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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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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失傳)되어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
번외: 현대 역사서
한국사







1. 개요[편집]


한국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로 《삼국사기》에서 사료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정약용이 인용하고 이재난고에도 인용된 것을 볼때 조선후기까지 남았던 것으로 보인다.


2. 인용문[편집]



2.1. 삼국사기[편집]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혹은 시조(始祖) 동명(東明)이라 하고, 혹은 시조(始祖) 우태(優台)라고 한다.

삼국사기》잡지 '백제 시조에 대한 해동고기 기록'

삼국사기에 남은 단편적인 기록을 보면 해동고기는 백제의 시조가 부여의 동명왕이라는 설과 부여의 우태라는 설 두가지를 모두 제시하였다. 여기 나온 동명을 고구려의 주몽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고구려나 백제나 당대에는 주몽과 동명왕을 매우 엄격히 구분해 표기했기 때문에 틀린 서술이다. 이는 백제의 온조 시조설과는 별개로 부여의 후손임을 자처하며 내세운 전승 기록이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 계사(53년)에 즉위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일곱 살이어서 국모(國母)가 섭정하였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146년)에 이르러 왕위를 양보하여 친동생인 수성에게 물려주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태조대왕본기

태조대왕의 양위에 대하여 적은 부분의 주석에 적혀있는 내용이다. 김부식후한서에 적힌 기록과 해동고기에 적힌 기록이 서로 상충한다며 의문을 표하는데 일단 후한서가 틀렸다고 보고 본기에서는 해동고기의 기록에 의거해서 적었다. 삼국사기가 한국측 기록을 우선했다는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2.2. 여유당전서[편집]


《해동고기》에 이르기를, 오국성은 두 곳이 있다. 일설에는 강계(江界) 벌랑보(伐登堡)에 있는 강 건너편 정사각형 모양의 성이라고 하고, 일설에는 회령보(會寧甫) 을하보(乙下堡) 서쪽 ㆍ두만강(豆滿江)의 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고성(古城)의 윤지(輪址)가 그것이다.

《해동고기(海東古記)》에 이르기를, 영원군(寧遠郡) 검산(劍山)은 옛 환도(丸都)라고 하였다. 풍속에서도 검(劍)을 환도(丸都)라고 한다.

여유당전서》大東水經 其一


2.3. 이재난고[편집]


海東古記 記三國以上古事

해동고기에 이르기를, 삼국이 상고시대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재난고》14권 二十四日壬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