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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돌프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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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제61대 재무장관
랜돌프 헨리 스펜서처칠 경
Lord Randolph Henry Spencer-Churchill
파일:Randolph-Henry-Spencer-Churchill.jpg
출생1849년 2월 13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벨그라비아
사망1895년 1월 24일 (향년 45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재임기간제61대 재무장관
1886년 8월 3일 ~ 1886년 1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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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父: 존 스펜서처칠
母: 앤 베인
배우자제니 제롬
자녀윈스턴 처칠, 잭 처칠
학력이튼 칼리지 (졸업)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컬리지 (법학 / 학사)
종교미상
최종 당적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영국의 제61대 재무장관.


2. 생애[편집]


1849년에 제7대 말버러 공작 존 윈스턴 스펜서-처칠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튼 스쿨에서 수재로 이름을 날리고 옥스퍼드 대학의 머튼 칼리지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주재 영국대사로 근무하던 중, 미국의 투자 사업가 레너드 제롬의 차녀인 제니 제롬을 만나 3일 만에 약혼하고, 6개월 후인 1874년 4월 15일 파리의 영국 대사관에서 결혼했다. 당시 서양에서는 미국 출신의 신흥 부자와 유럽 귀족 간의 혼사가 잦았다. 신분 상승을 위한 금수저들과 재정적으로 궁핍한 귀족 집안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1]

그 후 재무부 장관, 인도 제국 국무부 장관, 하원의장 등을 역임했다. 아들인 처칠처럼 그도 영국 보수당에서 활동했는데, 인도에서 국무부 장관을 역임할 당시 영국과 꼰바웅 왕조와의 전쟁에서 버마를 합병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인도에서 영국 수입품을 쓰는 것을 장려하는 무역정책을 추진했다. 재무부 장관 시절 군 예산 감축을 두고 육군장관 W. H. 스미스와 대립한 끝에 1886년 사표를 제출했고 정치 경력을 마감했다.

1895년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매독이었는데, 대학생 시절에 늙은 창녀와 성매매를 해 매독에 걸렸던 적이 있었다. 치료를 받아 호전됐지만 다시 재발해 사망하고 말았다. 랜돌프 처칠이 걸린 매독은 잠복형 매독으로 보인다. 잠복형 매독은 2기 매독 증상을 보이다가 갑자기 모든 증상이 사라지면서 자연 치유된 것처럼 보이는데 짧으면 3년 후, 길게는 30년 후에 3기 매독 증상을 보이며 돌연 발병한다. 랜돌프가 보인 증세는 정신이상 증세라 아내가 날 죽이려든다며 욕설과 구타를 해대 사람들이 아내를 다른 곳으로 보내야했고, 벌거벗고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놀란 하인들이 강제로 잡고 그를 묶어둬야 했다. 나중에는 더더욱 심해져서 아내를 죽여야 한다고 총을 쏘려고 해서 총알을 미리 빼냈다고 한다.

랜돌프의 사망 당시 장남 윈스턴 처칠은 20살이었는데 이때만 해도 매독은 유전병이라고 여겨저서, 윈스턴은 자신도 아버지를 따라 매독에 걸렸을 지 모른다고 지레짐작해서 금욕해야 했다.


3. 여담[편집]


파일:Jenny Jerome.jpg
제니 제롬
  • 랜돌프 처칠의 아내 제니 제롬은 남편이 사망한 후 1900년에 20세 연하의 근위대 대위와 재혼했지만 재혼 14년만에 다시 이혼했다. 이후 1917년에 63세 나이로 나이지리아에서 영국 관리로 일했던 40세의 몬태규 피펜 포치와 결혼했다. 다만 재혼했음에도 레이디[2] 칭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니 제롬은 좋게 말하면 매우 자유로운 사교생활을 즐겼고, 나쁘게 말하면 당대에 음탕한 여자로 악명이 높았다. 당시 영국의 왕태자였던 에드워드 7세를 비롯한 수십 명의 남성들과 관계를 거듭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지만 왕실과 귀족들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죽을 때는 참 허무하게 죽었는데 새로운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넘어졌고 발목이 부러진 뒤로 괴저가 생겨 결국 한달도 안가 발목을 잘라야 했다. 하지만, 괴저가 계속 벌어져 여러 부위를 잘라야했고 그로 인한 동맥출혈로 1921년 67살로 죽었다.

  • 장남 윈스턴 처칠에게도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는데, 정계 생활을 하느라 아들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제니 역시 남편의 정계 생활 내조로 인해 아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처칠이 기숙사립학교에 있을 당시 아버지 랜돌프는 4년 동안 4번 찾아왔고, 어머니 제니 제롬은 1번만 찾아왔을 정도였다.[3] 그래도 생전의 아버지를 미워하지는 않았는지 윈스턴은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 이름인 랜돌프를 붙였다.


4. 둘러보기[편집]


파일:처칠-투명.svg윈스턴 처칠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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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런 식으로 '유럽의 가난한 귀족과 결혼한 미국의 신흥 부유층 여성'을 지칭하는 '달러 프린세스'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로 당시에는 상당히 흔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엿볼수 있는 당대 소설이 있으니 셜록 홈즈 시리즈귀족 독신남이다. 영국의 공작가 영식과 미국의 대부호 딸의 결혼을 다룬 에피소드인데, 작중에도 두 사람의 결혼을 다룬 신문 기사에 "요즘은 영국의 명문가 안방에 대서양 건너의 부유한 상속녀들이 들어앉는 게 유행인가, 이 결혼으로 득을 보는 건 귀부인이 될 아가씨 한 사람만은 아닐 것(=부유한 상속녀를 아내로 삼는 공작 영식도 이득 보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언급이 나오기도 한다.[2] 귀족이 아닌 여성이 귀족과 결혼할 때 레이디란 칭호가 붙는다.[3] 그렇잖아도 이 시대 상류층 사람들은 자식 양육을 유모나 가정교사 등 고용인에게 맡겨두는 경우가 많았는데, 윈스턴 처칠의 부모는 자신들의 경력과 사교생활을 위해 자식들 양육에 더욱 신경쓰지 않았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과 존 처칠 형제는 자기 부모보다 유모에게 정을 느꼈고, 부모가 사망할 때보다 유모가 사망할 때 더 슬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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