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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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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강조의 정변
, 김훈·최질의 난
, 무신정권
,
,
,




무신정변
武臣政變

경인의 난(庚寅亂) | 정중부의 난(鄭仲夫亂)
시기
CE 1170년 8월 30일 ~ 9월 2일 (음력)
장소
고려 개경 보현원[1]
원인
문신-무신 차별의 누적
교전 세력
파일:고려 의장기.svg 고려 왕실
(진압군)


무신세력
(반란군)


주요 인물
지휘관

의종 (고려 군주)
지휘관

이고 (견룡군 산원)
이의방 (견룡군 행수)
정중부 (응양군 상장군)
참가자}}}
김돈중[2], 한뢰,
왕광취, 김석재[3],
조동희[4]
참가자}}}
채원[5], 이소응,
김광미, 양숙,
진준, 기탁성,
조원정, 이의민,
박존위, 이광정
병력
불명
불명
피해
불명
불명
결과
고려 왕실의 반란 진압 실패.
- 문신, 환관 대거 숙청.
- 의종 폐위, 이의방 일파의 무신정권 장악.

영향
고려 왕실의 괴뢰화.
무신정권의 성립. (이고, 이의방, 정중부 연립정권)

1. 개요
2. 원인
2.1. 무신과 문신의 지위
2.2. 문신과 무신의 갈등
3. 정변
3.1. 살육의 시대
3.2. 후일담 - 무신정권과 권력자의 교체
4. 후세 평가
5. 관련 인물
5.1. 무신
5.2. 문신
5.3. 고려 왕실
5.4. 환관
6. 기타
7. 매체
8. 관련 문서
9.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고려 의종 24년에 해당하는 1170년 8월에 고려의 무신들이 개경 인근의 보현원[6]에서 들고 일어난 정변. 당시 무신은 2대 군주인 혜종 왕무(王武)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호신(虎臣)이라고 불렸다. 피휘에 대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1170년이 경인년이기 때문에 경인의 난(庚寅亂)으로도 부른다. 경인년의 보현원 정변과 1173년 계사년에 일어난 김보당의 난(계사의 난(癸巳亂))을 합쳐 '경계의 난(庚癸─亂)'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으로 고려 왕조의 엘리트층과 지식인층은 살아남으려면 무신정권의 휘하로 들어가거나 지방으로 도주해야 했고 저항하면 그대로 숙청당해 고려를 지탱해온 엘리트층이 붕괴되었다.[7] 이후 무신정권은 중앙정부의 이권을 본인들이 독점하고 의도적으로 지방의 정규군을 해체하고 국력 증강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비록 명분이 적합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고 해도, 기존의 의종과 문신들이 사치향략에 빠지고 민생은 파탄지경에 이를정도로 무능하게 통치했기 때문에 민심이 용인한것이었지만, 정작 집권한 무신들이 고려의 폐단을 개혁하기는 커녕 자기네들끼리 권력다툼을 하는데 힘을 쏟으며 행정업무는 방기했으며, 그 영향으로 몇년이 채 되지도 않아 무신정변의 명분은 퇴색되었다. 결국, 고려는 이 사건 이후로 강력한 행정기반을 되찾지 못하고 혼란을 겪는다.

당시 상장군 정중부이의방, 이고 등의 무신들이 일으켰기 때문에 정중부의 난 또는 무신의 난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어쨌든 성공했기 때문에 난(亂)이라고 부르지는 않는 편이다. 무신정권 당대에는 난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인시대에서는 경인년 거병처럼 자기들끼리는 추켜세웠다. 다만 난으로 부르는 경우에는 2차 무인의 난이라고 하는데, 이미 이전에 문신들이 무신들에게 지급되었던 밥줄인 영업전을 강탈해가자 무신들이 분노하여 난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2. 원인[편집]






문신에 의한 무신 차별로 요약된다. 대표적인 사례로 어려도 한참 어린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린 일, 김돈중정중부의 수염을 태워서 화가 난 정중부가 김돈중을 때리자 그의 아버지인 김부식이 정중부를 매질하려고 했던 일 등을 들 수 있다.[8] 이 때문에 의종, 김부식, 김돈중, 한뢰가 무신정변의 원흉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복잡한 사정이 놓여 있었다.


2.1. 무신과 문신의 지위[편집]


고려 왕조에서 무신과 문신의 대접이 혼란스러웠던 시기, 문신과 무신이 권력서열을 다투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고려 군주들은 몇 세대에 걸쳐서 이궁지쟁처럼 서로 카운터 펀치를 날리도록 문신과 무신에 잘못된 훈수를 두면서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

고려시대는 군 지휘권을 문신들이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문신 정2품의 평장사를 상원수로 임명하여 총사령관을 맡겼고, 무신의 최고위인 상장군은 부원수에 임명되어 상원수의 지휘를 받는 위치였다. 한국사에서 유명한 서희강감찬도 군공으로 인해 장군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과거를 통해 관직에 입문한 문신이었다. 강감찬이 군 임무를 수행한 것은 거란족과의 전쟁 시기인 약 3개월 정도뿐이다. 여진 정벌에서 활약한 윤관 역시 문신 출신이었다. 대중들에게는 흔히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고려사에는 학문적인 면에서 좋은 평을 내리고 있다. 윤관도 전쟁 도중에 유교 경전을 탐독했을 정도로 철저한 유학자였다.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고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도 당연히 문신 출신이었다. 고려의 역사는 능력 있는 문신이 장군을 겸직하며 병법을 바탕으로 전략과 전술을 보여주었던 시대였다. 고려 전기는 문신들이 일반 군인들보다 탁월한 전략적 지식을 겸비했고, 반대로 무신들은 전술적으론 쓸모있지만 속된 말로 '글도 읽을 줄 모르는' 단순무식한 병대장 출신들이 대다수였던 시절이었다. 때문에 초기 무신들은 국가운영을 하는 역할이 아니었으므로 큰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고려시대까지 '무신'이란 체계적인 병법이나 거시적인 전략을 세울줄 아는 군인을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싸움을 잘하는 싸움꾼을 사령관으로 특별 채용해주는 '병대장을 장군으로 올려주는 개념'에 불과했다. 이런 방식이 가능했던 건 고려 시대 내내 전쟁이나 반란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시대는 정점인 정3품 상장군까지 올라간 무관일지라도, 자기 이름 석 자나 한자로 쓸 수 있으면 다행일 정도로 지식과 교양이 부족했다. 오랜 경험과 노련함에서 전술적 소양은 갖췄겠지만, 전장에서 그림을 넓게 보고 장병을 지휘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정치나 외교관계에 대한 판단을 기반으로 한 전략의 수립까지 요구되는 군대의 최고위 직책까지 맡을 만한 군인을 육성하는 체제 단위의 정식교육이 없었다.

고려 시대에는 문과에서도 유교 경전[9] 이외에 군사전법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과 시험을 요구하였기에, 고려시대의 대첩을 일군 명장인 강감찬이나 윤관 같은 사람들은 전부 문신이었다.[10]

고려 왕조는 강해진 문신(문벌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무신들을 키웠다. 그리하여 전대 군주 대에서 무신의 권력이 강해졌다가 현임 군주에서는 문신들의 권력이 강해지는 식으로 양쪽의 대접이 나빠졌다 좋아지기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문무 사이의 확고한 권력서열이 문란해졌다. 권력서열이 혼란스러워졌고, 어느 순간 양쪽의 감정 교류가 붕괴되어버린 사태에서 벌어진 쿠데타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군사적 지휘권을 가지고 문신과 무신이 불안한 균형을 이루던 중 이것이 무너지면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사람들 오해와 달리 그 시대 사회는 문신들도 전장에서 활약하는 경우가 많아서 무장으로 뛰는 경우가 많았고 이걸 단순히 문, 무의 차별로 인식하기보다는 권력의 지배구조로 봐야한다.

2.2. 문신과 무신의 갈등[편집]


무신정변은 문신에 비해 차별받아 온 무신들이 말 그대로 민란처럼 감정적으로 폭발해서 문신들을 대거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이 무신정변에는 또 하나의 중요한 배경이 있으니, 바로 무신과 문신 간의 정치적 갈등이었다.

초기에는 의종도 문벌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무신을 중용하는 정책을 펼쳤다. 무신 정변의 주요 인물인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순검군, 견룡군(경룡군)이란 이름을 가진 일종의 군주 호위 부대 출신이었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정변을 독자적으로 계획할 수 있던 것도 이 때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주 호위 부대는 군주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들로 채워지므로, 비록 문신과의 차별이 있다곤 해도 이런 특성상 차별 대우로 인한 감정적 행동으로 무작정 정변을 일으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고려의 무신들 상황은 결코 '차별 대우를 받았다' 정도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상황이었다. 고려의 여진 정벌에서 얻은 전공을 기반으로 무신들의 입지가 탄탄해지기는 했지만 이자겸의 난 직후의 척준경 일파 숙청과 묘청의 난으로 인해 입지가 꽤나 위태로워졌다. 이때를 틈타 기존의 문벌 귀족인 문신들은 무신들의 권력을 도로 빼앗으려 했다. 이로 인해 무신과 문신 간의 알력이 극심해졌고 정계는 혼란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신정변 직전까지 고려 무신들의 권위는 이전에 비해서 훨씬 더 개선된 편이었다. 고려의 여진 정벌,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을 통해서 무신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공을 세운 무신들이 많아지면서 오히려 무신들의 세력이 점점 더 비대해졌다. 무인들은 오히려 신분 상승의 기대를 품고 출세 욕구에 눈이 멀어 문신들에 대한 반감을 빌미로 이용해서 정변을 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고려시대는 신분 상승 가능성이 신라 시대보다 더 높았고 이 때문에 들고 일어난 노비들과 평민들의 반란도 꽤 많았다.

게다가 의종은 무신을 우대해서 불만을 해소한다거나, 아니면 거꾸로 아예 문신들에 힘을 완전히 실어주기보다는 두 문무 신료들 간의 알력을 적당히 이용해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것에만 급급했다. 더욱이 의종 말엽에는 거꾸로 무신들보다는 불만 많은 문벌귀족들과 환관을 우대하며 이들에게 정치에 간여할 수 있는 발언권을 줌으로써 의종은 즉위 초반에 자신이 직접 힘을 실어준 무신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했다. 결국 무신들은 자신들과 반목하던 문신뿐만 아니라 군주인 의종에 대한 정치적 반감과 적개심까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의종이 질펀하게 놀았다는 기록처럼 지나친 사치와 향락으로 인해 일반 백성들도 의종에 대한 원성이 매우 컸으며, 일반 병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무신 정변 당시 일반 병사들이 무신들의 행위에 대거 동조하였고, 무신들은 이를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세력을 얻는 한편, 정변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무신들은 문신들과 달리 권력을 뒷받침해 줄 기반이 없어서 정권 안정화에 실패하였다. 게다가 문신들을 몰아내고 빈 권좌를 두고 무신들 내부에서 새로운 알력 다툼이 야기되었다. 자신의 힘을 믿고 걸핏하면 시비를 걸거나 군사를 일으켜 전투를 하고 백성들을 문신들 이상으로 심각하게 수탈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사서 민심 이반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정변 이후에는 정변 소식에 크게 고무된 지방 각지의 유력자 및 백성들이 잇따라 봉기하면서 무신 정권은 정변 초기부터 큰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는 의종에게도 책임이 있다. 의종이 정변 초기 국면만 어느 정도 잘 수습했더라면 비록 우발적인 정변이었다고 해도 과거 현종 때처럼 최소한 왕위는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스스로 이를 주도하여 문벌 귀족들을 몰아내는 친위 쿠데타로 이 사건을 이용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의종은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다가 결국 스스로 화를 부른 격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의종은 세력간의 갈등을 일으켜서 자신의 지위를 안정화시키는 스타일의 왕이었는데 서경 사건이 크게 터지면서 자신도 절제를 잃고 그런 왕을 두고 문신과 무신의 갈등은 커지면서 결국 한 세력이 사라지게 된 사건이다.

3. 정변[편집]





정변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종 재위기의 권신 이자겸이 왕위를 탐내면서 온갖 뻘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군주는 문신을 버리고 군인인 무신들에게 온갖 버프를 넣기 시작했다. 이자겸의 난을 토벌한 무신 척준경이 그 동안 금단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정2품 품계를 수여받는 초유의 상황도 발생했다. 하지만 이후 척준경이 숙청되면서 척준경에 동조했던 무신들도 더불어서 함께 대거 축출됐다. 척준경이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전쟁 영웅이다 보니, 이자겸의 난 당시 척준경에 동조한 무신들이 상당히 많았다. 축출 다음에는 또 묘청의 난으로 인해 서경에 기반을 두고 있던 무신들이 대거 숙청당하기도 했다. 이렇게 무신들의 세력이 약해지자, 다시 정치 세력도를 되찾아야 하는 김부식 등의 문신들은 대놓고 무신들을 호구 취급하면서 서로 싸움을 시작했고 무례한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렇게 무신들의 분노 게이지는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의종 때에 이르러서는 양쪽의 대립과 괴롭힘이 마침내 정점을 찍었다. 의종은 문신들과 마실 나가면서 허구한 날 호위군인 금군을 대동했고, 그때마다 동원된 무신들은 군주와 문신들이 술먹고 띵가띵가하는 꼴을 굶으며 지키기만 해야 했다. 가끔 그러는 것도 아니고 하루가 멀다고 이 난리를 쳐댔으니 무신들은 그야말로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특히 의종은 무신들에게 관심도 없고 잘해주지도 않아 의종에 대한 불만도 커지고 있었다.

1144년에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11]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는데, 각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자랑[12]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로 날뛰고 즐기는 중에 내시(內侍)[13]였던 김부식의 젊은 아들인 김돈중이 당시 견룡대정[14]이었던 무신 정중부수염촛불로 태워버린다.

정중부는 외모도 훤칠하고 명장 관우처럼 멋진 수염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외모가 군주와 여러 대신들에게 주목을 받자 평소 무신을 만만하게 여기던 김돈중이 이를 시기하여 벌인 짓이라고 한다. 당연히 개친 정중부는 김돈중을 패고 쌍욕을 했는데[15], 문제는 김부식이 아들이 먼저 선빵을 날린 건 생각도 안 하고 아들이 맞은 것에만 격분해서 인종에게 정중부를 고문해서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인종은 그걸 냅다 허락한 것이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위인 사회였고 김돈중이 쳐맞으면서 모욕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이건 김부식과 김돈중이 해도해도 너무했던 것이다. 다만 인종은 정중부를 아껴서 은밀하게 도망다니도록 도와줘 실제로 처벌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걸 지켜보던 무신들은 그야말로 어이없고 기가 찼을 것이 분명하다. 이 일로 정중부는 김부식 일가에게 크나큰 원한을 품었고, 결국 이 앙심은 무신들의 반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거기에 김돈중은 그것 말고도 무신을 물먹인 적이 있었다. 보현원 사건 3년 전인 1167년 연등회 날 밤, 본인의 실수로 근위병과 부딪쳤는데 하필 근위병의 화살이 의종의 수레에 떨어졌고, 밤에 군주 앞에 화살이 떨어지자 암살 시도로 착각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런데 김돈중은 본인의 실수라는 것도 밝히지 않고 오히려 당시 근위병 무관에게 누명을 씌워 유배 보냈다.[16] 이때 유배 간 사람들이 견룡군과 순검군의 무관들로, 훗날 보현원에서 문신 학살에 가담했던 군대들이었다. 괜히 정중부 말고도 다른 무신들이 적극적으로 보현원 사건에 가담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1170년 8월, 의종이 보현원에 왔다가 개경 흥왕사에 머물렀는데, 분노가 쌓일 대로 쌓인 정중부가 폭발하여 이의방과 이고에게 "다음에 임금이 연복정에서 궁으로 돌아가거든 그만 참기로 하고 만약 또 보현원(普賢院)으로 옮겨가거든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의종은 다음날 보현원으로 출발하려고 하다가 무신들의 불만을 어렴풋이 느꼈는지 갑자기 출발 전에 오문(五門)에서 멈추더니, 오늘은 훈련하기 좋은 날씨라며 일종의 씨름인 오병수박희 대회를 열자고 했다. 이를 통해 무신들끼리도 특별히 즐기게 하고 상을 나눠주려는 의도였다. 수박은 당시에 현대의 태권도 격이었던 국가적 무술로, 이 행사는 일종의 무술 대련 및 시합 행사로 볼 수 있다. 군주제 체제에서 이런 무예 행사는 무신(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고, 군인이 군주의 눈에 띄어서 중앙 정계에 진출할 수 있게 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런 행사는 인기가 꽤 있었고, 군주들도 이러한 행사를 적절히 활용해 군인들을 본인 편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고령의 종3품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 경기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그만 경기를 알아서 포기했는데, 갑자기 신참 문신인 기거주 한뢰가 튀어나와 이소응의 따귀를 때린 것이다. 이소응은 섬돌에 나가떨어져 뒹굴었고, 이때 의종과 문신들은 손뼉을 치면서 크게 비웃었고 좌승선 임종식(林宗植)과 이복기(李福基)도 곁에서 이소응을 마구 깠다.

당시 폭행당한 이소응은 종3품 대장군으로, 고려 시대의 종3품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2번째로 높은 품계인데다가[17], 당시 나이가 61세였다. 당대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당장 예편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령의 노장이자 당시 무신들에게 존경과 예우를 받는 최고령 원로였다.[18] 반면 한뢰는 종 5품 기거주에 이전 정계 활동이 거의 없는 걸 생각하면 많이 잡아도 20대 후반 정도였다. 현대로 치면 대통령이 직접 참관한 군단 체육대회에서 20대 후반 정도 되는 새파란 대통령 비서관이 환갑을 넘어선 중장의 뺨을 때리고 대통령과 관료들이 대놓고 중장을 비웃은 셈. 60대의 이소응이 젊은 무신들을 상대로 수박희에서 이길 가능성은 당연히 없다. 그런 것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뺨부터 때렸다는 것은 무신을 대놓고 모욕하는 것밖에 안 된다. 이소응이 이겼다면 그때는 이소응에게 진 무신의 뺨을 때렸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연히 무신들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정중부는 젊은 시절에 김부식 부자로 인해 수염이 탄 개인적인 굴욕 이후 이런 일에 매우 민감해졌고, 다른 견룡군, 순검군 군인들도 김돈중이 3년 전 저지른 누명 사건으로 문신들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정중부의 분노는 폭발하여 한뢰에게 "네가 비록 문관이라고는 하나 이소응 장군은 종3품 대장군의 벼슬을 지내고 있는 분인데, 너 따위가 어떻게 이딴 짓을 할 수가 있느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문제는 의종은 이런 한뢰를 질책해도 션찮을 판에 오히려 정중부한테 "그런 일로 뭐하러 화내시오? 그만 진정하시오!"라며 한뢰를 두둔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바람에 정중부와 무신들이 제대로 머리 끝까지 폭발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일단 무신정변 자체는 의종이 보현원에 가기로 하면 일으키기로 모의했고, 실제로도 그 날 밤에 일어났으니 보현원 사건과 관계없이 정변은 일어날 예정이기는 했다. 물론 안 그래도 쌓일 대로 쌓였던 무신들의 불만을 의종이 제대로 폭발시켰고,. 말 그대로 가뜩이나 짜증나서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으니 안 그래도 불만이 가득하던 무신들이 무신정변에 호응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꼴이 되기는 했다. 사태를 지켜보고 있던 이고가 칼을 뽑아 정중부에게 눈치를 줬지만, 정중부는 그 자리보다는 군주가 보현원에 도착하거든 난을 일으킬 작정으로 만류하였다. 기록에서는 정중부는 "군주가 이대로 보현원으로 가는 게 아니라 대궐로 돌아간다면 그냥 우리가 참자!"라고 했다는데, 그게 진심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당장은 승산이 부족하니 일단은 참고 기다리자는 것으로 넘어갔을 수 있다.


3.1. 살육의 시대[편집]







경인정변

의종이 보현원에 도착하기 직전, 이고와 이의방은 먼저 들어가 황명이라고 속이고 순검군의 병사들을 일제히 소집했다. 의종과 문신들이 보현원의 문 안에 들어가자 이고, 이의방이 이끄는 순검군의 병사들이 난입했고, 수박 대회에서 웃었던 임종식과 이복기가 그 자리에서 참살당하며 정변이 시작됐다. 호위하던 병사들도 사전에 정중부의 휘하에 있었던 터라 바로 순검군과 합세했다.

낮에 무신들에게 어그로를 잔뜩 끌어놓은 한뢰는 황급히 의종에게 다가가 군주가 앉는 어상 밑에 숨었다. 의종 앞에서 자제하던 무신들과 의종을 보좌하는 내시부 관원이 한뢰에게 나오라고 말했지만, 한뢰는 의종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의종은 내시부의 관원을 시켜 무신들을 저지하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고, 오히려 그 관원들은 이고가 칼을 빼들어 그 자리에서 자비없이 죽여버렸다. 지유(指諭) 김석재(金錫材)는 "감히 폐하의 앞에서 칼을 뽑았는가?"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이의방이 인상쓰며 주둥아리 닥치라며 협박하자 죽기는 싫었는지 바로 버로우했다.[19] 의종 앞에서 한뢰를 죽여버린 무신들은 평소 원한이 있던 문신들을 찾아다니면서 죽이고 또 죽였다. 정중부 일파는 피아식별을 위해 우측 어깨를 내어 놓고 머리에 복두를 벗었는데, 같은 복장을 하지 않았다면 무신까지도 짤없이 죽였다.

한편 무신들은 김돈중이 은근슬쩍 도망갔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만일 김돈중이 개경에서 태자를 옹립할 경우 더 골치 아픈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김돈중이 개경으로 가서 태자에게 알리고, 반란을 진압할 관군을 편성했으면 불과 소수의 근위대 인원으로 구성된 정변 주도 세력에게는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이의방이 "만약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면 나는 남녘으로 바다에 뛰어들던지 북방으로 거란 놈들에게 투신해 피하겠다."고 했을 정도. 그리고 발걸음이 빠른 자를 김돈중의 집에 보냈는데, 김돈중이 안 돌아왔다는 대답을 듣자 무신들은 성공했다고 안도하며 병력을 이끌고 개경으로 곧바로 직행했다. 감악산으로 도망갔던 김돈중은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자의 밀고로 인해[20] 추격해온 정중부의 부하들에게 동생 김돈시와 함께 붙잡혀서 처참하게 얻어맞고 처형되었으며, 후에 목과 사지가 절단된 채 저자거리에 매달렸다. 정중부의 젊은 시절에 원한이 있던 아버지 김부식도 묘가 헤집어져 부관참시당한다. 본인이 전세를 뒤집을만한 카드를 갖고 있었음에도 살리지 못해 그대로 죽은 조상과 비슷한 신세.

개성에 입성한 무신들은 궁궐로 가서 각 궁궐들을 장악하고 핵심 관료들을 모조리 붙잡아 살해했으며, 사병들을 풀어 문관의 관(冠)을 쓴 놈은 말단 관리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한다. 이 과정에서 문극겸[21] 등등 소수 운 좋은 이들[22]을 빼고 문관 50여 명은 다 잡혀 죽었다. 의종은 이 상황이 무서워서 정중부에게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말렸지만, 정중부는 건성으로 대답할 뿐이었고[23] 의종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이고와 이의방을 응양용호군중랑장(鷹揚龍虎軍中郞將)으로 임명하고 다른 상장군은 수사공 복야(守司空僕射)로 대장군은 상장군으로 진급시켰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특히 무신들은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계속해서 맘에 안 드는 인물들을 닥치는대로 잡아 죽이고 다녔다.

이후 무신들은 의종을 궁궐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이때 의종이 총애하던 내시부 관원 왕광취(王光就)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하필 누설되어 왕광취를 포함한 20명이 효수된다. 이때까지는 의종과 그 가족들에게는 터치를 하지 않았던 정중부는 의종마저 협박해서 군기감(軍器監)이 되었고, 이후 정중부는 계속해서 직위를 높이는 일을 반복한다. 그러나 앞의 일로 인해 의종은 이미 무신들한테 신뢰를 단단히 잃은 상태라서 의종과 태자도 폐위시켜 추방하고, 태자의 어린 아들은 죽였다. 의종이 총애하던 궁녀가 도망가자 죽이려 했으나 공예태후가 간청해서 살려주었고, 그 궁녀는 의종을 따라갔다.

병부시랑 조동희는 지방으로 가 있던 차에 개경에서의 소식을 듣고는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켜 개경으로 오려고 했지만, 호랑이가 길을 가로막아 못 가던 중(...) 눈치챈 무신들의 기병이 와서 체포된다. 조동희는 앞서 탐라 봉기(양수의 난)를 수습했던 공이 있어 대신 귀양만 보내는 선에서 끝냈으나, 중간에 데려가던 자가 조동희를 죽이고 시체를 물에 처넣었다.

정중부와 무신들은 이어서 죽인 문관의 집들까지 다 철거하고 다녔다. 보다 못한 대장군 진준(陳俊)이 "원수로 여기던 문관들은 이복기, 한뢰 등 수 명이었는데 이번에 너무 죄없는 사람들까지 죽였소. 집을 부숴버리면 그 가족은 어떻게 살란 말이오?"라면서 말렸으나, 이의방 등은 듣지 않고 수많은 문관들의 집을 기어이 다 없애버렸다. 이때부터 무신들이 사적으로 원한이 있던 문신들의 집을 부수는 게 버릇이 되었다.

무신들은 이후 의종의 동생 익양공 왕호를 새 황제(명종)으로 옹립한다. 하지만 명종은 역시나 허수아비일 뿐, 실권 대부분은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에게 있었다. 의종의 별장들을 정중부, 이고, 이의방이 나눠가지기도 하고 명종이 즉위한 이후 무신들이 모여 살아남은 문신들을 모두 모았을 때 이고가 문신들을 모두 죽여버리자고 하기도 했지만, 정중부가 이를 만류한 적도 있다.

1172년에는 동북면 병마사였던 김보당[24]이 다시 의종을 왕위에 옹립하고 무신들을 살해할 계획을 세웠고, 거제도에 있던 의종을 데려오려고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것도 발각되었고, 무신들은 이의민 등에게 병력을 주어 보냈다. 김보당은 안북 도호부에서 잡혀서 고문받고 처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문관 중에 누가 나와 공모하지 않았겠소?"라는 한 마디로 또다시 남은 문신들이 여럿 학살당한다.

김보당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이준의(李俊義)[25], 진준, 김부(金富) 등이 정중부와 이의방에게 "하늘의 뜻은 알 수 없어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는데, 힘만 믿고 정의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문신들을 모두 죽여도 김보당이 또 나오리란 법이 없겠냐?"고 설득했고, 무신과 문신의 자녀를 결혼시키는 정책으로 문신들을 안심시키자고 하여 살육이 진정 국면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이의민 등이 동경(지금의 경주시)에서 의종의 척추를 꺾는 잔인한 방법으로 시해하고는 그의 시신을 버려버린다. 고려사에 따르면 큰 솥 안에 그의 시신을 담고는 곤원사 연못에 버려버렸다고 한다. 이에 누구도 의종의 시신을 꺼내려 하지 않았지만[26], 이를 안타깝게 여긴 부호장 필인이 몇몇 사람들과 함께 시신을 꺼낸 뒤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 근처에 묻어주었고, 이후 의종 시해를 사주한 이의방이 사망하고 나서 동생 명종에 의해 희릉으로 옮겨졌다.

3.2. 후일담 - 무신정권과 권력자의 교체[편집]


1170년에 시작된 무신 정변 이후 주동자들인 정중부와 이고, 이의방에 의해 무신정권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1171년에 이의방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려던 이고와 그의 동료 채원 등을 싸그리 죽이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해나갔다. 무신들의 실질적인 리더였던 정중부는 고속 승진하여 1173년에 문하시중까지 오르면서[27] 계속 무신들의 리더 및 집권자 역할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세력이 강해진 이의방을 경계하기도 하는 등 무신 내에서는 권력 다툼과 분열이 계속 일어나고 있었으며, 무신들도 자신들의 지독한 원수였던 문신들만큼이나 타락하여 탐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데 급급했는데, 이 때문에 이들이 문신과 다를게 뭐가 있냐면서 국가적으로 큰 반감을 사게 되었다.

고려 왕조와의 혼인을 획책하기도 할 정도로 야심이 커졌던 이의방은 1174년, 조위총의 난에서 패배하고 복귀하던 중 정중부의 아들 정균이 보낸 승려 종참 등에 의해 암살당했다[28]. 이후 정중부가 독주하는 세상이 오자 그의 아들인 정균 역시 방자한 생활을 하며 전횡을 부렸고, 공주를 자기의 아내로 눈독을 들일 정도로 막장 행각을 이어갔다. 결국 1179년에 새로운 인물인 경대승이 정변을 일으켜 정중부와 사위 송유인, 정균을 몽땅 죽이고 권력을 틀어쥐면서 고려의 무신 정권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4년 만인 1183년에 경대승은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에 경대승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피해 고향 경주로 낙향했었던 이의민이 돌아와 권력을 잡으며 무려 13년 동안 집권해서 국정을 어지럽히고 사사로이 재물을 탐하는가 하면 권력욕에 취해 문하시중의 지위에까지 올라 전횡을 일삼는 등 폭정을 부리다가 1196년에 최충헌에 의해 이의민 본인은 물론 아들들도 모두 한꺼번에 죽었다. 이후로는 오랫동안 최충헌과 그 후손들이 집권하며 무신 정권의 절정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1231년에 시작된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는 혼란으로 빠져들게 된다. 김준의 정변으로 몰락한 최씨 정권 이후로도 1258년에 등장한 김준과 1268년 김준을 죽이고 집권한 임연&임유무 부자가 있었지만, 원종이 무신들을 시켜 임유무를 암살함으로써 마침내 1270년에 무신 정권은 100년만에 끝이 난다.


4. 후세 평가[편집]


무신정변 이후의 역사적인 변화점은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국가의 전반적인 문과기풍과 지식 수준이 크게 퇴보했다. 이제현충렬왕과 문답할 때는 "글을 배울 곳이 없어 유학책 읽어야 할 사람들이 승려한테 글을 배운다."고 말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물론 최우 정권기에는 서방도 깔리고 이규보 같은 문인도 올라오고 상정고금예문 재판본 등 금속 출판물이 등장하는 등 아예 비문명 사회로 전락한 것은 아니지만 문(文)적 기풍과 지식이 크게 쇠퇴하고 남은 것 또한 정권에 종속되다시피 했다.

두번째로 무신정변은 한국사에서 집권 계층이 완전히 바뀐 몇 안되는 사건이다. 여말선초부터 조선시대까지 권문세족 - 사대부의 연결성과 훈구파 - 사림파도 서로 연결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한국사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매우 힘든 사건이다.

세번째로는 무신정변 이후 고려의 군사력이 급속히 쇠퇴하여 이전처럼 수십만명의 병력을 뽑아내기 힘들어진다. 무신정변 이후, 한국 역사에서 가장 많은 횟수의 반란이 일어나고 정부는 몽골 제국의 침략을 사실상 방치했고 지방에 대한 지배권이 희미해지면서 국가 단위의 군사력 집중이 불가능해졌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무신들은 고려 왕조를 꼭두각시로 만들어서 친목질로 관직을 돌려먹고 지방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든말든 수도권에 숨어서 지방통치를 방관했다. 그래서 이전 여요전쟁 때는 수십만 단위로 동원하던 군사가 이후에는 많아봐야 만 단위고 보통은 천 단위 정도로 폭삭 줄어들었다. 이후 몽골의 침략, 원나라에 속박, 여말의 혼돈 등으로 고려 왕조는 34대 475년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국의 군사정권은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들을 정당화할 명분으로 무신정변을 차별받는 군인들의 정당한 궐기로 포장하였다. 1980년대 중순 국민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는 삽화로 문신들은 의종과 마셔라 부어라하고 무신들은 더운 여름에 중무장 상태로 경비나 서고 있는 그림으로 불만을 가질 만한 묘사를 한 적도 있다.[29][30] 1990년대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부터는 그런 정치적인 묘사는 점점 줄어들었다.


5. 관련 인물[편집]



5.1. 무신[편집]




5.2. 문신[편집]




5.3. 고려 왕실[편집]




5.4. 환관[편집]




6. 기타[편집]


  • 1170년 고려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고 15년 뒤 공교롭게도 일본에는 1185년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지면서 무신정권이 들어섰다. 다만 현재 일본 역사학계는 가마쿠라 막부 이전의 헤이케가 세운 로쿠하라 정권도 과도기적인 무사정권으로 보고 있는데 헤이케가 세운 로쿠하라 정권의 성립은 고려의 무신정변보다 3년전의 일이다. 오히려 기존 정부에 들어가서 실력자가 되어 관직을 독점한다는 점은 로쿠하라 정권이 한반도의 무신정권과 닮아있다.[31] 그렇지만 한반도 무신정권은 지방세력의 도전이라고 볼 수 있는 조위총의 난이라는 내전을 막아내어 한반도 무신정권의 역사는 계속해서 개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로쿠하라 정권은 지방세력이었던 미나모토 가문과의 내전이었던 겐페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미나모토 가문이 자신의 근거지인 가마쿠라에 새롭게 막부를 설치함으로써 지방정부 중심의 새로운 형태의 막부체제로 개편하게 되는 것이다.

고려의 무신정권은 여몽전쟁으로 인해 1270년 100년 천하로 멸망했지만, 가마쿠라 막부원나라의 일본원정을 막아내면서 오히려 권위가 커져 천황을 밀어내고 일본 전국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것이 시발점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 역시 1333년에 멸망한다.[32]


7. 매체[편집]


  • 무인시대: 드라마 시작부가 무신 정변에서 명종의 등극까지의 전개를 다루고 있다. 2화 마지막에 이의방이 왕광취의 목을 내던지면서 의종에게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워낙 박력이 대단하다 보니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무인시대의 무신 정변 파트는 초반 치고는 상당히 복잡한 전개를 보이는데, 무신들이 문신들을 쳐죽이고 의종을 폐위시켰다는 뼈대에, '소장파와 노장파 무신간의 대립', '차기 군주를 누구로 세울 것에 대한 논란', '이고와 이의방의 대립', '무비와 정중부와 이의방 간의 밀거래' 등, 온갖 갈등 요소들이 얽히고설킨다. 덕분에 극 초반 치고는 숨막히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전개를 보인다. 무인시대에서의 보현원 사건은 한겨울에 벌어진 것으로 묘사되며 드라마 도입부에는 아예 눈보라가 몰아친다. 하지만 실제 사건은 가을인 음력 8월에 벌어졌다. 촬영 스케줄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나마 날씨 묘사는 사건 전개에 별다른 관계가 없으니 심각한 고증오류 정도는 아니며, 오히려 1화 최초반 장면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오들오들 떨며 의종의 마차를 인솔하는 무신들, 마차 안에서 편히 앉아서 따뜻한 술과 청산유수하며 시가(詩歌)로 희희낙락하는 군주와 문신의 방탕함 아첨으로 응수하는 환관의 간사함과 극명하게 대비되어 배경 설명에 힘을 실어주어 역사 지식이 전무한 사람으로서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이 눈속에서의 행차 장면은 무인시대 드라마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식한 장면이다.

  • 역사가 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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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1년 기준,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에 해당되는 지역 남단에 위치했던 사찰.[2] 좌승선[3] 金錫材[4] 병부시랑[5] 순검군 산원[6] 오늘날의 북한 장풍군 남단에 있었던 사찰.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의 청평사라고 알려져 있어서,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도 그렇게 자막이 달려 나왔으나 사실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12권 '장단도호부' 편에 보현원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고, 의종이 자주 찾아 연회를 베풀었으며, 정중부가 문신들을 모두 죽였던 절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다만 이 춘천 청평사도 고려 시대에 건립된 절이고 이 절 역시 '보현원'이라고 불리기도 했기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7] 예외적으로 문극겸처럼 무신을 하대하지 않았거나 왕에게 간언을 했던 문신들은 참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다.[8] 다만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사건은 정변보다 26년전에 있던 사건이다.[9] 고려 시대의 유학은 조선 시대의 주자학과 거리가 멀었고, 동아시아의 유교 경전은 현대 공무원 시험 과목으로 치면 정치학, 행정학 등의 행정 과목이었다.[10] 조선시대에도 무과시험은 하도 많은 인원을 뽑아서 '만과(萬科)'라는 비아냥도 들었지만, 선발 과정 자체는 체력 및 무술검정과, 병법서 및 유교 경전에 대한 교양 지식을 두루 테스트하여 무관도 엘리트 관료로서의 소양을 갖추도록 했다. 말단 병졸로 시작해서 공 세우고 올라온 이른바 '특채'가 아닌 시험 거친 무관은 글을 모를 수가 없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글을 모른다, 글을 아느냐 등의 말은 진짜 글을 몰라서 그런 경우보다는 학문이 깊지 못하다, 유학(=왕에 대한 충성심)적 수양이 제대로 갖춰져있냐는 뜻이다.[11] 제석(除夕).[12] 잡기(雜技)라고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귀신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13] 고려의 내시와 조선의 내시는 전혀 다르다. 고려의 내시는 엄연한 문관으로 군주의 최측근 역할을 맡은 문관들이었으며, 다른 관직을 지닌 자가 겸임했다. 고려 중기까지는 유력 귀족 자제들이 주로 맡았으며, 이를 환관이 맡게 되는 것은 원간섭기를 거쳐 가며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선 내시에게 수염이 있다. 간단히 이야기해 이 당시의 내시는 환관과 다르며, 고환이 있고 성기능도 멀쩡했다.[14] 견룡군에 속한 종9품 무관.[15] 물론 정중부도 그가 알고 보니 김돈중이었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고, 문신들한테도 무신 주제에 감히 문신을 함부로 여긴다면서 한 소리 들었다.[16] 게다가 추가로 애꿎은 대령군의 종 나언 등이 암살범으로 몰려서 참수당한다. 김돈중은 죽기 직전에 이 일을 이야기하며 본인 때문에 죄 없는 자들에게 화가 미쳤으니 본인이 죽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유언처럼 말했었다.[17] 가장 높은 품계는 정3품 상장군.[18] 당장 아버지가 대장군이면 그 자식들은 귀족 무관으로 쳐 줄 정도였다. 아버지가 대장군이라 그 영향으로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들이 이의방, 경대승, 최충헌으로, 무신집권 다섯 중 셋이 무려 대장군의 아들인 덕에 명문가 취급 받았었고, 정권을 차지하는데 기반이 되었었다. 그런 대장군을 모욕한 것이니 병졸들까지 분노가 폭발한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19] 드라마 무인시대에선 아예 이의방이 김석재를 발로 까버렸다.[20] 김돈중에게 걸린 현상금이 탐나서 배신했다.[21] 운이 좋게도 그는 이 해 의종에게 바른 말을 한 이유로 좌천되었는데, 이것이 원인이라는 설, 혹은 평소에 바른 말을 했다는 이유로 죽음을 면했다는 설이 있다. 무엇보다 무신을 차별하거나 비하하지 않고 문신과 동등하게 대우해줬다.[22] 이들도 문극겸의 덕을 꽤 봤다.[23] 이미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정중부에게 이런 조언이 통할 리가 없었다.[24] 문신이었지만, 의종의 실정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에 무신 정변 때에는 표적이 되지 않아 무사했다.[25] 이의방의 형.[26] 지나가던 한 승려가 솥을 발견했는데, 그 승려는 솥만 가져가고 시체는 도로 버렸다. 정황상 이 승려도 의종한테 어지간히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27] 이 때문에 이의방의 집권기를 정중부의 집권기에 포함시키기도 한다.[28] 이후 조위총윤인첨에 의해 살해되었다.[29] Why? 한국사 시리즈에서는 굶으며 경비를 서고 있는 무신들이 주인공들에게 무신들은 승진에 제한이 걸려있고 군대의 지휘권이 없다는 등의 차별대우를 말하거나 내시가 된 주인공들이 음식을 나르면서 피곤하다고 하자 경비서던 무신들이 우리만큼 피곤하겠냐고 하고 강마루가 연회음식의 일부를 빼돌리면서 이거라도 먹을라며 가져다주지만 다음 장면에서 문신들을 바래다 주라고 하는 모습이 나온다.[30] 물론 엄연히 따져서 이런 묘사들은 위에서 서술되었듯이 전부 사실이긴 했다. 무신들이 쫄쫄 굶으면서 경비 선 것도 사실, 각종 차별대우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이후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보인 만행이 한층 더 문제였을 뿐이다.[31] 헤이케 로쿠하라 정권은 1167년 ~ 1185년 불과 18년만에 멸망했다.[32]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가마쿠라 막부 멸망 하고 고려 또한 충혜왕 이후 부터 점점 막장이 되었으며 그 결과 41년후 1374년 공민왕이 암살 당하고 1388년 우왕, 1389년 창왕이 폐위되면서 참살당했고 공양왕도 결국 폐위되면서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59년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고 이듬해 일본 역시 남북조가 통일이 되면서 무로마치 막부가 정식으로 출범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