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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커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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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미국의 배우.
2. 위상[편집]
1950-60년대에 활약했던 명배우. 1951년 재넛 리와 결혼하면서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가장 각광 받는 스타 커플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제이미 리 커티스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3. 상세[편집]
헝가리 출신 이민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매우 비참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는 여성들과 자식들과의 관계에도 평생 큰 영향을 미쳤다.
양극성 장애를 앓던 어머니는 형제들을 자주 폭행했다. 지독한 가난으로 인해 8살 땐 고아원에 들어간 적도 있었다. 1938년 형 줄리어스(Julius)가 교통사고로 사망했을 땐 토니 커티스가 시체 신원 확인을 해야했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어린 남동생 라버트(Robert)가 그나마 유일한 의지처였는데, 라버트는 훗날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양극성 장애가 발병했다.
첫 연기는 아서 왕을 소재로 한 동네 연극의 여자아이 역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해군에서 복무했으며, 도쿄만에서 일본의 항복을 지켜보았다.
뉴욕에서 트럭 운전수로 일하는 한편 드러매틱 워크샵(Dramatic Workshop)에서 연기 공부를 하며 공연을 하던 중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조카인 캐스팅 디렉터 조이스 셀즈닉(Joyce Selznick)에게 발굴돼 1948년 할리우드에 첫 발을 디뎠다.
유니버설 픽처스와 계약에 들어간 뒤 조단역을 전전하던 중 <도적왕자>(1951)의 성공으로 주연으로 자리를 굳혔고 각광 받는 신예 스타였던 재넛 리와 결혼하고 함께 <마술의 사나이>(1953)에서 부부 역으로 나오면서 탑스타의 위치에 올라섰다.
당시 덕테일(ducktail)이라고 불리던 리젠트 머리를 유행시킨 장본인 중 하나로, 엘비스 프레슬리도 커티스의 영화를 본 뒤 이 머리를 하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예쁘장했던 외모 때문에 경력 초반엔 소속사에서도 대놓고 연기력을 평가절하해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나 정반대로, 1960년대 중반부터 40대에 접어든 커티스는 노화로 인해 머리숱이 줄어들고 인상이 변하면서 흥행력이 감소했다. <Wild and Wonderful>(1964)로 유니버설과의 오랜 계약도 끝나버렸다. 유럽에서 기존 이미지와 상반되는 역할들을 자주 맡았고, TV에 나오기 시작했다.
70년대부터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소위 B급 영화들에 나오거나 TV 드라마 주연작에서 실패하곤 했다. 로저 무어와 공동 주연한 영국 드라마 "위장 게임(The Persuaders!)"(1971-72), ABC 드라마 "McCoy"(1975-6) 모두 짧게 끝났다.
1980년 닐 사이먼의 공연 "I Oughta Be in Pictures"에 출연했다.
1984년 약물과 알코올 의존증을 치료하기 위해 베티 포드 센터에 입원한 적이 있다.
1990년대엔 로잔느 아줌마, 슈퍼맨 등의 유명 TV 드라마나 시트콤에 한 회씩 출연하기도 했다.
말년엔 화가 활동을 더 왕성하게 했는데, 상당히 고가에 거래되었으며 일부 작품은 MoMA 등에 전시되었다. 마릴린 먼로 등 동료 배우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꽤 남겼다.
2002년 뮤지컬판 "뜨거운 것이 좋아"에 아즈굿 필딩 3세로 나와 유명한 명대사 "완벽한 사람이 어딨겠어(Nobody's perfect)"를 쳤다.
2006년 영국 엠파이어상(Empire Awards)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2010년 9월 29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4. 주요 출연 작품[편집]
5. 개인사[편집]
-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이를 숨기지 않았다.
- 총 6번 결혼하고 5번 이혼했다.
- 1956년 첫 번째 아내 재넛 리와의 사이에서 장녀 켈리 커티스(Kelly Curtis)가 태어났다. 배우로 활동한다.
- 1962년 <대장 부리바>를 찍으며 17살 독일 배우 크리스티너 카우프만(Christina Kauffman)과 불륜 관계가 돼 재넛 리와 헤어졌다.
- 1963년 크리스티너 카우프만과 재혼해 두 명의 딸 앨릭잰드러(1966년생)와 얼레그러(1968년생)를 얻고 1968년 이혼했다.
- 1968년 레슬리 앨런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아들 니컬러스(1970년생)와 벤저민(1973년생)이 태어났다.
- 1994년 아들 니컬러스가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 1998년 여섯 번째 아내인 42살 연하의 말 훈련사 질 밴더버그와 결혼했다.
6. 여담[편집]
- 1977년에 소설 "Kid Andrew Cody and Julie Sparrow"을 출간한 적이 있다.
- 1993년 자서전 "Tony Curtis"를 출판했다. 2009년엔 회고록 "American Prince: A Memoir"를 내놓았다.
-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한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 뉴욕 사투리가 강한 편이다.
- 전성기 때부터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라는 관측이 있었다.
- 배우 생활을 막 시작했을 당시 아직 무명이었던 마릴린 먼로와 사귀었다고 밝혔다. 먼로는 자신의 생에서 진지한 관계를 가진 첫 여성이었다고 한다.
둘은 <뜨거운 것이 좋아>(1959)에서 호흡을 맞추기도 했는데, 영화를 찍을 당시 먼로가 임신을 하고 나중에 유산을 했으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이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지만 진위여부는 불분명하다.
- <뜨거운 것이 좋아>(1959) 촬영 당시 NG를 많이 내고 자주 지각하던 먼로에게 열받았던 커티스가 "매럴린과 키스한 기분이 어떠냐?"는 기자의 질문에 "히틀러와 키스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있다. 2001년 커티스는 "실제로는 오르가즘을 느낄 만큼 끝내주게 좋았다"고 변명했다.
- 시드니 푸아티에이와 영화 <흑과 백>(1958)에 출연한 뒤, "원래 내 역할로 캐스팅 제안을 받은 건 로버트 미첨이였는데, 미첨이 '흑인과 함께 쇠사슬에 묶여 연기하는 게 싫다'고 거절해서 내가 맡게 되었다"고 말해서, 미첨이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난을 받게 하기도 했다. 미첨이 출연제의를 거절한 진짜 이유는 영화 주인공들처럼 14살에 죄수가 되어 탈옥까지 했던 미첨에게 남부에서 흑인죄수와 백인죄수를 함께 묶어 관리한다는 영화 설정이 비현실적이였기 때문이다.
- 한국에도 진출한 적이 있는데, "인간의 땅"에서 농장주 페드로 역이었다. 허나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이 공식 필모그래피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 1965년 ABC 고인돌 가족 플린스톤에 스토니 커티스(Stony Curtis)로 패러디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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