 하던 1966년 9월 22일에 생전 처음 국회 방청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필 그날 김두한 의원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이 터졌다. 뭐라 말할 수 없는 끔찍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
- 사후 극우적 성향을 띈 네티즌들이 모욕적인 표현으로 상을 치르는 기간에 고인 부부를 비하하고 조롱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2018학년도 수능 만점자였던 서울대생이 "페미대장 잘 죽었다"를 비롯해 모욕을 퍼붓는 페이스북 게시물을 올려 빈축을 샀다.
- 대통령 부인 집무실 및 접견실로 사용되던 청와대 본관 내 무궁화실 벽면에 제15대 대통령 배우자로서 그녀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30]
7. 어록[편집]
노태우 부총재가 민주주의를 회복시키기 위해 좋은 결정을 내린 것을 환영합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그의 결정을 수용해야 합니다.
1987년 6.10 민주 항쟁 당시 외신과의 인터뷰.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이라는 자원을 사장시켜 놓고 그 사회가 발전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1999년 10월 국회 연설
모든 인간은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행복하게 살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외되고 고통받은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 말로 우리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1998년 여성 장애인의 날 기념식
남편이 평생 추구해 온 화해와 용서의 정신,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행동의 양심으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것이 남편의 유지입니다.
2009년 8월 23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 국민추모문화제에서.
저는 늦게 결혼했어도 참 좋은 분을 만나서, 제 인생은 값있고 뜻 있는 인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 2주기 인터뷰에서.
남북 정상이 만나서 대화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대화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남아도는 쌀도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을 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상회담을 해야만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1년 8월 동아일보 인터뷰.
다음 세대에 분단의 아픔을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국민 여러분도 뜻을 모으셔서 6.15가 선포한 화해와 협력, 사랑과 평화의 하나됨의 역사를 이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2015년 8월 방북 기자회견에서.
미투 운동 여성들, 용기를 가지고 목소리를 내라.
2018년 3월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