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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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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금나라 말기의 장군. 금나라가 멸망하자 잔존 세력의 수장으로서 2년 간 항쟁하였다.
2. 생애[편집]
본명은 곽빈(郭斌)으로 한족이다. 1192년에 태어났다. 활을 잘 쏘아 형 곽록대와 함께 장군이 되어 회주가 함락되자 형과 함께 포로가 된다.
'하마'라는 말은 개구리라는 뜻으로, 아마도 개구리 같은 인상이라 그런 별명이 붙은 듯하다.
2.1. 1223년 회주 탈환 시도[편집]
곽하마가 거느린 기병(약 500명)은 모두 붉은 승려복을 입고 산을 덮으며 내려왔는데, 서하인들은 이걸 산령이라며 두려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곽하마의 활약으로 서하에 함락된 지 4년 만에 탈환에 성공한다!
2.2. 1234년 금나라의 멸망, 부흥운동의 시작[편집]
금 애종이 몽골군의 압박을 버티지 못하고 자살했고,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까지 몽골군에게 죽자 금나라는 완전히 멸망한다. 다만 곽하마가 다스리는 지역은 항복을 거부하며 이후 2년간 더 버티면서 항전하였다. 그리고 1236년, 서주에서 고립된 채주성에서 곽하마는 최후의 항전을 하였다. 하지만 몽골군의 공격으로 승산이 없자 마지막 항전으로 성 안의 자원들을 몽골군에게 하나도 넘겨주지 않으려 우마들을 죽여 병사들에게 먹이고, 금, 은, 동, 철을 무기 만드는데 쓰고, 창고와 건물들을 태웠다.
2.3. 사망[편집]
그리고 관청 근처에 공동자결을 할 장소를 만든다. 이때 '차라리 내 손에 내 가족이 죽는게 낫겠지.' 이런 생각으로 가족을 죽이려 했다. 이때 아내는 살려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끝내 아내를 참살하였다. 성 안에 들어온 몽골군과도 끝까지 싸웠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래도 끝까지 싸워보려 애를 썼으나 화살이 다 떨어지자 부하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창고에 강제로 집어넣어 모두 태워죽이고는 불에 스스로 뛰어들어 자살한다.
사후 이곳 고장사람들이 그를 추모하는 비석을 세웠다.
3. 평가[편집]
3.1. 긍정적 평가[편집]
그는 끝까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금나라의 부흥을 위해 싸운 인물이다. 얼핏보면 최후의 항전이 신라와 백제 간의 황산벌 전투와 너무 비슷하고, 곽하마 그 자체도 적군에게 죽는 것보단 나을것 같아 자신의 가족을 죽인 것, 자신의 나라를 다시 세우려고[1] 노력한 것. 이런 점이 매우 비슷하다.
거대한 제국이 망해도 비교적 소외된 지역은 당장 편입되지 않고 시간이 걸리게 마련인데, 곽하마가 다스리던 지역인 회주도 간쑤성의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이라 당장 급히 접수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2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족이면서도 여진족의 정복왕조인 금나라에 끝까지 충성하다 죽음을 맞이한 것 때문에, 여진족의 후손인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3.2. 부정적 평가[편집]
그가 끝까지 싸운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비판 여론도 있다. 애꿎은 가족과 금나라 백성들을 끌어모아 되지도 않을 것 같은 전투를 벌여 가족과 백성들까지 죽게 만들었다. 희생정신이 보이지만 금나라 백성들을 죽이면서 오히려 부흥의 가능성을 줄였다.
그리고 살려달라는 아내를 참수하여 잔혹하게 죽인 것도 현대에 와서는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명예살인이라고 비판받는다. 특히 아내만 죽인게 아니라 부하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창고에 가두어서 태워죽여 학살까지 저질렀기 때문에 좋게 평가받을 수가 없다. 다만 이때는 충이 곧 미덕인 시대였다는 점과, 살아남아서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히면 험한 꼴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는 걸 감안해야 된다. 물론 그렇다고 그가 저지른 살인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4. 기타[편집]
- 완안진화상과 같이 금나라 최후의 충신이지만 국내에선 인지도가 상당히 적다. 부흥운동에다가 황제도 아니어서 그런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