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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멘터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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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 제9대 부통령
리처드 멘터 존슨
Richard Mentor Johnson


출생
1780년 10월 17일
미국 버지니아주 베어그래스[1]
사망
1850년 11월 19일 (향년 70세)
미국 켄터키 프랭크퍼트
재임기간
제9대 부통령
1837년 3월 4일 ~ 1841년 3월 4일
서명
파일:리처드 멘터 존슨 서명.svg
부모
아버지 로버트 존슨
어머니 제미나 존슨
배우자
줄리아 친
자녀
2명
학력
트랜실베니아 대학교
종교
개신교 (침례교회)
정당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미국의 제9대 부통령.


2. 생애[편집]


1780년 오늘날의 켄터키 루이빌인 당시 버지니아주 베어그래스에서 11명 중 5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트랜실베니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변호사로 활동하였으며, 1804년에 켄터키 주 하원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806년에는 연방하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연속 6선에 성공했다. 미영전쟁이 발발하자 켄터키에서 의용군을 모집해 대령으로 참전했고, 테쿰세를 전사시켰던 템스 강 전투에도 참여하는 등 공적을 세웠으나 부상을 입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하원으로 완전히 복귀해 군사 관련 업무, 미망인과 고아들을 위한 연금 확보, 서부 내 기반시설 확충 등에 주력했다.

1818년 초에 하원에서 은퇴할 의사를 밝힌 후 Class 3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여 낙선하였으나, Class 2 현직 상원의원이 사임한 후 그 궐석을 채울 후임자로 선출되었다. 1822년에 상원의원 재선에 성공한 후,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처음에는 헨리 클레이, 클레이와 존 퀸시 애덤스의 연대 이후에는 앤드루 잭슨을 지지했다. 1828년에 민주공화당 내 잭슨 파벌이 민주당을 창당했을 때 합류했고, 세번째 임기에 도전하였으나 사실혼 관계였던 혼혈 노예 Julia Chinn과의 관계 때문에 재선에 실패하고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원에 복귀한 존슨은 우체국 및 우편 도로 위원회 위원장(21~22대 의회), 군사위원회 위원장(22~24대 의회)을 역임했고, 1832년 대선 출마를 시도하였으나 잭슨이 재선 출마를 결정하면서 출마를 포기했다.

1836년 대선에서 마틴 밴 뷰런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는데, 선거 자체는 민주당이 승리하였고 마틴 밴 뷰런도 선거인단 과반을 훌쩍 넘긴 170표를 얻으며 대통령 당선을 확정지었으나 정작 존슨 본인은 버지니아 선거인단(23명) 전원이 불충실한 선거인단으로 다른 인물에게 투표한 탓에 과반에 1표 미달하는 147표를 확보하는 데 그쳤다. 결국 상원이 부통령을 선출하게 되었고, 상원 표결에서 33:16[2]로 휘그당 프랜시스 그레인저를 꺾고 부통령에 선출되었다.[3] 부통령이 된 이후에는 별다른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았고, 1840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존슨을 포함한 어떤 부통령 후보도 공식 지명하지 않은 채 윌리엄 해리슨-존 타일러의 휘그당에 패배하여 정권을 내주었다.

부통령직에서 퇴임한 후 존슨은 켄터키 주 하원의원을 두 차례(1841~1843, 1850) 역임한 것 이외에는 상원의원 선거(1842),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1844), 켄터키 주지사 선거(1848) 등에서 낙선했고, 1850년 11월에 주 하원의원으로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 오늘날 켄터키루이빌.[2] 당시 상원 정원은 52명이었으나 3명이 결석했다.[3] 미국 역사에서 상원이 부통령을 선출한 사례는 해당 사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