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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로 윌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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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뉴저지 주지사
파일:뉴저지 휘장.png
38대

39대

임시
존 프랭클린 포트

토머스 우드로 윌슨

제임스 페어맨 필더









미합중국 제28대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파일:President_Wilson_1919-bw.tif.png

출생
1856년 12월 28일
미국 버지니아 주 스턴톤
사망
1924년 2월 3일 (향년 67세)
미국 워싱턴 D.C.
재임기간
제28대 대통령
1913년 3월 4일 ~ 1921년 3월 4일
서명
파일:우드로 윌슨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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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아버지 조지프 러글스 윌슨 시니어(1822 ~ 1903)
어머니 재닛 윌슨(1826 ~ 1888)
형제자매
누나 메리언 윌슨 케네디(1850 ~ 1890)
누나 애니 조지핀 윌슨(1854 ~ 1916)
남동생 조지프 러글스 윌슨 주니어(1867 ~ 1927)
배우자
엘런 액슨 윌슨 (1860 ~ 1914, 사별)
이디스 볼링 윌슨 (1872 ~ 1961, 1915년 재혼)
자녀
마거릿 윌슨(1886 ~ 1944)[1]
제시 우드로 윌슨(1887 ~ 1933) : 2남 1녀
엘리너 윌슨 매커두(1889 ~ 1967)[2] : 2녀
학력
데이비슨 칼리지 (중퇴)
프린스턴 대학교 (B.A.)[3]
버지니아 대학교 법학대학원 (중퇴)
존스 홉킨스 대학교 (정치학, 역사학 / Ph.D.)
종교
개신교 (장로교회)
신체
180cm, O형
사상
뉴 프리덤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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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3. 생애
3.1. 정치학자, 대통령이 되다
3.2. 대통령으로서
3.2.1. 1기
3.2.2. 2기
3.2.2.2. 전후 처리
3.3. 갑작스런 반신불수와 아내의 직무 대행
4. 선거 이력
5. 평가
6. 여담
7. 어록
8. 둘러보기





제28대 미국 대통령의 육성

1. 개요[편집]


파일:$100000 front.jpg
1934년 10만달러 지폐[1] 속 초상화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제1차 세계 대전을 치른 시기의 대통령으로,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19세기 엽관제를 비판하며 나온 현대 미국 행정학의 창시자로도 평가받는다. 대내적으로는 뉴 프리덤이라고 불리는 여러 진보 정책을 추진하여 현대 미국을 떠받치는 여러 제도를 확립하였다. 한편, 극렬한 인종주의자이자 백인 우월주의자로도 유명했는데, 이는 인종주의와 진보주의가 공존했던 19세기 말~20세기 초 민주당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3.1. 정치학자, 대통령이 되다[편집]


버지니아주 스탠튼에서 스코틀랜드계 아버지 조지프 윌슨과 아일랜드계 어머니 재닛 우드로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 윌슨은 스코틀랜드계 장로회 목사였다. 아버지는 버지니아 스탠턴에서 목사로 일하다가 우드로 윌슨이 2살이 되기 전에 조지아주 오거스타로 이주했고,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북장로회에서 독립하여 미국 남장로회를 창설하였다. 1870년부터 1874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에서 가족들이 살았을 때 컬럼비아 신학교 교수를 맡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목사가 되기를 바랐으나[2] 윌슨은 19세기 영국 총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에게서 정치를 배운 뒤 정치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3]

노스캐롤라이나데이비슨 칼리지에 입학했다가 1년 후 프린스턴 대학교반수해서 1879년 졸업했다. 이후 버지니아 대학으로 가서 1년간 법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1886년존스 홉킨스 대학교에서 정치학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역사상 명예박사 학위나 특수대학원, 전문대학원의 전문박사가 아닌 유일하게 본인의 학문적 성취로 학술박사(Ph.D.) 학위를 딴 대통령은 윌슨이 유일하다.[4]

사실 이 시기 윌슨은 앤드루 잭슨 이후 19세기 말까지 미국 정치와 관료 사회를 좌지우지하던 엽관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행정을 정치 권력적 현상이 아닌 경영, 관리 기술로 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장했다. 그는 1887년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라는 저서를 통해 이러한 이론을 발표했는데, 이는 미국 내에서 행정학을 정치학으로부터 독립된 개념의 학문으로 본 사실상 최초의 이론이었기 때문에 우드로 윌슨은 지금도 행정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후 정치학자의 길을 걸으면서 여러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02년 46세의 나이로 모교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으로 취임했다.[5] 그리고 1910년부터 1911년까지 미국 정치학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정치학자로서 정치 현안에 자주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윌슨을 미국 민주당이 영입해 1910년 뉴저지주지사로 지명받아 주지사로 재직했다. 윌슨의 정치적 입장은 대체로 좌파 자유주의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6]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민주당은 윌슨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토머스 R. 마셜을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그런데 민주당을 상대해야 할 공화당윌리엄 태프트시어도어 루스벨트[7]가 대립하는 바람에 적전 분열이 일어났고, 윌슨은 공화당의 분열을 틈타 득표율 41.8%, 선거인단 435표를 득표해 대통령에 당선된다. 참고로 태프트는 유타 주버몬트주에서만 이겨서 8표라는 결과를 얻었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88표를 득표했다.


3.2. 대통령으로서[편집]



3.2.1. 1기[편집]


대통령 취임 후, 윌슨은 국내에서는 진보적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다. 1기 임기 동안 그는 끊임없이 하원의원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노력이 효과를 봐서 네 개의 주요한 법안이 통과했다.

첫 번째는 "언더우드 관세법안(Underwood Tariff)"으로, 보호무역 정책으로 높았던 미국의 관세를 낮추고 대신 수정 헌법 16조에 근거하여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두 번째 법안은 1913년 12월 23일에 서명된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으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Federal Reserve Board)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1914년에는 연방무역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었다. 이 세 법은 모두 연방정부의 힘을 강화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한 1914년에는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이 통과되어 파업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하고, 노사분규 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복구불능의 파괴행위가 예견될 때는 금지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뉴 프리덤 문서를 참조.

하지만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이전 공화당 정부의 패권주의적 정책을 대체로 답습해 중남미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들 지역의 반발을 불렀다. 특히 윌슨은 중남미를 통제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자 멕시코를 침공하여 베라크루스를 무력 점령, 당시 멕시코의 우에르타 정권을 몰락시켜버렸고,[8] 히스파니올라 섬의 두 나라도 보호국화했다.

3.2.2. 2기[편집]


1916년에는 재선을 위해서 다시 한번 선거에 출마했다. 상대 후보인 찰스 에번스 휴스는 연방대법관을 재임하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사임하고 나온 후보였다. 이 선거에선 1:1 구도다 보니 49.2% : 46.1%로 제법 아슬아슬하게 이겼는데, 선거인단은 277:254였다. 이때 윌슨은 자신이 패배할 것이라 생각하고, 행정에 공백을 만드는 것을 피해야 한단 자신의 신념에 따라 정식 취임일 이전에 미리 편법적으로 휴스에게 대통령 직을 승계시키려는 계획을 짜기도 했다.[9]


3.2.2.1. 제1차 세계 대전에의 참전[편집]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미국은 먼로 독트린의 전통에 입각해 될 수 있으면 유럽에 개입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의 무차별 상선 공격으로 루시타니아 호 침몰 사건이 발생해 미국 내에 반독감정이 격화된 상태에서 결정타로 독일 제국이 멕시코에게 미국과의 전쟁을 일으킬 것을 제안한 치머만 전보가 폭로되자, 결국 윌슨은 1917년 4월 6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1916년 재선을 위한 유세에서는 전쟁불참을 내세워서 당선됐는데, 취임 한 달 만에 모든 게 뒤집힌 것이다.

다만 윌슨은 전쟁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하긴 했다. 그는 연합국과 독일을 중재하려 노력하며 평화협상을 여러번 제안했다. 그는 1917년 1월, 그 유명한 '승리없는 평화'를 연설하며 모든 인류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이미 전쟁 중인 유럽은 눈깔 뒤집힌 지 오래였고, 멕시코에 대한 독일의 개입이 여러 번 드러나면서 참전 여론이 강해지는 와중에도 윌슨은 카이저의 황화론 개드립까지 꺼내가며(...) 참전에 반대했다. 그러나 치머만 전보가 공개되자 그런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갔고 미국도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전시 와중엔, 진보적 성향의 윌슨이었지만 국가가 일치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확신으로, 광신적 애국주의자들이 모인 극우 단체들을 이용해 반전운동가나 노동운동가들을 탄압하는 어두운 면을 보이기도 했다.


3.2.2.2. 전후 처리[편집]

파일:Big four 1919.jpg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윌슨과 협상국 주요 4개국 정상들.

어쨌든 1918년 1차 세계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윌슨은 독일에 대해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는데, 이유로 '독일의 경제 악화로 인한 사회 혼란, 이로 인한 전쟁 재발 우려'를 들었다. 그는 경제적인 압박이 사회 혼란과 전쟁 재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정확히 예견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윌슨의 견해가 정치학자들에게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에는 착한 척하는 몽상가 취급을 받으며 씹혔다. 이제껏 겪어본 적이 없는 엄청난 피를 흘려 분노한 영국과 프랑스에겐 뒤늦게 참전한 주제에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는 미국이 아니꼬왔다. 다만 아무리 주변의 상황이 안좋았다지만 독일의 처벌을 줄이는 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못했고 결국 사태를 초래했다는 점에선 오십보백보란 의견도 있긴 하다. 우드로 월슨의 소극적인 태도하에서, 1차 대전의 주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독일에 청구된 어마무시한 배상금은 결국 2차 대전의 빌미를 제공했다. 사실 영프 입장에선 전쟁 손실이 얼만데 뜯어먹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이는 당시 윌슨이 레임덕에 시달리고 있기도 해서 외교적 입지가 탄탄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실제로 당시 윌슨은 자신의 바램이 담긴 베르사유 조약국제연맹 창설 딱 하나만 살릴 수 있었다. 한편,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가톨릭 독재'라 혐오하는 등 개인적인 반가톨릭, 반오스트리아 감정 때문에 동맹국들과의 협상 조건으로 황제의 퇴위와 민주 정부 수립을 내걸었고, 결국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군주정은 붕괴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이는 장기적으론 필요했을지 몰라도[10] 단기적으론 혼란을 초래했고 그 결과가 발칸반도의 피바다와 나치의 집권이었던 것을 보면, 사회혼란과 전쟁 재발 방지를 근거로 관대한 처벌을 주장했던 그였기에 묘하긴 하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전후 처리를 위해 모인 1919년 6월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윌슨은 소위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한다. 그중 "민족 자결의 원칙(혹은 민족자결주의)"은 당시 전 세계 식민지 민중들에게 희망의 메시지처럼 들리기도 했다. 허나 그것은 패전한 동맹국 측 식민지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승전국인 연합국의 식민지들은 자신들의 알짜배기 식민지를 내놓을 리가 없었으므로 또 전쟁해서 이기지 않는 이상 그 주인의 지배에서 대부분은 벗어나지 못했다. 연합군 측 식민지의 독립운동가들은 윌슨에게 거하게 낚인 셈.(...)[11]그리고 소련으로 눈길을 돌리게 되는데[12]그리고 국제연합기구를 만들자는 주장에 의해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지만, 정작 미국은 당시 고립주의를 고수한 야당 등 상당수 의원의 반대로 상원 2/3 찬성을 얻지 못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도 못하는 황당한 사태를 겪게 된다.

국제연맹 가입을 의회가 지지해주지 않자 윌슨은 여론의 지지를 호소하기 위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8천 마일에 달하는 거리를 누비며 수십 회의 유세를 하는데, 충격적이게도 1919년 9월 25일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에 방문하던 중 뇌졸중을 일으켜 10월 3일 반신불수가 돼버리고 만다.[13] 멀쩡하게 연설하다가 갑자기 말하는 것이 멈췄다고 하는데, 사실상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다 뇌경색이 일어난 수준일 듯. 참고로 1919년 윌슨은 국제 연맹 창설과 유럽 평화에 기여한 공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14]


3.3. 갑작스런 반신불수와 아내의 직무 대행[편집]


윌슨 대통령은 의사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유세를 돌다 갑자기 반신불수가 되어 집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된다면 상식적으로 당시 부통령인 토머스 마셜이 대통령직을 정식 승계하거나, 최소한 직무대행을 하는 것이 맞는 처사였다. 그런데 이때 윌슨의 부인인 이디스 윌슨은 이를 숨기고 윌슨의 남은 임기 동안 국정을 자신이 처리하는 간 큰 행보를 보인다.

사족으로 이디스 윌슨은 우드로 윌슨의 2번째 부인으로, 1번째 부인이 사망한 이후 우드로 윌슨이 임기 도중 청혼해 결혼에 성공한 케이스다. 이디스도 이미 한번 결혼했으나 과부가 된 케이스로, 윌슨 대통령은 이디스를 만난 지 채 두 달도 안 되어 청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윌슨의 청혼에 망설이던 이디스에게 윌슨은 각종 국정 사안들을 알려주며 정치에 관심없던 그녀를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로 만들려 했다는데, 결국 둘은 만난 지 9개월 만인 1915년 12월 18일 조용히 결혼식을 올린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 평소에도 국정 사안을 논의하던 사이다 보니 윌슨이 반신불수가 된 이후에도 이디스 자신이 국정에 참여해도 되겠다는, 어찌보면 간 큰 계획을 실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엔 당시 이디스와 백악관 보좌진들이 마셜 부통령과 심한 불화를 겪고 있었고, 마셜 본인도 관련 규정의 애매한 내용 등으로 인해 사태를 조기 수습하지 못한 것도 한몫했다.

실제 당시엔 부통령의 승계 원칙이 조금 모호했다. 당시 미국 헌법에서 대통령이 사망했을 경우 부통령이 승계한다는 원칙은 명문화했지만, 대통령이 생존해 있으나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경우 언제 어떤 근거로 부통령이 승계할지에 대해선 명문화하지 않았다. 마셜 부통령도 이 부분을 이유로 대통령직의 승계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참고로 이 부분은 1967년 수정 헌법 25조를 제정하면서 비로소 명문화한다.

윌슨의 행정부 2기 후반부, 윌슨의 소망은 반은 이루어지고 반은 이뤄지지 않았다. 1919년 금주법, 즉 '볼스테드 법(Volstead Act)'이 윌슨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 1920년 8월에는 수정헌법 19조 통과로 일부 주에서 시행하고 있던 여성의 투표권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물론 1965년 선거권법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일부 주 선거에서 알게 모르게 현실적인 제약들이 있었다.[15][16]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이디스는 여성 참정권을 반대했다고(...). 참고로 미국의 참정권은 백인 남성 한정으론 1828년 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주에서 보통선거가 확립되었으며, 1870년에 수정헌법 15조를 통해 흑인 남성들에게도 보통선거가 확립되었다.[17]

그런 상황에서도 워런 하딩의 취임식을 앞두고 증상이 호전되어 참석했다.

윌슨은 반신불수가 되어서도 3년 넘게 살다가, 퇴임하고 머물던 워싱턴 D.C의 자택에서 1924년 2월 3일 수면 도중 뇌졸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디스의 국정 처리도 윌슨 사후에야 밝혀졌는데, 덕분에 그때까진 막연하게만 있던 대통령 유고 시 대통령직 승계 원칙에 대한 규정을 확실하게 한 미국 수정헌법 제25조가 이후 만들어지는 계기도 된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당선 여부
비고
1910
뉴저지 주지사 선거
뉴저지


233,682 (53.93%)
당선(1위)
초선
1912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
6,296,284 (41.8%, 435인)
1916
9,126,868 (49.2%, 277인)
재선


5. 평가[편집]


“그가 취임한 지 만 100년이 되었지만, 미국인들은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를 결론 내리지 못했다."

2013년 뉴스위크지, 데이비드 프룸의 평가 #


청교도 학교장(Puritan schoolmaster), 도덕적 이상주의자(moral idealist), 독단적인 민주주의 예언가(dogmatic prophet of democracy)

당대의 언론인 프레더릭 루이스 앨런(Frederick Lewis Allen, 1890-1954), 저서 "격식없는 1920년대 역사(An Informal History of the 1920's)#"에서.[18]

우드로 윌슨은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미국을 관통하던 혁신주의제국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그의 행적을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학자 시절 정치행정이원론을 주창하며 당시 횡행하던 엽관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행정에 실적주의를 도입하여 현대 미국 행정학의 시초를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실제 행정학상 최초의 논문인 '행정의 연구(The Study of Administration, 1887)'를 발표하여 지금도 행정학 교과서 및 수험서에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또 진보적인 리버럴 성향을 띠고 있던 윌슨은 국내 정치에선 여러 진보적인 개혁들을 추진했고, 웬만하면 유럽에 직접 개입하지 않던 기존 미국의 입장을 선회해 1차 대전에 참전하여 파리 평화 회의에 참석한 것이나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한편, 윌슨은 국제 외교에서 '힘의 균형' 원리에 대립되는 '도덕주의'와 '이상주의'를 내세웠으며, 이런 이념을 바탕으로 독일에 대해 연합국의 도덕적 명분이상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 역시 제국주의라는 당대의 트렌드 앞에서 말로만 이상을 떠들었지 현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이전 공화당 정부처럼 군사력 중심의 패권주의로 일관한 위선자였다는 주장도 있다. 사실 윌슨의 이런 이중적인 행보는 노동 문제에서도 나타났는데,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을 통과시키며 파업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해줬지만, 세계 대전 당시엔 또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도 했다.

윌슨이 주장한 14개조 평화 원칙과 그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 역시 어디까지나 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지배 아래에 놓인 폴란드, 알바니아, 세르비아 등 동유럽과 발칸반도에 있는 유럽 국가에 한해 적용되었지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식민지는 알 바 아니었다. 상기했듯 아이티와 도미니카를 보호국화하고 쿠바, 파나마, 러시아 등에 파병하며 자결주의와는 거리가 먼 내정 간섭을 이어가기도 했다. 다만 윌슨은 미국의 글래드스턴으로 불릴 정도로 전쟁에 꾸준히 반대해왔으며, 전후에도 자신의 입지와 무관하게 이상주의자란 욕을 먹으면서도 14개조 평화 원칙과 국제연맹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고 미국령 필리핀의 자치권을 확대시켜주는 등 마냥 제국주의자로만 몰기엔 다른 모습을 제법 보인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다양한 면모를 보인 인물. 특히 그가 주창한 공개조약, 자유무역, 민주주의, 반내셔널리즘 같은 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호응을 얻기도 했다.

윌슨은 베르사유 조약 당시 회의장에서 패전국 관련해 가장 관대한 조건을 제시한 연합국 리더였다. 하지만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특히 '호랑이'라는 별명까지 생길 정도로 강경했던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19] 관대한 조치에 격렬하게 반대했기 때문에[20] 조약은 윌슨의 의향과는 달리 가혹하게 변모했다. 하지만 이런 전후 사정을 잘 몰랐는지, 당시 영국 재무부 대표로 협상에 참여했던 경제학자 케인스는 윌슨을 "세계 최고의 협잡꾼"이라고 까기도 했다. 케인스는 독일에게 부과된 가혹한 배상금과 징벌이 또다른 비극과 전쟁을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조약의 위험성을 윌슨에게 경고했다. 물론 베르사유 조약을 강경하게 만든 건 미국이 아니라 프랑스와 영국이니 윌슨은 억울할 것이다.[21]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에게도 그렇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한다.[22] 기존의 유럽을 지배하던 세력균형이라는 국제질서를 무너뜨리고 국제연맹이란 집단안보체제를 만들었는데, 상당히 현실적인 제약점들[23]이 있었다는 것. 게다가 자기가 제안해놓고 의회 비준을 못 받아서 정작 미국은 국제연맹에 가입도 못하는 코미디스런 일도 벌어진다.(...) 물론 윌슨도 의회 욕하면서 열심히 여론 조성하려 뛰어다니긴 했다만, 그 와중에 뇌경색이 와 리타이어하고 말았으니.. 하여튼 그 결과 독일의 폭주를 방치하게 되는 결말을 낳았다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1차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허술하게 짰다'는 것. 다만 그가 제시한 집단안보체제는 이후 FDR-트루먼 시대 들어 유엔 안보리와 유엔군으로 어느정도 실현되긴 했다. 여기도 집단안보체제의 취약성을 어느정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냉전 등 위기 속에서도 세계대전급 대참사는 벌어지지 않게 통제하고 있으니 분명 평가할 점은 있다.

일본 우익진영에서 일본이 인종차별철폐 제안을 내놓자 윌슨은 반대했으니 인종차별주의자다 라는 주장이 있는데, 일본의 제안은 일본 국익을 대변하려는 의도가 강했으므로 인종차별주의자란 주장의 적절한 논거가 될 수 있는 사례는 아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일본은 국제연맹 규악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국제연맹에 참가하는 나라는 각국 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삽입하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선 본토로의 동양인 이민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라 중국인과 함께 일본인은 이미 이민 제한을 받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같은 경우는 아예 일본인의 토지 소유와 임차를 금지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일본 외무성은 노골적인 이민차별철폐 규정을 내세우는 대신 반대하기 어려워 보이는 인종차별철폐를 국제연맹 조약 규문에 넣으려 한 것이다. 물론 의도를 간파한 규약 작성 위원회 의장 우드로 윌슨은 안건의 중요성을 이유로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를 주장하였고, 그 결과 찬성 11, 반대 5로 이 제안은 부결되었다. 즉, 일본의 제안은 인종차별을 표면에 내세운 자국이익을 위한 주장이었으므로 이에 대한 반대 또한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이기에 그런 것이라고 볼 순 없는 것이다. 오히려 미국 내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된 인종차별주의자 우드로 윌슨 논쟁에 뛰어들어 인종차별에도 앞장선 '아름다운 일본'이란 이미지을 슬쩍 덧씌우려는 추악한 편승에 불과하다.[24]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윌슨 자체는 현대에도 중간 이상은 가는 대통령으로 평가받긴 한다.[25] 즉, 우드로 윌슨이 인종차별주의자를 등에 업은 혁신가였다는 견해다. 진보주의와 행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평가 이면에는 KKK단을 이용해 상하원에 정치적 세력을 불린 현실이 있었다. 이는 그의 배경을 살펴봐야 좀 더 이해가 되는데, 당시만 해도 민주당의 텃밭은 지금의 북부가 아닌 윌슨의 고향이기도 한 남부였다. 남북전쟁 당시 노예제를 옹호한 주가 많던 그 남부 지역 말이다. 덕분에 19세기만 해도 민주당은 지금의 리버럴함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보수 성향의 정당이었으나[26], 윌리엄 J. 브라이언 이후 20세기 들어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해 FDR 시절 뉴딜, 이후 민주당 정부의 흑인민권운동 지지, 이 틈새를 노린 공화당의 남부 전략 등이 겹쳐져 지금의 텃밭, 성향 체인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27] 그러니 아직 이런 성향이 남아있던 민주당과 남부 시절을 겪은 윌슨이 짬뽕된 성향을 가지는 것도 어찌보면 자연스러울지도 모른다.

윌슨은 일생동안 백인 우월주의적인 행동을 보여주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상당히 인종적인 태도였다. 자신의 저서인 '미국인들의 역사'에서 노예제를 인도적인 제도로 옹호하고, 남북전쟁의 원인이 노예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재건시대는 "어리석은 흑인들의 표로 유지된 정부"가 백인들을 괴롭힌 걸로 규정하고, KKK단을 정의의 사도로 묘사했다. KKK단을 미화한 영화 <국가의 탄생>이 개봉했을 때는 백악관에서 보고 칭찬을 했다고 한다.#고 알려져 있으며 윌슨 대통령은 자신의 대학 클래스메이트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잘 만든 영화[28], 불행한 점은 이게 잔인하게도 사실이라는 거다(it is like writing history with lightning. And my only regret is that it is all so terribly true)."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있는데, 조사에 의하면 후대에 덧붙여진 말로 실제 윌슨은 영화를 보고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으며, 별다른 감상평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남북전쟁 후 최초의 남부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자마자 재건시대 이후 몇안되는 결실들을 되돌리고자 노력했다. 20세기가 시작됬을 때 연방정부 공무원들의 10%는 흑인이었다. 윌슨 행정부는 우체국에서 내무부, 재무부, 해군, 인쇄소까지 광범위한 연방정부 기관에 남부식 짐 크로법을 적용시켜 사무실과 식당, 화장실을 인종별로 분리시키고, 흑인들을 승진에서 제외시켰다. 연방 공무원은 당시 흑인들이 가질 수 있던 몇 안되는 고소득 직장이었는데, 윌슨 탓에 워싱턴 DC의 흑인 주택 보유율이 떨어졌다. 흑인들이 예전처럼 연방정부에서 일하게 된건 수십년이 지나서였다. #

이러한 태도를 분리주의(racial separatism)이라 부르는데 윌슨 당시에도 인종차별이냐, 아니냐로 사회적 이슈가 될만한 행동이었으며, 오늘날은 반박불가 수준의 인종차별 중 하나이다. 결국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윌슨의 인종차별적 면모가 부각되자, 모교인 프린스턴 대학교는 '우드로 윌슨 공공정책국제문제대학원'과 기숙사에서 기념되던 윌슨의 이름을 빼버렸다.

윌슨과 동시대를 산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공화당을 지지하다 1916년 재선거 무렵에는 윌슨을 지지했는데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들은 윌슨이 크게 헤맸다고 했습니다. 뭐, 제 생각도 그렇고요. 그렇지만 전 그가 헤매도 항상 앞으로 나아가면서 헤맨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 윌슨은 스페인 독감을 세계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많은 학자들은 스페인 독감의 기원으로 미국 캔자스주를 지목하고 있는데,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을 선언하고 파병을 준비하던 시점에 이미 독감증세를 보이던 병사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 의사들은 독감증세를 보이거나 의심증세를 보이는 병사들은 파병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윌슨은 이를 무시하고 모든 병사들의 파병을 강행했다고 한다. 결국 매주 수천명의 미군병사들이 대서양으로 파병되었고 열악한 전선의 사정과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엄청난 확산을 일으키고 말았다는 주장.

이러한 점들에서 윌슨은 역사학자들과 일부 일반인들 사이에서 평가가 제일 많이 차이가 나고 있다.[29]

6. 여담[편집]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을 받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무단 통치에 반발한 3.1운동이 펼쳐지게 되고, 이 영향을 받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국은 1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긁어 부스럼 만들기도 뭐하고 해서 다른 식민제국인 열강들이 획득한 식민지들처럼 합당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이후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는 2차 세계대전 패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사실 한국에 영향을 미친 민족자결주의는 윌슨뿐만 아니라 소련의 레닌이 주창한 것도 상당히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개념 자체가 "주의"와 같은 사상 체계는 아니기 때문에 레닌 역시 먼저 제창했다고 볼 순 없고, 이미 민족주의로서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윌슨의 시대 때 떠돌던 민족자결주의의 근원은 당시 국제 공산주의 연합이었고, 윌슨은 프로파간다를 교묘히 잘 이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여기에 영감을 받은 인물 중 한 명은 호치민.[30][31]

여러 기록을 가진 대통령이기도 한데 사상 최초로 유럽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이자, 앞에서 봤듯이 미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것이 아닌 부인이 대통령직을 대행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동시에 의회에 보내는 첫 번째 메시지를 직접 의회에 나가 읽음으로써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 이래 사라졌던 관습을 다시 부활시킨 인물이기도 했다. 소위 '연두교서'라 일컬어지는 행위로 현대 미국 정치에서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훗날 한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에게 한국인 최초의 미국 박사 학위[32]를 준 사람 역시 윌슨이었다. 우드로 윌슨이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에 그는 이승만의 은사로서 국제 질서에 관한 그의 신념과 관점은 이승만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둘의 관계는 사적으로도 상당히 각별했는데, 이승만은 총장인 그의 집에 빈번히 찾아가 그의 가족과도 자주 어울렸으며 그들은 이승만이 감옥에서 겪은 수난과 앞으로의 독립에 대한 계획과 포부에 대해 퍽 감동과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 그는 가끔 교내에서 이승만을 방문객에게 소개하면서 "장래 한국 독립의 구원자"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하곤 하였다. 윌슨은 그에게 여러곳에서 연설할 기회를 베풀기도 했는데 1908년 12월 15일, 윌슨은 이승만을 위해 써 준 추천서에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33]

이승만 씨는 프린스턴 대학원의 학생이며, 우수한 능력과 고결한 성품으로 우리들에게 호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놀랄만큼 자국인 한국의 현재 상태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동양의 전반적 정세에 대해서도 정통합니다. 그리고 이와같은 정세를 일반 청중에 대해서도 개진했습니다. 그는 애국심이 강한 청년으로 동포에 대해 열렬하고 유익한 일꾼입니다. 동양에 있어서 연구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는 권익을 직접적으로 배우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나는 기쁘게 그를 추천합니다.


1912년 6월 5일, 일제의 탄압으로 도미한 이승만은 윌슨의 둘째 딸인 제시 윌슨(Jessie Wilson Sayre)을 만나 라이트하우스(Lighthouse)에서 모임을 가졌고, 자신을 감리교 총회의 한국 대표자 자격으로서 부친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1912년 6월 19일, 마침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논문[34]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앤드루 웨스트(Andrew F. West) 학장에게서 그것을 한 권 받아가지고 그 날 오후 4시 50분, 당시 뉴저지 주 주지사였던 우드로 윌슨이 기거하고 있는 주지사 여름 별장(cottage)이 위치한 시 거트(Sea Girt)로 향했다. 오후 6시 44분, 목적지에 도착하여 윌슨을 찾아가 자신의 논문 단행권을 선물로 드린 후, 찾아온 뜻을 말하니 그는 여간 반기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가 보고 온 한국의 참혹한 실정을 자세히 설명하고, 일본제국주의가 얼마나 동양의 평화를 해하고 있는지를 프린스턴 은사였던 그에게 강력히 피력하였다.[a][b][c] 또 그는 105인 사건으로 촉발된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를 즉각 중지하고 폭넓은 종교적 자유를 허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였다.[35]

이승만 : 한국 독립을 세계에 호소하는 성명서를 만들고자 하니, 거기에 동의하는 서명을 꼭 해 주시길 바랍니다.

윌슨 : 당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열의에는 무엇이라고 치하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미국 대통령 아닌 한 개인으로서는 거기에 물론 서명해 드리고도 싶소. 서명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일을 도와주려고도 합니다. 그렇지만 미국의 정치를 위해서는 아직 내가 당신의 성명에 도장을 찍을 때는 아니오. 그러나 언제 우리가 같이 일할 때는 반드시 올 것이니 그것을 믿으시오. 그렇잖아도 나는 벌써부터 당신의 조국 한국을 포함한 모든 약소민족 국가들의 일을 생각해 오고 있는 중이오.

이승만 : 현상 유지의 정치보다 인류 정의와 인도적 미래를 위하여 꼭 본인의 편이 되어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윌슨 : 물론이오. 그렇지만 모든 일의 해결엔 반드시 그 적당한 때가 있는 것이오. 하여간 내 당신의 갸륵한 뜻을 명심해 두리다. 그리고 당신은 나 한 사람의 도장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고 미국 전 국민들의 마음의 도장을 먼저 받도록 하시오. 우리 미국 모든 사람은 당신의 그 조국애에 반드시 감동할 것입니다.[a]

[b][c]


나름 유명한 러시모어 산 네 명의 대통령 얼굴에 들어갈 뻔 하기도 했다. 이걸 만들 당시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은 쉽게 결정되었고 실제로 처음엔 저 세 명의 얼굴만 새기려고 했지만 빈 바위가 남아 있어서 그 바위에 새겨질 주인공으로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윌슨이 경합을 벌였던 것. 그러나 루스벨트가 20세기 초 본격적으로 미국을 세계무대에 등장시킨 대통령으로 당시엔 좀 더 평가되는 바람에 루스벨트에게 밀렸다.[36]

친구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부인에게 대통령직 대행을 맡긴 이유도 부인만큼 가까운 사람이 없어서였다고...

프린스턴 대학교 교수까지 지낸 엘리트 학자이고 외모로만 보면 상당히 냉철하고 쌀쌀맞은 인물로 보이지만 의외로 깨는 면이 많고 익살스러운 인물이었다. 가족들과 가장 즐겼던 놀이가 '셔레이드(Charade)'라고 해서 바디랭퀴즈 몸짓으로 단어를 알아맞추는 놀이였는데, 그는 가족들과 이 놀이를 할 때면 '도도한 귀족 미망인'이나 '외알 안경을 만지작거리는 영국인'을 너무 리얼하게 흉내내서 가족들을 경악시켰다고 한다. 가장 잘 흉내냈던 것이 술 취한 사람의 휘청거리는 모습[37]의 흉내를 잘 내서 지인들을 많이 웃겼다고.

노래에 대한 개인적 취향도 우울하거나 엄숙한 노래보다는 매우 경쾌하고 통통 튀는 종류의 밝은 음악을 선호했다고 한다.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고는 하지만 아예 위트가 없는 사람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사석에서 윌슨을 만나본 사람들은 생각보다 인간미가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치킨 샐러드를 좋아했으며 대식가였다.

윌슨이 죽었을 때 당시 미국 국민들 사이에서 떠돌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가 죽어서 천국에 갔을 때 모세를 만났다. 모세가 윌슨을 보고 "자네가 바로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인가? 안됐구만. 자네가 제안한 14개조 평화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다고 들었네."라고 말했는데 윌슨은 "뭐 그렇죠. 하지만 모세께서 직접 지상에 강림하셔서 "인간들이 십계명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라고 받아쳤다고. 이 이야기는 당연히 떠돌던 이야기지만 인간들이 십계명의 정신을 훼손한 것을 보면 자신의 평화원칙에 대한 폄훼는 견딜만 한 것으로 여긴 윌슨의 면모를 잘 나타내는 이야기다. 실제로 윌슨은 자신의 평화원칙을 십계명에 견주기도 했다. 신성모독류 甲[38]

땅콩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윌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당시 조선에서 그의 땅콩을 수입하기도 했다고 한다.[39] 근데 이때면 이미 한일병합..

어릴 적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 살던 시절, 집 앞에서 노는데 지나가던 행인 한명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니 곧 전쟁난다!"라는 말을 외치고 다녔다고 한다.[40] 윌슨이 KKK단과 친분이 있던 것도 이러한 당시 남부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심슨 가족바트 심슨이 자신의 담임선생님인 에드나를 골탕먹이기 위해서 우드로라는 가명으로 편지를 주고 받는 에피소드도 있는데 그 우드로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바로 윌슨이다.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에서 싫어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민족 자결주의를 주창하여 높은 평가를 받는 빅토리아 시대 판도의 핵심인 독일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찢어놨기 때문. 특히 독빠/오스트리아빠 성향이 강한 갤러들은 윌슨을 아돌프 히틀러보다 더한 2차 대전의 진정한 만악의 근원으로 보는 역사왜곡성 밈을 공유하기도 한다.

버지니아주 출신 대통령들[41]중 유일하게 19세기 이후에 태어났으며[42], 유일하게 성공회 신자가 아니다.[43] 윌슨은 장로회 신자.

우드로 윌슨은 가장 최근에 일요일에 태어난 대통령이었다.

7. 어록[편집]


"보수주의자는 그냥 앉아서 생각만 하는, 주로 앉아만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보수주의란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않고 의심이 나면 할머니와 상의하는 것입니다."[44]


"트러스트들이 돈만 있다면, 정부를 사려고 할 것이다."#


"적을 만들고 싶다면, 무언가를 바꾸려고 해봐라."[45]


"곧 평화란 승리가 없는 평화가 아니면 안 된다. 승리란 패자에게 군림하는 강압적인 평화를 뜻한다. 그것은 수치를 당하고 희생을 감수하고서만 받아들여질 것이리라. 또한 후에 분노고통의 상념을 남기게 되리라. 그것은 영구한 것이 아니요, 모래밭에 놓여진 것에 불과하다. 평등한 자, 동지의 평화만이 오래 지속된다. 평화의 대원칙은 평등하며 공통적인 복지에 공동으로 참가하는 것이다."[46]


"평화를 사랑하는 이 위대한 국민을, 문명 자체의 운명이 걸려 있다고도 할 역사상 가장 참혹하고 파괴적인 전쟁으로 몰고 가기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정의는 평화보다 값진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소중히 간직해온 것들을 위하여 싸우려고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정부에 대한 발언권을 위해, 약소국들의 권리자유를 위해, 세계에 평화와 안전을 가져다주고 적어도 자유롭게는 해줄 그런 보편적인 권리를 위하여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아메리카를 태어나게 했고, 행복하게 했고, 그토록 찬미했던 평화를 가져다 주었던 원칙을 지키기 위해 피와 힘을 바치는 영광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바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나니, 우리에게 다른 길은 없습니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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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좌파적 경제관(경제적 진보주의) 한정. 중도우파인 사회적 의제(온건 사회보수주의)는 현대자유주의에 포함되지 않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미국의 보수주의와도 구별된다.
** 진보주의+사회주의 좌익정당. 진보주의는 자유주의에서 파생된 이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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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연방 은행 간 결제 수단 용도로 극소량만 발행되었으며 현재 우리돈으로 환산해도 1억원이 넘는다.[2] 그의 아버지는 연설에 일가견이 있었는데, 덕분에 토머스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연설에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그가 아버지에게 배운 연설의 비결은 내용보다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화법 위주였다고 한다.[3]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를 "신의 아들"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하며, 정치의 길로 가는 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물론 현대 관점에서 보자면 프로이트의 분석이 무조건 정확한 건 아니겠지만.[4] 법조인 출신 대통령들은 그전에도 많았고 그후로도 많기에 미국 대통령들 다수가 로스쿨 법무박사(한국 학제에서는 석사로 취급.) 학위는 취득했지만, Ph.D.는 그런 전문박사가 아니라 일반대학원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받는 학술박사다. 법도 로스쿨 법무박사 학위 말고 일반대학원 법학과에서는 법학박사로서 Ph.D.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이런 Ph.D.(학술박사) 학위를 받은 미국 대통령은 윌슨이 유일하다는 뜻이다.[5] 당시 재학생이던 이승만에게 직접 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6] 다만 학자 시절에는 버번 민주당 소속이었다. 정치계에 입문하면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교류했고 그와 여러 정치적 딜을 치면서 성향이 점점 좌경화되었다.[7] 당질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윌슨을 지지했다.[8] 이때 미국의 강력함이 드러났는데 베라크루즈 전투와 멕시코 침공에서 멕시코는 총력전으로 저항하고 당시 중남미의 강국이었던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도 멕시코의 구원 요청에 지원군을 파견해 같이 맞섰지만 미국은 이를 모두 격파해버리며 멕시코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이 전투의 승리로 중남미 전체가 덤벼도 미국엔 이길 수 없음이 드러났고, 미국이 북미를 넘어 아메리카 전체의 맹주임을 보여주었다. 특히 외교에서도 멕시코가 불리했던 것이 멕시코는 유럽 국가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럽은 미국과의 전쟁을 바라지 않아 거절했다. 이후 중남미의 모든 국가들이 미국에게 도전하지 않았다.[9] 당시에는 대통령 승계 순위에 하원의장, 상원임시의장이 없었고 부통령-국무장관-... 순이었다. 또한 의회가 휴회 중일 때는 상원 인준 없이 장관을 임명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이 패배할 경우 국무장관이 사임한 후 휴스를 국무장관에 임명, 그 직후 윌슨 본인과 부통령이 사임할 계획이었다. 현재는 양원 의장이 승계 서열에 껴있을 뿐만 아니라 장관 중에서도 상원의 인준을 거쳐 임명된 사람만 승계 서열에 포함되기 때문에 불가능한 꼼수. 이것이 현대의 승계서열로 바뀌게 된 건 역시 승계받은 대통령인 트루먼 시절(1945년)이다.[10] 사실 오헝제국의 구성국에 속하는 현대의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등의 입장을 제외하고 보면 미국과 서유럽 입장에서는 현대 기준으로 봐도 오헝제국의 붕괴는 큰 손해이다. 동유럽 공산화, 2022 우크라이나 침공 등 러시아의 폭주가 모두 근본적으로는 러시아를 적대하고 견제해왔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퇴위당하고 오스트리아 자체도 약소국화된 영향이기 때문이다.[11] 정확히는 윌슨은 민족자결주의의 범주를 패전국에 국한해서 제시하지 않았다. 위에서 보이듯이 윌슨은 상당히 진보적 사고관과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면모가 있었고 민족자결주의와 국제연합의 창설도 그러한 측면이 부각되는 부분이다. 문제는 독일에 대한 관대한 처벌과 마찬가지로 당시 승전국들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없었다. 후일 윌슨은 당시에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후회하는(강대국. 승전국의 측면에서) 발언도 남기기도 했다.[12] 농담이 아니라 민족자결주의가 가식적인 쇼에 불과하단 것을 깨달은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중 상당수는 그나마 독립지원이라도 해주는 소련에게 우호적인 노선을 타게 된다.[13] 윌슨은 파리에 다녀오는 와중에 스페인 독감에 걸렸지만 대외적으론 숨긴 상태였는데, 이 후유증으로 뇌졸중이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14] 오류가 많기로 유명한 이원복현대문명진단에는 윌슨이 중풍에 반신불수까지 겹쳐 파리 강화 회의를 마무리짓지 못 하고 귀국하느라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도 못 했다고 나와있다.[15] 미국은 각 주마다 자치권이 인정이 되어 연방법뿐만 아니라 주법도 개정 되어야 했다. 그나마 연방 선거에서는 연방법으로 참정권의 온전한 보장이 가능했지만, 연방 기관들이 개입하기 힘든 주 선거와 관련된 참정권에 대해서는 각 주의 결정이 필요했고, 이 과정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결국 1984년에서야 미시시피 주가 여성 보통선거에 관한 법을 인정하며 비로소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이 마무리가 되었다.[16] 게다가 백인 여성들은 참정권은 주 선거까지는 아니더라도 연방 선거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보장을 받았지만, 투표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미국 흑인 여성들의 참정권은 사실상 전혀 보장받지 못했다.[17] 물론 링컨의 노예 해방 선언 이전에도 미국 흑인 남성의 약 5~7%는 헌법상 보장된 참정권만 없었을 뿐 자유민이었다.[18] 사실 이 평가는 양면적인 측면이 있다. 앨런의 평은 윌슨이 민주주의를 세계에 퍼트리겠다는 이상을 가진 자였지만, 안타깝게도 이 당시 국제 질서가 얼마 안가 무너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심지어 앨런은 같은 전시 대통령 링컨과 비교하면서, 링컨은 성공의 순간에 죽을 수 있는 행운을 얻은 반면 윌슨은 그러지 못했다고 평가를 마무리 짓는다. 즉, 앨런은 윌슨의 이상은 높게 봤지만 현실에서 제대로 가동될 플랜을 짜놓지 못했다고 비판한 것인데, 현대에선 그 이상조차 사실은 위선스러운 측면도 있어보인다고 까는 주장이 나오는 걸 보면 오히려 역설적으로 호평했다고 볼 수도 있다.[19] 그는 독일을 무척 싫어해서, 유언"나의 시체를 독일을 향해 선 채로 매장하라"라고 했을 정도였다.[20] 클레망소는 윌슨을 보고 "당신은 강철 심장(heart of steel)을 가진 사람이오!"라고 비꼬았는데, 이는 프랑스가 독일에 대해 입은 피해가 막대한데 윌슨이 독일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니까 반대로 '동맹국한테 너무 냉정한 것 아니냐'는 뜻으로 비꼰 것이었다. 다만 이에 윌슨은 "그래도 전 도둑놈 심보(heart of steal)는 없습니다"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steel과 steal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 이와중에도 유머는 잃지 않았다.[21] 참고로 아이러니하게도 독일은 처음에 14개조 평화 원칙을 받아들이라고 요구받았을 때 코웃음을 쳤지만 종전 후 프랑스의 가혹한 요구가 있을 것임을 알자 태도를 바꿔 14개조 평화 원칙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결국 베르사유 조약행.[22] 에드워드 카도 '20년의 위기'에서 우드로 윌슨을 가루가 되도록 깠다.[23] 무엇을 안보로 위협하는 세력으로 볼 것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재가 마땅한가? 집단안보를 지키기 위해 각국은 그렇게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사실, 이 모두가 합의되기 어려운 사안이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합의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 한국전쟁 참전 역시 소련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가능했다. 덤으로 당시 유엔 상임이사국이던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이라 참전에 반대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비상사태 발생시 모두가 동의하는 대응책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24] 가토 요코,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25] 과거엔 위대한 대통령 순위 같은 거 매기면 10위 안에 드는 경우도 있었다. 2009년 부시 퇴임 이후에도 전체 42명 중 9위를 기록한바 있다. 다만 상기했듯 위선스러운 면모나 백인우월주의자였다는 의혹이 부각되면서 평이 예전보단 좀 깎이는 모양새.[26] 좀 더 정확하겐 남/북부민주당 드립처럼 고보수주의자들과 고전적 자유주의자 등이 뒤섞인 정당이었다. 참고로 19세기 미국 정치사를 관통하는 큰 주제 2가지는 중앙집권화식 강한 연방주의 vs 주의 권리를 존중하는 반연방주의와 노예제 찬/반 문제였는데, 그러다보니 기존 연방정부가 노예제의 잘못을 공감할지라도 주의 권리를 존중해 노예주 허용주가 많던 남부 지역에 개입하기 어려운 혹은 확산만 방지한다는 식으로 방관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다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남북전쟁이 터진 것.[27] 윌슨 역시 진보, 자유주의 컨셉을 내세운 대통령이긴 하지만, 여긴 뉴딜 동맹처럼 어떤 진보적 벨트를 만들진 못했고, 진보주의자면서도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의혹을 받는 희한한 스탠스 때문에 후대에 평가하기 애매한 부분이 있다.[28] 윌슨의 말을 직역하면 전기로 쓴 역사라고 한 것인데, 쉽게 표현하면 "잘 영상화 시킨 실제 역사다."라고 찬사하는 의미다.[29] 실제로 유튜브 영상에서(영어 버전) 미국 대통령 순위에서 일부 영상들은 윌슨이 중위권~하위권으로 나오는 영상들도 일부 있다. 윌슨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린든 B. 존슨, 로널드 레이건, 버락 오바마 등도 역사가들과 일반인들 사이에서 평가가 많이 차이나고 있다.[30] 자세한 내용은 윌슨의 순간 (The Wilsonian Moment)-에레즈 마넬라 (Erez Manela),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1-2장 참고.[31] 물론 소련은 카라한 선언을 통해서 제정 러시아 시기에 청나라군벌들과 맺었던 불평등한 비밀협정을 완전히 무효화했고, 강제로 확보했던 영역도 무상반환했다. 이때 러시아가 건설한 철도도 무상반환하기로 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발생하면서 중소분쟁의 원인이 되긴 하는데, 이 시기의 이런 선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단적으로 1차대전에 승전국으로 참가한 중국과 일본 가운데서 일본의 입장만 반영된 결론이 베르사유 조약에서 도출되면서 중국이 대대적으로 반발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결국 이런 소련의 지원은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에 모두 영향을 끼쳤다. 이때의 대결구도는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대 제국주의 구도였기 때문이다. 독립된 나라 대부분은 소련에 편입되거나(소련 자체가 그 목적으로 세워진 연합국가이므로) 몽골과 같은 위성국이 되었다.[32] 참고로 이승만의 박사 논문 제목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United States)"이었다.[33]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103-104[34] 「미국의 영향을 받은 국제법적 중립성」[a] A B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114-116[b] A B 李承晩, David P. Fields 외 공편, 《Log Book (국역 이승만 일기 : 1904~1944)》,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 p. 54-55[c] A B 徐廷柱, 《미당 서정주 전집 19 전기 : 김좌진 장군전, 우남 이승만전》, 은행나무, 2017, p. 398-400[35] 柳永益, 《이승만의 삶과 꿈》, 中央日報社, 1996, p. 86-93[36] 러시모어산 착공 당시에는 공화당 소속인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이였는데, 쿨리지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 더 많아야 한다며 루스벨트를 밀었다는 소문도 있다.[37] 영어로는 고무 다리(rubber-legged)라고 쓴다.[38] 프랑스 강경파 클레망소의 버전도 있다. "모세는 우리에게 십계명을 주었지만 우리는 그것을 어겼다. 이제 윌슨이 우리에게 14개조를 주지만 그것이 지켜질지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본문에도 나와있지만 1차 대전 중 독일에게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를 대변하던 인물인 클레망소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이다.[39] 사족으로 지미 카터 대통령도 땅콩농장 농장주였다.[40] 출처 : O'Toole, Patricia (2018). The Moralist: Woodrow Wilson and the World He Made. Simon & Schuster. ISBN 978-0-7432-9809-4.[41]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먼로, 윌리엄 헨리 해리슨, 존 타일러, 재커리 테일러, 우드로 윌슨[42] 이들 중 유일하게 20세기 이후에 대통령을 지냈다.[43] 다만 이들중 토머스 제퍼슨은 명목상으로만 성공회이고, 실제로는 이신론자이다.[44] 1912년 대선 연설 중 공화당을 비꼬며 한 말. 다만 당시 공화당의 성향은 이때 민주당과 마찬가지로 좀 짬뽕이긴 했다. 현직이던 테프트가 공화당 내 보수파였다면, 전임 시어도어는 혁신파였기에 둘이 갈라섰고 덕분에 윌슨은 어부지리를 취한다.[45] 1916년 디트로이트 세일즈맨십 학회 연설 중.[46] 1917년 1월 21일, 미국의 상원에서 한 '승리없는 평화' 연설 중 일부. 다만 그는 당시 유럽에 평화를 호소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은 연합국과 독일은 싸우느라 바빴다. 그리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 치머만 전보, 러시아 혁명 3단 어그로 콤보로 미국이 참전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되자, 그는 3달 뒤 역시 명연설로 기억되는 후술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연설을 해야 했다.[47]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연설 중 일부. 여기서 윌슨은 미국을 여성으로 표현했다. 윌슨은 연설 이후 우레 같은 갈채를 받았는데, 윌슨은 이에 대해 보좌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내가 말한 것은 젊은이들에 대한 죽음의 메시지인데, 그걸 환호하다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드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