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
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태진

덤프버전 :


<^|1><height=32>
[ 펼치기 · 접기 ]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철학, 윤리학, 논리학, 미학, 종교학, 교육학, 심리학
2분과: 언어학, 문학
3분과: 사학, 고고학, 민속학, 지리학, 문화인류학
4분과: 법학
5분과: 정치학, 행정학, 사회학
6분과: 경제학, 경영학
[분과별 학문 분야]
1분과: 수학, 물리학, 화학, 천문학, 대기과학
2분과: 생물학, 지질과학, 스포츠과학, 영양학, 가정학
3분과: 건축공학, 금속공학, 기계공학, 섬유공학, 자원공학, 전기공학, 전자공학, 정보공학, 조선공학, 토목공학, 항공공학
4분과: 의학, 치의학, 수의학,약학
5분과: 농학, 임학, 축산학, 수산학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6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정진홍
장석진
차하순
고상룡
임희섭
이현재
장세헌
이상만
김상주
이상섭
홍성각
차재호
조동일
이기석
김남진
강신택
곽수일
안세희
김수진
박중현
문국진
이병일
이돈희
홍재성
이기동
정동윤
안병준
정기준
노재식
이정우
김상용
김낙두
김현욱
이성진
김학주
김영한
박병호
김경동
김기영
박세희
박상대
노오현
김병수
황병국
소광희
이정민
이성규
김상용
김용구
유장희
권숙일
맹원재
윤덕용
이순형
류순호
윤사순
김수용
이태진
김효전
진덕규
이학용
기우항
임번장
현병구
김영중
장동석
이한구
조주관
한상복
임종률
백완기
이지순
김용해
장호완
나정웅
고재승
이홍석
박종현
장경렬
최병현
권오승
이정복
조장옥
이은
김상구
한송엽
심희섭
김윤수
정찬섭
남기심
임돈희
최병조
김홍우
한인구
조성호
정진하
최항순
이영순
박승우
-
김인환
박용운
신동운
신용하
-
이호인
조완규
이장무
이승규
최양도
-
이종호
김호동
-
임현진
-
김도한
이기화
이병기
이종호
홍성윤
-
-
김영식
-
신명순
-
박성현
안진흥
황규영
박성회
김수일
-
-
고동환

김진의
임정빈
유정열
이명식
고희종

최진호
박종욱
-
고규영
김용균
-
우경식
-
송진원
한재용
작고 회원
인문사회 분과
자연 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6분과
1분과
2분과
3분과
4분과
5분과
고형곤
권중휘
이병도
최태영
신기석
고승제
안동혁
손치무
이균상
한구동
정문기
안호상
이숭녕
김상기
유진오
이상백
최호진
김동일
강영선
원태상
윤일선
조백현
박종홍
이희승
신석호
고병국
신도성
신태환
이태규
정태현
최경열
이제구
현신규
김두헌
최현배
이선근
이근칠
민병태
유진순
전풍진
박동길
이종일
이종륜
우장춘
김기석
양주동
조의설
윤세창
김성희
조기준
최규남
김호직
이채호
박영진
김호식
김활란
이양하
김재원
이종극
고황경
김순식
권영대
이민재
최방진
이재춘
송재철
김계숙
이병기
류홍렬
김병노
김상협
김효록
최윤식
조복성
윤일중
이진기
이근태
이종우
김윤경
이홍직
이항녕
최문환
육지수
박철재
이병위
민한식
박호풍
박승만
이상은
손우성
홍이섭
박원선
정인흥
김준보
박하욱
김옥준
김기덕
김두종
심종섭
이인기
정인승
고병익
정광현
이만갑
이상구
조광화
최례석
최호영
이세규
지영인
김동화
조윤제
한우근
유기천
윤천주
권오익
이원철
김준민
김재근
김명선
이춘녕
김준섭
김형규
전해종
이한기
박동서
정수영
장기원
김창환
김종석
기용숙
박병희
오천석
차상원
이기백
이희봉
이용희
임원택
성좌경
김삼순
최형섭
한심석
윤상원
류승국
차주환
이광린
문홍주
김대환
박기혁
박정기
홍순우
김문상
우린근
이창구
이희철
여석기
김원용
서돈각
김운태
김옥근
박봉열
김봉균
신영기
나세진
김성원
서명원
조성식
김철준
손주찬
홍승직
오상락
최상업
윤석규
이량
이우주
이은웅
임한영
김동욱
이두현
남흥우
차기벽
정병휴
조순탁
주진순
장석윤
이문호
정후섭
최재희
정병욱
민석홍
황산덕
구영록
김동기
김치영
이대성
윤동석
김용관
강제원
김규영
강두식
이찬
김증한

박광순
이상수
정영호
한만춘
서병설
백운하
유형진
이기문
윤무병
김치선

조순
김정수
김훈수
강명순
이영소
김문협
백낙준
이능우
이우성
박일경

변형윤
최규원
이영록
윤장섭
권이혁
고재군
조요한
동완
황수영
김기두

윤기중
심정섭
김오중
오현위
이장락
최병희
김성태
장덕순
양병우
정영석


박을룡
김준호
최계근
김기홍
박영호
김태길
이가원
민영규
김현태


윤세원
하두봉
이승원
박수선
전세규
윤명로
김현창
김용섭
김정균


김태린
박희인
김재극
장신요
조재영
김종철
김용직
이성무
김홍규


박태원
정창희
우형주
이기영
오봉국
정양은
정명환

황적인


윤갑병

이택식
김주환

박영식
이경식

심헌섭


윤능민

황종흘
김용일

김충렬
김완진

김철수


이익춘

이만영
김정룡

조명한


김종원


송희성

조선휘
이호왕

오병남


이형국


고윤석

이리형


정범모







이충웅


조대경










길희성










명예 회원
노요리 료지
얀 린드스텐
위르겐 코카
얀 아헨바흐
크리스티안 스타크
피터 드루스
시오노 히로시
로저 비치
해럴드 푸어


}}} ||}}}


파일:external/file2.nocutnews.co.kr/20151030095947295944.jpg

李泰鎭
1943년 10월 14일 ~ (80세)

1. 개요
2. 상세


1. 개요[편집]


대한민국역사학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교수. 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 기간(2010.09.27~ 2013.09.2)에 11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임하였다.


2. 상세[편집]


1943년 10월 14일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나, 8.15 광복 후에 본적지인 영일군 청하면 월포리(現 포항시 북구 청하면 월포3리)[1]로 이주했다. 월포국민학교와 포항중학교, 성동고등학교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사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석사 학위 취득 후 1973년부터 1977년까지 경북대학교 사학과에서 전임강사로 재직했고, 1977년에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전임강사에 임용되었다가 1978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조교수에 임용되었다. 당시 이태진 교수의 세대에서는 석사학위만 받고 교수 임용이 가능했고, 특정 분야에서는 학사 출신 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이 당시는 한국사학계의 태동기로, 교수진은 매우 많이 필요했지만 학위 소지자는 적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태진 교수와 동시기에 활동했던 역사학자의 경우 최승희, 최병헌, 이기동, 김두진, 정만조 교수 등이 박사학위 없이 정년퇴임을 했다. 이후 2005년 2월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받기 시작하고 학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정확히는 교수 채용시 박사학위가 필수가 되는(음악, 미술계 등은 제외) 경향은 보다 뒷세대에서 나타난다.

원래 조선시대 정치사·사회사 전공이었으나 한국사 전체에 포괄적으로 관심이 넓은 편으로, 학술대회에 참여하거나 논문을 내는 것 역시 시대를 가리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리실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1988년부터 근대사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1992년에 규장각 장서 속에 포함된 대한제국 시기 정부 문서들을 영인해 보급하는 사업을 진행하다 고종·순종 두 황제의 명령서인 조칙, 칙령 묶음에서 순종 황제의 이름자 서명이 위조된 문건 수십 점을 발견한다. 이 문건은 일본의 한국통감부정미조약(1907)을 강제하면서 제정한 법령들인데 최종 결재 과정에서 황제 서명을 위조한 것이다. 이때부터 대한제국 시기를 비롯한 일제의 침략사 전반을 다시 연구하였다고 한다.#

2000년에 낸 책 <고종시대의 재조명>을 발표하고 이에 대한 반박과 재반박이 이어지고 토론회가 열리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그는 고종대한제국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개화파독립협회의 시각으로만 이뤄져왔으며 당대에 대한 연구가 미진한 점을 지적하였다.[2] 이는 대한제국광무개혁을 폄하해왔던 기존의 통설을 깨는 학설이었다. 그의 학설은 다른 한국사학자들 및 여러 분야에서 대한제국을 연구하는 교수들의 학설에 힘입어[3] 대한제국 건국 120주년인 2017년에 중앙일보에서 연속 특집으로 대한제국 기고를 실었고 현재도 꾸준히 연구 중이다.# #

2004년 정년퇴임 직전까지는 대표적으로 광무개혁 재평가나, 소빙하기 등의 조선사 관련 학설을 제기하였으며,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에 대해 비판하였다.

2005년 을미사변의 정황을 기록한 '우치다 보고서'를 일본 외무성 부설 외교사료관에서 찾았다. 이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기존에 알려진 옥호루 실내가 아닌 건천궁 내의 뜰에서 살해당하였고 메이지 덴노에게도 보고되었다는 내용으로 언론에 보도되었다.# # 이 기사가 일본에 보도되며 일본인들이 '우치다 보고서는 대학 도서관에도 찾아볼 수 있을만큼 공개되어 있다' 등의 내용으로 인조이재팬에 이태진 교수에게 공개질의를 하고 서울대에 답신을 바라는 메일을 보낸 사건이 있었는데 이에 이태진 교수가 답변하였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총독부라고 불렀던 일본인들은 이태진 교수가 일본인의 번역물을 이용한 점을 지적하였고 대학 도서관에 공개된 점을 들어 현대 일본 정부가 은폐한 것은 아님을 밝혔다. 일부 자신이 최초 발견자라고 주장한 질의에 대해선 자신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답변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이던 당시 박병선 박사와 함께 조선왕조의궤외규장각 도서가 프랑스에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후 외규장각 도서를 국내로 반환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2006년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학장에 취임했고, 2007년 7월 13일 대한민국 학술원 인문사회과학부 제3분과 회원에 선출되었다.


[1] 김정행대한체육회 회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2] 80년대까지만 해도 반정부운동과 민중운동에 대한 요구가 높았고 당시 한국사학계도 이 같은 맥락을 같이하여 갑신정변, 독립협회, 동학농민운동 등의 연구에 집중하였고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연구는 복벽론이나 왕조사관으로 몰리기 쉬웠다. 정치권에서도 좌우 전부 조선 말기 및 대한제국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팽배하였고, 그러다보니 고종과 대한제국에 대한 연구는 미진한 채 일제강점기 때의 연구에 머물러 기존의 통설이 반복되었다.[3]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