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중화민국 국가원수
덤프버전 :
1. 개요[편집]
헌정 이전 중화민국의 국가원수이다.
헌정 이전 중화민국에서는 혼란한 국내 정세로 인해 국가원수의 명칭이 통일되지 않았다.
2. 역사[편집]
2.1. 임시정부[편집]
중국어권에서 총통은 대통령의 번역어로 쓰였지만 이것이 실제 중국계 국가 국가원수의 관직명으로 쓰이게 된 것은 1912년에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된 이후였다. 이때의 관직명은 중화민국 임시대총통(臨時大總統). 저게 통째로 관직명이었다. 신해혁명의 주요 인물들이 모인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各省都督府代表聯合會)에서 투표를 통해 쑨원을 임시대총통으로 선출했다.
2.2. 북양정부[편집]
그러나 신해혁명은 큰 준비 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청나라가 제대로 대응하기 시작하자 각지에서 청군에 패배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쑨원은 북양군벌 위안스카이와 타협하여 임시대총통 직위를 넘겨준다. 그러나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할 생각이 없었던 위안스카이는 청나라를 멸망시키자마자 신해혁명 인사들을 탄압했다.
1912년 3월에 위안스카이는 일종의 약식 헌법인 중화민국 임시약법(臨時約法)을 개정해 정식 국가원수 직책인 중화민국 대총통(大總統)을 신설했다. 이 때는 중화민국의 양원제 국가 의회(중의원, 참의원)인 국회에서 투표를 통해 선출하는 직책이었다. 물론 위안스카이가 첫 대총통이 되었으나, 이후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 국회 해산 등 독재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황제병이 심해져 홍헌제제를 선포했고, 중국 전역의 반발로 인해 1년 만에 무산 되었고, 얼마 못 가 1916년에 병사하고 말았다.
이후에는 중화민국이 군벌들의 세력 각축장으로 전락해버려 대총통이 국가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는 어려웠다. 위안스카이 사후 초대 부총통 리위안훙이 권한대행을 했지만 그 권한대행조차 장훈복벽으로 대총통 노릇을 못 한 적도 있고... 1918년에 겨우 국회를 다시 소집해 쉬스창이 2대 대총통으로 선출되지만 그 이후로도 정치 혼란으로 대총통 자리는 공석이 되는 일이 많았고, 권한대행 체제이거나 행정부 역할인 국무원의 장 국무총리가 대총통 권한대행을 하기도 했다. 1923년에 선출된 차오쿤이 북경정변으로 축출된 이후 북양정부의 대총통제는 종말을 고했다. 북경정변이 일어난 1924년부터는 북양정부의 수반은 임시집정(臨時執政, 1926년까지), 육해군대원수(陸海軍大元帥, 1928년까지)라는 직함을 썼다.
2.3. 국민정부[편집]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은 국민혁명을 완수하고 형식상 중국을 재통일하여 국민정부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 국가원수의 직함은 국민정부 주석(國民政府主席)이었으며, 일종의 당대회인 중국 국민당 전국대표대회(中國國民黨全國代表大會)에서 투표로 선출되었다. 탄옌카이, 장제스, 린썬 등이 국민정부 주석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국민혁명 시기부터 국민당을 이끌었던 인물이 장제스인 만큼 국민정부 주석이 누가 되었든 그는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는 국민정부 시기 내내 장제스였다. 그리고 잠재적 반란군인 군벌들이 중국 각지에서 우글거리는 상황에서 장제스는 민주주의 이전에 강력한 국가정당, 즉 중국 국민당이 우선 국가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제대로 된 헌법도 없이 일당독재를 펼쳤다. 장제스가 내내 국민정부 주석에 있지 않았던 이유는 국민당 내 군벌/반대파와 타협하기 위해 국민정부 주석에서 물러났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2.4. 헌법 제정 이후[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만 총통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명단[편집]
3.1. 임시정부[편집]
이 시기의 직함은 임시대총통.
3.2. 북양정부[편집]
당시 중화민국 국가원수의 직함은 중화민국 대총통이다.[2] 펑위샹의 정변 이후 정식으로 대총통 직함을 쓴 사람은 없다. 차오쿤(曹錕) 밑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정식 대총통은 아니고 국가원수 대행인데 편의상 기록한 것. 그만큼 혼란한 시기였다는 의미도 있고
3.3. 호법정부[편집]
이 시기에는 국가원수 이름이 대원수, 수석총재, 비상대총통 등에서 왔다갔다 한다.
3.4. 국민정부[편집]
3.4.1. 광저우 국민정부 ~ 우한 국민정부[편집]
중산함 사건으로 왕징웨이가 퇴진한 이후로는 뚜렷한 국가원수를 내세우기도 힘든 상태이다. 광저우 국민정부 시기에는 중집위 상무위원장, 연석회의 주석 등이 난립하며 4.12 상하이 쿠데타 직전에는 아예 정부위원제가 운영된다.
3.4.2. 난징 국민정부[편집]
이 시기 중화민국은 국민당 일당독재 체제인 훈정(訓政)기간으로, 당시 중화민국 국가원수의 직함은 국민정부 주석이었다.
1925년 3월 20일 쑨원 사후,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 출범까지 후한민이 대원수 대리 자격으로 국가원수를 대행했으며 7월 1일부터는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주석을 맡았지만 1926년 중산함 사건으로 사퇴하고 외유를 떠났다. 이후에는 장제스가 상무위원회 주석, 군사위원회 주석,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자리를 겸임하며 실질적으로 1인자였으며 1927년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 수립 직후부터 1928년까지는 후한민이 정치회의 주석을 맡으면서 국가원수 직에 있었다.
3.5. 헌정 이후 [편집]
자세한 내용은 대만 총통/명단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호법정부와 국민정부 초기 (우한과 광저우 시기)의 인물은 서술되어 있지 않다.[2] 계임된 대총통은 대수를 따지지 않으며 공식적인 대총통 선거에서 당선된 위안스카이, 쉬스창, 차오쿤만 대수로 따진다.[A] 현재의 성급 행정구역 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