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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해군(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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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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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 연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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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호가 있거나 성년까지 생존한 사람만 기재






조선 세종의 왕자
영해군 | 寧海君

봉호
영해군(寧海君)[1]
시호
안도(安悼)
품계
소덕대부(昭德大夫)
본관
전주 이씨
이름
장(璋)[2][3][4]

제지(題之)
부친
세종
생모
신빈 김씨
부인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
(林川郡夫人 平山 申氏)
자녀
슬하 2남 1녀
장남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
차남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
장녀 - 박승약(朴承爚)의 처
묘소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생몰
기간

음력
1435년 3월 20일 ~ 1477년 5월 5일
양력
1435년 4월 27일 ~ 1477년 6월 24일
(향년 43세)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4. 영해군 묘



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왕족. 세종의 17남이자 서9남이다. 어머니 신빈 김씨에게는 5남이다.


2. 생애[편집]



1435년(세종 17년) 3월 20일 밤, 세종신빈 김씨의 5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장(璋)이었으나 후에 당(瑭)으로 개명하였다. 1442년(세종 24년) 영해군(寧海君)으로 책봉되었다. 부인은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이다. 자녀로는 신씨가 낳은 장남 영춘군 이인과 차남 길안도정 이의, 장녀 이씨가 있다. 성격은 화목한 것을 좋아하여 다투는 일이 없었다 한다. 시호는 안도(安悼)이다.

3. 가족 관계[편집]



  • 부 : 세종(世宗, 1397 ~ 1450)
  • 모 : 신빈 김씨(愼嬪 金氏, 1406 ~ 1464)
    • 형 : 계양군 이증(桂陽君 李璔, 1427 ~ 1464)
    • 형 : 의창군 이공(義昌君 李玒, 1428 ~ 1460)
    • 형 : 밀성군 이침(密城君 李琛, 1430 ~ 1479)
    • 형 : 익현군 이연(翼峴君 李璭, 1431 ~ 1463)
    • 남동생 : 담양군 이거(潭陽君 李璖, 1439 ~ 1450)

  • 정부인 : 임천군부인 평산 신씨(林川郡夫人 平山 申氏) - 한성윤 증찬성 신윤동(漢城尹 贈贊成 申允童)의 딸
    • 장남 : 영춘군 이인(永春君 李仁, 1465 ~ 1507)
    • 며느리 : 광양현부인 진주 류씨(光陽縣夫人 晋州 柳氏) - 행목사 증 영의정 류양(行牧使 贈 領議政 柳壤)의 딸
      • 손녀 : 부호군 윤회충(副護軍 尹懷忠)의 처
      • 손녀 : 이천(李瑏, 1504 ~ ?) - 좌의정 윤개(左議政 尹漑)의 처
      • 손자 : 완천군 이희(完川君 李禧, ?[5] ~ ?)
      • 손자 : 강녕부정 이기(江寧副正 李祺, ? ~ 1521)
      • 손자 : 순성부정 이정(蓴城副正 李禎)
      • 손자 : 덕녕부정 이의(德寧副正 李禕)
    • 차남 : 길안도정 이의(吉安都正 李義)
    • 며느리 : 여산 송씨(礪山 宋氏) - 부사 송자강(府使 宋自剛)의 딸
      • 손자 : 시산부정 이정숙(詩山副正 李正叔, ? ~ 1521)
      • 손녀 : 한림 신준미(翰林 申遵美)의 처
    • 며느리 : 청주 한씨(淸州 韓氏) - 상당부원군 한명회(上黨府院君 韓明澮)의 서녀
      • 손자 : 청화수 이창숙(淸化守 李昌叔, 1502 ~ ?)
      • 손자 : 송계수 이중숙(松溪守 李仲叔, 1503 ~ ?)
      • 손자 : 은계군 이말숙(銀溪君 李末叔, 1507 ~ ?)
      • 손자 : 벽계수 이종숙[6](碧溪守 李終叔, 1508 ~ 1579)
      • 손자 : 옥계수 이필숙(玉溪守 李畢叔, 1511 ~ ?)
    • 며느리(첩) : 성씨 미상
      • 손녀 : 참봉 이삼(參奉 李蔘)의 처
      • 손녀 : 숙릉참봉 이효원(淑陵參奉 李孝元)의 처
      • 손녀 : 습독 지윤리(習讀 池允利)의 처
    • 장녀 : 박승약(朴承爚)의 처
      • 외손자 : 박훈(朴薰)

4. 영해군 묘[편집]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105호

106호

107호
효민공 이경직 묘역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태종왕지 윤림분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6호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
全州 李氏 寧海君派 墓域

소재지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1
시대
조선시대
분류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수량 / 면적
분묘 10基, 석물 43基, 토지 1,630.4㎡
지정연도
1997년 12월 31일

영해군과 자손들의 묘역[7]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에 있다. 영해군 묘 주변에는 다른 가족들의 묘도 자리하여 하나의 묘역을 이루고 있다. 영해군 가족 묘역은 1997년 12월 31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받았다. 사실 원래는 영해군의 아들 영춘군의 신도비만 '이인신도비(李仁神道碑)'란 명칭으로 지정받았는데 2008년 10월 30일에 '전주 이씨 영해군파 묘역'이란 이름으로 바뀌면서 묘역 전체가 문화재가 되었다.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에 그의 위패를 모신 소덕사가 있다. 지금도 매년 영해군의 기일마다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1] 봉호는 경상도 영해군(寧海郡)에서 유래했다.[2] 선원록에 따르면 은언군의 아들 풍계군과 같은 이름으로 고쳤다지만 「조선시대 태실의 역사고고학적 연구」(홍성익,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5, pp.13)에 따르면 장(璋)과 당(瑭)의 태실이 따로 있으며 당(瑭)의 태지석에 황명(皇明) 정통 7년 임술 7월 24일 인시 생(生)으로 나와서 1435년 생인 영해군과 다른 왕자일 수 밖에 없다. 애당초 선원록은 임진왜란으로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완전히 불에 타서 없어졌고 숙종의 치세에 기억에 의존해서 다시 만든 것인지라 임진왜란 앞의 계보는 부정확할 수 밖에 없다. 덧붙여 당(瑭)이 왕자의 이름으로 쓰였음을 인지할 수 밖에 없음에도 왜 영조풍계군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는지도 알 수 없다.[3] 더군다나 명태조와 이름이 겹친다. 명나라를 천자의 나라로 인정하고 조공을 바치면서 왜 창업천자의 휘를 왕자의 이름으로 썼는지 알 수 없다.[4] 충선왕과 이름이 같다.[5] 족보에 천계 병자년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천계제는 17세기 초에 재위한 황제이기 때문에 연호에 오류가 있고, 또 생년이 병자년인 것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아버지 영춘군은 병자년에 살았던 적이 없다. 차남인 선성수가 1507년생이고 아버지가 1465년생이니 완천군은 1480년대에 태어났다고 추정할 수 있다.[6] 바로 이사람이 황진이의 시조에 언급되는 벽계수(碧溪守)이다.[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