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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릉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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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시대 제의 해릉왕에 대한 내용은 소소문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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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贊曰:海陵智足以拒諫,言足以飾非。欲爲君則弑其君,欲伐國則弑其母,欲奪人之妻則使之殺其夫.
찬하여 말한다. 해릉의 지혜는 거간에 족했고, 언변은 시비에 족했다.[2]
군주가 되고자 할 때는 그 군주를 죽이고, 나라를 정벌하고자 할 때는 그 모친을 죽였으며,[3] 다른 사람의 아내를 빼앗으려고 할 때는 아내를 시켜 남편을 죽였다.
― 《금사》의 <해릉 본기> 논찬
금나라의 제4대 황제. 폐위되어서 묘호는 없고, 시호는 '양'(煬)으로 수양제와 같은 시호다.[4] 보통 즉위 이전의 왕호인 해릉왕(海陵王)이라고 부른다. 즉위 전에 해릉군왕(海陵郡王)이었다. 《금사》(金史)에서는 폐제(廢帝) 해릉서인(海陵庶人)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는 원공(元功), 휘는 완안적고내(完顔迪古乃), 중국식은 완안량(完顔亮).
아버지는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서장자인 요왕 완안알본(遼王 完顔斡本)이었다. 해릉양왕이 즉위하고 덕종황제로 추존했으나, 해릉양왕이 폐위된 이후 묘호와 시호가 삭탈되고 황자로 다시 격하되었다. 어머니는 대씨(大氏)로 발해의 왕손이었다. 이 외에도 발해인의 후예가 금 황제의 황후나 비빈인 사례가 꽤 있는데 발해인 출신인 정식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1명과 12명이었고, 추존 황제의 황후나 비빈은 각각 3명과 2명이었다. 황후는 여진 귀족인 도단사야(徒單斜也)의 딸 도단황후(徒單皇后)였다.
중국의 수많은 폭군 중에서도 3대 폭군에 들어가는 극악무도한 악행들을 저지른 황제였다. 나머지 둘은 후폐제(유송), 수양제이다. 이 때문에 후대에게 황제 취급도 못 받아서 해릉양왕[5] 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금사》는 해릉양왕을 왕으로도 취급하지 않아 아예 '해릉서인'이라고 칭했다. 해릉양왕은 칭기즈칸의 먼 선조인 카마그 몽골의 제2대 칸이자 보르지긴 오복 타이치우드 씨족의 조상인 암바가이 칸을 목마에 못박아 죽인 자이기도 했다. 금사를 편찬한 몽골제국 입장에서도 이 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금사에서는 해릉양왕을 열전이 아니라 본기에 넣어서 명목상으로는 황제로 취급해줬다.[6]
2. 생애[편집]
2.1. 제위에 오르다[편집]
그는 첫 출발부터가 추악하기 그지없었다. 해릉양왕이 번왕이었을 당시 금나라 황제 희종(해릉양왕의 사촌 형)은 해릉왕의 착실한 성품을 높게 사서 그를 자주 불러 같이 대화를 나눴으며, 금태조가 나라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희종이 말해주자 해릉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듣는 것을 보고 희종은 그를 더욱 신뢰하였다.
희종은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국정에 임하면서 꽤 준수한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재위 10년이 넘어가면서 차츰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며 술주정을 부리고, 대신들을 때리거나 욕을 했으며, 무고한 대신을 함부로 죽이는 등 폭정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런 그에게 실망한 신하들은 해릉왕과 함께 역모를 꾀하기에 이른다.
당시 해릉왕은 좌승상인 당괄변(唐括辯)과 우승상인 병덕(秉德)과 함께 금 희종을 폐위시키기로 공모했는데 "그러면 지금의 폭군을 폐위시킨 후 누가 황제가 될 것인가?"를 놓고 당괄변이 여러 이름을 제시했지만, 해릉왕이 그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안 된다고 하였다. 나중에는 더 이상 황제로 만들 만한 사람이 없자, 당괄변은 해릉왕의 뜻을 눈치채고 그에게 "혹시 그대가 황제가 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오?"라고 물었다. 그러자 해릉왕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역시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 나 말고 또 누가 있겠습니까?"
모반을 꾸민 자들은 결국 해릉왕을 황제로 옹립하기로 결정하고 금희종의 호위 군관을 매수한 후, 일부 귀족 대신들과 짜고 황제의 침실에 뛰어들어 희종을 잡아 처형시키고 해릉왕을 제위에 올렸다. 1149년 쿠데타가 일어나자 희종은 황급히 동생을 찾았지만 희종 앞에 나타난 동생은 오히려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 사태의 전말을 깨달은 희종은 온 힘을 다해 그와 결투를 벌였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으며 결국 목숨을 잃고 말았다.
2.2. 성공한 쿠데타[편집]
쿠데타 성공 이후, 제위에 오른 해릉왕은 자손이 많아 다 합치면 7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희종의 일족을 모두 죽였기 때문에 희종은 후사가 끊겼다. 해릉왕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은 고대의 현명한 군주들을 본받고 싶고, 경들의 직언을 듣고 싶다. 조정이 잘못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간언해 주길 바란다." 또한 병영을 순시하였는데 병사가 흙이 섞인 밥을 먹자 자신이 그걸 빼앗아 먹고 그 병사에게 더 좋은 밥을 주도록 하였다.
또한, 순행길에 마차가 넘어져 깔린 사람을 보자 자신의 친위대에게 마차를 들어올려 사람을 구해주도록 시켰으며 자주 낡고 찢긴 옷을 입었고, 주변 신하들에게 이러한 것을 자랑하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자신이 아주 근검 절약한다는 황제라는 것을 알리고자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멀쩡한 옷에다가 구멍을 만들고, 구멍난 곳을 꿰매게 하고는 황제의 의식주행을 기록하는 관리에게 이를 기록하라고 하곤 했다.
선배인 수양제처럼 위선적인 쇼를 한바탕 벌인 뒤, 그는 희대의 폭군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2.3. 집권 기간[편집]
2.3.1. 희대의 색마[편집]
쿠데타에 성공해서 황제에 오른 해릉왕은 취임사를 발표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국가의 대사는 모두 짐이 지배한다.
- 군사를 이끌고 남송을 공격해서 토벌하고 남송 황제를 붙잡아 죄를 묻는다.
- 천하 절색의 미녀를 손에 넣어 모두 부인으로 삼는다.
처음 사안이야 신임 황제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특히 금나라는 부족국가에서 제국으로 너무 급발전한지라 영 엉성한 부분이 있었다. 가령 금태종은 신하 몰래 국고에서 돈을 써서 술을 마셨다고 신하들에게 곤장을 맞기도 했다. 중원 절반을 차지한 금나라의 사정상 어느 정도 중원제국으로의 전환은 불가피했고 이는 국가의 중대사를 황제가 담당하게 되는 체제가 된다. 애초 해릉양왕이 죽고도 금나라의 중원제국화는 오히려 계속되었으니 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문제는 다른 두 사안. 두 번째 사안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세 번째 사안은 그가 죽은 후 황제는커녕 왕으로조차 대접받지 못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여색을 밝힌 중국 황제가 해릉양왕만은 아니다.[7] 하지만, 이 사람은 대놓고 짐은 풋사과(처녀)보다는 단물이 철철 흐르는 농익은 사과(유부녀)[* 정확히는 성기가 익은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를 더 좋아하느니라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로 유부녀를 좋아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신하들이 해릉양왕에게 제발 유부녀는 냅두고 처녀를 건드리십시오라고 말했다.[8]
해릉왕이 재위 당시에 벌인 일은 가히 패륜광의 소행이라 할만한 것으로, 단순히 호색이나 엽색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것만 해도...
- 자신의 숙모·처제·조카딸을 강간했고, 게다가 이를 위해 그들의 남편을 협박하거나 살해했다.
- 거란족 출신인 한 유부녀와 그녀와 전 남편 사이의 딸 둘을 후궁으로 삼았다.
- 자신의 처제를 강간하고 신하의 아내와 그 여동생을 범했다.
- 그 외 유부녀: 더 볼 것도 없다.
위에 글을 자세하게 풀어서 쓰면 이렇다. 쿠데타로 사촌형인 희종 황제를 암살하고 즉위하자마자 본래 맘에 두고 있던 미망인을 거두어서 귀비로 봉했다. 그러나 곧 싫증이 나던 중에 눈에 들어온 여자가 바로 그 미망인 귀비의 딸이었다. 그 딸을 역시 귀비로 봉하여 옆에 두고 문란한 성관계를 즐겼다. 귀비는 낙담하여 궁인과 동성애를 했고, 그러다가 해릉양왕에게 동성애 사실이 드러나자 해릉양왕은 미망인 귀비와 궁인 모두를 잔혹하게 처형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아내를 강제로 빼앗아 성폭행하고, 신하가 이를 거부하면 바로 죽여버렸다. 심지어 더 큰 쾌락을 즐기기 위해 성폭행을 저지를 때 반드시 성폭행 대상의 남편에게 자신이 그 남자의 아내를 성폭행하는 광경을 지켜보게 했다.
심지어 해릉양왕은 본인의 성미가 뒤틀리면 성관계 도중에도 갑자기 칼을 빼들어 성관계 중이던 여자의 목을 잘라버렸다고 한다.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고 협박하였는데, 신하 오대의 부인은 결국 남편을 독살하고 황후로 책봉되었으나 곧 해릉양왕의 총애를 잃어, 다른 남자와 간통하다가 걸려 역시 참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숙모와 처제도 성폭행하려 들었다. 처제는 성폭행을 당하기 직전에 자결했는데, 이 여자가 바로 당시 요양부 유수였던 완안옹의 부인이었다. 완안옹은 이후 해릉양왕을 폐위시킨 뒤 죽이고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금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금 세종이다. 황제가 이 꼴이니 나라는 볼 것도 없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2.3.2. 그 외의 악행들[편집]
- 해릉양왕은 특히 거위 고기를 좋아했는데 여진족 자체가 거위를 좋아하는 민족이기도 했다. 순행 나가서도 산해진미를 물리라면서 '짐에게는 거위 고기면 충분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놈이 평범하다 싶지만, 시도 때도 없이 거위 고기를 찾아서 문제였다. 거위 자체가 동서양 가리지 않고 상당한 고급 식재료인 데다가 먹을 수 있을 만큼 살이 붙으려면 최소 10년 이상은 키워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산해진미에 들어간다고 봐도 되는데, 나중에는 거위를 하도 찾다보니 거위 가격이 크게 올라 신하들이 황제에게 바칠 거위를 구하러 고작 거위 1마리를 사는데 수만 전을 들였으며, 소 1마리를 끌고 가서 거위 1마리와 바꿔 오는 일까지 발생한다. 물론 못 가져오면 사형이었다.
- 황족과 여진족 신하들을 학살했으며 자신과 함께 희종을 시해하는 데 동참한 사람들까지 황제를 시해했다는 죄목으로 숙청했다. 명백한 토사구팽. 그러면서도 스스로 쿠데타를 일으켜서 집권한 탓인지, 자기한테 조금만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하거나 이상한 낌새만 있으면 그냥 죽였다.
- 1150년에는 금 태종의 모든 자손을 멸했으며, 이 외에도 여러 황족들의 자손들을 때만 되면 멸해서 금나라 황족들의 남은 수가 거의 없어진다.[9]
- 1153년 수도를 중국과 가까운 중도 대흥부(中都大興府, 지금의 베이징)로 옮겼는데, 나무 재료 하나를 운송하는 데 비용이 2,000만 전에 달하였으며, 궁전을 전부 황금으로 장식해서 금가루가 바람에 날아다니면 마치 눈이 온 듯 했다고 한다. 골 때리게도 이런 궁전을 짓는 데만 억만금을 썼지만 충분히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자기가 좋아하던 중국식 건물을 지으려고 원래 수도에 있던 건물을 모두 부쉈다. 그 다음에는 원래 수도인 상경 회령부(上京會寧府, 지금의 하얼빈) 가까이 있던 자신의 조상들[10] 과 금태조, 금태종 등 황제들의 능을 모두 중도 대흥부로 이장했다. 그러나 하필이면 400여 년 뒤 명 말에 천계제가 후금이 강성해지는 것을 주술적인 방법으로 막아 보겠다며 이 황릉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해 버렸다. 해릉양왕 자신도 나중에 죽으면 이곳에 당연히 묻히기 위해 성대하게 묘역을 단장했으나...
2.3.3. 무리한 남송 침공, 그리고 처참한 말로[편집]
그 와중에 취임사를 실천하려고 무리하게 남송 침략을 시도했다. 그런데 사실 남송을 정벌하려는 목적도 남쪽에 미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어서라고. 참고로 수양제도 강남 총관을 하다가 강남 미녀에 빠져 후량 선제의 딸이었던 소씨를 부인으로 삼았다.
남송을 침공할 때 신하들에게는 하늘에서 사자가 와서 송나라를 정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했다. 당시 금과 남송은 화평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남송은 이전 북송 시절 이민족들에게 당한 정강의 변이라는 매우 아픈 역사가 있다. 심지어 그 이민족은 바로 금나라였다. 당연히 다른 이민족들보다도 심하게 경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남송은 강남으로 후퇴한 뒤에도 늘 전선을 만들고 성곽을 고치는 등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금나라의 신하들도 이것을 알았기에 여러 신하들이 남송 침공을 반대했지만 해릉양왕은 1160년에 그들의 목을 모두 베며 여론을 탄압했다.[11] 심지어 이 과정에서 태후가 '금 왕조를 망칠 셈이냐?!'는 식으로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간언하자 그 태후까지 살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거기다 죽였으면 그냥 조용히 묻어주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해릉양왕은 태후의 시신을 불태운 뒤에 뼈를 물에다가 뿌려버리는 만행까지 저지른다.
다만 해릉양왕은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를 죽인 것은 아니었는데 그의 친어머니였던 대씨는 이 시기면 이미 사망했기 때문. 해릉양왕이 죽인 태후는 '적모'(첩의 자식이 아버지의 정실 부인을 부르는 호칭이다)였던 선황제의 정실 부인인 황태후 도단씨였다.
이렇게 반대 의견을 억누른 뒤 해릉양왕은 본인이 제위에 오를 때부터 밝혔던 남송 정복을 위해서 무려 50여만 명의 장정을 강제로 징병하거나 배를 건조하는 일에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금사》에 따르면 금나라의 국고는 이미 파탄이 났고, 가족이 서로 떨어지거나 뿔뿔이 흩어졌으며 전쟁에 나가 죽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이를 원망하는 울음 소리가 하늘을 진동시킬 정도였다고 한다.[12]
그렇게 남송 침략을 개시되는데 여기서 해릉양왕에게 약간의 천운이 따른다. 바로 위에서 보이는 것처럼 엄청나게 광고를 해줌에도 당시 남송 황제였던 조구는 이에 대한 방비를 따로 하지 않았던 것. 금에 사신으로 갔던 우윤문이 금나라가 변경으로 천도하여 남송을 침공할 것이라고 하고 금에 대한 방비를 하라고 했으나[13] 남송 조정이 이를 기각했던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서인지 금나라군이 양회 전선을 함락시키자 당시 사령관인 왕권이 지레 겁을 먹고 도주한것에서 보이듯 남송이라고 방어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진 않았다.
그런데도 원정 과정은 신통치 않았다. 남송으로 가려면 장강이라는 큰 강을 건너야하는데 당시 금나라의 선박 기술은 남송에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 그래서 금군은 수전에서 번번이 남송군에게 물을 먹었야했는데 당장 총관 아린이 채석기에서 도강을 시도했지만 남송의 명신 우윤문에게 저지당했으며[14] 산동 지역에서도 이보가 이끄는 해군이 금나라의 해군을 격파해낸 건이 그 예시. 그외에도 위승이 이끄는 군대 역시 금군을 저지하며 금군은 별다른 소득없이 양주로 이동해야 했다.
거기다 1161년 제국 북서쪽에 있던 거란인들이 강제 징병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한다. 특히 남송 원정군에 속했던 거란인 장군들도 아예 남송에 항복해 길 안내까지 할 정도로 답이 없었으며 결국 거란의 반란은 금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건도 화약을 주도했던 복산충의가 진압했다. 또한 동경 요양부(東京遼陽府)에 있던 사촌 동생 완안옹도 반란을 일으켜 중도 대흥부에 입성했다.
이렇게 내부적으로도 붕괴되어가는 상황에서도 해릉양왕은 난을 진압하기는커녕 남정에만 더욱 골몰하는 삽질로 시간을 보냈다. 양주로 이동한 해릉양왕은 아예 정신이 나가버렸는지 거기서도 도강에 실패하면 장수들을 죄다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호북의 남송 수군이 장강 중류에서 양주가 위치한 하류로 내려오는 중이고, 남송군의 저항이 격렬해 도강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강을 건너자니 남송 수군에게 죽을 지경이고, 강을 못 건너면 해릉양왕에게 목이 잘릴 판이었기에 장수들은 결국 해릉양왕에게서 등을 돌렸다.
1161년, 황제의 막사로 화살이 날아드는 것으로 진중반란이 시작되었다. 원정군을 이끌던 지휘관들이 이반하여 해릉양왕을 향해 칼을 돌리고, 이 희대의 폭군은 도주하려다가 병부상서 겸 신무군 도총관 야율원의[15] , 무승군 도총관 도단수소 등에게 붙잡혀 막사에서 처형당하는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야율원의와 도단수소는 해릉양왕을 살해하고 그를 따르는 다른 부하들도 잡아 죽였으며 수도로 가서 황태자를 죽였다.
2.4. 사후[편집]
해릉양왕을 사형에 처한 부장들의 주도로 완안옹은 제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금 최고의 명군인 금세종이었다.[16] 《금사》에 따르면 이 때 해릉양왕을 처형한 부장이 '새로운 황제께서 중도 대흥부에 입성하셨다!'고 알리자 해릉양왕은 웃으면서 "옹이 황제가 되다니! 그 녀석을 먼저 처리했어야 하는데!"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사후에 악행의 업보를 치렀는데, 금 세종은 해릉양왕의 태자 완안광영을 포함하여 그의 자손들의 목숨을 남김없이 모두 빼앗은 뒤 해릉먕왕을 서인으로 격하시켰다. 무엇보다 해릉양왕의 시체를 중도 대흥부에 성대히 세운 황제 묘역에 묻지도 않았다. 사실 원래는 그래도 황좌에 앉아있던 사람이라 나름 왕으로 대접해서 왕들의 묘역에 묻었지만, 대정 20년에 신하들이 "이놈은 팔왕의 난 당시의 사마륜보다도 죄가 큰데 왕으로 대접해서도 안 된다."고 간언을 올렸고, 이 간언에 따라 최종적으로 폐서인시켜버린 것. 이미 실컷 황제 자격이 없는 짓을 했고 서인으로 떨어졌으니 예를 갖추지 않았으며 시신을 중도 대흥부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밭에 대충 묻어버렸다. 그래서 해릉양왕의 무덤의 위치는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다.
금사에는 완안량의 조정에서 크게 권세를 누렸던 대방기(大邦基)라는 인물의 열전이 있는데, 성씨에서도 보이듯 발해 왕실 후손으로 본명은 흥국(興國)이라고 하는 이 사람은 앞서 희종 시해 당시에는 희종의 침전 문지기를 맡고 있던 권근시국직장(権近侍局直長)이었다. 이 사람이 희종이 시해되던 날 자객들과 짜고 침전 문을 열어준 장본인이다. 금사에 따르면 황통(皇統) 9년(1149년) 완안량의 생일에 금 희종이 대흥국을 시켜 생일 선물로 사마광(司馬光)의 초상화를 비롯한 여러 물품을 보냈는데, 당시 희종의 황후로 정사에 관여하고 있던 배만씨(裴満氏)도 마찬가지로 완안량에게 선물을 보냈고, 이를 알게 된 희종은 불쾌해져서 선물을 도로 가져오게 하는 동시에 완안량에게 선물을 가져간 사자인 대흥국도 화풀이 삼아 곤장 100대를 쳤다. 단지 선물을 갖다주라고 해서 갖다 줬을 뿐인데 졸지에 화풀이로 찍혀 곤장을 맞게 된 대흥국은 이 일로 금 희종에게 앙심을 품어 희종 시해에 가담했으며, 침전까지 쳐들어온 침입자를 발견한 희종은 평소 침대 머리맡에 세워두던 호신용 패도(佩刀)로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이 패도마저도 대흥국이 어디론가로 치워버린 바람에 결국 희종은 속수무책으로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대흥국은 완안량이 즉위한 뒤 크게 출세하고 이름도 방기 즉 '국가의 기반이 되는 자'라는 거창한 이름을 해릉양왕에게 하사받았지만, 해릉양왕이 쫓겨난 뒤 재산은 몰수되고 대방기 자신도 금 세종에 의해 희종의 능침인 사릉 앞에서 처형되었다.
3. 중앙집권화[편집]
폭군 중의 폭군으로 유명한 해릉양왕이지만, 금 왕조의 중앙집권화와 황제 독재 체제 강화에 대해서는 상당한 업적이 있다. 보수적인 여진 황족들을 숙청하여 황권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모두 쳐내고 주요 관직에는 한인과 발해인, 거란인들을 임명해 믿을만하고 능력 있는 이들을 선발했다.
또한 해릉양왕은 한자를 쓰고 시를 지을 수도 있었다는 희종 이상으로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사서오경, 시, 사, 가곡, 부를 읽고 감상할 수준의 '문화군주'였다. 물론 이 정도는 평범한 한인 학생도 갖춘 교양이지만, 삼림 수렵 민족 출신의 금 왕조는 화북 지역을 통치한 것이 채 30년이 안 되는 시점이고 전대 황제인 희종이 겨우 한자를 읽고 시를 쓸 정도의 교양을 지녔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대 여진인 귀족, 황족 중에서 해릉양왕만큼의 교양을 쌓은 이는 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해릉양왕은 중국의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중국의 국가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해릉양왕은 금 태종이 시행했던 한복(漢服) 금지령을 폐하고 중국 왕조들의 황실 의례를 도입했다. 기존에는 요 왕조 출신의 문인과 송 왕조 출신의 문인들 간의 학문 성향 차이를 배려해 만든 남, 북선 과거 제도를 일원화하고 송 왕조의 과거 제도를 모방하여 과거 제도의 개혁을 이루었으며 국자감 같은 고등 교육 기관도 설립했다. 여진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한인을 기용하는 해릉양왕의 개혁은 만주가 아닌 화북을 통치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기조 하에 이루어졌다.
해릉양왕은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화를 가속하기 위해서 행정 개혁을 실시했다.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상서성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는 이 개혁은 1156년, 정륭 원년에 완성되어 '정륭 관제'라 부른다. 정륭 관제의 추진 목적은 여진 귀족의 영향이 강한 중서성과 문하성을 폐지하고 황제가 통제할 수 있는 상서성만을 운영하여 황권을 강화하고 상서성의 소속 기관으로 추밀원을 설치, 황제가 군권을 틀어쥐기 위함이었다. 또한 수도를 상경에서 중도로 이전한 것은 여진 보수파 귀족들을 약화시키고 화북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확립하는 한편, 중국 전체의 통일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이러한 조치는 성공적이었으며 금 왕조 최고의 명군으로 알려진 세종도 해릉양왕이 만든 정륭 관제는 약간의 개정만 하고 그대로 운용했으니 희종이 도입한 3성 6부제를 해릉양왕이 금 왕조에 맞는 형태로 변화,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다. 해릉양왕이 만든 정륭 관제는 금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이처럼 중앙집권화와 황권 강화에는 확실한 공적이 있는 해릉양왕이지만, 위의 여러 문단에서 지적하듯이 그의 황권 강화 과정은 너무 조급하고 잔혹했다. 필요 이상의 학살과 엽색 행각, 수도 이전을 비롯한 토목 공사와 사치는 아직도 송 - 금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인민과 행정이 체계화되지 못한 금 왕조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이었고 민심이 이반하기에 충분했다. 세종, 장종대의 경제 성장을 '경제 회복'이라 평가할 정도로 세종 이전의 화북 지방은 송대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이 상황에서 과다한 숙청, 사치, 토목 공사를 벌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대군을 동원해 남송을 친다고 했으니 해릉양왕은 자기 손으로 목을 조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릉양왕이 죽고 난 뒤에 즉위한 세종은 해릉양왕이 보수파 귀족들을 다 숙청해 준 덕분에 정변으로 황위에 올랐음에도 황권에 도전할만한 세력이 없어 상당히 편하게 황제 생활을 시작했고 해릉양왕의 폭정을 끝내고 과다한 세금 징수를 없애주는 것만으로도 성군 소리를 들었다. 국가의 행정 제도는 희종과 해릉양왕이 상당 부분 완성시켜 둔 상태였기에 세종은 이를 조정하고 마무리하는 작업에 착수해 금 왕조의 정치, 행정 제도를 완성시켰다. 즉, 해릉양왕은 죽 쒀서 남 좋은 일만 시킨 셈이 되었다.
그가 숙청과 학살을 줄이고 엽색 행각과 사치를 벌이지 않았다면 해릉양왕은 금 왕조의 기초를 세우고 황권을 반석 위에 올린 황제로 평가받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문제를 지적해주는 충신들은 죽이고, 반대파들은 피에 굶주린 악귀처럼 학살했으며 수많은 여성들을 손에 넣어 지배층이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폐위당할 명분이 되는데, 과다한 토목 공사와 세금 수취, 남송 정벌로 민심까지 잃고 끝내는 자신을 최후까지 지켜야 할 금군에게 살해당했다. 해릉양왕의 이러한 모습은 금 세종을 비롯한 후대의 군주들에게 반면교사의 예로 늘 인용되었다.
4. 여담[편집]
1980년대에 대한민국에서 《폭군 해릉왕》이라는 이름으로 소설이 나온 바 있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3S정책에 제대로 편승한 일종의 야설이다. 해릉양왕의 엽색 행각에 따라 인처&로리물에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일품인데, 당연히 절판되어서 구하기 좀 어렵다. 다만 국립중앙도서관과 몇몇 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대체역사소설 《왕조의 아침》에서도 등장. 주인공을 죽이려는 외국 최고 지도자로 유일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주인공 측이 다음 군주인 금세종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오히려 역공을 가해, 해릉양왕은 죽음을 당한다.
- 해릉양왕의 아들들은 완안광영만 빼고 다 아기 때 죽었고, 완안광영은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후 금세종 완안옹에게 피살되었다.
- 장남: 숭왕 완안원수(崇王 完顔元壽) - 원비 대씨 소생.
- 차남: 폐태자 완안광영(廢太子 完顔光英) - 폐황후 도선씨 소생.
- 3남: 숙왕 완안신사아보(宿王 完顔矧思阿補) - 유비 야율씨 소생.
- 4남: 등왕 완안광양(滕王 完顔廣陽) - 재인 남씨 소생.
《금사》<후비전>(后妃傳)에 따르면, 여러 비빈궁(妃嬪宮)을 모시는 모든 시녀들에게 남자의 의관을 착용시키고, '가시아'(假嘶兒)라 불렀다고 한다.
4.1. 몽골과의 관계[편집]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어떻게 보면 금나라 멸망의 씨앗을 뿌린 황제이기도 하다. 그의 재위 당시 카마그 몽골의 암바가이 칸을 나무 노새(목마)에 못박아 처형시켰는데, 암바가이 칸이 죽으면서 자신의 후손들이 반드시 복수할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는 원조비사에 실려 있는데 이에 대한 해릉양왕의 답변은 "그 말은 너희 부족 무리한테나 고하는 게 옳도다! 짐은 두려워하지 않는다."였다. 확실히 당대에는 몽골을 꺾는데 성공했고 실제로도 몽골이 일어서기까지는 40년이나 더 걸렸으니 맞는 말이긴 했다만...
이 저주 서린 유언은 훗날 암바가이 칸의 먼 방계 후손, 정확히는 암비카이 칸의 6촌이었던 카불 칸의 증손자 테무진(일명 칭기즈 칸)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졌다. 암바카이 칸이 금희종 때인 1136년에 죽었다는 설도 있고 중국 드라마 칭기즈칸에서 이 설을 채용했다. 그러나 해릉양왕 때인 1156년에 죽었다는 설이 더 유력하다.
게다가 이후에도 악연이 이어졌는지 다음에 몽골의 칸이 된 쿠툴라 칸 역시도 5년만에 금나라와 타타르의 협공을 받아 죽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해릉양왕 때인지 금세종 때인지는 알 수 없다. 만일 해릉양왕 시기면 몽골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 칸을 두 명씩이나 죽인 악몽 같은 존재가 된다. 심지어 쿠툴라 칸 사후 몽골은 약 40년 동안 칸 없이 분열된 시기를 맞았으니 정말 몽골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흑역사도 없을 것이다.
다만 그래도 해릉양왕이 당대에 그 정도라도 몽골을 꺾은 건 도움이 되었다. 물론 당시에 몽골이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처럼 강해진 것도 아니고 카불 칸도 그 정도의 역량은 아니었다. 금희종을 상대로 여러차례 승리하여 그 금나라를 상대로 물자를 삥뜯기까지 했지만 정작 타타르와 사이가 나빠져 쌈박질하다가 그걸 또 금나라가 잘 이용한 바람에 결국 몽골의 약체화를 야기하고 말았다. 그래도 이미 카불 칸 때 금나라를 골치 썩이게 만든 만큼 해릉양왕이 그 정도라도 꺾어놓지 않았다면 금나라는 금세종과 금장종의 전성기에도 몽골에 시달리며 안정기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5. 둘러보기[편집]
[1] 후대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모습이다. 참고로 복장이 고증 오류인데, 금나라 박물관에는 역대 금나라 황제의 흉상을 전시하면서 해릉양왕을 포함한 금나라 역대 황제들을 북방 이민족스러운 옷을 입은 모습으로 만들었다. 중국 사서에 요나라와 금나라의 상류층들이 송나라식 단령과 사모를 착용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현대 중국에서는 요나라와 금나라의 복식을 묘사할 때 중국식이 아닌 이민족식 의상으로 복원한다. 전 황제인 희종 때 통천관과 24류 면류관, 강사포를 입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냥 이민족스럽게 만들었다.[2] '거간'은 간언을 물리친다는 뜻이고, '시비'는 말을 교묘하게 얼버무린다는 뜻이다.[3] 생모가 아니라, 적모인 도단씨를 말한다. 죽인 다음 뼈를 불태워 물에 뿌려 버렸다.[4] 양(煬)은 '방탕하고 악랄하며 여색을 좋아하고 예를 무시했으며 하늘의 뜻에 거역하고 백성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자세한 내용은 시법 참조.[5] 군주로도 취급하지 않았다. 황족으로서 친왕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왕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6] 후술되어있듯 중앙 행정을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화 과정을 잘 수행했고 몽골을 잠시나마 억누르는 등 업적이 아예 없진 않았기 때문인것으로 보인다.[7] 명나라의 융경제는 난잡한 성생활을 즐겼지만, 이는 궁녀와 후궁 한정으로 충분히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한 것이고, 황제로서의 행적으로 따지면 오히려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지나친 여색으로 인해 건강을 해쳐 요절했지만 말이다.[8] 전근대 시기엔 조기사망률이 높았으므로, 왕조의 혈통을 유지시키기 위해 신하들이 군주에게 후궁을 여러 명 두어 다산을 권고하는 게 당연시되는 시기였다. 단, 이건 결혼한 적 없는 처녀들이 대상이었지, 유부녀를 건드리는 건 절대적인 금기였다.[9] 비슷한 사례로 역시나 왕족들을 마구 숙청했던 고려의 광종이 있다. 이쪽은 자기 친아들인 경종도 죽이려 했으며 어찌나 많이 죽였던지 목종 대에는 왕좌를 계승할 인물이 대량원군(현종)밖에 남지 않았을 정도이다.(광종의 아들이었던 경종은 자식이 목종 하나뿐이었고 목종이 너무 어려 대신 왕좌에 오른 경종의 사촌인 성종도 아들이 없이 딸 둘만 낳았다. 거기다 목종은 동성애자라서 아이를 못 낳았다.)(당시 왕씨로는 대량원군 말고도 효은태자의 자손들도 있었지만 광종에 의해 계승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그러나 대량원군에게 유고가 생겼다면 목종은 자식을 못 낳는 상황이고 왕씨 남성도 효은태자의 자손들만 남은지라 이들이 계승권을 회복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광종은 해릉양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업적을 쌓아 명군 소리를 듣는 군주라 해릉양왕이 비벼볼 건덕지가 없다...[10] 역대 여진 추장들이었으며 황제로 추존받은 이들이다.[11] 이때 당시 죽은 대표적인 인물이 기재인데 해릉양왕이 무슨 일이 있으면 직언해도 된다는 그의 말을 믿고는 남송을 공격하는 일에 반대 의견을 냈다가 그 즉시 목이 잘렸다.[12] 이런 상황에서도 해릉양왕은 천하에 군주가 넷인데 남에는 남송, 동에는 고려, 서에는 서하가 있으니 이를 통일해야 진정 넓은 나라가 된다며 남송 정복이 끝나면 고려와 서하를 정복하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즉, 남송이 쓰러져도 전쟁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금나라 백성들의 앞날은 가시밭길이나 다름 없었다.[13] 우윤문은 금에 사신으로 가서 금나라가 변경으로 물자를 운송하는 것을 보고, 금나라가 남송을 침공할 것을 예측하였다.[14] 이때 금나라 군의 도강을 저지할 때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고 한다.[15] 성이 야율씨인 걸 봐도 알 수 있듯이 요나라 황족 혈통이다. 천조제의 직계 혈통을 단절시킨 장본인이 해릉양왕이므로 친척의 원수를 갚은 셈이다.[16] 금 세종은 해릉양왕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었기에 반란에 동참한 것인데 바로 그 때문에 부인 오림답씨를 잃었던 것이다. 해릉양왕은 오림답씨가 미녀라는 소식을 듣고 그녀를 강탈하려했는데, 오림답씨는 남편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궁으로 향했고 해릉양왕의 유혹을 거절하고 자진하면서 절개를 지켰던 것이다. 금 세종은 황제에 오른 뒤 오림답씨를 황후로 추존하고 늘 그리워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