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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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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公壽
(? ~ 1137)
1. 개요[편집]
고려의 재신. 본관은 인천 이씨이다. 자는 원로(元老), 개명하기 전 이름은 '공(公)'자를 뺀 이수(李壽)다.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 중기 권신인 이자연의 동생 이자상의 손자이다. 이공수는 이자상의 아들 이예의 장남임.
2. 생애[편집]
2.1. 초년[편집]
어린 시절 이공수의 외조부 최유선은 이공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 아이는 반드시 큰 그릇이 될 것이다."[1] 라고 말했다. 공부에 힘써 선종 3년(1086) 과거에 급제한 뒤 직한림원, 좌습유(대간) 등을 지냈다. 숙종 4년(1099)에는 요에 사신으로 가서 요 도종이 숙종의 생일을 축하해준 것에 감사하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2.2. 예종 시기[편집]
예종 때는 서경유수판관을 지냈다. 하루는 서경에 예종이 행차했는데, 이공수는 백성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도 왕을 잘 대접했고 예종은 이러한 이공수의 능력을 가상하게 여겼다. 예종은 이공수에게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신을 호종하라고 명령했는데, 이공수가
라고 사양하니 예종은 이공수의 말이 옳다고 하며 그 말을 따랐다.예로부터 돌아가는 어가를 섬길 때는 오직 지유(知留, 지서경유수사) 한 명만 호종해 갔는데, 어찌 특별한 은혜를 바라 샹규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2]
판관 임기가 끝난 뒤에는 예부원외랑에 임명됐다. 예종 4년(1109) 어사중승에 올랐고 곧 병부시랑으로 전임됐는데, 이후 14년간 병부에서 무관에 대한 인사를 맡았으며 적임자로 평가됐다. 예종 7년(1112) 서북면병마사에 임명되고 위위경으로 관직이 바뀐다. 예종 9년(1114)과 10년(1115) 황군상과 함께 두 차례 요에 가서 횡선사 파견에 감사하는 뜻을 전했다. 그 사이에 이공수는 공부상서로 승진했다. 예종 12년(1117) 잠깐 우산기상시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13년(1118) 서북면병마사로 보임됐고 예종 16년(1121) 재차 서북면병마사에 임명됐다.
2.3. 이자겸의 난[편집]
이공수는 예종대에 다른 임관 동기들이 재상에 오르는데도 공부상서에서 승진이 멈췄었다. 사람들은 이공수가 재신이 되지 못한 것에 의아해했지만 이공수는 태연하게 처신했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이공수의 6촌 형제인 이자겸이 외척으로 권력을 손에 넣었다. 이공수는 인종 2년(1124) 비로소 검교사도 수사공 참지정사에 임명돼 재신의 반열에 들어갔다. 당시 재추에 오른 인사는 척준경, 박승중, 김인규, 이자덕 등 이자겸파 인물들이 많았다. 한편 김약온처럼 이자겸의 친척이긴 하지만 적극 동조하지는 않는 인물도 있었는데, 이공수는 후자에 포함됐다.
인종 3년(1125) 4월 이자겸의 집을 '중흥택'이라 개칭하도록 하는 교서와 함께 왕이 하사하는 보물들을 들고, 이자겸파인 동지추밀원사 허재와 함께 이자겸을 찾아갔다. 같은 해 12월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됐다. 인종 4년(1126) 2월 왕은 이자겸을 제거할 뜻을 지후 김찬, 녹사 안보린 두 내시와 동지추밀원사 지녹연에게 밝혔다. 이공수는 이자겸의 당여가 아니었기에 김찬을 통해 왕의 뜻을 전달받았는데, 전 평장사 김인존과 마찬가지로 이자겸 당여가 조정에 가득한 지금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밝혔다. 왕은 두 재신들의 충언을 무시했고, 생각이 짧았던 지녹연 등의 뜻을 따랐던 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인종이 이자겸의 집에 유폐되고 척준경과 함께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뒤인 4월에는 문하시랑평장사 판예부사에 임명됐다. 여전히 이자겸에 거스르는 뜻을 드러내지 않던 이공수는 척준경이 최사전의 설득으로 돌아선 뒤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연경궁으로 거처를 옮긴 왕이 환관을 통해 밀서를 보이자 척준경 등이 입궁했다. 계획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걸어잠궜는데 이공수가 뒤따라왔으니, 왕은 문 한쪽만을 열어 빨리 이공수를 들이도록 했다. 척준경이 왕을 호위해 군기감으로 향했으며, 이공수는 군기감에서 척준경과 의논해 이자겸과 가족들을 체포한 뒤 이자겸을 따르는 장수들을 참수했다. 이자겸의 당여는 차례로 잡혔고, 마침내 이자겸의 난이 진압됐다.
2.4. 말년[편집]
이자겸 진압에 공을 세웠기에 추충위사공신(推忠衛社功臣)호를 받았고 판이부사를 겸했다. 인종 5년(1127) 잠깐 판병부사로 바뀌었다가 다시 판이부사 감수국사로 바뀌었다. 인종 6년(1128) 마침내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 상주국에 임명됐다. 문하시중으로서는 인종 8년(1130) 양부 대신들과 논의해 백관에게 쌀을 하사하고 현성사(賢聖寺)와 영통사(靈通寺) 두 절에서 나라를 위한 행사를 지내도록 지원한 공적이 있다.
말년의 이공수는 중풍을 앓았고, 표문을 4번이나 올리며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청했다. 인종 9년(1131) 7월에 마침내 은퇴가 허락됐다. 9월 관직이 검교태사 수태부 문하시중 판이부사로 바뀌었다. 인종 15년(1137) 7월 16일 죽었고 시호를 받았다. 이공수의 묘지명은 아들 이지저가 지었다.
3. 평가[편집]
천성이 도량이 넓고 두터웠으며 근검했지만 인색했다. 불교를 좋아했다.[3]
『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4. 가족관계[편집]
- 아버지: 이예
- 어머니: 최씨
- 아들: 이지저
- 아들: 이지무
- 아들: 이지간
- 아들: 이지혜
- 아들: 이지의
- 아들: 이지철
- 사위: 김영석
어머니는 해주 최중의 아들인 최유선의 여이다.
이공수 묘지명이 전한다.
고려사에 의하면아들 이지무는 태자태보(太子太保)|감수국사(監修國史)|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냈다. 이지무는 단속사대감국사비(斷俗寺大鑑國師碑)를 지었다.
이지저는 1143년에는 참지정사 판서경유수사(參知政事判西京留守事)를 지냈다. 1145년에 정당문학 참지정사로 재직할 때 죽었다. 중서시랑평장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이지저 등 여러 아들과 딸을 뒀는데, 사후에 이지저가 유산을 독식했다.
사위 김영석은 아버지는 시중(侍中) 김인존(金仁存), 어머니는 경원군개국백(慶源郡開國伯) 이호(李顥)의 딸 이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