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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풍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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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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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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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조선 목조의 왕자
안풍대군 | 安豊大君

봉호
안풍대군(安豐大君)
시호
충장(忠壯)
본관
전주(全州)
이름
정(精)
시호
충장(忠壯)
부왕
조선 목조
모후
효공왕후 이씨 (孝恭王后 李氏)
부인
부부인
자녀
3남
묘소
함경북도 경흥군(실전)
함경남도 흥남시 유정리(신도비)[1]
생몰
기간

음력
? ~ ?

1. 개요
2. 생애
3. 묘소
4. 가족관계
5. 후손



1. 개요[편집]


안풍대군은 조선 목조의 셋째 아들이다.


2. 생애[편집]


목조를 따라 구 의주(宜州) 현 원산시로 이주하였다. 이주한 관북지방 동북면에서 원나라가 힘을 크게 썼으며 여진족과 호족들 역시 행패를 부렸다. 이후 지역 영토를 침범하고 양민에게 폐해를 끼치던 여진족을 격퇴하고 호족들을 몰아내 큰 공을 세웠다. 1872년 12월 3일 고종에 의해 안풍대군으로 추봉되었다.

사후 1872년, 고종에 의해 형인 안천대군과 동생들과 같이 가선대부 영종정경에 추봉으로 되었다가 동년 12월 3일에 대군으로 추봉되었다.

그곳에서 승하한 부왕을 따라 필생의 포덕집의(布德執義)의 대 업을 보필하였다. 대군도 경흥에서 돌아갔으나 묘소는 실전되었다. 대군의 후손들이 그 유덕을 기 려 왔다. 대군은

전주 이씨 안풍대군파의 파시조이다.

3. 묘소[편집]


묘소는 원래 경흥군에 위치했으나, 실전되어 함흥 주남 후농(州南 厚農 : 현 흥남시 유정리)에 신도비를 세워 제사를 받들었다.


4. 가족관계[편집]


부인 : 부부인 (府夫人, ? ~ ?)
장남 : 동원군 이환(東原君 李環, ? ~ ?)
차남 : 동흥군 이단(東興君 李端, ? ~ ?)
3남 : 동평군 이법장(東坪君 李法莊, ? ~ ?)

3남을 두었고 3대손까지는 경흥에서 살았으나 4대손부터는 함흥으로 이주해 정착하게 되었다.


5. 후손[편집]


안풍대군 파종회는 화수계(花樹契)라는 형식으로 오래 전부터 많은 일을 해왔다. 안풍대군의 신도비를 세우고 묘단을 정제하여 매년 음력 9월 보름날에 세사를 지냈다. 1922년에는 안풍대군파 족보인 <임술보(壬戌譜)>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8·15광복 이후 북한이 공산화되자 안풍대군의 후손들은 남북으로 유리되어, 그 규모가 컸었던 화수계 조직은 하루 아침에 무너져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안풍대군의 월남한 후손들 중 동흥군파가 1978년 <동흥군지파보>를 발행하고 동흥군파 종친회를 결성하였다. 그리하여 동흥군파 종친회가 펼친 종친찾기 광고 등으로 2백여 가구의 동 원군지파 파족(派族)도 찾아내게 됨에 따라 1982년 4월 11일 처음으로 상선(相鮮) 종현이 주도하여 서울에서 안풍대군 파종회를 결성하고 종약원에 등록을 마쳤다.



[1] 진짜 있는지는 미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