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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폰 벡지코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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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군인으로 장군참모장으로 25년을 복무하였었다.
2. 생애[편집]
프리드리히 벡(Friedrich Beck)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바덴 대공국의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카를 요제프 벡(1794-1838)이 그 곳에 외과의사로 일하던 때였다. 벡은 합스부르크 황실에 대한 충성심으로 1846년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입대했다. 그는 당시 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중위, 공병 정찰대를 거쳐서 장군참모부에서 복무했다. 헝가리 혁명을 시작으로 요제프 라데츠키 휘하 부대에서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1852년 제국의 수도에 현대적 의미의 최초의 고급 장교 양성 기관인 황립 및 왕립 전쟁대학(k.u.k. Kriegsschule)이 신설되었고, 제1기생으로 입교후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여 상위(Stabskapitän)[2] 에 진급한다.
1861년 벡은 안나 마리아 지코프스키 폰 도브리 도브지츠(Anna Maria Rzikowsky von Dobrzicz)와 결혼했다. 이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참전한 벡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무릎에 총을 맞는 부상을 입었고 제국군이 패배하는걸 무력하게 지켜볼수밖에 없었다. 종전 이후 벡은 오스트리아 기사 작위를 받았고 소령으로 진급한다.
활기차고 잘 조직된 프로이센군에 감명받은 벡은 헬무트 폰 몰트케를 자신의 롤모델로 삼았다. 1862년 오스트리아 제국군 장군참모장인 하인리히 폰 헤스(1788-1870)원수의 부관으로 장군참모부에 복무하게 되었다. 1865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부관이 되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한다.
1881년 마침내 장군참모장으로 승진한 벡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높은 신임을 얻었다. 침착하고 신중한 그의 명확한 판단력과 실용적인 상식은 사람과 사물을 편견없이 순전히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고 판단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래서 군사 문제에 대해 진보적 자유주의 근대화주의자들과 야전 사령관 알브레히트 대공 주변의 반동 진영 사이에서 조율하는 역할을 했다 . 그의 지휘하의 장군참모부는 제국군의 실질적인 최고 사령부가 되었으며, 제국 전쟁부에 대한 장군참모부의 종속은 거의 명목상의 수준에 불과했다.[3]
1893년, 그는 빌헬름 2세에 의해 프로이센 왕국의 검은 독수리 훈장을 받았다. 재임 기간의 마지막 몇 년은 군사 기술 및 보급에 대한 개혁에 집중되었다. 또한 1889년에는 국군법의 초안을 작성하여 훗날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효력을 유지할 모집 제도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징병은 더 이상 유럽 초강대국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벡은은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는 것과 전쟁부의 한정된 예산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타야했다.
1899년, 제국군의 총사령관이 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국 해군과 군의 보급제도에 대한 현대적인 개선과 황립 및 왕립 해군에 열렬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육군의 중무장에만 몰두했었던 벡은 페르디난트 대공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페르디난트 대공은 황제에게 장군참모장 교체를 요구하였다.
4년 동안의 줄다리기 끝에 황제는 제위 계승자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06년, 76세의 황제는 왕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군의 현대화를 요구로 76세의 장군참모장을 해임하였다. 대신 페르디난트 대공은 자신의 "그림자 내각"의 일원인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중장을 추천하였고 곧 그가 벡의 후임이 되었다. 그의 다년간의 복무를 인정하여 황제는 1906년 6월 11일 벡을 백작으로 승격시켰고 이후 그를 황립 및 왕립 선임 근위 궁사대의 대장으로 삼았다. 1913년에 벡이라는 성에 아내의 성을 합치는 것에 대해 황실의 승인이 내려져 공식적으로 벡지코프스키가 되었다. 1916년 2월 26일 벡지코프스키는 5개월전 신설된 상급대장계급을 부여받았다. 원수보다는 낮은 계급이었지만 이미 실무에 몇년동안 떠나 있었던 벡지코프스키였기에 상급대장 수여가 황제한테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6개월 후 벡지코프스키는 은퇴를 하였고 1920년에 사망한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벡지코프스키'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또한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이 규정 용례이다.[2] 영어로는 staff captain, 독어로는 Stabshauptmann인 이 계급은 오래 전부터 프로이센과 러시아 제국에서 쓰인 계급으로 위치는 중위보단 높고 대위보단 낮다. 북한식으로 상위라고 번역.[3] 벡은 1906년까지 "부황제"(Vizekaiser)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그 이유는 벡이 프란츠 요제프 1세와 동갑인데다 성격도 비슷하고 군사 정책 면에서도 그와 매우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