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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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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원나라 말기의 군벌. 저장 성과 장쑤 성에 할거하였다.
2. 생애[편집]
장사성은 장쑤 성 태주 백구정 출신이며, 본명은 장구사(張九四)이다. 1321년 염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원 말기로, 조정의 부정부패와 재정 부족으로 소금 값이 오를 대로 올랐던 시기였다. 장사성은 식구들을 부양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소금을 운반하는 일을 하였다. 하지만 소금을 상납해도 제 값을 받지 못해 제염업자의 생계는 늘 곤궁하였고 관리들의 모욕을 듣기 일수였다.
2.1. 장사성의 난[편집]
결국 장사성은 1353년 난을 일으켜 그의 아우와 이백승 등 18명과 함께 원나라에 항거하여 태주를 포함한 4개 진을 함락시켰다. 이 소식을 들은 원 조정에서 장사성에게 벼슬을 주겠다고 회유했지만 장사성은 이를 거절하고 나라를 세워 국호를 대주(大周), 연호를 천우(天祐)라 하고 자신을 성왕(誠王)이라 칭했다.
1355년 원은 탈탈을 보내 장사성의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탈탈은 100만 대군을 거병하여 고우를 쳤다. 탈탈은 장사성의 군대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어 장사성이 성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끔 만들었지만 원순제가 간신의 말에 넘어가 탈탈의 병권을 박탈하여 탈탈은 회군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타 장사성의 무리는 탈탈의 군대를 기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원이 장사성을 치면서 고려에도 군사를 동원해 지원할 것을 요구했는데, 그 군을 지휘한 인물 가운데 최영도 포함되어 있었다. 탈탈이 실각하고 원의 군사들이 철수한 뒤에 고려로 돌아온 최영은 탈탈이 병권을 박탈당하고 장사성 진압에 실패한 사실과 원의 개판 오분 전인 상황을 공민왕에게 아뢰었고, 공민왕은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굳혀 반원자주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1356년 장사성은 남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평강로(쑤저우)를 차지하여 웅평부로 삼고 그곳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장사성의 세력이 날로 커져가자 주원장은 이들 세력에 양헌을 보내 우호의 뜻을 내비치지만 장사성은 양헌을 돌려보내지 않고 주원장의 세력을 공격한다. 이에 주원장은 서달을 보내 장사성을 막게 했고 장사성은 용담에서 참패를 당하자 주원장에게 곡식 20만 석과 금은을 바치며 화친을 제안했다. 주원장이 그에게 해마다 곡식 50만 석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양헌을 돌려보내라고 하자 장사성은 이에 답서를 보내지 않았다.
2.2. 원에 투항과 최후 [편집]
1357년 원의 양완자에게 패배하고 주원장에 의해 장흥(長興), 강음(江陰)을 빼앗기는 등 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장사성은 원에 투항해 태위에 봉해진다. 이듬해 장사성은 양완자와 달식첩목이의 관계를 이용해 달식첩목이와 연합하여 양완자를 공격했다. 양완자는 자진하였고 결국 장사성은 항저우를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또다시 왕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긴 장사성은 원에 왕위를 요구했지만 조정에서 반응이 없자 원나라를 배신하여 1363년 자신을 오왕(吳王)이라 칭하고 군벌 세력으로 자리매김했다. 한편 또 다른 군웅 세력인 진우량은 장사성에게 자신과 연합하여 주원장에게 맞설 것을 제안했다. 장사성은 진우량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오량에게 막히는 바람에 파양호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다.
1366년 주원장은 진우량 세력을 복속시킨 뒤 장사성 세력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장사성의 군대는 전투마다 패배를 거듭하였고 결국 마지막 거점인 평강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평강을 포위한 주원장은 장사성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장사성은 마지막까지 항복하지 않고 싸우다가 평강이 함락된 후 포로로 잡혔다. 그 후 장사성은 1367년 47세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3. 기타[편집]
수호전의 저자로 유명한 시내암이 이 사람 밑에서 지낸 적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양우생의 소설 평종협영록의 주인공 장단풍이 장사성의 후손으로 설정되어 있다.
개명 후 이름인 '사성(士誠)'에 대한 야사가 있다. 상술한 바와 같이 그의 원래 이름은 '구사(九四)'였는데, 이는 그야말로 그 이름의 소유자가 친족 내 항렬로 따졌을 때 몇째인가를 나타내는 명명 방식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군벌이 되자 좀 더 폼나는 이름으로 바꾸어야 할 내면적 필요성을 느꼈는지, 인근에서 한 문사를 불러다 작명을 부탁했다. 그러나 장구사의 변변찮은 출신에 대해 일찍부터 알아서 그를 깔보는 마음이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그를 불러들인 장구사나 그 부하의 태도가 고까웠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문사는 장구사에게 '사성'이라는 이름을 추천했고 장구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저 낱자로만 보면 유가 경전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성(誠) 자가 들어가 있어서 썩 나쁘지 않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진짜 의미는 <맹자(孟子)>의 경문 가운데 윤사(尹士)라는 인물이 맹자를 비판했다가 역으로 맹자에게 설복을 당하고서 "저는 참으로 소인입니다.(士誠小人)"라고 자아비판을 했다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으며, 따라서 이 문사는 작명을 이용해 장사성을 소인이라고 조롱한 셈이다.
이 이야기는 훗날 명 태조 주원장의 귀에도 들어갔고, 평소 문사들을 위선적이라 여겨 별로 좋아하지 않던 주원장의 성향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다만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주원장에게 전해진 이야기 버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이것이 문제의 문사가 가졌던 진짜 의도였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고, 설령 그것이 맞다고 하더라도 장사성이 이러한 내막을 생전에 알았는지 어쨌는지도 역시 알 수 없다. 알았다면 장사성은 화를 내며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한낱 문사에게 희롱을 당하고서 뒤늦게 깨닫고 화를 냈다느니 하는 모양 빠지는 꼴을 피하기 위해 끝까지 진짜 뜻 대신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으므로.
4. 둘러보기[편집]
[1] 위의 이미지에는 장오왕(張吴王) 유상(遺像)이라고 씌었는데, 장사성의 초상화란 뜻이다. 여기서 오(吴)는 오(吳)의 속자로, 장사성이 생전에 오왕(吳王)을 칭했기 때문에 '장오왕'이라고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