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미나미노 요코
덤프버전 :
분류
1. 개요[편집]
“「純だね、陽子」、「可憐だね、陽子」”
“「순수하구나, 요코」 「가련하구나, 요코」”
― 데뷔 당시 캐치프레이즈
일본의 가수이자 배우. 1985년 데뷔하여 밝고 청순한 이미지로 1980년대 중후반 일약 스타덤에 오른 톱 아이돌이었다.
전성기 시절엔 쿠도 시즈카, 아사카 유이, 나카야마 미호와 함께 아이돌 4대 천왕이라 불렸으며 그 중에서도 남성팬들에게 가장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다.
애칭은 미나미노(
2. 연예계 활동[편집]
2.1. 데뷔 이전[편집]
1967년 6월 23일 효고현 킨키 중앙 병원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태양과 같이 밝고 건강하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 요코(
고향 고베에서 아가씨 학교로 유명했던 쇼인 여자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 친구와 함께 오사카역 옆의 ABC 홀에서 열린 공연을 보러 갔다가 스카우트된 것이 계기가 되어 도쿄로 상경하여 연예 활동이 가능한 호리코시 고등학교에 편입했다.[3]
당시 고등학교 동창들은 오카다 유키코, 혼다 미나코, 이시노 요코, 나가세 마사토시 등 유명 아이돌 및 배우가 많았다.
2.2. 데뷔 초[편집]
상경 후에는 월급을 3만엔 밖에 받지 못하였고 거기에 숙소비로 2만엔을 내고 나면 항상 돈이 부족하여 고향의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지원을 받아 생활했다.[4]
1984년 드라마 ‘명문 사립 여자 고등학교’로 데뷔를 하였으나 가끔 들어오는 잡지 촬영 외에는 활동이 전무했던 관계로 드라마가 끝난 후에는 숙소에서 할 게 없어 직접 교복을 입은 채로 방송국, 레코드 회사, 출판사에 찾아가 일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오디션을 찾아다니던 중 잡지 ‘주간 소년 매거진’에서 주최하는 1985년 4월 ‘미스 매거진’에 합격하게 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아이돌로서 데뷔한다.[5]
다른 아이돌에 묻혀 데뷔곡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직접 교복을 입고 방송국을 찾아다닌 것을 인상 깊게 본 후지 테레비 관계자가 인기 드라마 시리즈 스케반 데카 후속작의 주인공으로 발탁하였고 그 후에는 큰 인기를 얻으며 톱 아이돌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2.3. 데뷔 이후[편집]
“난노는 제멋대로, 건방지다!” 라고 적힌 근거 없는 비판 기사가 나왔을 때였다.
“이대로 죽어버릴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가족, 친구들, 응원하는 팬들을 생각하면 “난노 때리기 따위에게 질 수 없다!” 라고 결심했다.
― 에세이 “달밤의 재채기”에서
데뷔 직후부터 닛폰 방송에서 라디오 방송 ‘落書きだらけのクロッキー・ブック’을 7개월 가량 진행하였고 반년 후인 1986년 10월부터는 ‘ナンノこれしきっ!’을 시작하여 본인의 전성기가 끝나는 시점인 1990년까지 약 4년간 진행하였다.[6][7][8]
그 당시 가장 확실한 인기를 볼 수 있던 브로마이드 매상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데뷔 이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계속 이어진 스케줄로 인해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면서도 드라마 촬영과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는 등, 활동을 계속 이어갔으나 데뷔 당시부터 연기와 아이돌 활동을 각각 사무소 두 곳(에스원 컴퍼니, 극단 청년좌)으로 나뉘어 관리를 했기 때문에 톱 아이돌이 되면서 스케줄이 서로 겹치는 일이 잦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동시에 스케쥴이 겹치는 더블 부킹으로 인해 모델을 맡고 있던 후지쯔의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고 결국 모델에서도 하차하게 되며 주간지에 비판 기사가 단골로 나오게 되는 등의 일로 1990년 개인 사무소를 차려 독립한다.[9][10][11]
동시에 80년대 말 밴드 붐이 크게 일면서 70년대부터 이어진 아이돌 붐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음악적으로 여러 변화를 주었으나 계속된 하락세가 이어지며 가수 활동은 1991년 ‘夏のおバカさん’을 마지막으로 끝나고 만다. 이후로는 아이돌이 아닌 방송인으로서 드라마와 영화, 연극 무대 등에 출연. 현재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활동하고 있다.
3. 디스코그래피[편집]
1987년 6번째 싱글인 ‘낙원의 Door(楽園のDoor)’의 첫 오리콘 1위를 시작으로 연달아 히트곡을 배출하며 8곡 연속으로 1위를 달성, 가수 활동을 중지할 때까지 4개의 앨범을 제외하면 발표한 모든 싱글이 오리콘 차트 10위 안에 들어갔을 만큼 성공적인 활동을 하였다.
"display: none; display: 문단=inline"를 참고하십시오.
4. 이야깃거리[편집]
- 아이돌 시절의 매력 포인트는 앞니.
- 학창 시절 운동 신경이 학교에서 가장 나빴다. 50m 달리기는 매번 10초 이상이었고 앞구르기도 전혀 못해서 자주 아픈 척하여 체육 시간을 쉬었다.
- 데뷔 곡의 원 제목은 천사의 손수건이었지만 처음 하는 리코딩이 너무 부끄러워 2일이 지나서도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고 스튜디오를 빌리는 마지막 3일째 되는 날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겨우 리코딩을 마쳤고, 그걸 본 작사가가 제목을 변경한다.
- 데뷔 초 팬레터에 감격하여 직접 감사 전화를 한 적이 있다.
- 데뷔 초의 목표는 아이돌 잡지 ‘MYOJO’와 더 베스트 텐 스포트라이트에 나오는 것이었다.
- 1986년에 발매한 사진집 ‘陽子をひとりじめ’는 일본 연예인 역대 사진집 매출 부수 랭킹 8위에 올라있다.
- ‘스케반 데카’ 촬영이 끝나고 찢어진 옷에 분장용 피나 폭약이 그대로 묻어있는 상태로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등교하는 일도 있었다.
- 1988년 더 베스트 텐에서 ‘秋からも、そばにいて’를 부르고 있었을 때 가사를 잊어 손을 부르르 떨며 매우 당황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 나자마자 눈물을 머금으며 “대단히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라고 고개를 90도로 숙여 사과. 그 당시에는 “당장, 가수 그만둬”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회상할 때는 “이제 내 아이돌 생활은 끝이겠구나” 했다고.[12]
- 1990년 영화 ‘白い手’에서 아이카와 쇼와 했던 키스신이 본인 인생에서 첫 키스였다.
- 중화권에서는 '난예양즈'로 부른다.
- 호리코시 동급생인 오카다 유키코와 절친했으나 1986년 자살, 또 다른 동급생이자 절친 혼다 미나코도 2005년 백혈병으로 사망하였는데 무대에 서던 중 비보를 듣고 그대로 쓰러져 오열하였다.
- 소속사복이 없는 연예인을 꼽자면 가장 먼저 이름이 나오는 인물이 바로 난노인데, 첫 사무소인 에스원 컴퍼니는 영세한 규모에 소속 연예인에 대한 처우도 가혹한 블랙기업이었고, 첫 급여는 월 3만엔, 그 다음 해 급여가 월 4만엔이었다고 한다. 80년대 여성 듀오로 인기를 끌던 BaBe도 에스원 컴퍼니 소속이었는데 한참 잘 나갈 때도 7만엔 받았다고 폭로할 정도의 사무소라 계약 종료 후 독립하자 바로 망해버렸다. 하지만 소속사 도산 시 사장이 본인도 모르게 회사의 명의를 본인으로 돌려버린 후라 버블이 붕괴한 90년대에 회사의 부채를 모두 직접 지게 되었고 그 빚을 20년이 훨씬 지난 2010년대에 겨우 갚았다.
- 배우쪽 사무소였던 극단 청년좌도 당시엔 규모에 비해 문제가 엄청나게 많은 회사였는데 드라마가 히트치자 스케줄을 이중으로 잡고 미친듯이 굴려서 결국 주간지엔 미나미노 요코가 스케줄을 펑크 냈다느니 하는 기사가 떴다. 충분히 규모가 있는 소속사임에도 이런 대우라 현장에서 매니저들에게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고 울면서 화를 내자 이번에는 성격이 나쁘다느니, 제멋대로에 건방지다느니 하는 루머가 매니저들에게서 흘러나와 주간지를 달궜다. 이는 결국 1990년에 개인 소속사인 케이 대쉬로 독립하고서야 그나마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 아이돌 시절 인생의 목표로 “데뷔 5년 후인 23세 생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은퇴하여 아이 둘을 낳고 남편은 70세 본인은 73세에 세상을 떠난다”라는 공약을 했으나 실제 결혼은 43세가 된 2011년에 했으며 아이도 없다.
- 2016년 2월에는 가수 활동을 그만둔지 25년 만에 첫 솔로 콘서트 ‘NANNO 30th ANNIVERSARY’를 개최하여 호응을 얻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인기에 힘입어 추가 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25년 만에 다시 여는 무대라 감회가 새로운 듯 감격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5. 출연 작품[편집]
5.1. 드라마[편집]
5.2. 영화[편집]
5.3. 라디오[편집]
5.4. 수상[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8 20:56:50에 나무위키 미나미노 요코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어머니는 2011년 11월, 뇌출혈과 심내막염으로 별세.[2] 그러나 2023년 방송된 NHK의 “패밀리 히스토리” 방송에 따르면 일족의 원래 성은 “난노南 野 "였다는 점이 밝혀졌다. 증조부가 도박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오사카로 이주하면서 성을 난노에서 미나미노로 바꾸었다고. 심지어 요코 본인도 이러한 경위는 몰랐다고 한다. 우연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신기한 연이라고 할 수 있다.[3] 원래는 데뷔에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연예계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하던 부모님과 싸운 후 도쿄로 가출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게 되었고 연예계 데뷔를 위해 도쿄로 전학을 간다는 소문이 학교에 퍼지며 상경하게 되었다.[4] 과로로 인해 쓰러질 정도였던 전성기 시절에도 월 6만엔 밖에 되지 않는 급여를 받았고 그 이후로도 10만엔 이상의 급여를 받아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 해 데뷔한 사이토 유키의 경우엔 영화 이벤트 나갈 때마다 하루 1만엔 이상의 수당을 받았으며 호리프로 소속이던 선배 사카키바라 이쿠에는 첫 급여가 7만엔이었으니 엄청난 착취를 당했던 셈이다.[5] 이력서 제출 당시에는 이미 마감 기한이 지나서 당연히 탈락이었지만 아깝게 생각한 매거진 측이 ‘매거진 메이트’라는 새로운 상을 만들어 표지에 실리게 된다.[6] 전성기 시절에는 매달 1만 통이 넘는 엽서를 받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었다.[7] 1990년 6월에 프로그램의 중단이 결정되었고, 말도 없이 갑자기 중단하게 되자 닛폰 방송에게 화도 나고 억울했다고 한다.[8] 마지막 회에는 발표 이전의 곡 ‘耳をすましてごらん’을 부르다 노래를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방송이 끝났다.[9] 톱 아이돌이 된 후에도 6~7만엔 수준으로 갓 데뷔한 신인과 별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10] 대형 기획사 소속으로 확실하게 밀어줬던 동시대의 다른 아이돌들과는 다르게 좋게 말하면 중소, 힘이 없는 사무소에 있었기에 적은 월급과 데뷔 이전부터 스스로 일을 찾아다니는 등의 고생으로 인해 불만이 컸다. 요코뿐만이 아니라 당시 소속사에 의해 피해를 본 아이돌들이 많았다.[11] 에스원 컴퍼니는 버블 당시 유행이었던 골프장/골프장 회원권을 대량으로 매입했는데 본인도 모르게 회사의 명의를 본인으로 돌려버린 후라 버블이 붕괴한 90년대에 회사의 부채를 모두 직접 지게 되었다.[12] 쿠도 시즈카가 대기실에서 요코의 절친인 혼다 미나코의 남자친구였던 히카루GENJI 모로호시 카즈미에 대해 안 좋게 발언해 다투게 되면서 그 일 때문에 잊어버렸다는 말이 있었다.[13] 2014년 이후 매년 특집 방송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