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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영국 총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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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28일에 치러진 영국의 총선
1970년 총선에서 이변의 승리를 거두며 집권에 성공한 에드워드 히스 총리와 보수당이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히스 총리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경제 정책의 중추인 아인 매클라우드 재무장관이 취임 30일만에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정권 초 주요 계획들이 어그러지면서 시작부터 힘이 빠진데다가 1973년 오일쇼크와 함께 찾아온 극심한 경제 불황이 히스 정권을 덮쳤다. 경제 불황으로 인해 당초 목표로 했던 긴축 조치와 민영화 정책을 일시 보류하게 되자 당내에서 당장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와 반대로 긴축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노조의 파업은 1972년부터 계속되고 있었고, 야당이 된 노동당의 공격도 날로 극심해져 히스 총리로서는 그야말로 조기 레임덕이 현실화됐다. 히스 총리는 노조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했지만 뾰족한 해법을 내지 못하면서 골머리를 싸매야했고 정국은 갈수록 혼란해졌다.
한편 다른 사정도 좋은 편은 아니라 북아일랜드에서는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졌고, 1973년에는 유럽 공동체(EC) 가입 문제로 보수당 내부가 다시 한번 분열되었다.
결국 히스 총리는 조기 레임덕을 극복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에게 의회 해산을 건의하며 승부수를 띄웠는데 이때 엘리자베스 2세는 커먼웰스 게임 참석을 위해 뉴질랜드에 가있었기 때문에 대신해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마거릿 공주가 국가 참사관 자격으로 대신해 해산 조서를 낭독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대공황 이후 가장 극심한 경제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총선이었기 때문에 더 선, 데일리 미러 등 언론사에서는 위기 총선(Crisis election)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선거 결과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297석을 차지하며 노동당에 밀리는 2위에 그쳤고, 해럴드 윌슨 전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역시 301석을 차지하며 1당을 차지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목표였던 과반 달성에는 실패했다.
총 득표율에서는 보수당이 소폭 앞서긴 했지만 소선거구제 제도 하에서는 어디까지나 지역구를 어느 당이 더 많이 차지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고,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정권을 노동당에 다시 내줬기 때문에 보통 보수당이 패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유당은 1964년 총선 이후 10년만에 두자릿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본래 예상보다는 저조한 14석을 차지했고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7석을 차지하면서 1974년을 기준으로 창당 후 최다 의석수를 획득했다. 웨일스의 플라이드 컴리도 2석을 획득하면서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했다. 여담으로 덕분에 보수-노동 양당 득표율 합계(75.1%)가 80% 미만으로 떨어졌는데 1929년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보수, 노동 양당 모두 과반의석 달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일단 차기 정부 구성을 위한 우선 협상권은 현재 정부를 이끌고 있던 히스 총리에게 돌아갔다. 히스 총리는 자유당에 연정 구성을 제안했지만, 제러미 소프 대표가 제안한 투표 비례성 강화를 위한 선거제 개혁안을 거부하면서 연정이 무산. 히스 총리는 결국 사임을 선택해야했다.
결국 해럴드 윌슨 전 총리가 자유당의 묵인 아래 소수내각을 이끌기로 하면서 다시 총리직으로 복귀, 결과적으로 노동당이 4년만에 정권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에서 소수내각이 출범하는건 1923년 이후 처음이다.
||1. 개요[편집]
1974년 2월 28일에 치러진 영국의 총선
2. 배경[편집]
1970년 총선에서 이변의 승리를 거두며 집권에 성공한 에드워드 히스 총리와 보수당이었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히스 총리의 가장 큰 지지자이자 경제 정책의 중추인 아인 매클라우드 재무장관이 취임 30일만에 심장마비로 죽으면서 정권 초 주요 계획들이 어그러지면서 시작부터 힘이 빠진데다가 1973년 오일쇼크와 함께 찾아온 극심한 경제 불황이 히스 정권을 덮쳤다. 경제 불황으로 인해 당초 목표로 했던 긴축 조치와 민영화 정책을 일시 보류하게 되자 당내에서 당장 반발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와 반대로 긴축과 민영화에 반대하는 노조의 파업은 1972년부터 계속되고 있었고, 야당이 된 노동당의 공격도 날로 극심해져 히스 총리로서는 그야말로 조기 레임덕이 현실화됐다. 히스 총리는 노조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을 주장했지만 뾰족한 해법을 내지 못하면서 골머리를 싸매야했고 정국은 갈수록 혼란해졌다.
한편 다른 사정도 좋은 편은 아니라 북아일랜드에서는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졌고, 1973년에는 유럽 공동체(EC) 가입 문제로 보수당 내부가 다시 한번 분열되었다.
결국 히스 총리는 조기 레임덕을 극복하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에게 의회 해산을 건의하며 승부수를 띄웠는데 이때 엘리자베스 2세는 커먼웰스 게임 참석을 위해 뉴질랜드에 가있었기 때문에 대신해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마거릿 공주가 국가 참사관 자격으로 대신해 해산 조서를 낭독하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영국 입장에서는 대공황 이후 가장 극심한 경제위기 속에서 펼쳐지는 총선이었기 때문에 더 선, 데일리 미러 등 언론사에서는 위기 총선(Crisis election)이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3. 여론조사[편집]
4. 결과[편집]
선거 결과 에드워드 히스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은 297석을 차지하며 노동당에 밀리는 2위에 그쳤고, 해럴드 윌슨 전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역시 301석을 차지하며 1당을 차지하는데는 성공했지만 목표였던 과반 달성에는 실패했다.
총 득표율에서는 보수당이 소폭 앞서긴 했지만 소선거구제 제도 하에서는 어디까지나 지역구를 어느 당이 더 많이 차지하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고, 후술하겠지만 실제로 정권을 노동당에 다시 내줬기 때문에 보통 보수당이 패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유당은 1964년 총선 이후 10년만에 두자릿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지만 본래 예상보다는 저조한 14석을 차지했고 스코틀랜드 국민당은 7석을 차지하면서 1974년을 기준으로 창당 후 최다 의석수를 획득했다. 웨일스의 플라이드 컴리도 2석을 획득하면서 처음으로 원내에 진출했다. 여담으로 덕분에 보수-노동 양당 득표율 합계(75.1%)가 80% 미만으로 떨어졌는데 1929년 이후 처음있는 일이다.
보수, 노동 양당 모두 과반의석 달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일단 차기 정부 구성을 위한 우선 협상권은 현재 정부를 이끌고 있던 히스 총리에게 돌아갔다. 히스 총리는 자유당에 연정 구성을 제안했지만, 제러미 소프 대표가 제안한 투표 비례성 강화를 위한 선거제 개혁안을 거부하면서 연정이 무산. 히스 총리는 결국 사임을 선택해야했다.
결국 해럴드 윌슨 전 총리가 자유당의 묵인 아래 소수내각을 이끌기로 하면서 다시 총리직으로 복귀, 결과적으로 노동당이 4년만에 정권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영국에서 소수내각이 출범하는건 1923년 이후 처음이다.
5. 관련문서[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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