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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민당(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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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1981년 창당되어 1988년까지 존재한 관제야당. 약칭은 '국민당'이며 상징은 문서 상단의 당기에 새겨진 거북이 등껍질 문양에서도 알 수 있듯이 노란 거북이였다.[1]
2. 상세[편집]
1980년 전두환과 신군부의 정치금지법으로 해산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소속 정치인들 중에서 정치활동금지를 피한 인사들이 1981년 1월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동 풍전빌딩에서 창당하였다. 초대 총재는 김종철[2] 이었다.
국민당 창당의 실무 책임자를 맡았던 김한선 전 의원은 훗날 김종철이 자신에게 창당 참여를 제안하러 와 "신군부 고위층 인사가 자신에게 제1·2여당, 제1·2야당, 반공당 등 5개 정당을 만드는 구상을 밝히며 나보고 제2여당을 책임지고 만들라고 했다. 참여 인사는 공화당·유정회 출신 인사들을 주축으로 하는 명단이 넘어올 것이다"라고 했다고 밝혔다.[3] 국민당 창당 작업에 신군부가 얼마나 깊이 관여되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기사
여당의 후신인 만큼 원내 제1야당을 목적으로 했으나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충청권과 영남권, 강원권 일부에서만 당선자를 내면서 총 25석으로 민주한국당에게 밀려 제2야당이 되었다. 1985년 이만섭이 2대 총재로 취임하였으나,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돌풍에 밀려 20석으로 당세가 위축되면서 제3야당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민한당 소속 당선자들이 거의 다 신민당에 입당하고, 민한당에는 3명의 의원만이 남으면서 다시 제2야당이 되었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여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자 현직 국회의원 8명과 대부분의 당직자, 지역조직이 신민주공화당으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와해되었고, 남은 국회의원 중 8명도 집단 탈당하여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에 입당하면서 이만섭 총재를 포함한 4명의 국회의원만 남는다. 결국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등록취소되었다.[4] 그래도 왕년의 경쟁자 민주한국당, 신한민주당보다 2배나 많은 65,032표를 얻었다. 6위 민중의당(65,650표)보다 근소하게 뒤진 게 함정. 5위는 한겨레민주당이었다.
중앙당사는 창당 초기부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정동 11-3 풍전빌딩에 터를 잡다가 9월에 정동길 33 구 신아일보 별관을 거쳤으나, 1985년부터 서소문길 11-50 신아빌딩으로 옮겼다.
마지막까지 한국국민당 총재 자리를 지켰던 이만섭은 이후 김영삼의 민주자유당과 국민신당을 거쳐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으로 소속을 옮겨 국회의장을 두 번 지냈다.
3. 역대 당직자[편집]
4. 총재[편집]
5. 원내총무[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본래 이만섭은 공화당에서 쓰던 황소를 쓰려고 했고, 안 되면 2안으로 단군의 어머니를 뜻하는 '곰'으로 상징을 정하려고 했다. # 그러다가 '곰'과 '거북이'의 2파전이 펼쳐졌고, 최종적으로 거북이로 선택된 모양. 거북이가 상징하는 것은 장수, 한계상황에서의 생명력,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 등이었다. # [2] 한화그룹 창업주인 현암 김종희 회장의 형이다. 즉,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큰아버지.[3] 이 구상은 지지기반이 겹친다는 이유로 폐기된 반공정당을 빼곤 모두 실현되었다. 제1야당은 민주한국당이고 제2야당은 고정훈의 민주사회당인데 모두 신군부가 만든 구색정당이었다.[4] 2014년 헌법재판소가 득표율 미만 정당 해산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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