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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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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8월 29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치러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휴버트 험프리는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된다. 휴버트 험프리는 메인 주의 상원의원 에드먼드 머스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낮은 지지율과 전당대회에서의 폭력 사건으로 인하여 선거전 초반 휴버트 험프리는 리처드 닉슨에게 큰 차이로 뒤진 채 캠페인을 시작한다.Some People Talk Change, Others Cause It
어떤 사람들은 변화를 말하지만, 누군가는 변화를 일으킵니다
1968 험프리-머스키 티켓 슬로건
1968년 8월 8일 마이애미 비치에서 치러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닉슨은 록펠러, 레이건, 롬니 등의 경쟁자를 재치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다. 강경보수파 메릴랜드 주지사 스피로 애그뉴는 부통령 후보자로 지명된다. 리처드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냈으며 1966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었으며, 민주당의 분열상과 전당대회의 혼란에 대비되어 선거전 초반 험프리에 비해 큰 우위를 보인다.Nixon's the One!
닉슨이 바로 적임자다!
1968 닉슨-애그뉴 티켓 슬로건
1968년 대선에서 두각을 드러낸 또다른 후보자는 조지 월리스 앨러배마 주지사였다. 조지 월리스는 1964년 민주당 경선에 출마해 메릴랜드 주 프라이머리에서 놀라운 성과를 드러낸 바 있었다. 1963~1968년 사이 이루어진 많은 민권 조치는 조지 월리스를 비롯한 극우적인 남부 민주당원들을 격노하게 했고 특히 휴버트 험프리의 민주당 후보 지명은 그들에게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통령 당선이나 다름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휴버트 험프리는 린든 B. 존슨의 측근이었을 뿐더러 1948년부터 연방민권법의 필요성을 주장한 대표 "민권 파이터"였다. 존슨 행정부에서 이행된 여러 민권 법안들도 험프리의 영향을 받은 것이 많았다. 험프리가 아니더라도, 남부 민주당원들에게는 유진 매카시, 로버트 F. 케네디 모두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1968년 2월 조지 월리스는 일찌감치 대통령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1968년 8월 대선 후보가 험프리로 확정되자 독자 출마를 확정하고 전국적인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Stand Up for America
미국을 위해 궐기하자
1968 월리스-르메이 티켓 슬로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