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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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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15대, 16대, 17대, 19대 국회의원, 문화관광부장관을 지냈으며 現 윤석열 정부 초대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는 정치인이자 소설가.
2.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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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방송 / 라디오 DJ[편집]
4. 저서[편집]
- 2006년 《눈뜨면 없어라》 수필
- 2000년 《김한길의 희망일기》 수필
- 1996년 《아침은 얻어먹고 사십니까》 칼럼
- 1995년 《거기 그녀가 서 있는 걸 보았네》 소설
- 1993년 《눈뜨면 없어라》 수필
- 1993년 《여자의 남자》 장편소설, MBC 미니시리즈 드라마로 제작
- 1989년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장편소설, 영화로 제작
- 1984년 《미국일기》 수필
- 1981년 《바람과 박제》 소설
- 1981년 《세네카의 죽음》 소설
- 1980년 《대학일기》 수필
- 1978년 《병정일기》 수필
5. 비판과 논란[편집]
김한길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계는 원래 좋았으나,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의 권력 운용이 386을 중심으로 이뤄 지면서 불화가 가속화된 것으로 보인다. 2002년 대선 당시 금강팀이 출범하기 전에는 노무현이 김한길에게 자주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 출범 후 김한길은 열린우리당 내에서 중도 보수성향 인사들을 주로 대변했다. 재정경제부 장관을 지냈던 강봉균 의원은 대표적인 김한길계 정치인이었는데, 그는 김근태 의원을 상대로 '종북좌파'라고 강도높은 비판을 하기도 했다. 이후 김한길은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을 치던 참여정부 말기부터 청와대와 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노무현 대통령 사망 이후에는 당내 친노 진영을 일컬어 "밀실에서 당권을 나누는 반칙 정치", "오만과 독선의 노무현 프레임" 같은 발언으로 표현하는 등 친노 진영과의 대립을 지속해왔다. 정동영과 함께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들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음에도 이후에는 비노 세력의 수장 역할을 했다는 역설이 있다.
2013년에 민주당의 새 당대표를 뽑는 선거에서는 61.7%의 득표율로 압승을 거두는 등 당내 싸움에서는 승률이 좋은 면모를 보여준다.
그가 민주당 당대표가 되고 처음으로 치렀던 선거인 2013년 4.24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새누리당에게 패했다. 이 때야 박근혜 정부가 갓 출범했던 시기라 정부 여당 모두 분위기가 좋았던 때였고, 또 국회의원 재보선을 치르기로 한 지역구가 거의 다 새누리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었으니까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세월호 참사라는 역대급 악재 속에서 치렀던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새누리당을 상대로 무승부를 냈다. 기초단체장 선거에서는 117 : 80으로 새정치연합이 새누리당에게 완패했지만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새누리당에게 9 : 8로 백중세를 이뤘고, 또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 진영이 완승한 덕분에 대표직 사퇴까지는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6.4 지방선거가 끝나고 약 한 달 뒤에 치른 2014년 7.30 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은 새누리당에게 무려 11 : 4로 참패하고 말았고, 이 때 당을 이끌었던 김한길과 안철수는 결국 당대표직에서 물러나게 됐다.
5.1. 창당과 합당 이력[편집]
2016년 새정치민주연합 탈당 당시 2007년경 민주당 분열 과정에서 빚어진 수 차례의 창당과 합당 과정이 화제가 되었다. 다만 친노와 비노가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비노 중 중도-보수성향 정치인들의 동반탈당이었기 때문에 '잦은 당적 변경'과 같은 개인적 선택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피닉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이인제의 경우 소속되어 있던 정당이 당명 교체 및 합당 등과 같이 타의적 당적 변경이 아닌 자의적 당적 변경(탈당 및 당 대표인 상황에서 합당을 결행)만 셌을 경우 8회(무소속 포함)이고 같은 기준을 적용했을 경우 김한길 의원 역시 8회이다.[2]
물론 진보 정당을 제외한 모든 당에 소속된 적이 있는 이인제와는 달리 김한길은 제3지대 정당[3] 과 민주당계 정당 범위 밖으로 나간 적은 없지만, 그 복잡한 민주당계 정당 계보에 들어가는 거의 모든 당에 몸담은 적이 있고, 특히 그 자신이 민주당계 정당들의 이합집산에서 중심적 역할을 맡은 점으로 인해 민주당 지지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김한길 본인은 우리 사회의 갈등요인 중에서 "지역 갈등은 조금씩이라도 완화되는 것 같으나, 정치 진영 간의 갈등은 여전히 심각하다. 적대적 공생관계라고 하는 양당 중심의 정치는 필연적으로 적대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 내가 정치하는 내내 양당 중심 정치를 어떻게 해서든 깨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당적이 자주 변경될 수 밖에 없었지만 결국 매번 실패했다. 내가 요즘 다시 등장하니까 탈당, 창당을 많이 했다고 나를 공격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내가 탈당, 창당을 시도 했던 것은 나름대로 양당 정치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좌절했어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 사실 양당이 서로 보수니 진보니 말하지만 그렇게 극명하게 차이가 있는 정당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굳이 차이점을 든다면 지역 기반이라든지 대북 정책 등에서 몇 가지 차이가 있는 정도에 불과하므로 여든 야든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국가를 위한 공동 목표를 가지고 서로 경쟁하는 게 맞다고 본다."라고 항변하였다.
이어서 자신이 최근에 본 멋진 말 중에 하나가 "우리가 이만큼이나마 누리고 있는 세상은 수많은 이상주의자들의 좌절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다. 오늘날 다당제가 정치 발전인 것처럼 말해지는 데까지 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창당 시도가 칭찬을 받지는 못할 망정 비난을 받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탈당과 창당은 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정치적 기본권이지 비난 받을 대상이 아니다. 정당이 특정 패거리에 장악되어서 다른 목소리를 용납하지 않고, 정당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체제에서 굴종하지 않는 방법은 신당 창당으로 맞설 수 밖에 없지 않는가."라고 말하였다.
김한길은 불출마 선언을 두 차례 했지만[7] 정계 은퇴를 선언한 적은 없고 국민의 당 이후로는 정계 활동을 하지 않고 정계와 멀어지기는 했다.
국민의당에 입당한 이후 다른 당에 별도로 입당을 하거나, 활동을 한 사실은 없다.
6. 소속 정당[편집]
7. 선거 이력[편집]
8. 여담[편집]
- 김한길은 방송위 사무총장 서리(기획국장 겸직)를 지낼 시절 '여자의 남자'를 모 매체에 연재했다. 당시 일간지가 연재소설로 구독자를 늘리던 시절이었는데, 김한길의 소설은 미주한국일보 때부터 상당한 인기가 있어 일간지 간부들이 서로 유치하려고 경쟁했다고 한다.
- 술은 거의 못마시지만 담배는 하루 4갑까지 피워본 적이 있을 정도로 골초다. 이 때문에 한 때 폐암으로 투병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담배를 끊었다.
9. 둘러보기[편집]
[1] 우리말 이름이 매우 드물었던 세대이기도 하고, 어감 역시 순우리말같지 않은 탓에 金漢吉이라는 한자 표기로 소개되는 일이 종종 있지만, 실제로는 한자 자체가 없는 순우리말 이름이 맞다. 형제들의 이름 역시 그와 마찬가지로 순우리말 이름인 "밝힘", "누리"다. 그래서 중국어권에서는 그의 이름을 표기할 때 순우리말 이름이라서, 과거 우리나라 언론이 임의로 한자 표기를 했던 金汉吉(간체)으로 표기한다.중국어 위키백과의 김한길 문서.[A] A B 현재는 SNS는 사용하지 않는다.[2] 불분명한 탈당 1건이 있는데 이것을 포함하면 탈당 횟수는 9회다.[3] 통일국민당, 국민의당, 바른미래당[4] 김한길의 정치 시작을 민주당(1991년)에서 시작한 걸로 알려져 있는데, 신민주연합당과 합당 이전인 1991년 4월에 꼬마 민주당 동작 을 지구당 조직책(현재의 지역위원장/당협위원장)에 임명됐다는 기사가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있다.[5] 이때 소속 정당은 없이 무소속이었지만, 함께 집단 탈당한 20여명이 '중도개혁통합신당추진모임'라는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활동했다.[6] 새정치연합은 창준위이므로 합당의 주체가 되지 못했다.[7] 다만 2008년과 2016년 이후로는 총선 불출마 내지 은퇴까지는 아니어도 선거철 시즌만 제외하고 대체로 정계 활동을 관여하지 않아 정계와 멀어지기는 했다.[8] 신민주연합당과 신설 합당.[9]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10] 새천년민주당에 흡수 합당.[11]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한 탈당.[1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3] 민주당과 신설 합당.[14]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5] 민주당과 신설 합당.[16]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17]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1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19] 바른정당과 신설 합당.[20]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 신설 합당.[21] 대통령 직속 국민통합위원회 위원장 취임으로 인한 탈당.[22] 1999.3.3. 의원직 사퇴.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되기 위해서 당시 법에 따라 전국구 의원직을 사퇴한 것이다. #[23] 2000.9.20. 의원직 사퇴. 문화관광부장관이 되기 위해서 임기 4개월만에 전국구를 또 사퇴했다. 전국구 2번 당선에 2번 사퇴를 한 셈. #[24] 전임자 장영신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인한 의원직 상실.[25] 2007년 당적 변경 (중도개혁통합신당 중도통합민주당) 후 대통합민주신당 합류.[26] 2016년 탈당, 국민의당 합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