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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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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Korean Axe Murder incident


파일:attachment/c0019657_925519.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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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8.18 도끼 만행[1]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2]
판문점 사건[3]
영어
Korean Axe Murder incident

일시
1976년 8월 18일 오전 10시
장소
경기도 파주군 진서면 선적리 산99
공동경비구역
원인
유엔미루나무 벌목 시도
북한군의 벌목 반대
결과
미국폴 버니언 작전 발동
• 북한에 대한 보복
• 미루나무 벌목 성공
영향
조선인민군 초소 4개 파괴
공동경비구역 경비구역 강화[1]
인명
피해

사망
2명 (유엔군 2명[2])
부상
8명 (유엔군, 한국군 각 4명)
영향 국가
[[미국|

미국
display: none; display: 미국"
행정구
]]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1. 개요
2. 사건 경위
3. 사건 이후
3.1. 본격적인 준전시 태세
3.2. 폴 버니언 작전
3.3. 한국의 대응
3.4. 북한의 대응
4. 결과
5. 여담
6. 매체에서




1. 개요[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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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당시 사진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벌목 작업을 지도하던 미국인 유엔군 장교 2명이 조선인민군 병력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다.


2. 사건 경위[편집]




1976년 당시 공동경비구역 지도


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단어 그대로의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 측 3초소(CP 3)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 3개소(KPA 4, KPA 5, KPA 8)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OP 5)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이 문제는 미루나무가 3초소와 5초소 중간에 위치한 데다 무럭무럭 자라며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8월 3일 UN군[3] 경비대 작업반은 시야가 확보되지 않으면 3초소가 위험하니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이에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UN군 병사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이 다가와 이의를 제기하면서 돌아가라며 작업을 중단시키자 UN군은 일단 후퇴하였다. 이후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시야확보를 위한 가지치기만 하는 것으로 작업을 결정, 오전 10시 30분 한국인 노무자 5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 작업에 들어갔으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UN군 장교 2명 및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에 나섰다.

그러자 북한군 군관 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차 항의했으나 UN군은 베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했고, 이에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상층부에 연락을 한 뒤 답이 오자 가지치기 정도면 OK라고 수긍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지치기 작업은 순조로웠고 북한군은 오히려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하기도 할 정도로 화기애애했다.



조선인민군 박철 중위


그런데 10시 47분에서 50분 사이, 박철 중위[4] 등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났고 박철 중위는 보니파스 대위에게 갑자기 작업 중단을 요구했다. 보니파스 대위는 방금 전에 북한군이 허용해놓고 갑자기 또 중단하라는 박철 중위의 말을 무시하고 작업을 속행할 것을 지시하자 박철 중위는 북한군 1명을 북한 경비본부로 보냈다. 그렇게 11시 30분경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도착했다. 이 때 박철 중위가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재차 위협을 가했으나 보니파스 대위는 무시했다.

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신호를 보내자 북한군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었고, 박철 중위가 "죽여!"라고 소리를 지르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다.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졌고, 북한군 5명이 쓰러진 그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서 살해했다. 마크 배럿 중위는 구타를 당한 채 방치되었으며 발견 당시에는 살아 있었지만 이송 중 사망하였다. 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을 당했다.


파일:external/photos1.blogger.com/bonifasbarrett.jpg


(좌) 아서 조지 보니파스 Arthur George Bonifas 소령[5] (1943년 4월 22일생)
(우) 마크 톰 배럿 Mark Thomas Barret 대위[6] (1951년 6월 9일생)


보니파스 대위는 사건 당일 한국에서의 근무가 3일 남은 시점이었고, 후임 중대장 역시 JSA에 투입되어 인수인계 과정 중이었기에 가지치기 작업 감독 지휘 정도는 충분히 후임 중대장에게 인계할 수 있는 업무였다. 배럿 중위는 JSA에 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대외조사부 부부장[7]의 증언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당시 북한 주석김일성이 아닌 후계자 수업을 듣던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한다.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당시 UN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8]


2.1. 북한의 주장[편집]


북한은 이 끔찍한 사건의 경위를 두고 "미군 측이 나무를 자르는 것을 보고 (북한 측)경비병들이 제지하러 나섰는데, 갑자기 미군이 자신들에게 도끼를 던졌다"였다. 미군 장교를 살해한 경위는 "우리 하전사들이 날아오는 도끼를 손으로 잡아 미군들에게 다시 던졌다."라는 그야말로 무협지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정신줄 놓은 소리를 공식 발표했다.

심지어 이런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고서는 뻔뻔하게 미군 쪽에게 먼저 도발했다며 미국의 사죄를 요구했다. 타국의 군인을 살해한 것은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 행위임에도 사과는 전혀 없고 경비장교 회의 선에서 미국의 사과를 받는 식으로 덮으려고 했다.

이러한 북한의 말 같지도 않은 행위에 대하여 전 세계의 공산주의국가들[9], 심지어 소련의 위성국들이나 다름없던 동유럽사회주의 공화국들조차도 '북한 놈들이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다'며 어처구니없어했고, 설령 미군이 진짜로 도발을 했다고 쳐도 비무장 상태인 미군 장교를 도끼로 찍어 죽이는 미친놈들이 어딨냐고 조선로동당 측에 상황 설명을 제대로 하라며 마구 닦달을 해댔다.[10]

하지만 북한은 여기에 대해서 당시 북한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사회주의 국가 대표단의 방북을 일방적으로 취소하는 것으로 대답했고, 쿠바 공산당 대표단에서 방북 취소를 거부하고 입국을 시도하자 상륙도 불허하고 비행기째로 되돌려보내는 똥배짱을 보여서 사회주의권 내부에서 북한에 대한 어그로는 엄청나게 상승했다. 결국 아들이 저지른 문제로 아버지인 김일성이 직접 사건 후에 방문했던 동독 군사대표단장 하인츠 호프만에게 비록 미제와 남조선 괴뢰의 선제 도발이라는 전제를 여전히 고수했으나, 소란 떨어서 미안하다고 사과까지 해야 했다.[11] 이렇게 북한의 거대한 어그로 짓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날 뻔한 일촉즉발에 가까운 상황이 되었을 때도 소련과 중국도 북한을 지원하기를 꺼리거나 '니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버릴 준비로 가득했다.[12] 왜냐하면 북한이 UN군 관할지에 있는 미루나무 벌목을 핑계로 먼저 비무장 미국 군인을 공격해 살해한 일에 참전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린 이 사건이 우리 사회주의 우호국들을 우려하게 했던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국인들이 이 도발을 책동했으니만큼 이건 우리의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진정되었습니다. 포드는 재선되기 위해서 이 도발을 책동한 것입니다. 미국인들은 항상 도발을 책동합니다. 미국 대통령들은 모두 그랬습니다. 1968년에는 존슨이 푸에블로 사건을 책동했습니다. 닉슨은 EC-121 간첩기 사건을 책동했습니다. 이젠 포드가 1976년에 판문점에서 작은 나무 하나를 가지고 온 세상을 뒤흔들려 하는 것입니다.

— 1976년 10월 2일,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의 초청으로 방북한 동독 군사대표단장인 국방장관 하인츠 호프만에게 김일성이 한 발언



3. 사건 이후[편집]



3.1. 본격적인 준전시 태세[편집]


이 사건에서 살해당한 미군 장교는 미국의 장교이기 전에 UN군 소속의 장교들이었다. 이것의 의미는 단순히 미국과 북한의 문제를 넘어, 이 사건이 UN에 무력도발을 한 국제적인 대도발 사건이 되었다는 의미다. 정당한 이유가 있었더라도 문제가 되었을 사건이 말도 안되는 명분으로 말도 안되는 과정을 거쳐서 터졌으니 사건이 유하게 해결될 리 없었다.

당연히 이 사태의 최대 피해자인 미국은 매우 분노했다. 아니, 매우 분노하다 못해 9.11 테러 당시 미국 행정부처럼 북한을 지도상에서 지워버리리라 마음먹었다. 일반 병사가 죽어도 빡치는 상황인데 병사도 아니고 장교를[13]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명분 없이 참혹하게 살해했고 미국은 이를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UN군 사령관이자 미 육군 대장이었던 리처드 스틸웰 장군은 휴가차 일본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사건의 보고가 자신에게 올라오자마자 바로 전투기에 탑승하여 급히 한국으로 입국했다. 한국에 입국한 스틸웰 대장은 즉시 회의를 소집한 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데프콘 3[14]를 발동시키자는 합의를 내렸다.

한국에 주둔 중인 UN군과 미군뿐만 아니라 보고를 받은 미국 본국의 중앙정부도 좌시하지 않고 강경하게 대처하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이례적으로 1만 2천 명 가량의 미육군과 1800명의 미 해병대를 증파했고 미국의 최강 정예 해군이라 불리는 미 해군 7함대B-52 전략 폭격기 3대까지 추가 배치될 정도로 당시의 미국 정계는 좌우나 정당 및 파벌을 가리지 않고 '더 이상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미국의 위신이 깎여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이전까지 전쟁에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미군의 자존심이 바닥을 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대통령 경선을 준비하고 있던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은 가뜩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약하게 군다는 비판을 받고 있었기에, 이런 비판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포드 대통령은 즉각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미국 시간으로 8월 18일 오후 3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의 주재로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대리인 국방차관 윌리엄 클레멘츠, 해군참모총장미 해군 대장 제임스 핼러웨이 제독, 대통령 안보 부보좌관 윌리엄 하이랜드 등이 참여한 워싱턴 특별대책단 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서 키신저 장관은 현장 사진을 보고 극도로 분노했고, 사진에서 북한군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며 '북한군을 권총으로 쏴죽였어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CIA에서는 이 도발이 계획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고 이에 참석자들도 동의했다. 키신저는 북한이 미국인 2명을 때려죽인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소리쳤고, 회의장을 나오면서 '빨갱이들의 피를 반드시 보고야 말겠다'고 말하는 등 미국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걸 보여주었다.

8월 19일에 들어 미국은 군사정전위원회 개최를 요구했으나, 북한 측은 여전히 경비장교회의를 운운하며 미국의 사과를 받는 적반하장인 태도로 사건을 덮으려 했다. 결국 군사정전위원회와 경비장교회의가 동시에 열렸다. 이 자리에서 UN군은 김일성에게 보내는 UN군사령관의 메시지를 통해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에 당장 나오라는 강경한 최후 통보와 사과 및 배상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했는지 여전히 억지 주장을 계속하며 되려 사건 가담 주모자들을 처벌하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태도를 유지했다.

당연히 협상은 결렬되었고, 스틸웰 장군은 그 날 바로 워싱턴 국가안보회의에 데프콘 3를 발동하겠다고 보고했다. 마침내 국내에서 처음으로 데프콘 3가 발령되었다. 이로 인해 6.25 전쟁 이후 최초로 주한UN군대한민국 국군이 준전시 체제에 돌입했으며, 북한군도 이에 맞서 북풍 1호(준전시 체제)를 발동, 전군 완전 무장을 지시했다.


3.2. 폴 버니언 작전[편집]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으로 미&남 vs 북한 구도로 대치하는 가운데, 폴 버니언[15]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 세워졌다. 미군과 한국 제1공수여단 지원병력 감시 하에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는 작전이었다.

1976년 8월 21일, 마침내 미국 본토와 대한민국의 주변국에 주둔한 미군 기지에서 병력을 편성했는데, 단순히 벌목을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규모였다.






  •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해군 제7함대[16], 미드웨이급 항공모함순양함 5척이 서해안에 대기.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북한에 대한 전면적 공격보다는 만약 북한이 미루나무 벌목 중 총격을 가하면 휴전선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서해안 부분 정리, 개성 및 연백평야로의 진격, 옛 38선 이남 대한민국 영토의 수복 등을 고려한 증원 병력이었다. 공산권 측에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북한이 추가 도발 없이 침묵한다면 무력 시위로 끝낼 계획이었지만, 유사시에 북한이 추가 도발을 하면 바로 반격할 생각이었다. 일단 미군의 계획은 작전 시 교전 사태가 발생하면 포병 부대는 개성의 인민군 육군 막사에 포격을 개시, 개성 위쪽 시변까지 포격해서 인민군 육군 포병 전력을 싸그리 없앤다는 것이었으며, 북한 육군 전차 부대의 남하 시 전술핵 사용 같은 구체적인 전시 상황 계획까지 완벽하게 수립했다.

미 해군은 동아시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제7함대의 가용 전력을 총동원하고, 미 공군 역시 한국과 일본 주둔 병력 외에도 한반도를 작전 지역으로 삼고 있는 괌의 폭격기[17]를 동원했으며, 미 육군도 12,000명의 증파 요청을 감안하면 최소 사단 단위의 병력의 증파를 계획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도 당시 한반도에 동원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이 작전이 시행되기 전 군사분계선 부근에 데프콘 2[18]가 발령되었다.

육군 항공대AH-1 공격헬기 7대와 다목적 헬리콥터 20대의 직접 엄호 및 도끼와 권총으로 무장한 30여 명의 미군 공동경비부대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같은 판문점 주변의 주요 시설들을 안전하게 확보했고, 미 육군 공병 8명으로 이루어진 2개 팀이 전기톱으로 미루나무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 북한 측은 맞대응으로 판문점에 자동소총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200여 명의 병력을 배치했지만 미군에게 직접 대응할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이에 따라 보복은 하지 않기로 결정하여 작전은 그대로 종결되었다.


3.3. 한국의 대응[편집]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로 이루어진 64명의 결사대[19]를 조직한다. 1공수특전여단의 지역대장이었던 김종헌 소령이 이 결사대의 지휘관을 맡았다. 이 결사대가 해당 작전 지역에 투입되어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 육군 공병들을 엄호하고, 육군 제1보병사단 수색대는 그 일대에 매복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보복작전이 수행됐다.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 권총과 수류탄은 전투복 속에 숨기고, 크레모아, M79 유탄발사기 등은 삽, 곡괭이 등 작업도구 밑에 감추는 식으로 트럭에 탑승하여 공동경비구역에 들어가 도끼와 곡괭이자루를 가지고 북한군 초소 4개를 파괴하였다.[20] 대원들이 초소에 접근해 손에 도끼와 소총을 들고 활보하며[21]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자, 북한군은 모조리 도망쳤다. 간간히 나타난 북한군은 독이 오른 특전사 대원들이[22] 위협을 하며 욕을 퍼붓자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당시 매복 작전을 수행 중이던 1사단 수색대원은 훗날 인터뷰에서 이러다 정말 일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특전사의 공격에 대해 무력 대응을 할 경우엔 북한군들을 과감히 사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말라'는 명령이 내려져 있었다. 즉, 북한군을 구타하고 깽판을 놓다가 북한군이 발포하면 바로 응사해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군에게 선제공격을 당하는 대원들은 전사하게 될 것이므로 그야말로 죽음을 각오한 결사조로서의 투입인 것이다. 실제로 출동 직전에 유서와 손톱 등을 남겼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북한군이 처음부터 저항없이 무조건 도망가기만 해서 교전은 발생하지 않았다.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1공수 대원 증언에 따르면 유서 작성, 손톱과 머리카락을 잘라서 남겼고, 출동 전까지 외출 외박이 금지된 채 영내 대기를 하였다. 초소를 부술 때 북한군 초소 병력들은 도주를 했지만, 곧이어 소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분계선을 따라 도열하여 대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발포 등의 공격은 없었고 모든 초소를 파괴하는 걸 구경만 하였다. 특전사 대원의 증언에 따르면 무표정한 북한군 무장 군인들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초소를 파괴하는 동안 나머지 특전사 대원들도 소총으로 무장하고 북한군 출동 병력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23]

미국은 어디까지나 나무를 벌목하기만 하고 북한의 반응을 볼 계획이었기에, 실제 전쟁을 수행할 전력을 동원했어도 무력 시위에만 그쳤고, 그렇다 보니 한국 육군 특전사 대원들이 갑자기 북한 초소를 공격하는 급발진에 대경실색했다.[24] 미루나무를 자른 후에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군에 욕설을 퍼붓고 인민군의 초소로 달려나가자 엄청 당황했다고 한다.[25] 미군이 전쟁 발발을 우려해 결사대를 제지하자, 특전사 대원들은 북측 도로 차단기를 제거하기 위한 진격에 불응하는 미 육군 트럭 운전병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다.[26][27]


3.4. 북한의 대응[편집]


북한 입장에서는 이렇게까지 미국이 강하게 나설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미국은 자국민이 외국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것에 극도로 민감하게 반응하는 국가이며[28], 이들에 대한 처벌로 전쟁도 불사하는 국가이다.

애초에 미국 내부의 여론은 징집제도가 있던 시절에도 군인에게 매우 우호적이며, 특히나 미국인들에게 악명 높은 IRS의 눈 밖에 나거나 살인마, 마약사범처럼 여론을 등질 범죄자가 아닌 엘리트 중의 엘리트로 예우 받는 현역 장교를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죽였으니, 당연히 뒤집어질 것을 북한이 예측하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미국에 대해 제대로 파악도 못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국민 보호라는 매우 당연한 수칙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초강대국이라는 미국의 위상에 먹칠을 할 수 있다는 인식도 한몫한다.[29] 애초에 미국의 저런 태도가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다. 어찌어찌 넘어간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제외하면 1차대전 참전 원인 중 하나인 루시타니아호 침몰 사건, 2차대전 참전의 직접적 원인인 진주만 공습, 베트남전 발발 원인으로 삼았던 통킹만 사건, 판문점 사태 이후긴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쟁을 비롯한 테러와의 전쟁의 직간접적 원인이던 9.11 테러 등 미국의 전쟁 발생 중 다수는 자국민의 희생이었다.

그나마 미국 측이 나무를 자르는 동안, 심지어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초소에 침입해 불을 지르고 온갖 난장판을 만들고 있을 때도 대응은커녕 초소를 비우고 도망쳤다. 김정일 주도설을 제기했던 신경완의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도 미군을 두들겨 패라고만 했지 설마 미군 장교를 죽일 정도로 박철 중위가 막나갈 것을 예상하지 못한 상태[30]에서 미군 장교를 둘이나 살해했다는 보고가 상부에 올라가자 김정일을 포함한 수뇌부에서도 "어... 이게 아닌데" 수준으로 난리가 났다고 한다.

김정일은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감지해 초소에서 즉각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미군 장교가 북한군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초풍한 김일성이 노발대발하면서 이런 짓을 왜 했느냐고 크게 질책했다. 이에 김정일은 "미군의 의식적인 도발이다. 저들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도발했다."는 뻔뻔한 거짓 보고를 올렸다. 당 비서들은 차마 김정일이 시켰다는 말은 못 하고 인민무력부 놈들이 미쳐서 그랬다고 보고했다. 김일성은 극대노하여 인민무력부장 최현을 불러서 쌍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고[31], 김정일의 죄를 뒤집어 쓴 최현은 역시나 열 받아서 작전국장을 불러서 조지고 책벌했다고 한다.

상기된 대로 미국의 보복 작전이 준비되자, 김일성은 "사람이 죽었으니 유감을 표명하라. 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미국이 사과를 했지 않았는가?"라는 면피성 지시를 내렸다. 다만 북한은 이 사건을 좀 더 정치적으로 써먹고는 싶었는지, 몇 시간 뒤에 스리랑카에서 진행 중이었던 비동맹회의에서 "이 사건은 미국놈들 탓이다."라며 한미 연합군을 질타하는 결의안을 제안했고 이때 이 사실관계가 퍼지기 전이라 몰랐던 참여국가들의 찬성 하에 결국 승인되었다. 그러나 승인된 이후 사건의 주동자가 누군지 확실하게 밝혀지자마자 정세는 확실히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섰다.

상술했듯이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이 신문에 실리자마자 북한의 주장과는 달리 가해자는 북한,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것. 북한은 긴급하게 수석대표회의를 요청했고,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 성명을 표했다. 처음 미국은 "유감 성명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거부했다가 폴 버니언 작전이 끝난 시점이라 하루 지나서 결국 수락했다.[32] 그리고 북한은 미국이 쳐들어올까 봐 쫄아서 1년 동안이나 준전시 체제를 유지했고, 미군은 일단 폴 버니언 작전 병력들을 철수시켰지만 이후 남북한의 군사력 증강 대결이 일어났다.

미군이 동원한 전력인 고작 12,000명의 지상군 증파만으로는 북한 전역을 점령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북한의 주요 시설을 공중 폭격으로 손보고 휴전선이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갈 저력은 됐다. 이에 북한은 총동원령을 내려 대학생들을 군에 동원했으며 노농적위대, 교도대 등의 예비군들도 모조리 동원했다.

심지어 김평일은 이 사건 직후 김일성 종합대학 학생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전 학생들의 군 입대를 독려했고, 그 자신이 제일 먼저 그 자리에서 인민군 육군에 입대함으로써 군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제대한 장교들도 60세 미만은 전부 다 군으로 복귀했고, 생산 시설들을 후방에 옮길 준비가 착수되었다. 또한 평양황해도, 강원도의 최전방지대 주민들의 소개 작업이 시작되었는데, 노약자와 성분 불량 계층을 함경도로 이주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평양을 비롯한 해당 지역은 완전히 난리통이었다고 한다.[33] 8~11월까지 석 달 동안은 모든 군인들이 군장을 싸놓고 잠을 잤다고 하며, 노동자들도 직장에서 나와 전투 위치로 배치되었고 대학생들도 건장한 사람들은 죄다 인민군에 끌려가서 사실상 휴학 상태에 들어갔다. 너무도 급한 소개 작업 때문에 식량 문제가 심각했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이한영의 저서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에 따르면 76년 만행 사건 발생 당시 미국의 강경대응으로 김부자의 일가들이 대거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 누이 김경희 부부, 이복동생 김영일­ 김경진 등 이른바 "로열 패밀리"의 여자와 자식들이 막대한 돈을 싸들고 모스크바로 가 두달 가량 고급호텔에 묵으면서 지냈다고.

4. 결과[편집]


북한이 혼자 무슨 난리를 치든 미국은 나무가 벌목되는 동안 북한이 총알 한 발이라도 도발을 가하면 대대적인 반격을 가할 생각이었기에[34] 사고 친 북한이 현명하게도(?) 침묵하자 결국 미루나무를 자르는 선에서 작전을 종결짓고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판문점 경비초소에는 사건 이전과 같은 애매한 경계 대신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확실한 경계가 세워졌다. 경계 밖에 있던 양측 초소는 모두 철거되고 현재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벌목된 미루나무의 일부는 JSA 안보견학관에 전시하여 방문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으며, 미루나무는 완전히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미루나무 둥치 둘레만큼의 둥근 시멘트 위에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판문점 관람 코스에 버스를 타고 추모비 앞을 지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으며 버스 안에서 이 추모비를 볼 수 있다.

김일성은 미군의 대응 작전이 종료되었음에도 미국의 폭격을 진지하게 두려워하고 있었고 그래서 1년 뒤인 1977년까지도 준전시태세를 유지했다. 당연히 북한의 경제는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큰 타격을 입었고 병사들에게 지급할 식량도 부족해질 정도였다. 이후 80년대의 경제 정책 실패로 이어졌고 북한 경제는 급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이후로 당시만 해도 양측 군인들 간에 개인적인 안부를 물을 정도였던 판문점은 지금처럼 완전히 갈라진 경색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김일성종합대학의 질이 본격적으로 추락하던 시점이기도 했다. 황장엽의 증언에 의하면 1970년대만 해도 김일성대학 교수진의 절반은 남한에서 월북한 이들이었고 이들의 학문적 역량도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일이 전쟁 위기를 빌미로 남한 출신 교수진들을 내쫒아냈고 이 때를 기점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의 학문적 수준이 악화되었던 것.


5. 여담[편집]



  • 당시 북한군이 판문점에 들어가려면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로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통행이 불가능해진[35] 북한군은 사건 발생 1주일 동안 북한 측 판문각 뒤로 우회하는 도로와 다리를 개설해야 했다고 한다.

  • 외국인들에게는 관광 명소가 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담당하는 미 육군 부대 주둔지 이름은 원래 '캠프 키티호크'였으나, 이 사건 중에 살해 당한 아서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을 따서 '캠프 보니파스'로 이름이 바뀌었다.

  • 사건의 원흉인 박철 중위는[36] 처벌은 커녕 사건 이후에도 판문점에서 행패를 부렸다.[37] 다만 8년 후 판문점에서 소련 관광객이 남측으로 귀순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비병력 간의 총격전 뒤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공식적인 증거는 없으나 당시 미군에게 사살된 북한군 중에 박철 중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는데, 2018년 7월 8일자 이제 만나러 갑니다 방영분에서 사건 당시 근무 중이던 하사의 증언을 통해 박철 대위의 사살이 진실임이 확인되었다.

  • 북한은 이후로 방송이나 성명서를 통해 미 제국주의자를 맹비난하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미군을 향해 직접적인 무력도발을 하는 경우는 전혀 없게 되었다. 미국을 건드렸다가 진짜로 지도에서 나라가 지워질 뻔했던 경험은 북한이 자기 주제를 깨닫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흘러 미국 본토가 진짜로 공격당한 9.11 테러 때는 환영 성명이나 미국을 향한 비난 성명이 아니라 국제 테러리즘을 맹비난하면서 자기들이 주체가 아님을 보여주며 눈치를 살폈고,[38]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때도 테러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무고함을 드러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과 전쟁했을때도 북한은 전쟁 특수를 노리지만 하마스가 북한이 합동해서 미국을 공격한다는 기대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맹국까지 선을 긋는 편이다.

이렇듯 북한도 대외적으로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대내적으로는 전혀 정신을 차리지 않았다. 북한 내부에서는 이 사건이 단순히 '판문점사건'이라고 축소되어 알려진 것은 물론 인민군의 영웅적 행위로 칭송되며 관련자들이 영웅 대접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사과하기는 커녕 오히려 2015년 4월 27일 정론 <태양은 조선에 있다>에서 대놓고 북한이 미국 본토에서 '정의의 핵대전'을 벌여 워싱턴 D.C를 함락하고 지구에서 미국을 없애버리겠다는 정신나간 소리를 하기도 했다.[39] #

사건 40주기인 2016년 8월 18일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이 사건을 '남조선을 영구 강점하고 침략전쟁의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미제가 계획적으로 일으킨 사건'이라고 우겼고, "판문점 사건은 역사에 심각한 교훈을 남겼다. 그것은 침략자, 도발자들에게는 오직 수치와 죽음만이 차례진다는 것"[40]이라고 말하며 자기들이 미국에 완승했다는 황당한 역사 왜곡을 하고 있으며, "도끼를 들고 덤벼들면 도끼에 맞아 죽고 핵몽둥이를 휘두르면 미 본토가 핵참화 속에 잿가루가 되고 만다는 것,[41] 이것이 판문점 사건과 이후 40년 역사가 보여준 교훈"이라고 현실인식을 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그럼 미군이 판문점에서 나무를 찍은 것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격화시켜 새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거란다.(...) 2023년 현재에도 각종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다.

  • 존 에버라드의 '영국 외교관: 평양에서 보낸 900일'을 보면 북한에서 이 사건에 사용한 도끼를 박물관에 전시 중이라고 한다.

  •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사건 현장의 사진이 남았다는 것은 미국 측에서 자신들을 계획적으로 도발, 음모를 꾸미기 위해 미리 기자들을 대기시킨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며 물의를 빚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야후 코리아가 있던 시절 모 재미교포 블로거가 그런 시리즈물까지 올려가며 허황된 소리를 했던 사건이 있었다.

  • 희생자인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이 하필 나무를 베고 이교도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유명한 잉글랜드 성인 보니파시오에서 따온 거라 아이러니하다는 얘기도 있다.


6. 매체에서[편집]


  •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다룬 두 편의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판문점 미루나무 작전>이라는 영화이다. 두 편 다 이낙훈태현실이 주연을 맡았다.

  • 원래는 드라마 제4공화국 21~22편으로 방영될 예정이었으나 오일쇼크를 다룬 '각하 큰일났습니다' 편으로 변경되면서 취소되었다.

  • 북한에서는 1989년 영화 <내가 설 자리>를 만들었는데, 홍길동으로 유명한 미남배우 리영호가 주인공 홍철 역을 맡았다. 8.18 도끼 만행 사건에 분격하여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던 중 해군에 탄원해서 입대한다는 내용이다.

  • 한 외국인이 이 사건을 컨트리볼로 각색한 유튜브 애니메이션 영상을 제작했다. [42] #



[1] 이전에는 5cm의 콘크리트 선이 없었지만, 사건 이후 약 5cm의 콘크리트 선을 설치하여 남한과 북한의 경계선을 확실히 구분하였다.[2] 보니파스 대위, 배럿 중위(유엔군 장교)[3] 한미연합군사령부는 2년 뒤인 1978년에 창설되어 유엔군사령관(주한미군사령관과 겸임)이 한미연합사령관을 겸임하게 된다.[4] 본명은 홍성문으로 평소 군화에 쇠징을 박고 다닐 정도로 괴짜였고, 행실이 워낙 개차반이라서 한국군에서는 미친개, 미군에서는 BULLDOG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년 전 헨더슨 소령 사건을 주도한 전력도 있었다.[5] 추서 계급[6] 추서 계급[7] 1922~1998. 10.26 이후, 동향인인 대만 대사 옥만호를 포섭하기 위해 대만으로 파견되었다가 대만 현지 당국에 체포, 남한으로 송환된 후 전향하였으며 북한 정부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용규, 신경완, 신평길 등의 가명과 필명을 썼다. 워낙 베일에 싸여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안기부가 만들어낸 가짜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으나 엄연한 실존 인물이고 1970년에 체포된 공작원 김진계와의 대질 심문을 통해서 재확인되기도 했다. 다만 정체를 워낙 드러내길 꺼려서 돌아다니는 직함도 정무원 부부장, 선전선동부 부부장 등 중구난방이지만 대남 공작부서였던 대외조사부 부부장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까지 올라갔었다고 한다.[8] 실제로 현장에 한국인 노무자 5명이 있었지만 단 한 명도 부상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크다.[9] 인도차이나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지친 상태이며 미국의 역린을 건드려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특히 베트남은 북한이 한반도를 적화통일해야 되니깐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지 말아야 한다고 자빠졌으니 곱게 볼 리가 없었다.[10] 당시 소련의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과의 데탕트 체제를 통해 세계평화를 이루고자 했고 이를 통해 냉전의 종식을 이끌어 서방세계의 대소련 봉쇄가 해체되길 원하고 있었다. 중국 역시 미국과의 데탕트를 통해 중국의 가장 큰 안보위협이었던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북한의 도발은 소련과 중국이 그리던 외교적 큰 그림에 단단히 먹칠을 한 짓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11] 당시 동독이 유독 이 사건에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이는 서독과 관계개선을 진행 중인 와중에 북한이 일을 저질러서 초를 쳤기 때문이었다.[12] 당시 소련은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을 지원하느라 바빴고 중국은 대약진-문화대혁명이라는 연타석 자폭 정책 행진으로 인해 국부인 마오쩌둥이 내려오고 새로운 권력투쟁이 이뤄지는 등, 자국 내부 상황이 나빴다. 때문에 가뜩이나 바빠 죽겠는데 북한이 멋대로 미국은 물론 한국 그리고 동구권 국가들도 지지해주지도 않는 대형사고를 터뜨렸으니 북한을 감쌌다가는 더 큰일로 번질 게 뻔했던지라 북한의 병크에 대해 민감했다.[13] 물론 윤리적으로 생각하면 목숨의 경중이 있는 건 아니지만 윤리가 먹히지 않는 전쟁에서 병사와 장교의 손실의 값어치는 다르다. 공군 전투기 조종사 장교를 하나 키우는데 얼마가 드는지 생각해 보면 쉽고 대한민국에서도 육사든 ROTC든 일단 수천만 원은 깔고 시작할 정도로 고급 인력들인데 국방비가 상당한 미국에서도 이는 똑같다. 또한 경험이 많은 사단장급 장군의 손실은 더욱 더.[14] 훈련(연습) 용어로는 '라운드 하우스'라고 불리며, 영내에 있는 모든 물자를 방치품/적재품/파기품으로 분류하고 "당장이라도 막사 뺄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 을 말한다.[15] 북미의 벌목꾼들 사이에 전해지는 설화에 등장하는 거인 나무꾼이다.[16] 당시 제7함대는 세계 7위의 해군력으로 불리는 요즈음이나 제2차 세계 대전, 특히 태평양 전쟁기의 제7함대(당시는 제7함대라는 이름 대신 태평양 함대로 불렸고 그 산하에 제7함대가 번호함대로 편성되는 형태였다.)와 달리 미국에서 약체라고 불렸다. 그럼에도 이 당시나 지금이나 7함대를 총동원하면 어지간한 국가 하나는 단독으로 갈아버릴 수 있을 수준이다.[17] 전술 폭격기 F-111 및 전략 폭격기 B-52.[18] 기지방호 용어로는 'Fast Pace(천막을 도는 속도를 높임)'라 불린다. 부대 편제 인원이 100% 충원되며 실탄이 지급된다. 데프콘 2가 발령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다.[19] 5개 팀, 1개 지역대 규모이다.[20] M16 소총은 샌드백에 넣어 가져갔는데, 미군이 물어보면 방호벽으로 둘러댔다.[21] 당시 특전사 지휘관의 인터뷰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북한군이 30m만 접근해도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30m를 100m로 고쳤다고 한다.[22] 초소를 난장판으로 만들 때, 초소 안의 김일성 초상화를 깨부수고 커튼 등을 약탈했으며, 북쪽을 향해 오줌발까지 갈겼다고 한다.[23] 1공수 백모씨의 증언이다. 1987년 청취되었다.[24] 당시 미국은 베트남 전쟁 패전이라는 엄청난 후폭풍으로 반전여론이 가득한 상황이었으며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은 워터게이트로 사임한 닉슨을 급히 승계한 부통령 출신이라 정통성이 없어서 미 의회로부터 항상 견제를 당하던 신세였다. 즉, 단순 무력시위가 또 다른 전쟁으로 확전되는 것은 미국 입장에서 정치적인 부담이 매우 큰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한국의 보복행동을 결코 좋게 볼 수 없던 상황이었던 것. 거기에다가 당시 헨리 키신저와 미국 외교 정책결정권자들은 중국과의 우호관계를 통해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는데 만약 북한과 미국의 직접 무력충돌이 빚어지게 된다면 북한의 후견국인 중국은 당연히 위협을 느껴 소련과 냉랭했던 관계를 다시 청산하고자 할 것이고 대소련 봉쇄망 구축을 최우선순위로 삼았던 미국 입장에선 엄청난 손해이다.[25] 한편 이 사건 전까지 박정희 정권과 미국의 사이가 소원해져 주한미군 축소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국지전을 발발시켜 주한미군을 붙들어놓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결사대 작전을 지시했다는 분석도 있다. 더불어 베트남 전쟁 이후 전반적인 반전 움직임과 더불어 미국이 묵인했던 독재 세력들을 차근차근 정리해나가는 시기이도 했기에, 이는 박정희에게는 충분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져 무리수를 두었다는 평도 존재한다.[26] 이 일로 김종헌 소령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나 흐지부지되며 무죄 판결을 받았다.[27] 애초에 특전사는 부사관 위주의 작전편제이므로 일반 병사로 분류되는 특전병, 그것도 행정업무 담당의 특전병이 결사대에 투입될 리는 없다.[28] 우방국이라도 외국인에 의해 숨진 게 아닌 우발적인 사태로 인해 숨질 경우 미국이 우방국에게 경고하거나 사건에 개입했을 정도.[29] 러시아도 역시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지 않는 이유는 초강대국 위신이라기보다는 완충지대인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편입되면 수도 모스크바가 미사일 사격권 안에 들어가게 되고 우크라이나라도 먹지 못한다면 푸틴이 노리는 강한 러시아는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30]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본때를 보여주되 총기는 일체 사용하지 말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김정일은 사살이 아닌 단순히 미군을 도발, 어느 정도 구타한 뒤 어떻게든 미국의 사과를 받아내 자신의 권력 장악과 체제 선전에 이용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일어났던 헨더슨 소령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푸에블로호 사건처럼 미국이 국제 정세상 힘들 때 대충 북한을 인정해 주면서 타협하려고 하는 등의 모습도 보였으므로, 김정일도 이 기회에 후계자를 확고히 하고 당 내부에서는 지지도를 얻으며 크게는 체제 선전을 통해 정치 권력을 확고히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총기를 쓰지 말라니까 도끼로 저런 미친 짓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며 실제로 김정일도 보고를 듣고 뒷목을 잡았고, 끝내 김일성의 귀에까지 들어가 김정일은 아버지에게 불려가 엄청나게 깨졌다.[31] 상기한 대로 박병엽의 증언. 하지만 당시 인민무력부장은 3개월 전에 오진우로 교체된 후였다. 김일성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물러나 있던 최현을 불러내서 조진 것인데 직함에서 혼동한 것인지, 아니면 오진우를 불러내서 조진 것인데 최현으로 잘못 말한 것인지는 불명.[32] 이는 아직까지 소련이 건재한 상황에서 정말로 끝까지 나간다면 3차 세계대전이 터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은 북한을 내다버린 자식 취급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보기에는 엄연히 공산국가를 자처하는 이상 소련은 공산국가의 수장으로서 북한을 지원할 것이 뻔했고, 미국은 베트남전의 패배로 인해 아직까지 반전 여론이 강한 상황이었다. 만일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유감 성명을 받아들였던 제럴드 포드와 다르게 닉슨 독트린을 깨버린 채 푸에블로호 복수를 천명하였을 테고, 북한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33] 소개 작업은 김정일의 지시로 국가정치보위부가 주도했으며, 평양에 주민소개 지도위원회가 설치되어 장성택이 모든 작업을 실질적으로 지휘했다고 한다. 8월 말부터 11월 중순에 걸쳐서 20만 명의 주민들이 이주되었고 황해도, 강원도에서 8천 세대의 성분 불량자와 노약자들이 '솎아졌다.' 작업은 은밀하고도 강압적이기 그지없었는데, 보위부원들이 소개장을 전달하며 정해진 시간까지 짐을 싸라고 지시한 후, 옆집도 모르게 온 식구를 실어 날라버렸다고...[34] 계획에 의하면 연백평야를 점령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북한 전체가 타겟이 아닌 것은 당연히 소련과 중국 때문.[35] 양측 모두 군사분계선 통과가 불가능해지면서 다리를 건너려면 필연적으로 남측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 루트가 막힌 것.[36] 실제 이름은 홍성문. 후에 공화국 영웅 칭호까지 받았다.[37] 물론 전술했듯이 상관한테 쌍욕은 무진장 먹었을것이다.[38] 9.11 테러가 일어나기 전 김정일은 비동맹회의 의미가 없어지자 미국과 일본 등 자유진영 상대로 저팔계 외교를 시행하였고, 적들에게 바지를 벗어주는 행동을 일체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는 현명한 행동이었는데, 전 세계가 벌벌 떨 동안에 세상물정 모르고 미국보고 천벌을 받았다고 깝죽거리던 이라크사담 후세인은 즉각 테러의 배후로 몰려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와 집안 가족들은 풍비박산나고 본인은 교수대 위에서 비참히 죽어야 했다. 즉 북한이 여기서 어그로를 끌었다면 즉각 테러 지원국, 또는 평화의 적으로 몰려 진작에 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것.[39] 물론 진짜로 북한이 미국 본토에 핵을 쏜다면 미국 전역에는 진주만 공습9.11 테러를 합친 것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분노가 들끓고 이에 미군이 북한에 몰락 작전 실사판을 벌여 북한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김정은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인민군 역시 워싱턴을 함락하기는 커녕 미국 땅에 상륙하기도 전에 미 해군에 궤멸당할 것이다. 미군 vs 북한군 문서만 봐도 얼마나 정신나간 발언인지 짐작할 수 있다.[40] 그 '도발자'가 북한이라면 엄연한 사실이긴 하다.[41] 북한은 한미연합훈련이 열리면 이를 '북침핵전쟁 도발'이라고 박박 우기고 있는데, 자기들 생각에는 미국이 먼저 '북침핵전쟁'을 일으키면 자신들이 '정당방위' 격으로 미국 본토에 핵을 날릴 거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은 북한을 향해 미사일을 날린 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북한이 한미훈련을 빌미로 미사일을 쏘며 한미를 도발하면 도발했지.[42] 다만 전체적인 전개만 따왔을 뿐 과장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마지막에 나무를 무슨 전술핵(...)으로 제거한 것마냥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