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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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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金正淑


출생
1917년 12월 24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오산동
(現 함경북도 회령시 오산덕동)
사망
1949년 9월 22일 (향년 31세)
평양특별시
최종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배우자
김일성
자녀
장남 김정일
차남 김만일
장녀 김경희
종교
무종교(무신론)

1. 개요
2. 생애
2.1. 사후의 우상화
3. 대중매체에서
4. 기타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파일:김정숙우표.jpg
우상화를 위한 선전 우표의 김정숙 초상화
북한의 초대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둘째 부인(본처는 한성희) 이자 제2대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생모. 광복 이전부터 일찍이 공산당 활동을 했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 '혁명의 위대한 어머니'라고 포장하며 숭배한다.

북한에서의 위상은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 최고지도자에 준하는 수준으로서 북한에는 그녀의 이름을 붙인 김정숙군이라는 지역이 존재할 정도이며 북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영원한 국모로 추앙받는다.

생가는 함경북도 회령시에 소재한 '회령고향집'. 김씨 최고지도자 3대와 함께 백두산절세위인 반열에 있다 보니 북한 정권 치하에서 중시되는 시설물 중 하나다.


2. 생애[편집]


1917년 12월 24일에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면 오산동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중국으로 건너갔다. 어릴 때부터 아동단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하였으며 1933년에 공산청년단에 가입하였다. 1935년 9월에 항일유격대에 가입한 뒤 1936년 이후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에 들어가서 김일성과 인연을 맺었다. 1937년 1월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하였다.[1]

북한 측 문헌들에 의하면 김정숙이 김일성을 처음 만난 것은 1935년 3월경이었으며 당시 이들의 만남은 업무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이 관계는 애정으로 발전하였으며 김정숙은 1940년 9월에 김일성과 결혼 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 10월에 김일성과 함께 소련으로 넘어갔다. 1941년 소련군 극동88정찰여단에 입대해 훈련을 받았다. 여성 첫 낙하산병이었다는 주장이 있다.탈북자들도 이 주장을 가능성 있게 본다. 1941년 2월 장남 김정일(金正日)을 출산하였다. 이후 차남 김만일을 낳았다. 하지만 1944년 태어난 김만일은 1947년에 김정일과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했는데 동생이 일찍 죽은 것을 지켜봤던 경험 때문인지 김정일은 유일한 친동생인 김경희에게 잘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북한으로 돌아와 1946년에 김경희를 낳았고, 1949년 9월 22일에 넷째 아이를 낳다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사인은 과다 출혈. 태아도 살아남지 못하고 죽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김일성이 비서로 들어왔던 김성애와 바람을 피우자, 이를 눈치챈 김정숙이 화를 내며 넷째 아이를 출산할 때 병실 문을 닫고 의사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난산으로 인해 의사 없이 아이를 낳던 김정숙과 태아는 사망했다.

이걸 북한에서 김정숙이 김일성이 국사의 대업을 보는 것을 자신 때문에 방해가 될까봐 갸륵한 마음으로 열어주지 않았다고 포장하는데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데 방해가 되는 김일성이 불륜했다는 사실을 공개할 리가 없기는 하다.

어쨌거나 김성애가 사망의 단초를 제공했기 때문에 김정일이 김성애와 그녀의 아들인 김평일을 그토록 싫어했다는 말이 있다. 어쨌든 김정숙이 사망한 후 "김정숙이 자신의 병을 숨기고 인민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죽었으니 미리 김정숙을 돌보지 못한 우리가 죄인이다"라는 식의 프로파간다를 내놓고 있는데 이후 김일성김정일이 사망했을 때 비슷한 레퍼토리를 내놓았다.


2.1. 사후의 우상화[편집]


한때 김성애는 김평일을 후계자로 내세우면서 김정숙을 매우 격하했는데 전국의 여성동맹에서 김정숙의 사진을 끌어내려 버리고 자신의 사진을 걸었다. 하지만 이는 격분한 김정일이 계모에게 복수의 칼날을 가는 계기가 되었다.

1972~74년에 걸친 투쟁 과정에서 김정일이 김평일을 밀어내고 김일성의 후계 입지를 다지면서 '백두여장군'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북한 전역에서 우상화 작업이 시행되었다.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집권한 뒤로는 김일성-김정숙-김정일을 '백두산 3대 장군'으로 칭했으며, 량강도 신파군이 김정숙군으로 개명되었다. 그리고 2000년부터는 대학교 전공과목으로만 가르치던 김정숙의 '혁명력사'를 전 학교로 확대했으며,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넷 모두를 '백두산절세위인'으로 칭하고 있다.

김일성-김정일 부자만큼은 아니어도 김정숙의 생일 역시 북한에서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명절이 되어 있는데, 생일12월 24일이어서 북한 주민들은 매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대신 이 사람의 생일을 기려야 하며, 학교에 간다든가 직장에 다닌다거나 할 경우에는 각종 행사에도 동원된다고 한다. 그리고 김정일은 어머니가 해산하다 죽은 경험 때문인지 나중에 평양산원을 지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김정숙이 '백발백중의 명사수'(#)라는 식으로 미화하여 선전하고 있으나, 마이클 리 전 CIA 요원에 따르면 실제로 김정숙은 전투에 참여하기는 커녕 빨래나 불 피우기 같은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고 한글도 읽지 못하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김일성은 김정숙의 생전에 아내를 공식 석상에 노출시키지 않았으며[2] 아내를 계속 심하게 구박해 왔다고 한다. 그리고 김정일이 이복동생들을 외국으로 추방한 것도 자신이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 참고자료(북한에서 선전하는 김정숙 전기)

심지어 키가 작고[3] 당대인들의 평가로도 별로였다는 김정숙의 용모도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수준이라고[4] 평가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 북한의 한 소설에서는 병원에 입원한 한 어린이가 병문안을 온 김정숙을 보고는 김정숙의 '무척 단아한' 용모가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아 그날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는 묘사가 나오는 등 마치 김정숙이 절세미녀인 것마냥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5][6] 더구나 과거에는 북한에서 김정숙에 대해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말하면 문자 그대로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다고 한다. 다만 북한에서 젊은 김일성의 얼굴을 수려하다고 찬양하고 김정은의 얼굴이 그런 김일성과 판박이라 간주된다는 것을 감안하면 북한이 김정숙을 절세미녀라고 주장하는 것은 (북한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은 아니다.

2017년 12월에는 김정숙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선전화보인 『조선』에다가 북한이 늘 그렇듯 김정숙을 찬양하는 기사를 썼다. #


3. 대중매체에서[편집]


1990년작 KBS1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배우 권기선이 연기했다.


4. 기타[편집]


김정숙의 러시아식 이름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증언이 엇갈린다. '와랴'[7], '가랴'[8], '니나'[9], '베라'[10] 등의 증언이 전해진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대단히 요리를 잘 했다고 하는데 김일성은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가 김정숙으로부터 국수와 만두를 대접받고 대단히 흡족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말리놉스키와 메레츠코프같은 거물들에게도 대접했다는 것은 김일성의 허세일지도 모르지만 김정숙이 요리를 잘했다는 것 만은 사실인 것 같은 것이 소련 장교들의 회고에서도 김정숙은 대단히 요리를 잘했다는 기록이 많다. 김일성의 목숨을 구해줬던 노비첸코도 김정숙이 병원에 입원한 자신에게 밥상을 한가득 차려서 온 적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동명이인으로 외교관료인 허담의 아내이자 김일성의 고종사촌동생인 김정숙(金貞淑, 1931~)[11]과 대한민국 제19대 영부인인 김정숙(金正淑, 1954~)도 있다. 이 때문인지 2020년 5월 2일, 일본 방송 BS TV도쿄 닛케이 플러스10은 김일성의 부인이랍시고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의 사진을 올려 물의를 빚었고, # 5월 5일 방송사 홈페이지에 정정 및 사과문이 게시되었다.

김정일은 2002년 2월 러시아 기자 올가 말리체바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인물을 묻는 질문에 어머니 김정숙이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자신이 어린 나이에 사망하여 기억이 그리 많지 않을텐데도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는지 아버지 김일성이 왜 계모인 김성애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머니라고 부르냐고 묻자 조국이 하나이듯 어머니도 하나라며 오직 김정숙만이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2015년 5월 11일 북한의 조선혁명박물관에 있는 김정숙의 금반지가 도둑 맞았다. 대한민국으로 치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국보급 문화재가 도난당한 셈. 김정은 정권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자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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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괄호 안의 연도는 북한의 주장에 근거한 연도이며, 실제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단체 및 사건이거나 실제와는 다른 연도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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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에서는 김정숙이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활동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애초에 조선인민혁명군은 실존하지도 않은 가공의 군대다.[2] 다만 적어도 김일성이 외부에 아내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은 과장된 증언으로 보이는데, 상단 각주에서도 알 수 있듯 북한측의 공식 사진에서도 김정숙이 김일성과 함께한 사진이 몇 장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아내를 대외적으로 노출시키는 것을 꺼렸을 가능성은 있다.[3] 실제로 김정일의 만 6세 때 찍은 가족사진(문서 최상단 사진의 원본이다)을 봐도 김정숙의 선키가 김일성의 앉은키와 머리 반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사족으로 북한에서 이 가족사진을 보정해서 전시한 적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원본 사진과 비교해볼 때 김정숙의 눈의 길이가 살짝 다르다. #[4] 참고로 바로 전 해에 리용호 당시 외무상이 '역대급'이란 말을 쓸 정도로 북한 고위층 내에서도 한류가 겉잡을 수 없이 퍼져 이들도 남한의 걸그룹, 연예인들을 어느 정도 접했을 2018년에, 그것도 조선로동당의 대외 선전매체조선의 오늘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다만 원문은 '용모에서나 덕망에서나 지성에서나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여인'으로, 김정숙의 용모뿐만 아니라 성품에 대해서도 평가하는 부분이다.[5] 이 때문인지 과거 북한에서는 김정숙과 비슷한 여성이 미인상이었다고 하며 이와 반대로 서구적인 미인상은 선호되지 않았다고 한다. #1, #2 다만 늦어도 1999년부터는 북한에서도 서구형 미인이 인기를 얻는 추세였다고 하며 # 특히 북한의 한류 열풍으로 인해 남한의 여배우들과 걸그룹들이 알려지며 오늘날의 북한에서는 남한의 미인들을 이상적인 미인상으로 생각할 가능성도 높다.[6] 김일성을 숭배하던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의 영부인 엘레나 차우셰스쿠도 본인을 우상화하면서 '가정적인' 외모를 가졌던 본인이 미녀라는 식으로 선전했는데 다만 이쪽은 김정숙과는 달리 본인이 앞장서서 우상화한 케이스다.[7] 레베셰프 소장의 부인 증언.[8] 김정숙이 머물렀던 뱌츠코에 마을 사람들의 증언.[9] 표도르 째르치즈스키(한국명 이휘성)의 연구.[10] 1997년 6월 29일 모스크바 중앙 TV방송 특집 다큐멘터리.[11] 김일성의 친척인지라 '김정숙'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