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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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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청나라 말기 시절 주요 관리. 19세기 후반 불씨가 꺼져가던 청나라를 일으켜 세우고자, 공친왕 등과 함께 몇몇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개혁을 시도한 실권자 중 한 명이었다.
중국의 역사적 인물들 중 한국에서 한자 발음대로 이름을 표기하는 마지막 세대다. 국내에서 현대 중국 인물로 분류되어 중국인 발음으로 표기하는 기준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이홍장은 그 이전인 1901년에 사망했으니 원칙상 이홍장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 반대로 바로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위안스카이는 1916년에 사망했으므로 한국 한자음인 원세개가 아닌 중국어 발음에 따른 위안스카이라는 표기가 원칙이다.
참고로 중국어 발음은 리훙장(Lǐ Hóngzhāng)이다. 다만 위와 같은 이유로 한국에서는 잘 사용하지는 않는 편.[2] 종종 리훙장이라 표기하는 책도 있긴 한데, 누가 설명해주지 않으면 연상하기 어려운 린쩌쉬(= 임칙서)와는 달리 리훙장은 딱 봐도 이홍장이라 사실상 별 상관은 없다.[3]
2. 생애[편집]
2.1. 출생과 성장[편집]
청나라의 안후이성 허페이시 출신이며 한족으로 신사층(= 상류층) 출신이다. 아버지 이문안은 진사였고, 전 세대의 유학자인 증국번의 지인이었다. 1844년 향시를 통과한 뒤 베이징에서 증국번의 직계제자가 된다. 층층시하로 보는 과정을 거쳐, 1847년에 진사가 되었고, 진사 출신에서도 최고 등급이 임용되는 한림원 관리에 임명되었다.[4] 여기서 진사는 조선에서의 의미[5] 와 달리 과거 시험 최종 합격자로 황제 앞에서 등수만 가리는 시험인 전시를 볼 수 있는 인물을 뜻한다. 조선시대의 생원 • 진사에 해당하는 것은 중국의 수재나 거인이고 지방 시험에서 합격해 베이징과 난징에서 열리는 과거 시험(회시)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거인이라고 했다. 거인이면 사대부 취급을 해주고 지방에선 유지로 행세할 수 있었다.[6] 물론 회시를 거치지 않고도 하급직이나 납연[7] 이 가능했다. 진사 출신은 명 • 청 시대 과거 시험을 거친 최고 엘리트였다. 그 당시 중국의 과거 시험은 조선시대보다 훨씬 더 경쟁률이 높았고, 청나라 때는 인구도 대폭 늘어난데다가[8] 만주인 우대로 한인들은 관료로 들어갈수 있는 문이 더 좁아졌기 때문에 그야말로 바늘구멍을 뚫고 나온 것과 비슷했다.
2.2. 의병 활동[편집]
홍수전에 의해 한족이 중심이 된 태평천국의 대란이 일어났지만 그들의 혁신적인 주장을 두려워 한 지배 향신층은 이를 기득권에 대한 위협으로 보고,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당시 청나라 정규군인 팔기군과 녹영은 이미 18세기 말 백련교도의 난 때 무력함이 입증된 상태였으며, 태평천국 진압에는 향신층이 조직한 의병들이 주로 나섰다. 그렇다고 관군이 아예 논 것은 아니었다. 특히 몽골 팔기군은 높은 전투력으로 유일하게 실전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준가르부 정벌에서 막강했던 팔기군은 50년도 안 되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의병을 조직한 사람 중엔 증국번도 있었다. 증국번의 의병은 "상군(湘[9] 軍)", "회군(淮[10] 軍)"이라고 한다. 이홍장은 이들을 물려받으면서 태평천국을 진압하고, 군벌이 되어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다.
증국번은 이홍장을 광서성 의병장 강충원에게 천거했다. 이홍장은 문관 출신이기는 했지만 태평천국 진압에서 발군의 진압 역량을 보여줬다. 태평천국 이후 중원 일대를 쉽쓸었던 반청 운동으로, 태평천국처럼 특정한 이념은 없었고 마적과 별로 다를 바도 없었던 염군(捻軍) 진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854년에 강충원이 사망하고, 복제가 안후이의 순무로 부임한다. 이홍장은 자신의 고향에서 모집한 의용군인 회군(淮軍)을 거느리고 상하이 수비 등에서 공적을 올렸고 전후 1등 백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때 쑤저우에서 협상 후 자진항복한 태평군 병사들을 모두 학살하는 사건도 벌였다. 이 학살 이후 항복 협상을 받아낸 조지 고든[11] 상승군 대장[12] 이 크게 분노해 이홍장을 죽여버리겠다고 날뛰었다고 한다. 처형 자체가 잔혹한 탓도 크지만, 항복 협상 자체가 고든은 태평군 병사들의 생명과 신원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무혈 항복을 받아줬는데 처형이 벌어졌으니 고든의 명예를 크게 훼손한 셈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태평군 포로 학살은 이홍장만 벌인 게 아니라 대다수의 청군 지휘관들도 했으며, 원인은 태평천국 점령지에서의 만주족 학살로 인해 눈이 뒤집힌 청나라 조정의 불관용 방침이 컸다.
1858년에 복제의 지도력에 실망한 이홍장은 증국번과 함께 태평천국 진압에 힘쓴다. 1864년에 공적을 인정받아 황마괘[13] 를, 태자태보, 일등숙의백의 작위를 받고, 안후이 성의 순무로 임명된다. 1866년에 염군 진압을 지도해 협판대학사와 호북호남총독으로 임명된다.
2.3. 집권[편집]
1870년 톈진에서 반(反) 기독교 폭동이 일어나 프랑스, 영국 - 미국 가톨릭 선교사들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발하자, 이홍장은 증국번과 함께 프랑스 외무장관과 협상을 한다. 증국번을 이어 직례총독으로 임명되고, 북양통상대신과 문화전대학사를 겸임한다. 북양통상대신으로써 외교업무를 전담하면서 서양의 문물과 기술을 접하게 된다. 1882년 조미통상조약을 중개 서태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하며, 막대한 예산을 들여 독일, 영국 등으로부터 대량의 철갑함, 순양함, 어뢰정 등을 구입하여 당대 아시아 최강이라는 북양함대를 조직했다. 이 과정에서 주독 청국공사 이봉포, 허경징, 기술자 서건인, 서도 부자 등의 인맥을 육성하였다.
같은 양무파였지만 정적이기도 했던 좌종당과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논쟁을 벌였는데, 좌종당은 영국 - 프랑스 - 미국 같은 해양 세력보다는 북방의 러시아 세력을 견제할 것을 주장했고(= 새방), 이홍장은 러시아보다는 영 • 불 • 미가 더 위협이 될 것이라고 보아(= 해방), 해군력에 힘을 쏟았다. 이홍장은 러시아 세력을 이용하여 영국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는데, 이로써 국제적 안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2.4. 실각과 말년[편집]
하지만 청나라의 군사력이 청일전쟁에서 무참히 무너지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실각하고 말았다. 다만 이건 마냥 이홍장의 잘못이라고 보긴 애매한 게, 당시 서구 문물의 수입을 과하게 한 탓에 청의 경제가 붕괴 조짐을 보이자 불가피하게 경제 자립화를 위해서 군사력 강화를 중단한 것이었다.[14] 근데 하필 그 시점에 청일전쟁이 터진 게 불운이라면 불운이었다.
하여튼 청일전쟁을 정리하기 위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이홍장 아니면 전후 협상을 안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전권 위임 대사라면 관직이 낮은 것은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관직이 높을수록 협상은 잘될 것이며 특히 이홍장이나 공친왕이 직접 오시면 제일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조약을 실제로 이행할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지요."라고 요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홍장이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갔는데, 일본의 극우파인 고야마 로쿠노스케에게 저격당해 총알이 얼굴에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 날 다시 얼굴에 붕대를 감고 협상장에 나서는 위엄을 보여주었고, 결국 이홍장이 건강 악화로 귀국해 국제 여론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 측이 3억 냥의 배상금을 2억 냥으로 줄이고 당초 톈진 할양 요구에서 타이완 할양으로 대신하는 합의를 해주었다. 물론 이것만 해도 청 중앙 정부의 1년치 총수입을 뛰어넘는 엄청난 액수였지만, 청 입장에선 손해를 꽤 줄였다.
한편, 범인인 고야마 로쿠노스케는 사로잡혀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으나 1907년 12년 만에 출옥되어 천수를 누렸다. 근데 천수를 누리다가 일본 제국이 잘 나가는 것을 보는 듯하더니 결국 원폭 공격당하고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하고 1947년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는 것까지 보았다.
이후 일시적으로 재기용 되기도 했으나, 개혁파 중에선 온건파에 가깝던 그를 변법자강운동 당시 급진파들이 서태후와 연합을 할 까봐 우려해 멀리하였고 결국 다시 한직으로 밀려난다.[15] 그리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한 채 신축조약으로 청나라가 사실상 반(半) 식민지화가 된지 두 달이 지난 1901년 11월에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유언으로는 "인재를 키우고도 나라를 망쳤으니 그야말로 한스럽도다!" 이후에도 의식은 있는 채 하루를 더 생존했으나 병이 심각해져 말을 하지 못했고 끝내 눈을 뜬 채로 눈물을 흘리기만 하자 좌우에서 "공께서 하지 못하신 일은 저희가 이루겠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눈을 감았다고 한다.
3. 평가[편집]
과거 출신이라서 고리타분할 것 같지만, 새방해방(塞防海防)을 두고 좌종당과의 논쟁에서 보듯이 이홍장이 보는 국제 인식은 대체로 정확했다. 1870년대 청나라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던 새방해방 논쟁에서 이홍장은 영국, 좌종당은 러시아를 가상적국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다. 두 나라 모두 야금야금 중국의 이권이나 영토를 삼키고 있었는데, 이홍장은 해양세력인 영국이 더 중국에 위험하다고 본 것이다. 당시 영국과 러시아의 국력차이를 보면 아직 시베리아를 넘어 극동에 군사력을 투사하기 힘든 러시아보다는[16] 강력한 해군을 투사할 수 있는 영국이 중국에 더 위협적이었다. 이홍장은 건륭제 시절 손에 넣었지만 툭하면 반란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지역이 사막에 불과한 신장[17] 을 러시아에 팔고, 그 돈으로 영국을 몰아낼 함대를 육성하자고 했다.[18]
문제는 청나라가 제대로 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근대적 문물을 전근대적으로 운용하다보니 엄청난 실수가 있었다. 예를 들어, 통설과는 달리 청일전쟁 때 청나라군의 무기는 일본군의 무기보다 대체로 성능이 뛰어났음에도[19] 청군의 계급 체계나 조직은 명나라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결국 서양 교관들이 아무리 청군을 훈련시켜도 지휘관들이 무능했기에[20] 몇몇 삽질이 겹쳐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다.[21]
청일전쟁에서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타격을 받아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역으로 만약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했다면 청나라를 일으켜세운 위인으로 대접받았으리라 조명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다만 이건 요즘 와서 하는 평가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이홍장에 대한 평가는 극히 안 좋았다. 좋게 봐도 나라 말아먹은 무능 정치인, 좀 심하게 말하면 한간의 원조로 보는 케이스도 있었다.[22] 하지만 어른의 사정인지 혹은 양무운동이 체제 변화를 배제한 경제발전이라는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권 정책과 맞아 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1980년대부터 이홍장에 대한 중국의 평가는 계속 올라갔다. 한국으로 따지면 인지도 차이는 있지만 김홍집과 여러모로 비슷한 면이 있다.
결론적으로 한 나라의 재상이라는 위치에 있을 만한 능력도 있었고, 청나라를 개혁할 의지와 비전도 충분한 인물이었으나 나라의 상황이 너무나도 개판이었던 것이 그에게 큰 불운이었다. 위에도 나와있듯 이홍장이라는 인물 자체는 꽤 유능했으나 당시 청나라는 군대, 경제, 내치, 외교 등 모든 것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결국 나라 꼴이 이러니 이홍장과 몇 명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해결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개혁을 방해하던 주요 세력 중 하나인 황실 자체를 냅두고 소극적 개혁만 부르짖으니 애초부터 태생적 한계이긴 했다.
4. 여담[편집]
- 위의 유명한 풍자화[23] 에서 뒤에서 두 팔 든 채 손톱 세우고 격분하는 인물이 바로 이홍장이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종이 호랑이임이 입증된 중국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열강들이 갈라먹는 상황을 속절없이 지켜보는 충격과 공포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24][25][26] 그러나 청나라 땅이 너무 큰 데다 유럽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폴란드처럼 갈라먹지는 못했다.[27]
- 그래도 19세기 청나라 제국의 나름 개혁 의지가 있던 실권자였던지라 서구권에서도 꽤 유명했는지, 여러 인사와 만남을 가졌다. 미국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와도 만났는데, 그랜트는 이홍장을 글래드스턴, 비스마르크급으로 고평가하기도 했다.
- 어마어마한 장신이였다. 위의 사진 속 오토 폰 비스마르크,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조지 커즌 세 사람 모두 193cm의 장신인데, 같이 찍은 사진을 보면 이홍장이 세 사람보다 작기는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며[30] , 이홍장과 친했던 미국인 찰스 다니엘 테니의 회고에서도 190cm 정도의 장신이었다고 언급되며, 니콜라이 2세도 러시아를 방문한 이홍장을 만난 후 당당한 풍채를 가지고 있다고 일기에 썼다. 이런저런 증언들과 위의 사진들로 종합해 봤을 때 이홍장의 키는 180대 후반 정도로 추정된다. 놀랍게도 만주족이나 몽골족 등 북방민족이 아닌 남방민족인 한족인데도 당대 서양인에 비해서 꿇리지 않았다.
- 40세가 넘은 나이에 영어를 혼자서 학습하였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토 히로부미와 통역없이 영어로 대화하였고 미국과 영국에 방문하고서도 여객선에서 현지인들과 영어로 막힘없이 대화하였다. 영어에 능숙해진 이후로는 영자신문을 읽으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하였다.
- 당시 조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만큼 조선 사람들도 적잖이 만나 봤는데 그 중에는 흥선대원군도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었을 때 만났는데, 이홍장은 반란의 수괴인 흥선 대원군을 비록 의전상 상급자[31] 라 정중히 대하긴 했어도 심문하는 입장이었다. 이홍장은 흥선대원군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학하다"고 평가했다가 1884년 올린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들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은 효웅이다. 그의 재기는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호평하기도 했다.
- 흥선대원군이 고종의 형 이재면에게 보낸 한글 편지(#)에는 '니즁탕'이라는 호칭으로 거론된다. '니'는 성씨 '이(李)'이고 '즁탕'은 '중당(中堂)'으로 여기서 '중당'은 재상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 비록 청일전쟁으로 인해 실권을 잃었다지만 특출한 외교적 수완은 계속 인정받고 있었기에 시모노세키 조약, 청 - 러 밀약, 베이징 조약 등 굵직한 대외적 협정마다 7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직접 나섰다. 평생을 현역으로 활약한 셈. 80세 가까이 이르는 인생을 청나라 부흥에 전력 투구했으며 그럼에도 결국 그 몰락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현장에서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역사상의 풍운아였다. 세대로 따지자면 청나라의 몰락의 신호탄을 쏘아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아편전쟁 때 그는 약관 17세에 불과했다.
- 저서로는 《이문충[32] 공전집》이 있다.
- 그의 무덤은 고향인 허페이시에 있다. 라이벌인 좌종당과 마찬가지로 이홍장의 무덤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파헤쳐졌고 시신은 훼손되었다. 이후 이홍장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서 생가와 무덤을 복원하였으며 생가는 그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되었다.
- 조선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이 일본의 무력 시위에 당황해 청나라 조정의 의견을 물었고 이홍장은 조선에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권고하면서도 일본이 종주국인 청나라를 대신해 조선에 주도권을 행사할까 봐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과의 통상 조약을 주선했다. 일부 청나라 관리들이 번속국인 조선을 아예 병합해 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지만 이홍장이 비현실적이라며 물리쳤다. 당시 청나라의 국력으로도 조선의 병합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는 이홍장이 정치적으로도 조선을 별개의 나라로 인식함과 동시에 자신의 세계관의 국가로 인지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이홍장은 조선을 무리하게 병합하기보다는 기존의 번국 형태로 유지시키고 청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청나라에게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중원의 통일 왕조들은 한나라와 당나라처럼 한반도 일부를 직접 지배하려 했으나[34] 그 이후로는 조공 관계를 맺고 상국으로 군림하는 정도에 만족했지 아예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희제 시절에도 대만을 복속하면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강희제는 조선이 중국과는 풍속이 다르다며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다.[35]
- 그의 외증손녀는 장아이링이라는 소설가인데, 중국 현대문학사에서는 유명한 루쉰만큼이나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 한국에서는 후기에 쓴 단편 색계가 영화화 되어 나름대로 히트를 쳤는데, 원작자 장애령이 바로 장아이링의 한자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 쑨원과 의사소통이 전혀 안 돼서 애 먹은 적이 있다. 쑨원이 광동어만 쓸 줄 알았기 때문. 중국은 공식적으로 중국에서 쓰이는 언어들을 중국어의 사투리로 취급하지만, 중국어는 단일 언어라기보단 방언연속체로 이루어진 제어(諸語)이기 때문에 외국어처럼 서로 의사소통이 거의 되지 않는 방언도 많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5.1. 사극[편집]
5.2. 영화[편집]
- 1965년 영화《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에서는 배우 주선태가 연기했다.
- 영화《황비홍》에서는 나름 뛰어난 관리로 묘사되어 나온다.
5.3. 만화[편집]
- 《왕도의 개》에는 노회하고 유능한 정치가로 등장하지만 김옥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등 음험한 역할도 맡았으며 이 때문에 카노 슈스케의 사주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을 위해 방일하던 중 입에 총을 맞아 복수당한다.
5.4. 기타[편집]
-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선 원래 역사처럼 태평천국을 상대로 활약을 벌인다. 허나 고종과 서태후의 능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청나라의 상황이 원역사보다 더 안좋아지자, 이에 중화제국을 건국하고 근대화와 개혁을 시도한다. 허나 전반적인 여건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결국 천명대전에 친정을 한 끝에 주인공 이형의 손에 목이 잘린다.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주인공이 도망쳐 나와 가장 먼저 의탁한 사람이며, 영어를 잘 아는 점이 일치해 상당히 친해져 이홍장 관할 구역에서 홍삼 사무역을 승인할 정도에 이르렀으며 나중에도 이 친분을 잘 써먹는다.
[1] 193cm의 영국의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총리,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 총리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엄청난 장신이다.[2] 사실 따지고보면 한국에서 근현대 중국인들을 표기할 때 오히려 신해혁명 이후 인물조차도 그냥 한국 한자 발음대로 읽는 케이스가 심심찮은 점을 감안하면 이홍장의 이런 케이스가 특이케이스에 해당되기도 한다. 특히나 일반 대중문화를 좀 넘어서 학계에 들어가면 아주 최근 논문이 아닌 이상 상당수의 논문이나 저서에서 모택동, 장개석, 원세개 같은 방식으로 그냥 한국 한자음을 표기하는 경우가 잦은데, 발표된 지 좀 된 논문의 경우 이름을 아예 한국어를 빼고 한자로만 표기해서 그걸 한국 독음대로 읽어서 그런 경우도 많고, 그 영향이 남아 좀 더 최근으로 와도 현대 중국 인물을 한국어 한자 발음대로 읽는 경우가 흔하다.[3] 얼핏 보면 리홍장이라고 보이기 쉬워서 "李홍장"이겠거니 하고 잘만 알아먹는다. 심지어 Lǐ Hóngzhāng을 Li Hongzhang으로 보고 그대로 표기해 진짜 리홍장이라고 하는 책도 있다.[4] 진사 출신 중 특별히 높은 등수로 합격하면 한림원으로 가는 것이 관례였다.[5] 조선에서는 '향시 합격자'를 의미한다.[6] 단순한 유지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나라로 치면 광역지자체의 부지사라든지 국장 같은 요직을 할 수 있었다. 중앙 정부에서 지방관을 임명하면 그 지방관이 파견되어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실무 관료들을 지방관 직권으로 구성했는데 거인 출신들이 그런 자리를 많이 역임했다. 물론 중국이 거대한 나라인 만큼 그 자체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자리였다.[7] 돈으로 벼슬 임용을 합법적으로 행함.[8] 명나라 말기에 1억 근처이던 중국 인구가 이미 4억이 되어 있었다.[9] 후난성의 약칭이 '상(湘)'이다.[10] 안후이성의 약칭으로 공식적으로는 '환(皖)'을 쓰나, 화이허(淮河)를 따라 '회(淮)'라고도 종종 쓴다.[11] 생몰년도: 1833년 ~ 1885년[12] 용병부대이지만, 본인은 고결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고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파쇼다 사건을 참고할 것.[13] 고위 관리들의 황색 제복[14] 실제로 1890년대에 들어서서 이르면 청나라는 열강들로 부터 빌린 차관도 거의 다 상환하고 무역수지도 빠르게 호전된다.[15] 그의 강력한 북양군은 위안스카이가 이끌게 되었고 결국 청나라를 멸망시키는 도구가 되고 만다.[16]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한참 뒤인 1898년에야 완성되었다.[17]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18] 사족으로 만약 그랬다면 현재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중국령으로 남아있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로 좌종당의 견해도 러시아의 역사적인 팽창주의를 보면 일리는 있었다. 또한 좌종당이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신장은 현재 자원의 보고로 중국에 중요한 지역이다보니, 중국이 외부적으론 러시아나 소련 시절부터 견제받고 내부적으론 그곳 위구르족의 독립 요구가 터져나옴에도 이를 거부하는 것 역시 이런 이유가 한몫한다.[19] 당장 함대 총 배수량만 하더라도 일본 해군의 2배에 달했다. 일본 해군은 없는 7,000톤급 전함 2척도 북양함대에 존재했기에 일본 해군과 대등하게 교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상적인 운용을 했다면 청나라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다.[20] 특히나 지휘관 중 섭지초는 공주에서 평양성으로 후퇴 한 뒤, 성환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했다는 거짓보고를 이홍장에게 하였다.[21] 무능한 지휘관들이 많았어도, 등세창 같은 해군 지식에 유능한 인물이나, 비록 황해 해전에서 졸장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육지 전투에서 만큼은 지식이 빠삭했던 정여창을 배출하는 등 여러 명장들을 배출하기도 하였다.[22] 한족임에도 만주족이 지배층인 청나라를 위해 일했기 때문이다. 즉, 한족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다.[23] 청나라, 제2차 아편전쟁 문서에서도 이 그림을 볼 수 있다.[24] 위의 "열강에게 분할당하는 청" 그림에 중국을 갈라먹는 열강의 대표로 나온 인물들은 왼쪽부터 빅토리아 여왕, 빌헬름 2세, 니콜라이 2세, 마리안, 사무라이이다. 또 이홍장의 손톱이 긴게 특징인데, 당시 청나라 귀족이나 고급 관료들은 육체노동을 경멸하여 저렇게 손톱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다. 서태후 사진을 보면 긴 손톱을 보호대로 보호하고 있는 사진도 많다.[25] 1990년대 후반 베스트셀러인《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어》의 지은이인 한호림이 후속으로 쓴《꼬리에 꼬리를 무는 중국어》라는 책자에서 저 사진의 말풍선 설명에서 구한말 역사를 잠깐 설명하며 이홍장이 조선을 먹으려는 것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홍장은 오히려 신장처럼 청나라의 국력으로 통치가 어려운 지역은 과감히 러시아에 할양하고 국력을 정비하는 게 옳다고 보았을 정도로 팽창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자국의 능력을 현실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 자국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려고 했지만, 자국의 능력을 넘어서 직접 먹으려 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일부 청나라 관리들의 조선 병합 의견을 비현실적인 의견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그러니 이홍장이 조선을 먹으려는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26] 그렇다고 해서 이홍장이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나 근대화를 바란 것은 아니다. 그는 조선이 서양이나 일본에 넘어가는 것도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청나라의 영향권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임오군란 때는 민비의 요청을 받아들여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기도 하고, 갑신정변 때는 조선의 내정에 개입해 일본의 입김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쿠데타를 분쇄했다.[27] 후대에 대놓고 중국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같은 이유로 가장 승승장구할 때조차 중국의 동부 해안 지대만 간신히 차지했다.[28] 이 동아일보 기사를 패러디한 "이홍장과 비스마르크"라는 팬픽이 존재한다.[29] 폴란드가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립할 때 폴란드의 국경을 확정한 커즌 선을 그었다.[30] 로버트 개스코인세실도 나이가 들면서 키가 좀 줄어들었을 것이고, 대두(...)인 데다가 조금 구부려있는 상태로 찍었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팔순 노구였음을 감안하면 키가 꽤 줄었을 것이다.[31] 아무리 관직이 높다 한들 신하 국가의 군주의 친아버지인 대원군보다 이홍장의 의전 서열이 높을 수는 없다.[32] 이홍장의 시호가 문충(文忠)이다.[33] 다른 하나는 순친왕.[34] 한나라의 한사군과 당나라의 도호부. 다만 설치 이후 얼마 못 가 축출되거나 중앙 정부와 분리되어 현지 한민족과 동화되는 양상을 보였다.[35] 물론 대만의 동녕 왕국이 한족 왕조였고 당시 대만도 이미 한족들이 대거 이주한 상태였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