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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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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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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
(918~981)

광평시중
김행도 | 박질영 | 류덕영 | 공훤 | 왕철 | 권직
문벌귀족기
(981~1170)

문하시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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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1170~1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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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
(1270~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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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6~1392)

문하시중 · 도첨의정승 · 도첨의시중
홍언박 | 윤환 | 이제현 | 염제신 | 염제신 | 이암 | 홍언박 | 류탁 | 경복흥 | 경복흥 | 류탁 | 경복흥 | 김보 | 이춘부 | 이인임 | 김일봉 | 이춘부 | 이인임 | 윤환 | 경복흥 | 염제신 | 경복흥 | 이인임 | 윤환 | 이인임 | 홍영통 | 이자송 | 조민수 | 임견미 | 최영 | 이성림 | 임견미 | 이성림 | 이인임 | 이성림 | 반익순 | 반익순 | 이성림 | 최영 | 이성계 | 최영 | 우현보 | 조민수 | 이성계 | 이색 | 이성계 | 이림 | 심덕부 | 이성계 | 정몽주 | 이성계 | 이성계 | 심덕부 | 배극렴 | 이성계
고려 국왕 · 무신정권 집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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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대보 · 시중 · 상대등) · 발해 대내상 · 태봉 시중 · 고려 문하시중
조선 영의정 ·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 대한민국 국무총리








고려 문하시중
강감찬
姜邯贊 | Gang Gamchan


파일:강감찬 표준영정.jpg장우성, 정부표준영정 5호, 197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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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0041956_4d21a032192b4.jpg황의돈의 《중등 조선역사》(1924)에 나온 강감찬의 초상화[1]

출생
948년 12월 27일[1]
(음력 정종 3년 11월 19일)
금주 낙성대
(現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사망
1031년 9월 15일[2] (향년 82세)[3]
(음력 덕종 즉위년 8월 20일)[4]
봉호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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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1019년(현종 10)
천수현 개국자(天水縣開國子)1020년(현종 11)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1031년(덕종 즉위)

시호
인헌(仁憲)
본관
진주 강씨
이름
은천(殷川) → 감찬(邯贊, 邯瓚)
《고려사》 권94, 열전7 강감찬

1. 개요
2. 경력
3. 생애
4. 평가
5. 기타
5.1. 강감찬 축제
5.2. 강감찬 설화
5.3. 이름
5.3.1. 강한찬?
5.3.2. 姜邯贊과 姜邯瓚
6. 대중매체
7.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살아서는 명재상이며 장군이었고, 죽어서는 전설이 되었다.

네이버 캐스트-강감찬, 귀주대첩의 신화를 쓰다.

고려문관.

동아시아 역사 전체에 영향을 미친 구국영웅이자 정치적으로도 고려의 리즈 시절을 이끈 현종의 치세에 큰 도움을 준 명재상이었다. 또한 고구려을지문덕, 조선이순신 등과 비견되는 명장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강감찬은 서희, 양규, 현종, 최영,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위인이다.

현대 한국인들에게는 주로 거란을 물리친 장군으로 알려져 무신#武臣으로 오해받지만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이다. 강감찬은 정식 무관#武官직에 봉해진 적이 없고, 여요전쟁 때 받은 상원수직은 임시 군단의 지휘관이라 비상설직이므로 품계가 있는 공식 무관직이 아니다.[5][6]

생전 받은 작위남작에서 진작된 후작이다. 봉지명은 천수현(天水縣). 아마 한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후작일 듯하다.

진주 강씨 중 인헌공파의 파조이기도 하다.[7]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8]에서 출생한 관계로 인헌공파는 '금천(衿川)[9] 강씨'로 따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2. 경력[편집]


고려 서북면 행영 군단
상원수(上元帥)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강감찬
부원수(副元帥)
대장군(大將軍) 강민첨
판관(判官)
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
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
기타 지휘관
병마판관(兵馬判官) 김종현
시랑(侍郞) 조원
휘하 장병
208,300 명
1018년, 거란소배압이 100,000명의 대군을 지휘하며 남침하자 고려는 서북면 행영[10]을 조성하고, 강감찬을 행영의 도통사로 삼았다. 이어 200,000명의 대군을 소환하여 강감찬을 상원수로 임명하고, 지금의 군단장과 같은 직위를 맡겼다.

여요전쟁 승리 후 직위
공신호
추충협모안국공신
(推忠協謀安國功臣)
현종이 봉한 공신호.
검교직
검교태위(檢校太尉)
'검교'는 직위에 이름만 올린 명예직을 의미한다. 태위삼공직 중 가장 높다.
직위
서경유수(西京留守)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
서경유수는 서경 분사의 장관이다.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중서문하성의 차관이다.
작위
천수현 개국남(天水縣開國男)
천수현은 봉지(封地), 개국은 미칭으로 개국남은 남작.
은퇴 후 직위
공신호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덕종이 봉한 공신호.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특진(特進)
개부의동삼사는 종1품 최고위 품계.
특진은 정2품 품계. 문산계 중에서 두 번째로 높다.
검교직
검교태부(檢校太傅)
태부는 삼사 중 가장 낮은 직위이다.
검교태사(檢校太師)
태사는 삼사 중 가장 높은 직위로 '천자의 스승'이란 의미의 지위였다.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문하시중중서문하성의 실질적인 장관이다.
시중(侍中)
아마 문하시중을 이르는 듯하다.
작위
천수현 개국자(天水縣開國子)
천수현은 봉지, 개국은 미칭으로 개국자는 자작.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
봉지가 천수군으로 승격됐다. 작위도 후작으로 진작되었다.
사후 직위
시호
인헌공(仁憲公)
문종이 추증함.
향직
품계

대승(大丞)
덕종이 추증함. 3품 1등위 향직 품계.
수직
수태사(守太師)
수직은 행수법에 따른 것으로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으면 붙는다. 강감찬은 종1품 개부의동삼사 및 정2품 특진이지만 태사는 정1품이다.
직위
중서령(中書令)
중서령은 중서문하성의 명목상 장관인 명예직이다. 고위급 왕족이나 공신만 임명된다.


3. 생애[편집]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이다.[11]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다.[12]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3] 강궁진(姜弓珍)이었다.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14]에서 금천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강감찬을 보았다.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한다.[15] 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16]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17]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다. 그래서 그가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이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다.[18] 그런데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다.[19]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현종 1) 요나라성종이 400,000명의 대군으로 침공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파일:external/www.independence.or.kr/img_018.jpg
귀주대첩 기록화
그 후 하공진으로 하여금 요 성종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했으며 이후 한림학사 · 승지 · 중추원사 · 이부상서 · 서경유수 · 내사시랑평장사에서 문하시중까지 올라가 승승장구했고, 함경도 쪽으로 파견되어 동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다. 늦게 출세하고 능력도 늦게 발휘된 전적을 보면 대기만성형 인물에 가까웠던 것 같다. 1019년(현종 10) 거란의 제3차 침공 당시 서북면행영도통사였던 강감찬은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때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유격전,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포위섬멸전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해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
거란의 제3차 침공이 끝난 1020년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데 토사구팽을 염려했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74세나 되는 고령에 전쟁터를 다녀왔으니 건강 문제였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20] 다만 훌륭한 군주들이 그렇듯 현종은 강감찬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주고 3일에 1번만 출근토록 명령했다.

강감찬이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며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도록 하였다.

고려사》 <강감찬 열전> 中.


1021년 수도 개경의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다.[21]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 5년 5월.


1030년 개경의 주위에 나성을 두르라는 간언을 올렸고[22]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문하시중이 되었는데 현종은 강감찬이 문하평장사에 임명될 때 거란의 제2차 침공 당시 몽진을 주장한 것[23]을 언급하며

"그 때 강공의 계책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24]

라고 공을 평가했다. 1031년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 개국후(開府儀同三司 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 特進 檢校太師 侍中 天水縣 開國侯)

에 봉해졌으며, 1031년 8월에 향년 84세로 사망했는데 현종이 붕어하고 3개월 뒤의 일이었다. 사후 내사령 유진[25]의 전례를 따라 조정에서 제사지내주었고, 현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강감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의외의 장소에 있는데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옥산면 국사리로 묘가 발견된 해가 1963년이어서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금천 강씨에서는 조선 인조 때의 민회빈 강씨와 관련된 강빈 옥사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강빈의 아버지인 우의정 강석기는 강감찬의 17대 손으로 강빈 역시 강감찬의 후손이었는데 강빈은 비정한 시아버지 인조로 인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해야 했고, 그 형제들도 모조리 장살되거나 유배를 당하는 등 말로 다하지 못할 수난을 당했다. 그래서 강석기의 친척들은 멸문지화를 모면하기 위해 성씨를 바꾸거나 조상의 묘에 성묘도 안 하는 과정에서 강감찬의 묘까지 실전되고 말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문중의 주장일 뿐 근거는 전혀 없으며 금천 강씨 문중에서도 실제로 이 묘가 강감찬의 묘가 맞는지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강빈의 옥사는 어디까지나 강빈과 주변인이 참화를 입은거지 진주 강씨 인헌공파 전체와 그들과 혼맥, 학맥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해를 입은 것이 아니다. 특히 성씨를 바꾸었다는 부분은 왕씨 몰살을 레퍼런스 삼아 과장한 티가 너무 많이 난다. 무엇보다 순종 대 《승정원일기》에 강감찬의 묘를 보수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라는 기록이 멀쩡히 등장한다.

국역본만 보면 '찾아 보수하라'는 대목을 '실전된 묘를 수소문하라'는 의미로 착각할 수 있는데 원문을 보면 방문(訪問)이며 단순히 '지방관이 방문하여 시설을 정비하고 제사지내라'는 의미이다. 강감찬은 조선에서도 명신으로 받아들여져 선조 때와 광해군 때 선조와 광해군 부자 모두 "강감찬의 묘 관리에 신경을 쓰고 나무를 심어주라"는 명령을 내린 기록이 보이며 멸망 직전인 순종 대도 묘를 정비하고 제사지내게 했다. 묘에 대한 건 아니지만 숙종 때에도 강감찬의 사우(祠宇)에 액호를 내렸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으므로, 강감찬은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충신으로 나라에서 기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후손들도 조정의 눈이 두려워 묘를 찾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묘를 찾지 않으면 "조상이란 것만으로도 정중히 모셔야 하는데, 나라의 충신이기까지 한 조상을 외면하다니 사대부의 자격도 없는 배은망덕한 가문"이라며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국가에서 정비를 해줄 정도니 당연히 그에 관한 행정 기록이나 참여한 제3자들이 여럿 있을텐데 강씨 후손 일부가 숙청되었다고 단기간에 통째로 망실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6.25 전쟁으로 이어지는 혼란 속에 실전되었다는 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삐딱하게 바라보면 불민한 후손들이 겨우 몇 십 년 사이에 조상 묘를 잃어버려 놓고 나라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관리해 준 조선 왕실에 책임을 전가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이다. 한편 갑신정변 등으로 신분 제도가 철폐되면서 실제로 강씨가 아닌 사람들이 구한말의 혼란기에 금천 강씨 문중으로 편입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금천 강씨 문중에서 가장 유명한 위인인 강감찬의 묘를 찾아내는 퍼포먼스를 취해서 나중에 편입된 출처가 불분명한 후손들이 자신들을 금천 강씨의 온전한 후손으로 주장한다는 의견이다.

오늘날 강감찬의 묘가 있는 마을에는 발견 이전부터 '유명한 장수의 무덤이 동네 산자락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왔으며 그 무덤 주변 역시 영험한 장소로 여겨졌다고 한다. 금천 강씨 후손들은 이같은 구전 이야기를 바탕으로 지난 1963년, 일대 묘지를 수소문하던 끝에 '姜邯贊'(강감찬) 이름이 쓰여진 묘지석을 발견해서 강감찬 묘로 삼았다고 한다. 하지만 문화재 위원들이 "지석이 너무 망실되어서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해당 무덤이 강감찬의 묘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고 문화재 지정도 보류했다. 조선 왕조에서 관리받던 시기에는 분명 존재했을 분묘와 석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아 모두 1964년 이후 제작되었다. 강감찬의 진짜 묘가 아닐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으며 엄밀히 말해 이 묘는 강감찬 묘가 아니라 '전(傳) 강감찬 묘'이다. 지자체에서도 문화재 지정은 하지 않았고, 청원군에서 강감찬 묘에 지내는 제례 비용을 문중에 대 주기만 하다가 2014년 7월 청주시와 청원군이 통합이 되어서 현재는 흥덕구에서 이 묘를 관리하고 있다.


4. 평가[편집]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앞에서 언급했듯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

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이다.[26] 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그에 대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

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

라며 칭송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소리이다.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이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요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간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현종 때부터 인종 때까지에 이르는, 한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 정치/경제/문화/군사적으로 가장 빛나던 시기 중 하나였다. 강감찬은 고려시대 최고의 군주인 현종을 보필한 '왕좌지재'의 신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동아시아 여러 나라가 팽팽한 세력 균형을 유지하며 오래도록 평화가 이어진 시기는 사실 찾아봐도 거의 없는 편인데,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며 동아시아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 요군을 귀주대첩으로 크게 물리친 덕택에 요나라는 정복전쟁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고, 북송, 요나라, 고려, 서하 등 4개국 간의 평화 균형 체제는 훗날 금나라가 흥기하여 요나라와 북송을 잡아먹을 때까지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단순히 구국의 영웅 이상인, 동아시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인 셈이다.[27]


5. 기타[편집]


파일:external/wmk.kr/F93102005_0_0_0_0_0_0.jpg
전쟁기념관에 있는 흉상
파일:attachment/강감찬/e0017672_4ebdd4af609b7.jpg
낙성대공원의 기마상


  •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28]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다.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했다. 관악구 낙성대동의 낙성대역의 부역명으로 '강감찬'이 붙어있다. 이곳의 마을버스 회사명도 각각 은천운수, 인헌운수다. 매년 10월에는 강감찬 축제를 열고 있다.

  • 한때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에도 강감찬 동상이 있었다. 강감찬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수원에 강감찬의 동상이 들어선 사연은 1971년 박정희 집권 당시 대통령의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건립하라"라는 밀어붙이기 식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결국 팔달산의 강감찬 동상은 2007년에 이전되고, 현재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성신사가 복원되었다.
파일:강감찬함.jpg
강감찬함
  •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의 제5번함인 DDH-979는 장군의 함자(銜字)를 따서 '강감찬함'이라 명명되었다.
  • 무공훈장인헌무공훈장은 강감찬 장군의 시호에서 유래되었다.

  • 무속 신앙에서는 여러 명장들과 함께 군웅신으로 모셔진다.


5.1. 강감찬 축제[편집]





2022년 강감찬 축제
매년 가을 관악구에서는 강감찬 축제를 한다. 이때 인헌공 강감찬 장군 추모제향을 한다. 추모제향은 수십년 전부터 진행되었다. 2023년 기준 34회를 맞이하였으며 관악문화원의 주관으로 이루어진다. 제사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시보격고: 북을 치며 모이시오라고 외친다.
  • 전폐례: 초헌관이 폐백을 올리고 향불을 붙인다.
  • 초헌례: 초헌관이 술을 올린다. 축관이 축문을 읽는다.
  • 아헌례: 아헌관이 술을 올린다.
  • 종헌례: 종헌관이 술을 올린다.
  • 음복례: 초헌관이 음복주와 조육을 먹는다.
  • 망예례: 초헌관이 폐백과 축문을 사당 옆에서 불사른다.
  • 예필: 제례가 종료되었음을 알린다.
  • 일반분향: 안국사 앞에 분향, 헌화한다.

2023년 강감찬 축제
제사는 오전에 열리며 2023년에는 10월 13일에 열렸다. 2023년 강감찬 축제는 10월 13일 금요일부터 15일 일요일까지 진행되었다. 낙성대공원에 다양한 천막이 쳐져 다양한 행사가 진행되었으며, 강감찬 장군을 주제로 한 연극과 태권도 공연, 드론쇼도 하였다. 기회가 되면 가볼 만한 축제이다. 서울시에서 우수축제로 지정된 바 있다.

5.2. 강감찬 설화[편집]


  • 소년 시절 너무 잘생겨서 고민하다가 스스로 천연두를 얽게 해서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과거 천연두는 생명에 관계될 수 있을 만큼 위험한 질병이었기에, 고의적으로 천연두를 앓았다는 말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위인치고는 풍채가 떨어지는 그였기에 그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려 한 야사가 덧붙은 모양이다. 다만 실제였을 수도 있는데, 당시의 천연두는 난치병이어서 심하게 앓으면 죽지만, 가볍게 앓으면 면역이 생겨 다시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고대 인도에서는 면역을 유도하기 위해 건강한 사람의 팔이나 종아리 등에 상처를 내고 천연두 환자의 피고름을 살짝 발라 일부러 감염시켰다가 면역만 갖고 넘어가게 하는 인두법을 개발했고, 이것이 중국과 중세 유럽으로도 넘어갔다. 그러나 부작용 역시 만만치 않아서 인두법은 계속 논쟁이 거듭되다가 영국 의사 에드워드 제너가 우두 바이러스에서 가져온 종두법을 개발하여 더 안전한 접종법을 정착시켰고, 1980년 완전 박멸이 선포되어 현재까지 인류가 박멸한 유일한 질병으로 남아 있다.

  • 장인어른을 골탕먹인 민담도 전해지는데 마치 후대 권율이항복 사이의 일화를 보는 듯할 정도로 유사하다. 강감찬이 혼인을 하고 처가에 갈 때마다 장인에게 매번 큰절을 올려야 하는 것이 번거로웠다. 그래서 한 번은 처가에 가서 큰절을 올리는데 강감찬은 장인의 바로 앞까지 가서 장인의 코에 얼굴이 닿을락말락할 정도로 머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깜짝 놀란 장인이 "내 콧등 떨어지는 줄 알았네. 다음부터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게"라고 말했는데, 강감찬은 다음에 처가에 갔을 때 장인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괘씸하게 여긴 장인이 왜 절을 하지 않느냐고 따지자 강감찬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장인어른께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절을 올리라고 하셨기에 문 밖에서 절을 올리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장인의 말을 잘 들은 것 뿐이며, 만약 그렇다고 장인 앞에서 한 번 더 절을 올리면 죽은 사람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이 된다는 걸 노린 것이다. 이 민담의 결말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강감찬의 이런 재치있는 대답을 들은 장인은 크게 웃으면서 앞으론 굳이 자신에게 억지로 절을 할 필요 없다고 말했다는 결말이 그나마 알려져 있다.

  • 개구리 퇴치 설화는 여러 지역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개구리가 너무 시끄럽게 울어대서 관내 백성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자 강감찬이 이를 퇴치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강감찬이 이걸 어떻게 퇴치했는지는 지방 구전마다 다르다. 부적을 썼다는 전승도 있고 "니들 계속 울어대면 내가 도술로 이 연못의 물을 몽땅 없애버리겠다"는 협박문을 개구리에게 내보였다는 전승도 있다. 혹은 약을 풀어서 개구리들이 잠을 자게 했다는 전승 또한 있다. 몇몇 위인전에선 이걸 섞어서 수하들에게 약을 풀게하고 자신은 사람들 앞에서 부적을 쓰고는 그걸 태워 뿌리며 위의 대사를 읊었다는 식으로 다 합쳐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또는 주민들 몰래 밤에 부하들을 시켜 대나무 장대로 연못을 마구 휘저어 개구리들이 울어댈 틈을 주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다.

  • 호랑이 퇴치 설화도 존재한다. 지금의 서울시인 남경[29]의 판관에 재직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사람들을 해치는 일이 잦았다. 그러자 강감찬이 한 노승을 불러 오게 했는데 그가 오자 "너의 무리를 이끌고 북쪽 땅으로 가거라!"라고 일갈했다. 그 노승이 바로 둔갑한 우두머리 호랑이였던 것이다. 호랑이들의 수가 많음을 알고 있었던 강감찬이 우두머리에게 3일간의 유예 기간을 주고 떠나겠다는 약속을 받았는데 떠나기 하루 전에 우두머리가 암컷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강감찬에게 왔다. 보아하니 그가 데려온 암컷 호랑이가 이미 새끼를 밴 상태로 곧 있으면 새끼를 낳을 때가 되어 당장 떠날 수 없게 되어 그녀가 새끼를 낳고 몸조리를 하는 즉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강감찬은 처음엔 당황했으나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그 암컷 호랑이만큼은 새끼를 낳고 떠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후 호랑이들은 서둘러 북방으로 전부 달아났고, 임신한 암컷 호랑이는 새끼들을 낳은 뒤 서둘러 북방으로 갔다.

  • 어린 시절 학식이 풍부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작은 고을의 원님이 된 적이 있는데, 그곳의 아전들이나 향리들은 새로 온 원님이 나이도 젊은 것을 보고 그를 비웃었다. 그러자 강감찬은 이들을 불러놓고 동헌 뜰의 수수를 가리키며 "저기 수숫대를 모두 그대들 소매에 넣어 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수숫대가 사람 옷의 소매 속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걸 본 강감찬이 "겨우 1년 자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감히 20년도 넘게 자란 나를 소매 안에 넣고 흔들려 했단 말인가!"라고 일성대갈을 날리자 아전과 향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에 한 혼례식에 갔다가 신랑을 봤는데, 그 신랑이 매우 미남이어서 인간 세상의 사람이 아닌 듯 했다. 강감찬은 이 신랑이 인간이 아닌 것을 알아채고, 활과 화살을 가진채 이 부부의 첫날밤 신방을 급습했으며 어른들에게도 신랑이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자 신랑은 당황해서 멧돼지로 변신해서 도망쳤으나 강감찬의 화살에 쓰러졌다. 신부의 아버지가 저 신랑의 정체를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강감찬은 "신랑이 고기 반찬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과 그림자에 꼬리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알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 이런 일화도 있다. 말단 지방관 시절, 한 마을의 혼례식에서 난리가 났는데, 신부가 두 명이나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즉 신부의 외모를 한 똑같은 여자가 두 명이나 있었다는 건데, 쌍둥이였을 리는 없고 어느 한 쪽이 둔갑한 요괴였던 것이다. 이에 강감찬은 한 마리를 풀어 신부를 조사했는데, 한 명에게는 친근하게 들이댔지만 다른 한 명은 무서워했는데, 강감찬은 개가 무서워한 신부의 발바닥을 단검으로 찔렀다. 그러자 그 신부는 여우로 변해 피를 토하다 죽었다. 즉 100년 묵은 여우가 신부로 둔갑했던 것이다.

  • 심지어는 염라대왕을 불러냈다는 구전 설화도 있다. 강원도에서 채집된 설화로 이 설화에 의하면 강림도령은 본래 강감찬의 부하였다. 강감찬의 집 밑에서 술 장사를 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 남편은 고약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집에서 잘 자라던 아들 둘이 갑자기 죽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한 집에서 어린아이를 둘이나 잡아간 염라대왕이 야속해서 집에서 심부름 하는 강림도령을 불러 자신이 염라대왕에게 쓴 편지를 주며 말하기를 "어느 곳 다리 밑에서 숨어있으면 사인교(四人轎)[30]가 하나 지나갈 것이다. 그러면 사인교의 문을 열고 이 편지를 넣어라."라고 했다. 강림도령은 시키는 대로 그 다리 밑에 숨어있었는데 새벽이 되자 가마 하나가 느닷없이 나타나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강림도령은 놓칠세라 쫓아 달려가 가마의 문을 열고 편지를 넣자 염라대왕이 강감찬을 찾아왔다. 부른 이유를 묻자 강감찬은 한 집에 사는 아이들을 하루 저녁에 둘이나 잡아 갔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무랐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그건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장수의 아이 둘이 한 짓인데 그 아이들은 술장사하는 집에서 기숙하다가 술장사하는 사람에 의해 죽임을 당해 원수를 갚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들은 강감찬은 염라대왕을 나무란 것을 사죄하자 염라대왕은 심부름을 잘하는 강림도령을 탐내어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강감찬이 안 된다고 했지만 이미 늦어 강림도령은 벌써 죽어있었다. 즉 염라대왕이 데리고 간 것이었다. 강감찬이 생각해보니 엿장수 아들을 죽이고 수족과 같았던 강림도령마저 죽게 만든 술장사 내외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그래서 술장사 내외에 의해 죽었다는 엿장수 아이들의 시신을 찾고, 술장사 내외에게 큰 벌을 주었다.

  • 벼락을 부러뜨렸다는 설화도 있다. 전쟁 중에 벼락에 맞아 병사들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걸핏하면 벼락 맞아 죽게 되어서야 쓰겠냐고 염려하며 벼락칼을 분질러 없애야겠다고 굳게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던 하루는 일부러 샘물가에 앉아서 일을 보는데, 하늘에서 벼락칼이 내려와서 강감찬을 치려고 했다. 강감찬은 얼른 벼락칼을 잡아서 분질러 버렸다. 그랫더니 그 후부터는 벼락 치는 횟수도 적어지고 벼락칼도 반이 잘려 버린 터라 얼른 나왔다가 얼른 들어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훨씬 덜 벼락 맞게 되었다고 한다. 강감찬이 죽은 뒤 다시 문곡성의 원신으로 돌아가자 그의 앞에 뇌신이 나타나 반 토막 난 벼락칼을 고쳐 달라고 따졌다. 문곡성은 그 이후부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벼락칼을 고치려고 노력했지만 직선으로 잇기가 불가능했고, 간신히 엇갈리게 접합시켜 지금의 벼락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 별의 정기를 타고 난 인물이라 그런지 다양한 설화가 전국 곳곳에 현재까지도 많이 남아 있다. 현재 장군이라는 이미지로 남은 것과는 달리 민간 설화나 야사에서는 지략, 담력, 도력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많으며 심지어는 암행어사 비슷한 것을 했다는 설화도 있다. 관련 설화를 모아 보면 어쩐지 단순한 지략가가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도인처럼 묘사되고는 하는데 별 생각없이 설화를 보면 거의 '강감찬 퇴마록'이라고 봐도 지나치지가 않다. 《고려사》 <열전>에서도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
는 평가가 있는 것에 비춰 보면 당시 민간에서도 지혜로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강감찬이 요물들을 퇴치하거나 설복시키는 설화들은 고려의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을 은유한다는 해석도 있다. 이 해석에 의하면 호랑이, 멧돼지, 귀신 등 백성들을 괴롭히는 요물들은 사실 지방의 호족이나 향리를 상징하며, 강감찬이 지방관으로써 이들의 전횡을 엄히 다스려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의 권위를 세웠고, 나아가 지방 행정 정비와 중앙 집권 확립에 공헌했다는 것이다. 마침 강감찬이 활약한 성종~현종 시대는 고려의 지방 행정 체계와 중앙 집권화가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5.3. 이름[편집]



5.3.1. 강한찬?[편집]


邯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설이 있는데, 그의 이름은 강감찬이 아니라 강한찬이라 읽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이 설에 따르면 은 일본식 한자 독음이라고 하며, 한국어에서는 어찌 된 일인지 이 아니라 '감'으로 굳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 전국시대 7웅 중의 하나인 조나라의 수도 邯鄲은 '한단'으로 읽으면서 姜邯贊의 邯은 '감'으로 읽는 것이 오류라는 것이다. 또 다른 근거로 《초한지》에도 나오는 진(秦)나라 말기의 명장 장한(章邯)의 이름도 '한'이라고 읽는다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또 邯의 표준 중국어 발음이 hán밖에 없으며, 일본어 발음은 '감'과 유사한 gan(ガン, 오음) 또는 kan(カン, 한음)이라는 것도 근거로 거론된다.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는 이 설을 따라 시종일관 '강한찬'으로 표기한다.

그러나 원래 자의 주요 한자음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匣모寒운(胡安切, 音)에서 유래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匣모談운(胡甘切, 音酣)에서 유래한 것이다. 두 한자음은 운미(-n, -m)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데, 표준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는 두 운미가 -n으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m으로 끝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일본 한자음이 만들어질 당시에 ハ행은 p 소리를 가졌으며, 匣모는 ガ행(g-) 또는 カ행(k-)으로 받아들였으므로 ハ행으로 시작하는 한자음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 -m 운미가 남아 있는 광동어에서는 邯 자의 한자음을 hon4과 ham4의 두 가지로 제시한다.# 심지어 匣모談운에 대응되는 ham4은 章邯이라는 인명에 쓰인다는 설명이 있으므로, 장한의 이름을 '한'이라고 읽는다는 근거는 오히려 역으로 '장한'이라는 이름이 잘못된 것이 아니냐고 받아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한국 한자음에서는 匣모를 대체로 ㅎ 또는 ㄱ으로 받아들이며, ㄱ으로 받아들인 한자음은 속음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31] 전근대 한자사전인 《전운옥편》에서 邯 자의 한자음으로 '한'과 '함'을 제시했고, 邯 자와 동음 관계에 있는 酣 자의 한자음을 '함俗감'으로 제시한 것을 고려할 때, '감'이라는 독음이 邯 자의 속음일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는 姜邯贊을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있어도 '강한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는 될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강함찬'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서구'(西歐)를 '서우'로, '대만'(臺灣)을 '대완'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 정도의 설득력을 가질 뿐이다.

결정적으로, 일본제국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20세기 서적은 물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집필된 《 》이나 《조야기문》 등의 서적에서도 姜邯贊은 '강감찬'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감찬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어떻게 발음했을지 몰라도, 조선시대에는 이미 '강감찬'으로 발음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姜邯贊을 '강한찬'으로 읽었다는 증거가 새로 발견되거나 금천 강씨 종친회에서 '강한찬'으로 읽어 달라고 정정을 요구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강감찬을 '강한찬'이라고 불러 줘야 할 이유는 없다. 또한 적어도 일본제국에 의해 '강감찬'이라는 이름이 정착되었다는 주장은 낭설이다.

관악구에서 지정한 공식 영문 이름은 'Gang Gamchan'이다.


5.3.2. 姜邯贊과 姜邯瓚[편집]


'찬'에 대해서도 한자 표기가 조금 엇갈린다. 간단히 말하면 '찬'의 부수인 '구슬 옥' 변이 있냐 없냐 차이이다.

오늘날에는 《고려사》의 표기를 따라 姜邯이라고 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姜邯이라고 쓴 것도 발견된다. 위에도 있는 강감찬이 흥국사에 세운 탑에 쓰여진 탑명에는 姜邯瓚이라고 쓰고 있다. 조선시대정조실록》을 보면 위의 흥국사 탑을 거론하면서 예조판서 민종현이 이런 상소를 올렸다.

"송경(松京: 개경) 흥국사의 옛터에 탑 하나가 있는데, 탑면에 음기(陰記)가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강감찬이 쓴 것인데 그 이름이 찬(瓚) 자로 적혀 있어 공사 서적에 실려 있는 바와 다릅니다. 대개 석각(石刻)은 목각 판본에 비하여 훨씬 더 믿을 만한 것입니다. 지금 이후로 강감찬의 이름을 모두 찬(瓚) 자로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從之。 又啓言: “松京興國寺舊址有一塔, 塔面有陰記, 卽姜邯賛所書, 而其名以瓚字書之, 與公私書籍所載者不同。 蓋石刻之可信, 比諸登榟之本, 不啻懸隔。 自今以後姜邯賛名字皆以瓚字書之恐好矣。” 從之。

《정조실록》 정조 20년 7월 21일.

姜邯이라는 표기는 조선시대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의 표기이고, 강감찬이 세운 흥국사 석탑에는 姜邯이라고 쓰여 있으니 석각이 목각 판본에 비해 믿을 만하다는 의미로 후자의 이름을 택하자고 건의하고 있는 것이고 정조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 무렵부터 논란이 된 이야기인지 정조 때의 한치윤도 《해동역사》에서 이 탑명을 근거로 들어

"《고려사》에서는 '구슬 옥' 변을 빼고 그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이 흥국사 탑에 쓰인 것이 정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흥국사탑은 북한에 있어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나, 명문은 남아 있다.링크 하지만 대부분 姜邯으로 기록되고 여기서만 다르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구슬 옥' 변은 노년에 붙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6. 대중매체[편집]


한국 역사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구국영웅[32]이고, 고려 현종[33] 시기에 활동한 사람이라 충분히 많이 다뤄질만한 인물임에도 많이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고려사 자체가, 특히 고려 초기의 기록이 많이 없어서 잘 드러낸 드라마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 1974년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배우 주현[34]이 연기했다.

  • 2009년 KBS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이덕화가 연기했다.[35] 드라마 문서에도 나오지만, 처음에 그는 드라마 주인공이 '강감찬'인 줄 알았고, 강씨 문중이나 강부자의 눈치를 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천추태후가 주인공이니 비중은 미묘했고[36] 드라마에서는 경주원군(왕욱, 김호진 역)의 동무로 나오며, 전쟁 때나 갑주를 입을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부채를 손에 쥐고 있다. 여담으로 신정황태후 황보씨에게 소개할 때, "지난 날 황주 사건에 연루되어 죽은 금주 강궁진 공의 아들"이라고 해서 한동안 조정에 뜻이 없다가 중반에 서희와 황주 집안의 청으로 인해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1, 2, 3차 여요전쟁 사이 활약한 장면이 나온다.


제목은 《별을 품은 아이》로 카카오페이지의 웹툰 《관악 창작만개》에서 여요전쟁을 다룬 4화가 연재되었고, 이어서 여요전쟁을 대비하는 5화가 추가로 연재되었다.

  • <태종 이방원>의 후속 드라마로 2023년 하반기에 <고려거란전쟁>이란 제목이 결정되어 2차와 3차 여요전쟁을 다루는데, 고려 현종과 함께 주요 인물로 그려지며 강감찬 배우는 최수종으로 캐스팅되었다. 고려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자 작품의 주역인 현종에게 있어서는 '정치적 스승' 역할로 묘사된다고 한다. 태조 왕건으로서 자신이 세운 고려를 강감찬으로 환생(?)해 지킨다는 배우 개그와 더불어, 사극에서 벌써 3번째로 거란족과 대립하는 배역을 맡게 됐다.[37] #1 #2 #3 여담으로 상술했듯이 같은 KBS 대하사극인 천추태후에선 이덕화가 강감찬 역을 했는데, 과거 대조영에서 숙적인 설인귀대조영을 각각 맡았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해신에선 최수종이 장보고, 숙격적인 자미부인을 맡은 채시라가 이후 천추태후를 맡았다는 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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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둘러보기[편집]



고려사(高麗史)

[ 세가(世家) ]
1·2권
3권
4·5권
태조 · 혜종 · 정종定宗 · 광종 · 경종
성종 · 목종
현종 · 덕종
6권
7·8·9권
10권
정종靖宗
문종 · 순종
선종 · 헌종
11·12·13·14권
15·16·17·18·19·20권
21권
숙종 · 예종
인종 · 의종 · 명종
신종 · 희종 · 강종
22·23·24권
25·26·27권
28·29·30·31·32권
고종
원종
충렬왕
33·34·35권
36권
37권
충선왕 ·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 충정왕
38·39·40·41·42·43·44권
133·134·135·136·137권 ※ [ 열전 ]
45·46권
공민왕
우왕 · 창왕
공양왕
[ 지(志) ]
47·48·49권 「천문(天文)」 / 50·51·52권 「역(曆)」 / 53·54·55권 「오행(五行)」 / 56·57·58권 「지리(地理)」 / 59·60·61·62·63·64·65·66·67·68·69권 「예(禮)」 / 70·71권 「악(樂)」 / 72권 「여복(輿服)」 / 73·74·75권 「선거(選擧)」 / 76·77권 「백관(百官)」 / 78·79·80권 「식화(食貨)」 / 81·82·83권 「병(兵)」 / 84·85권 「형법(刑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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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87권 「연표(年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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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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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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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국장공주 · 조국장공주 · 경화공주 · 명덕태후 홍씨 · 수비 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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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 · 장녕공주
-
세자 왕석 · 숙녕궁주 · 정신궁주 · 경화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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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 - 제신(諸臣) ]
92권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 유금필 · 최응 · 최언위 (최광윤 최행귀 최광원) · 왕유 왕자지 · 박술희 · 최지몽 · 왕식렴 · 박수경 · 왕순식 이총언 견금 윤선 흥달 선필 태평 · 공직 · 박영규
93권
서필 · 최승로 최제안 · 쌍기 · 최량 · 한언공 · 류방헌 · 김심언 · 최항 · 채충순
94권
서희 서눌 서공 · 유진 · 강감찬 · 최사위 · 황보유의 장연우 · 양규 (양대춘) · 지채문 지녹연 · 하공진 · 김은부 · 주저 · 강민첨 · 곽원 · 왕가도 · 김맹 · 류소 · 윤징고 · 위수여 · 전공지 · 이주헌 · 이주좌 · 안소광 · 조지린
95권
최충 최유선 최사제 최약 최윤의 · 이자연 이자량 이자인 이혁유 이자현 이자덕 이예 이공수 이지저 이오 이광진 · 박인량 박경인 박경백 박경산 · 황주량 · 류신 · 왕총지 · 위계정 · 소태보 왕국모 고의화 · 문정 · 정문 · 김원정 · 손관 · 최사량 · 김선석 · 임의 임원후 임극충 임극정 임부 임유 임익 임항 · 김한충
96권
최사추 · 김인존 · 윤관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이) 윤인첨 윤세유 윤상계 · 오연총
97권
김부일 김부의 · 고령신 · 김황원 이궤 · 곽상 곽여 · 유재 호종단 신안지 · 김경용 (김인규) · 최홍사 · 한안인 · 이영 · 한충 · 임개 유녹숭 · 김준 · 류인저 · 강증 · 허경 · 문관 · 정항 정서 · 김극검 · 김약온
98권
김부식 김돈중 김군수 · 정습명 · 고조기 · 김정순 · 정극영 · 박정유 · 최사전 · 김향 · 최자성 · 김진 · 임완 · 최기우 · 김수자 · 최유 · 이숙 이위 · 허재
99권
양원준 · 최유청 최당 최린 최선 최종준 최온 최문본 최평 최옹 · 이공승 · 신숙 · 한문준 · 문극겸 · 류공권 류택 · 조영인 · 왕세경 · 이순우 · 임민비 · 최척경 · 함유일 · 염신약 · 이지명 · 유응규 유자량 · 현덕수 · 최균 최보순 최윤개 · 김거공 · 한유한
100권
두경승 · 우학유 · 노영순 · 조위총 · 방서란 · 박제검 · 기탁성 · 홍중방 · 경대승 · 진준 · 최세보 · 박순필 · 이영진 · 백임지 · 이준창 · 최충렬 · 정세유 정숙첨 정안 · 정국검 이유성 · 정방우 · 정언진
101권
민영모 민식 · 송저 · 김광중 김체 · 안유발 · 최여해 · 최우청 · 왕규 · 차약송 기홍수 · 정극온 · 류광식 · 권경중 · 김태서 김약선 김미 · 문한경 권세후 백돈명 · 노인수 · 김의원
102권
금의 · 이규보 이익배 · 유승단 · 김인경 김승무 · 이공로 · 이인로 오세재 조통 임춘 · 조문발 · 이순목 이수 · 김창 · 송국첨 · 최자 하천단 · 채송년 채정蔡楨 · 손변 · 권수평 · 이순효 장순량 · 송언기 · 김수강 · 김지대 · 이장용
103권
104권
조충 조변 · 김취려 김문연 김변 · 이적 · 채정蔡靖 · 박서 송문주 · 김경손 김혼 · 최춘명 · 김희제 · 이자성 · 김윤후 · 김응덕
김방경 김구용 김제안 김흔 김순 김영돈 김영후 김사형 박구 · 한희유 · 나유 나익희 · 원충갑 · 김주정 김심 김종연 김석견
105권
류경 류승 류돈 류만수 · 허공 허종 허관 허금 허부 허유 · 홍자번 홍승서 홍영통 · 정가신 · 안향 안우기 안목 · 설공검 · 유천우 · 조인규 조서 조연 조덕유 조린 조연수 조위
106권
백문절 백이정 · 박항 · 곽예 · 주열 · 이주 이행검 · 장일 · 김구 · 이승휴 이연종 · 김훤 김개물 · 정해 정오 정포 정공권 · 조간 · 심양 · 추적 이인정 채우 · 김유성 곽린 · 윤해 윤택 · 이영 · 엄수안 · 안전 · 최수황 · 박유 · 홍규 홍융
107권
108권
한강 한악 한수 한방신 · 원부 원충 원호 원선지 원송수 · 김련 · 김부윤 · 정인경 · 권단 권부 권준 권렴 권용 권적 (권고) 권화 권근 · 민지 민상정
민종유 민적 민사평 민변 민제 · 김지숙 김인연 · 정선 · 이혼 · 최성지 최문도 · 채홍철 · 김이 · 이인기 · 홍빈 · 조익청 · 배정지 · 손수경
109권
박전지 · 오형 · 이진 · 윤신걸 박효수 · 허유전 · 박충좌 · 윤선좌 · 이조년 이승경 · 이곡 · 우탁 · 안축 안종원 안보 · 최해 · 장항 · 이성 · 조렴 왕백 · 이백겸 · 신군평
110권
111권
최유엄 · 김태현 김광재 · 김륜 김경직 김희조 김승구 · 왕후 왕중귀 · 한종유 · 이제현 이달존 이보림 · 이능간
염제신 · 이암 이강 · 홍언박 홍사우 류연 · 류탁 · 경복흥 · 김속명 · 이자송 · 조돈 조인옥 · 최재 · 송천봉 · 홍중선 · 김도 · 임박 · 문익점
112권
이공수 · 류숙 류실 · 이인복 · 백문보 · 전녹생 · 이존오 · 이달충 · 설손 설장수 · 한복 · 이무방 · 정습인 · 하윤원 · 박상충 · 박의중 · 조운흘
113권
안우 김득배 이방실 · 정세운 · 안우경 · 최영 · 정지 · 윤가관 · 김장수
114권
윤환 · 이성서 · 이수산 이념 · 이승로 · 황상 · 지용수 · 나세 · 김선치 · 전이도 · 구영검 · 오인택 · 김보 · 변광수 · 정지상 · 임군보 · 나흥유 · 목인길 · 김유 · 양백연 · 지용기 · 하을지 · 우인열 · 문달한 · 김주 · 최운해
115권
116권
117권
이색 · 우현보 · 이숭인
심덕부 · 이림 · 왕강 · 박위 · 이두란 · 남은
정몽주 · 김진양 · 강회백 · 이첨 · 성석린
118권
119권
120권
조준
정도전
윤소종 윤회종 · 오사충 · 김자수
121권
「양리(良吏)」
「충의(忠義)」
유석 · 왕해 · 김지석 · 최석 · 정운경
홍관 · 고보준 · 정의 · 문대 · 조효립 · 정문감
「효우(孝友)」
「열녀(烈女)」
문충 · 석주 · 최루백 · 위초 · 서릉 · 김천 · 황수 · 정유 · 조희참 · 정씨 · 손유 · 권거의 노준공 · 신씨 · 윤구생 · 반전 · 군만
유씨 · (현문혁의 처) · (홍의의 처) · (안천검의 처) · (강화부 세 여인) · 최씨 · 배씨 · 문씨 · 김씨 · 안씨 · 이씨 · (권금의 처)
122권
「방기(方技)」
「환자(宦者)」
「혹리(酷吏)」
김위제 · 이녕 (이광필) · 이상로 · 오윤부 · 설경성
정함 · 백선연 · 최세연 · 이숙 · 임백안독고사 · 방신우 · 이대순 · 우산절 · 고용보 · 김현 · 안도치 · 신소봉 · 이득분 · 김사행
송길유 · 심우경
123권 「폐행(嬖幸)」
유행간 · 영의 · 김존중 · 정세신 · 백승현 · 강윤소 · 염승익 · 이분희 이습 · 권의 채모 이덕손 · 임정기 (민훤) · 주인원 · 이지저 고종수 김유 · 인후 인승단 · 장순룡 차신 노영 · 조윤통
124권 「폐행(嬖幸)」
윤수 윤길보 (송화) · 이정 김문비 이병 · 원경 · 박의 · 박경량 · 전영보 · 강윤충 · 배전 · 민환 · 윤석 · 손기 · 정방길 임중연 강융 · 신청 박청 · 왕삼석 양재 조신경 최노성 윤현 안규 · 최안도 이의풍 김지경 이인길 · 노영서 박양연 송명리 · 김흥경 · 반복해 · 신원필
125권 「간신(姦臣)」
문공인 · 박승중 · 최홍재 · 최유칭 · 박훤 · 송분 · 왕유소 · 송방영 · 오잠 석주 · 김원상 · 류청신 · 권한공 · 채하중 · 신예 전숙몽 · 이춘부 · 김원명 · 김횡 · 지윤
126권 「간신(姦臣)」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 조민수 · 변안열 · 왕안덕
127권 「반역(叛逆)」
128권 「반역(叛逆)」
129권 「반역(叛逆)」
환선길 · 이흔암 · 왕규 · 김치양 · 강조 · 이자의 · 이자겸 · 척준경 · 묘청 (정지상)
정중부 이광정 송유인 · 이의방 · 이의민 · 정방의 · 조원정 석린
최충헌 최이 최항 최의
130권 「반역(叛逆)」
131권 「반역(叛逆)」
한순 다지 · 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선 장위 류종) · 이현 · 조숙창 · 조휘 · 김준 · 임연 · 조이 김유 이추 · 한홍보 · 우정 · 최탄 · 배중손
조적 · 조일신 · 김용 · 기철 · 노책 · 권겸 · 최유 · 홍륜 · 김문현 · 김의
132권 「반역(叛逆)」
신돈
133·134·135·136·137권
신우(우왕) (신창(창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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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화의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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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신
하느님 · 환인 · 옥황상제도교 · 천지왕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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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웅 · 대별왕과 소별왕제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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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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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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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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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민족대표 33인
김좌진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1] 율리우스력 12월 22일.[2] 율리우스력 9월 9일.[3] 82년 8개월 18일.[4] 세는나이 84세.[5] 반대로 군단 부원수였던 강민첨은 강감찬과 마찬가지로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지만 동시에 정식 무관직인 종3품 대장군과 정3품 상장군을 거친 진짜 장수였다.[6] 비슷한 사례로 중군사 서희와 원수 김부식이 있는데, 이들이 받은 중군사와 원수직도 비상설 지휘관직이기 때문에 정식 무관이 아니다. 대원수 윤관 또한 마찬가지지만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라는 독자적인 직위를 제수한 적이 있어 조금 예외라고 볼 수 있다. 임진왜란권율이 문관 출신 도원수로서 조선군 전군을 총괄한 것과 유사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무관들도 종2품 이상으로 승품이 가능하여, 조선 초기 일부이긴 하지만 조영무최윤덕 같은 무관 출신 정승도 있었다. 이는 순수 검투사와 다름없는 사람들을 무인으로 뽑은 고려와 달리 조선에서는 무인에게 전술, 전략은 물론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까지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7] 귀주 대첩에서 강감찬을 보좌했던 부원수 강민첨은 진주 강씨 은열공파 파조이다.[8] 당시는 고려 금주.[9] 금주(衿州)는 훗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주'(州)가 들어간 고을 이름을 대거 '천'(川) 또는 '산'(山)으로 개칭함에 따라 '금천'(衿川)으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관악구 옆에 있는 금천구의 '금천'이 바로 이것이다.[10] 행영(行營)은 '임시로 만들어진 군단'을 의미한다.[11] 고려시대 사람들 중 이름을 바꾼 사례가 적지 않게 발견된다. 서염윤 → 서희, 이인저 → 이규보, 최난 → 최충헌, 정몽란 → 정몽룡 → 정몽주 등이 있다.[12] 흔히 알려져 있는 금천 강씨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이기 때문에 붙인 분파의 이름이다. 금천 강씨는 진주 강씨의 5대파(은열공파, 박사공파, 소감공파, 관서공파, 인헌공파) 중 인헌공파를 말한다. 그러므로 금천 강씨는 진주 강씨와 다른 성씨가 아니라 진주 강씨의 세파 중 하나이다.[13]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공신.[14] 고구려 멸망 이후 강씨 집안이 북방에서 남쪽인 진주로 남하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이 일족의 사람 강진이 진주 지역의 진양후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15] 많은 민간전승에서 여우는 조화를 부리는 영물이면서 사악한 악물이거나 대부분을 인간을 괴롭히는 요물이었던 것으로 보아 본처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16] 전설에 따르면 중국의 사신이 별을 보면서 길을 걷던 중 우연히 별 하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서둘러 달려가는데 이때 강감찬이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 강감찬이 성인이 되어 하인과 옷을 바꿔 입고 사신을 맞이했는데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그동안 문곡성께서 어디로 갔나 걱정했는데 바로 이 곳에서 현신하셨사옵니까!"라며 절을 했다. 문곡성 설화가 있는 유명인으로는 북송 인종때의 명판관 포증이 있다. 다만 두 사람의 생존기간이 겹치기 때문에 둘 다 문곡성일 수는 없다.[17] 혹은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9성[18] 강감찬을 뽑은 지공거는 이몽유였다. 《금천 강씨 족보》에 따르면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태사 - 문하시중에 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기록으로 고증해보면 생전에 문하시중을 역임했고, 사후 태사에 추증되었으니 완전히 틀린 기록은 아니다. 다만 족보는 역사적 사료로써의 가치가 낮은 편이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조작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19] 여러모로 당나라 최고의 명장이자 행운아였던 곽자의와 비슷한 점이 많다. 60세가 다 되어서야 두각을 나타낸 점, 국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점, 80세가 넘도록 장수하며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극치에 이르렀다는 점 등이다. 다만 《고려사》에 없는 26년 간의 공백을 메꿀만한 기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용재총화》, 《동국여지승람》, 《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강감찬은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거의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다.[20] 사실 이 정도의 전쟁 지휘는 예나 지금이나 순식간에 수명을 깎아 먹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무이기는 하다. 몸도 몸이지만 머리를 쓸 일도 많고, 목숨이 달린 일이니 심적으로도 부담감이 심했을 듯하다.[21] 석탑은 오늘날에도 개성에 남아 있으며 북한에서 국보 문화유물 제132호로 지정했다고 한다.[22] 이 때 사람들을 동원해 양산을 주고, 양산을 펼친 사람들을 도열시켜 가면서 성곽을 어떻게 세울지를 구상했다고 한다.(《고려사》 <왕가도 열전>)[23] 몽진을 주장한 이후로 강감찬의 기록이 보이지 않아서 강감찬도 다른 신료들처럼 현종 곁을 안지키고 도망간 것이 아니냐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강감찬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거물이 현종을 내팽개친 경력이 있었다면, 이는 주홍글씨로 남을 것이며 지금의 강감찬 포지션은 지채문이 차지하여야 맞는 상황이 된다. 따라서 다른 전선에서 활약하고 있었다고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몽진을 주장할 정도였다면 싫든 좋든 전선에 나가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렸을 수도 있다.[24] 원문은 '좌임'(左衽)이라고 되어 있는데 '왼쪽으로 옷깃을 여민다'는 뜻이다. 원래 이 표현은 '피발좌임'(被髮左衽)이라 하여 '머리를 풀어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는 뜻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뜻하는 말이다. 공자춘추시대의 명재상 관중을 평가한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 야만인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한 것에서 유래한다.[25] 내사령은 중서문하성의 명목상 최고위직으로 직명이 내의령 → 내사령 → 중서령 순으로 바뀌었다. 유진은 대호족인 충주 유씨 가문 출신이다.[26] 여담이지만 두 세대 후에 북송 인종때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포청천도 이 별의 화신이었다는 설화가 있다. 다만 항간에 강감찬이 포청천의 환생이라는 말은 옳지 않다. 오히려 포청천이 강감찬의 손자뻘 나이이다. 그리고 또 이황과 촉나라 책 이야기도 있고.[27] 강감찬 외에도 한국 역사상의 구국의 영웅이 동아시아 전체 차원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사례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을지문덕은 자신의 승리로 중국의 어느 통일제국을 무너뜨렸으며, 이순신도 결과적으로는 일본을 200년간 지배한 정권의 창립을 가져왔다.[28] 당시는 고려 금주.[29] 다만 당시에는 아직 '남경'으로 승격하기 이전이었다. 당시 명칭은 양주였다. 남경으로의 승격은 강감찬 사후 36년 후인 1067년에야 이루어졌다.[30] 네 사람이 드는 가마[31] 예: , , [32] 이순신 다음가는 라인으로 을지문덕과 이 분을 꼽을 만하다.[33] 이 정도 업적의 군주이면 우리나라 역사에서 조선 세종과 동급 혹은 그 이상 느낌의 성군이다. 뿐만 아니라 이 분 인생도 참으로 스펙타클하기도 해서 어떻게 극본을 써도 역사왜곡이 아닐 수준이다.[34] 1972년 KBS 드라마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 역.[35] 전작인 대조영에서는 작중 설정 상 거란족인 설인귀를 맡았는데 본편에는 거란족의 나라인 요나라를 흠씬 두들겨팬 인물을 맡은 것이다. 다만 설인귀가 거란족이라는 것은 실제 역사에는 전혀 없는, 작품의 창작 설정이다.[36] 애당초 강감찬 자체가 현종 치세에만 활약한 인물로, 나이와 별개로 현종 이전에 비중이 거의 없다.[37] 태조 왕건의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보낸 낙타를 굶겨죽이며 거란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고(물론 해당 이야기는 태조 왕건보다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서 언급되었다.), 드라마 대조영의 대조영의 극 중 행적은 두 말 하면 입이 아프며, 이젠 그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상대로 싸우게 된 것이다. 참고로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은 바로 그 왕건의 장수로 '삼한벽상공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