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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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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비슷한 피겨 스케이팅 선수에 대한 내용은 김규은 / 감강찬 문서
1. 개요[편집]
고려의 문관.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군이었고, 죽어서는 전설이 되었다.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구국영웅이자 정치적으로도 고려의 리즈 시절을 이끈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준 명재상이었다. 또한 고구려의 을지문덕, 조선의 이순신 등과 비견되는 명장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강감찬은 서희, 양규, 현종, 최영,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위인이다.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주로 거란을 물리친 장군으로 알려져 무신#武臣으로 오해받지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이다. 강감찬은 정식 무관#武官직에 봉해진 적이 없고, 여요전쟁 때 받은 상원수직은 임시 군단의 지휘관이라 비상설직이므로 품계가 있는 공식 무관직이 아니다.[5][6]
생전 받은 작위는 남작에서 진작된 후작이다. 봉지명은 천수현(天水縣). 아마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후작일 듯하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7]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8] 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衿川)[9]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2. 경력[편집]
3. 생애[편집]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이다.[11] 《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12]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3] 강궁진(姜弓珍)이었다.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14] 에서 금천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강감찬을 보았다.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한다.[15]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16] 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17] 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이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18] 그런데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19]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현종 1) 요나라의 성종이 400,000명의 대군으로 침공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1021년 수도 개경의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다.[21]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 5년 5월.
1030년 개경의 주위에 나성을 두르라는 간언을 올렸고[22]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이 되었는데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거란의 제2차 침공 당시 몽진을 주장한 것[23] 을 언급하며
라고 공을 평가했다. 1031년"그 때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24]
에 봉해졌으며, 1031년 8월에 향년 84세로 사망했는데 현종이 붕어하고 3개월 뒤의 일이었다. 사후 내사령 유진[25] 의 전례를 따라 조정에서 제사지내주었고,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 개국후(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 開國侯)
강감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의외의 장소에 있는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로 묘가 발견된 해가 1963년이어서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금천 강씨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 옥사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 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이었는데 강빈은 비정한 시아버지 인조로 인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말로 다하지 못할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고 말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중의 주장일 뿐 근거는 전혀 없으며 금천 강씨 문중에서도 실제로 이 묘가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강빈의 옥사는 어디까지나 강빈과 주변인이 참화를 입은거지 진주 강씨 인헌공파 전체와 그들과 혼맥, 학맥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해를 입은 것이 아니다. 특히 성씨를 바꾸었다는 부분은 왕씨 몰살을 레퍼런스 삼아 과장한 티가 너무 많이 난다. 무엇보다 순종 대 《승정원일기》에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기록이 멀쩡히 등장한다.
국역본만 보면 '찾아 보수하라'는 대목을 '실전된 묘를 수소문하라'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는데 원문을 보면 방문(訪問)이며 단순히 '지방관이 방문하여 시설을 정비하고 제사지내라'는 의미이다. 강감찬은 조선에서도 명신으로 받아들여져 선조 때와 광해군 때 선조와 광해군 부자 모두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고 나무를 심어주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보이며 멸망 직전인 순종 대도 묘를 정비하고 제사지내게 했다. 묘에 대한 건 아니지만 숙종 때에도 강감찬의 사우(祠宇)에 액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으므로, 강감찬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충신으로 나라에서 기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후손들도 조정의 눈이 두려워 묘를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묘를 찾지 않으면 "조상이란 것만으로도 정중히 모셔야 하는데, 나라의 충신이기까지 한 조상을 외면하다니 사대부의 자격도 없는 배은망덕한 가문"이라며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국가에서 정비를 해줄 정도니 당연히 그에 관한 행정 기록이나 참여한 제3자들이 여럿 있을텐데 강씨 후손 일부가 숙청되었다고 단기간에 통째로 망실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 실전되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삐딱하게 바라보면 불민한 후손들이 겨우 몇 십 년 사이에 조상 묘를 잃어버려 놓고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관리해 준 조선 왕실에 책임을 전가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한편 갑신정변 등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면서 실제로 강씨가 아닌 사람들이 구한말의 혼란기에 금천 강씨 문중으로 편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금천 강씨 문중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인 강감찬의 묘를 찾아내는 퍼포먼스를 취해서 나중에 편입된 출처가 불분명한 후손들이 자신들을 금천 강씨의 온전한 후손으로 주장한다는 의견이다.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발견 이전부터 '유명한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 주변 역시 영험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 위원들이 "지석이 너무 망실되어서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무덤이 강감찬의 묘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재 지정도 보류했다. 조선 왕조에서 관리받던 시기에는 분명 존재했을 분묘와 석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모두 1964년 이후 제작되었다. 강감찬의 진짜 묘가 아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며 엄밀히 말해 이 묘는 강감찬 묘가 아니라 '전(傳) 강감찬 묘'이다. 지자체에서도 문화재 지정은 하지 않았고, 청원군에서 강감찬 묘에 지내는 제례 비용을 문중에 대 주기만 하다가 2014년 7월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이 되어서 현재는 흥덕구에서 이 묘를 관리하고 있다.
4. 평가[편집]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이다.[26]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소리이다.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
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요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간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였다.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군주인 현종을 보필한 '왕좌지재'의 신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진 시기는 사실 찾아봐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요군을 귀주대첩으로 크게 물리친 덕택에 요나라는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북송, 요나라, 고려, 서하 등 4개국 간의 평화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하여 요나라와 북송을 잡아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이다.[27]
5. 기타[편집]
- 강감찬은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武官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다. 84년 간의 긴 일생 동안 갑주를 입은 건 제3차 여요전쟁#제3차 침공 때의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 대첩의 의의가 엄청나다보니 항상 장군처럼 묘사된다.
-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28]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다.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했다. 관악구 낙성대동의 낙성대역의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어있다. 이곳의 마을버스 회사명도 각각 은천운수, 인헌운수다. 매년 10월에는 강감찬 축제를 열고 있다.
- 한때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에도 강감찬 동상이 있었다. 강감찬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수원에 강감찬의 동상이 들어선 사연은 1971년 박정희 집권 당시 대통령의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건립하라"라는 밀어붙이기 식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결국 팔달산의 강감찬 동상은 2007년에 이전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성신사가 복원되었다.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제5번함인 DDH-979는 장군의 함자(銜字)를 따서 '강감찬함'이라 명명되었다.
- 무공훈장 중 인헌무공훈장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되었다.
5.1. 강감찬 축제[편집]
- 시보격고: 북을 치며 모이시오라고 외친다.
- 전폐례: 초헌관이 폐백을 올리고 향불을 붙인다.
- 초헌례: 초헌관이 술을 올린다.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 아헌례: 아헌관이 술을 올린다.
- 종헌례: 종헌관이 술을 올린다.
- 음복례: 초헌관이 음복주와 조육을 먹는다.
- 망예례: 초헌관이 폐백과 축문을 사당 옆에서 불사른다.
- 예필: 제례가 종료되었음을 알린다.
- 일반분향: 안국사 앞에 분향, 헌화한다.
5.2. 강감찬 설화[편집]
- 소년 시절 너무 잘생겨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천연두를 얽게 해서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과거 천연두는 생명에 관계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질병이었기에, 고의적으로 천연두를 앓았다는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위인치고는 풍채가 떨어지는 그였기에 그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려 한 야사가 덧붙은 모양이다. 다만 실제였을 수도 있는데, 당시의 천연두는 난치병이어서 심하게 앓으면 죽지만, 가볍게 앓으면 면역이 생겨 다시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대 인도에서는 면역을 유도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의 팔이나 종아리 등에 상처를 내고 천연두 환자의 피고름을 살짝 발라 일부러 감염시켰다가 면역만 갖고 넘어가게 하는 인두법을 개발했고, 이것이 중국과 중세 유럽으로도 넘어갔다. 그러나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아서 인두법은 계속 논쟁이 거듭되다가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 바이러스에서 가져온 종두법을 개발하여 더 안전한 접종법을 정착시켰고, 1980년 완전 박멸이 선포되어 현재까지 인류가 박멸한 유일한 질병으로 남아 있다.
- 장인어른을 골탕먹인 민담도 전해지는데 마치 후대 권율과 이항복 사이의 일화를 보는 듯할 정도로 유사하다. 강감찬이 혼인을 하고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에게 매번 큰절을 올려야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한 번은 처가에 가서 큰절을 올리는데 강감찬은 장인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인의 코에 얼굴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깜짝 놀란 장인이 "내 콧등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음부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게"라고 말했는데, 강감찬은 다음에 처가에 갔을 때 장인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괘씸하게 여긴 장인이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강감찬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장인어른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라고 하셨기에 문 밖에서 절을 올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장인의 말을 잘 들은 것 뿐이며, 만약 그렇다고 장인 앞에서 한 번 더 절을 올리면 죽은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이 된다는 걸 노린 것이다. 이 민담의 결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강감찬의 이런 재치있는 대답을 들은 장인은 크게 웃으면서 앞으론 굳이 자신에게 억지로 절을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결말이 그나마 알려져 있다.
- 개구리 퇴치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관내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강감찬이 이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감찬이 이걸 어떻게 퇴치했는지는 지방 구전마다 다르다. 부적을 썼다는 전승도 있고 "니들 계속 울어대면 내가 도술로 이 연못의 물을 몽땅 없애버리겠다"는 협박문을 개구리에게 내보였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약을 풀어서 개구리들이 잠을 자게 했다는 전승 또한 있다. 몇몇 위인전에선 이걸 섞어서 수하들에게 약을 풀게하고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부적을 쓰고는 그걸 태워 뿌리며 위의 대사를 읊었다는 식으로 다 합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주민들 몰래 밤에 부하들을 시켜 대나무 장대로 연못을 마구 휘저어 개구리들이 울어댈 틈을 주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다.
- 호랑이 퇴치 설화도 존재한다. 지금의 서울시인 남경[29] 의 판관에 재직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강감찬이 한 노승을 불러 오게 했는데 그가 오자 "너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 땅으로 가거라!"라고 일갈했다. 그 노승이 바로 둔갑한 우두머리 호랑이였던 것이다. 호랑이들의 수가 많음을 알고 있었던 강감찬이 우두머리에게 3일간의 유예 기간을 주고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떠나기 하루 전에 우두머리가 암컷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강감찬에게 왔다. 보아하니 그가 데려온 암컷 호랑이가 이미 새끼를 밴 상태로 곧 있으면 새끼를 낳을 때가 되어 당장 떠날 수 없게 되어 그녀가 새끼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즉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강감찬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 암컷 호랑이만큼은 새끼를 낳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호랑이들은 서둘러 북방으로 전부 달아났고, 임신한 암컷 호랑이는 새끼들을 낳은 뒤 서둘러 북방으로 갔다.
- 어린 시절 학식이 풍부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된 적이 있는데, 그곳의 아전들이나 향리들은 새로 온 원님이 나이도 젊은 것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놓고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숫대가 사람 옷의 소매 속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걸 본 강감찬이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단 말인가!"라고 일성대갈을 날리자 아전과 향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에 한 혼례식에 갔다가 신랑을 봤는데, 그 신랑이 매우 미남이어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강감찬은 이 신랑이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활과 화살을 가진채 이 부부의 첫날밤 신방을 급습했으며 어른들에게도 신랑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자 신랑은 당황해서 멧돼지로 변신해서 도망쳤으나 강감찬의 화살에 쓰러졌다. 신부의 아버지가 저 신랑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강감찬은 "신랑이 고기 반찬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그림자에 꼬리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런 일화도 있다. 말단 지방관 시절, 한 마을의 혼례식에서 난리가 났는데, 신부가 두 명이나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즉 신부의 외모를 한 똑같은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는 건데, 쌍둥이였을 리는 없고 어느 한 쪽이 둔갑한 요괴였던 것이다. 이에 강감찬은 개 한 마리를 풀어 신부를 조사했는데, 한 명에게는 친근하게 들이댔지만 다른 한 명은 무서워했는데, 강감찬은 개가 무서워한 신부의 발바닥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 신부는 여우로 변해 피를 토하다 죽었다. 즉 100년 묵은 여우가 신부로 둔갑했던 것이다.
- 심지어는 염라대왕을 불러냈다는 구전 설화도 있다. 강원도에서 채집된 설화로 이 설화에 의하면 강림도령은 본래 강감찬의 부하였다. 강감찬의 집 밑에서 술 장사를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집에서 잘 자라던 아들 둘이 갑자기 죽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둘이나 잡아간 염라대왕이 야속해서 집에서 심부름 하는 강림도령을 불러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쓴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어느 곳 다리 밑에서 숨어있으면 사인교(四人轎)[30] 가 하나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사인교의 문을 열고 이 편지를 넣어라."라고 했다. 강림도령은 시키는 대로 그 다리 밑에 숨어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가마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강림도령은 놓칠세라 쫓아 달려가 가마의 문을 열고 편지를 넣자 염라대왕이 강감찬을 찾아왔다. 부른 이유를 묻자 강감찬은 한 집에 사는 아이들을 하루 저녁에 둘이나 잡아 갔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엿장수의 아이 둘이 한 짓인데 그 아이들은 술장사하는 집에서 기숙하다가 술장사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해 원수를 갚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강감찬은 염라대왕을 나무란 것을 사죄하자 염라대왕은 심부름을 잘하는 강림도령을 탐내어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강감찬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늦어 강림도령은 벌써 죽어있었다. 즉 염라대왕이 데리고 간 것이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엿장수 아들을 죽이고 수족과 같았던 강림도령마저 죽게 만든 술장사 내외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술장사 내외에 의해 죽었다는 엿장수 아이들의 시신을 찾고, 술장사 내외에게 큰 벌을 주었다.
- 벼락을 부러뜨렸다는 설화도 있다. 전쟁 중에 벼락에 맞아 병사들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걸핏하면 벼락 맞아 죽게 되어서야 쓰겠냐고 염려하며 벼락칼을 분질러 없애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던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하늘에서 벼락칼이 내려와서 강감찬을 치려고 했다. 강감찬은 얼른 벼락칼을 잡아서 분질러 버렸다. 그랫더니 그 후부터는 벼락 치는 횟수도 적어지고 벼락칼도 반이 잘려 버린 터라 얼른 나왔다가 얼른 들어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훨씬 덜 벼락 맞게 되었다고 한다. 강감찬이 죽은 뒤 다시 문곡성의 원신으로 돌아가자 그의 앞에 뇌신이 나타나 반 토막 난 벼락칼을 고쳐 달라고 따졌다. 문곡성은 그 이후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벼락칼을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직선으로 잇기가 불가능했고, 간신히 엇갈리게 접합시켜 지금의 벼락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 별의 정기를 타고 난 인물이라 그런지 다양한 설화가 전국 곳곳에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장군이라는 이미지로 남은 것과는 달리 민간 설화나 야사에서는 지략, 담력, 도력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으며 심지어는 암행어사 비슷한 것을 했다는 설화도 있다. 관련 설화를 모아 보면 어쩐지 단순한 지략가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도인처럼 묘사되고는 하는데 별 생각없이 설화를 보면 거의 '강감찬 퇴마록'이라고 봐도 지나치지가 않다. 《고려사》 <열전>에서도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있는 것에 비춰 보면 당시 민간에서도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강감찬이 요물들을 퇴치하거나 설복시키는 설화들은 고려의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을 은유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호랑이, 멧돼지, 귀신 등 백성들을 괴롭히는 요물들은 사실 지방의 호족이나 향리를 상징하며, 강감찬이 지방관으로써 이들의 전횡을 엄히 다스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권위를 세웠고, 나아가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마침 강감찬이 활약한 성종~현종 시대는 고려의 지방 행정 체계와 중앙 집권화가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5.3. 이름[편집]
5.3.1. 강한찬?[편집]
邯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설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이라 읽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감은 일본식 한자 독음이라고 하며, 한국어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한이 아니라 '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전국시대 7웅 중의 하나인 조나라의 수도 邯鄲은 '한단'으로 읽으면서 姜邯贊의 邯은 '감'으로 읽는 것이 오류라는 것이다. 또 다른 근거로 《초한지》에도 나오는 진(秦)나라 말기의 명장 장한(章邯)의 이름도 '한'이라고 읽는다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또 邯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hán밖에 없으며, 일본어 발음은 '감'과 유사한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이라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는 이 설을 따라 시종일관 '강한찬'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원래 邯 자의 주요 한자음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匣모寒운(胡安切, 音寒)에서 유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匣모談운(胡甘切, 音酣)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한자음은 운미(-n, -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두 운미가 -n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m으로 끝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 한자음이 만들어질 당시에 ハ행은 p 소리를 가졌으며, 匣모는 ガ행(g-) 또는 カ행(k-)으로 받아들였으므로 ハ행으로 시작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m 운미가 남아 있는 광동어에서는 邯 자의 한자음을 hon4과 ham4의 두 가지로 제시한다.# 심지어 匣모談운에 대응되는 ham4은 章邯이라는 인명에 쓰인다는 설명이 있으므로, 장한의 이름을 '한'이라고 읽는다는 근거는 오히려 역으로 '장한'이라는 이름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받아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한국 한자음에서는 匣모를 대체로 ㅎ 또는 ㄱ으로 받아들이며, ㄱ으로 받아들인 한자음은 속음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31] 전근대 한자사전인 《전운옥편》에서 邯 자의 한자음으로 '한'과 '함'을 제시했고, 邯 자와 동음 관계에 있는 酣 자의 한자음을 '함俗감'으로 제시한 것을 고려할 때, '감'이라는 독음이 邯 자의 속음일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姜邯贊을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강한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서구'(西歐)를 '서우'로, '대만'(臺灣)을 '대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결정적으로, 일본제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20세기 서적은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집필된 《 》이나 《조야기문》 등의 서적에서도 姜邯贊은 '강감찬'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감찬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어떻게 발음했을지 몰라도, 조선시대에는 이미 '강감찬'으로 발음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姜邯贊을 '강한찬'으로 읽었다는 증거가 새로 발견되거나 금천 강씨 종친회에서 '강한찬'으로 읽어 달라고 정정을 요구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강감찬을 '강한찬'이라고 불러 줘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적어도 일본제국에 의해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관악구에서 지정한 공식 영문 이름은 'Gang Gamchan'이다.
5.3.2. 姜邯贊과 姜邯瓚[편집]
'찬'에 대해서도 한자 표기가 조금 엇갈린다. 간단히 말하면 '찬'의 부수인 '구슬 옥' 변이 있냐 없냐 차이이다.
오늘날에는 《고려사》의 표기를 따라 姜邯贊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姜邯瓚이라고 쓴 것도 발견된다. 위에도 있는 강감찬이 흥국사에 세운 탑에 쓰여진 탑명에는 姜邯瓚이라고 쓰고 있다. 조선시대 《정조실록》을 보면 위의 흥국사 탑을 거론하면서 예조판서 민종현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
姜邯贊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의 표기이고, 강감찬이 세운 흥국사 석탑에는 姜邯瓚이라고 쓰여 있으니 석각이 목각 판본에 비해 믿을 만하다는 의미로 후자의 이름을 택하자고 건의하고 있는 것이고 정조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 무렵부터 논란이 된 이야기인지 정조 때의 한치윤도 《해동역사》에서 이 탑명을 근거로 들어"송경(松京: 개경) 흥국사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정조실록》 정조 20년 7월 21일.
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고려사》에서는 '구슬 옥' 변을 빼고 그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 흥국사 탑에 쓰인 것이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흥국사탑은 북한에 있어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나, 명문은 남아 있다.링크 하지만 대부분 姜邯贊으로 기록되고 여기서만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구슬 옥' 변은 노년에 붙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6. 대중매체[편집]
한국 역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구국영웅[32] 이고, 고려 현종[33]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라 충분히 많이 다뤄질만한 인물임에도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고려사 자체가, 특히 고려 초기의 기록이 많이 없어서 잘 드러낸 드라마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35] 드라마 문서에도 나오지만, 처음에 그는 드라마 주인공이 '강감찬'인 줄 알았고, 강씨 문중이나 강부자의 눈치를 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천추태후가 주인공이니 비중은 미묘했고[36] 드라마에서는 경주원군(왕욱, 김호진 역)의 동무로 나오며, 전쟁 때나 갑주를 입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부채를 손에 쥐고 있다. 여담으로 신정황태후 황보씨에게 소개할 때, "지난 날 황주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금주 강궁진 공의 아들"이라고 해서 한동안 조정에 뜻이 없다가 중반에 서희와 황주 집안의 청으로 인해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1, 2, 3차 여요전쟁 사이 활약한 장면이 나온다.
- <태종 이방원>의 후속 드라마로 2023년 하반기에 <고려거란전쟁>이란 제목이 결정되어 2차와 3차 여요전쟁을 다루는데, 고려 현종과 함께 주요 인물로 그려지며 강감찬 배우는 최수종으로 캐스팅되었다. 고려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작품의 주역인 현종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스승' 역할로 묘사된다고 한다. 태조 왕건으로서 자신이 세운 고려를 강감찬으로 환생(?)해 지킨다는 배우 개그와 더불어, 사극에서 벌써 3번째로 거란족과 대립하는 배역을 맡게 됐다.[37] #1 #2 #3 여담으로 상술했듯이 같은 KBS 대하사극인 천추태후에선 이덕화가 강감찬 역을 했는데, 과거 대조영에서 숙적인 설인귀와 대조영을 각각 맡았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해신에선 최수종이 장보고, 숙격적인 자미부인을 맡은 채시라가 이후 천추태후를 맡았다는 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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