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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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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
초대
로버트 월폴
조지 2세
초대제2대제3대제4대
로버트 월폴스펜서 컴프턴헨리 펠럼토머스 펠럼홀스
제5대제6대
윌리엄 캐번디시토머스 펠럼홀스
조지 3세
제6대제7대제8대제9대
토머스 펠럼홀스존 스튜어트조지 그렌빌찰스 왓슨웬트워스
제10대제11대제12대제13대
대 윌리엄 피트오거스터스 피츠로이프레더릭 노스찰스 왓슨웬트워스
제14대제15대제16대제17대
윌리엄 페티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소 윌리엄 피트헨리 애딩턴
제18대제19대제20대제21대
소 윌리엄 피트윌리엄 그렌빌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스펜서 퍼시벌
제22대
로버트 젠킨슨
조지 4세
제22대제23대제24대제25대
로버트 젠킨슨조지 캐닝F. J. 로빈슨아서 웰즐리
윌리엄 4세
제25대제26대제27대제28대
아서 웰즐리찰스 그레이윌리엄 램아서 웰즐리
제29대제30대
로버트 필윌리엄 램
빅토리아
제30대제31대제32대제33대
윌리엄 램로버트 필존 러셀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제34대제35대제36대제37대
조지 해밀턴고든헨리 존 템플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헨리 존 템플
제38대제39대제40대제41대
존 러셀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벤저민 디즈레일리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제42대제43대제44대제45대
벤저민 디즈레일리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로버트 개스코인세실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제46대제47대제48대제49대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아치볼드 프림로즈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에드워드 7세
제49대제50대제51대제52대
로버트 개스코인세실아서 밸푸어헨리 캠벨배너먼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조지 5세
제52대제53대제54대제55대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앤드루 보너 로스탠리 볼드윈
제56대제57대제58대제59대
램지 맥도널드스탠리 볼드윈램지 맥도널드스탠리 볼드윈
에드워드 8세
제59대
스탠리 볼드윈
조지 6세
제59대제60대제61대제62대
스탠리 볼드윈네빌 체임벌린윈스턴 처칠클레멘트 애틀리
제63대
윈스턴 처칠
엘리자베스 2세
제63대제64대제65대제66대
윈스턴 처칠앤서니 이든해럴드 맥밀런알렉 더글러스흄
제67대제68대제69대제70대
해럴드 윌슨에드워드 히스해럴드 윌슨제임스 캘러헌
제71대제72대제73대제74대
마거릿 대처존 메이저토니 블레어고든 브라운
제75대제76대제77대제78대
데이비드 캐머런테레사 메이보리스 존슨리즈 트러스
찰스 3세
제78대제79대
리즈 트러스리시 수낙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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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제2대제3대제4대
존 스미스로버트 할리로버트 벤슨윌리엄 윈덤
제5대제6대제7대제8대
리처드 언슬로로버트 월폴제임스 스탠호프존 애이슬래비
제9대제10대제11대제12대
존 프래트로버트 월폴새뮤얼 샌디스헨리 펠럼
제13대제14대제15대제16대
윌리엄 리헨리 빌슨리그조지 리텔턴헨리 빌슨리그
제17대제18대제19대제20대
윌리엄 머리헨리 빌슨리그윌리엄 배링턴프랜시스 데시우드
제21대제22대제23대제24대
조지 그렌빌윌리엄 도데스웰찰스 타운젠드프레더릭 노스
제25대제26대제27대제28대
존 캐번디시소 윌리엄 피트존 캐번디시소 윌리엄 피트
제29대제30대제31대제32대
헨리 애딩턴소 윌리엄 피트에드워드 로헨리 페티피츠모리스
제33대제34대제35대제36대
스펜서 퍼시벌니콜라스 밴시터트F. J. 로빈슨조지 캐닝
제37대제38대제39대제40대
찰스 애버트존 찰스 해리스헨리 골번존 스펜서
제41대제42대제43대제44대
토머스 덴먼로버트 필토머스 스프링 라이스프랜시스 베링
제45대제46대제47대제48대
헨리 골번찰스 우드벤저민 디즈레일리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제49대제50대제51대제52대
조지 콘월 루이스벤저민 디즈레일리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벤저민 디즈레일리
제53대제54대제55대제56대
조지 워드 헌트로버트 로우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스태퍼드 노스코트
제57대제58대제59대제60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휴 칠더스마이클 힉스 비치윌리엄 하코트
제61대제62대제63대제64대
랜돌프 처칠조지 고셴윌리엄 하코트마이클 힉스 비치
제65대제66대제67대제68대
찰스 리치오스틴 체임벌린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제69대제70대제71대제72대
레지널드 맥케나앤드루 보너 로오스틴 체임벌린로버트 혼
제73대제74대제75대제76대
스탠리 볼드윈네빌 체임벌린필립 스노우덴윈스턴 처칠
제77대제78대제79대제80대
필립 스노우덴네빌 체임벌린존 시먼킹슬리 우드
제81대제82대제83대제84대
존 앤더슨휴 달튼스태퍼드 크립스휴 게이츠컬
제85대제86대제87대제88대
랩 벌터해럴드 맥밀런피터 소니크로프트데릭 히스코트어모리
제89대제90대제91대제92대
셀윈 로이드레지널드 모들링제임스 캘러헌로이 젠킨스
제93대제94대제95대제96대
이언 매클라우드앤서니 바버데니스 힐리제프리 하우
제97대제98대제99대제100대
나이젤 로슨존 메이저노먼 라몬트케네스 클라크
제101대제102대제103대제104대
고든 브라운앨리스터 달링조지 오스번필립 해먼드
제105대제106대제107대제108대
사지드 자비드리시 수낙나딤 자하위쿼지 콰텡
제109대
제러미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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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2대

토머스 칼라일
3대

제임스 몬크리프
남작
4대

윌리엄 스털링맥스웰
준남작
5대

에드워드 스탠리
백작
6대

스펜서 캐번디시
공작
7대

아치볼드 프림로즈
백작
8대

스태퍼드 노스컷
백작
9대

숌버그 커
후작
10대

조지 고셴
자작
11대

제임스 로버트슨
남작
12대

알렉산더 브루스
13대

프레드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후작
14대

로버트 핀리
자작
15대

리처드 홀데인
자작
16대

조지 윈덤
17대

길버트 엘리엇머레이키닌먼드
백작
18대

허버트 키치너
백작
19대

데이비드 비티
백작
20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백작
21대

스탠리 볼드윈
백작
22대

존 길모어
준남작
23대

윈스턴 처칠
24대

이언 해밀턴
25대

에드먼드 알렌비
자작
26대

허버트 그리어슨
27대

존 도널드 폴록
28대

앤드루 커닝엄
자작
29대

앨러스터 심
30대

알렉산더 플레밍
31대

시드니 알프레드 스미스
32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3대

조 그리몬드
남작
34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5대

맬컴 머거리지
36대

케네스 올솝
37대

조너선 위트니 개리옥 윌즈
38대

고든 브라운
39대

마그누스 마그누손
40대

앤서니 로스
41대

데이비드 스틸
남작
42대

아치 맥퍼슨
43대

뮤리얼 그레이
44대

도니 먼로
45대

맬컴 매클라우드
46대

존 커훈
47대

로빈 하퍼
48대

토머스 디엘
준남작
49대

마크 밸러드
50대

이언 맥워터
51대

피터 맥콜
52대

스티브 모리스
53대

앤 헨더슨
54대

데보라 카옘베




영국 제41·43·45·47대 총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Rt Hon. William Ewart Gladstone
FRS FSS
파일:William_Ewart_Gladstone,_1892_(cropped).jpg
출생1809년 12월 29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리버풀
(現 영국 잉글랜드 머지사이드 리버풀)
사망1898년 5월 19일 (향년 88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하워든 성
(현 영국 웨일스 플린트셔 하워든)
재임기간제41대 총리
1868년 12월 3일 ~ 1874년 2월 17일
제43대 총리
1880년 4월 23일 ~ 1885년 6월 9일
제45대 총리
1886년 2월 1일 ~ 1886년 7월 20일
제47대 총리
1892년 8월 15일 ~ 1894년 3월 2일
서명<white,#2d2f34>파일: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서명.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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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부모 존 글래드스턴 준남작
앤 맥켄지 로버트슨
배우자캐서린 글린
자녀윌리엄 헨리 글래드스턴
헬렌 글래드스턴
헨리 글래드스턴 남작
허버트 글래드스턴 자작 등 8명
학력이튼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정당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대영제국의 총리로
2.2.1. 1기: 41대 총리, 5년 77일간
2.2.2. 2기: 43대 총리, 5년 48일간
2.2.3. 3기: 45대 총리, 169일간
2.2.4. 4기: 47대 총리, 1년 199일
2.3. 여생
3. 정치
4. 선거 이력
5. 그 외
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서로의 사랑은 영국 법에 의해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과 기독교 문명의 범주에서 제한받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서로에 대한 사랑은 전 세계에 유효하다는 것을 기억하시오."

델케이스(Dalkeith) 연설에서, 1879년 11월


가장 위대한 평민 (The great Commoner)[1]


인민의 윌리엄 (People's William)[2]


19세기 영국총리. 자유당을 대표하던 정치인 중 한명으로, 지금도 영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총리 중 한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제국주의가 절정이던 시기에 평화주의적 대외관계를 고수하였으며, 아편전쟁 반대, 아일랜드 자치법, 비밀투표 실시와 같은 많은 내정 개혁을 시도하는 등 자유주의19세기 의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글래드스턴 자유주의로 대표된다.

무려 4차례에 걸쳐 영국 총리직을 역임했다. 덧붙여 최고령 영국 총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사임했을때 나이가 무려 84세였다.

글래드스턴이 유대인이라는 루머가 있지만, 글래드스턴은 유대인들이 많이 쓰는 성씨인 스턴(Stern)이 아닌 Gladstone이다.[3] 사실은 오히려 그의 동시대 라이벌로 유명했던 보수당 디즈레일리 총리가 유대인이었다.


2. 생애[편집]



2.1. 초기[편집]


1809년 잉글랜드 머지사이드리버풀에서 부유한 상인이자 하원의원이었던 존 글래드스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튼 칼리지옥스퍼드 대학교라는 엘리트 코스를 거친 뒤 아버지의 권유로 정계에 입문해 1833년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원의원에 당선된다. 정적이었던 디즈레일리가 6번 낙선되고서야 정계진출 성공한 것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초선 의원 시절인 1840년 영국 의회가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을 승인하는 찬반투표가 열리기 직전, 의회 연설을 통해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글래드스턴은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스럽게 만들 전쟁은 없을 거라며 영국인들의 양심을 호소했다.[4] 결국 아편전쟁은 개시되었지만, 그의 연설을 계기로 아무런 이의 없이 진행될 뻔 했던 영국의 전쟁 선포가 의회 표결에서 불과 몇 표차로 간신히 결정될 정도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글래드스턴에게 상당한 정치적 명성을 가져왔고, 이후 그가 실시하는 비(非)제국주의/도덕주의적 외교 정책을 예고하게 되었다.

1841년 재선된 이후 로버트 필 내각의 상무원 총재(President of the Board of Trade)로 입각한다. 자유무역을 지지하는 소위 필 파(Peelites)였던 그는 이 시기 관세 개혁을 통하여 자유 무역을 증진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845년 아일랜드의 종교 문제가 본인의 신념과 어긋나자[5] 장관직에서 사임한다. 하지만 당시 수상이었던 로버트 필이 글래드스턴을 각별히 아꼈던 만큼 채 1년도 지나기 전이었던 같은 해 12월에 식민지 장관으로 재임용된다. 1846년 로버트 필 내각이 곡물법 폐지 문제로 인해 붕괴되었을 때, 자유무역의 옹호론자답게 시종일관 곡물법 폐지를 주장하면서 주요 정치인 중 하나로 부상하기 시작한 그는 1852년 휘그당과 필 파의 연정이었던 애버딘 내각의 재무대신으로 취임한다. 이 시기 각종 관세 인하를 비롯한 획기적인 예산안으로 재정가로의 명성을 얻는다. 그는 자유주의자답게 작은 정부를 지향했고, 정부의 규모를 줄이기 위해서 직접세의 폐지를 주장하였다.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대중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글래드스턴은 직접세의 액수를 낮춰서[6]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세를 내게끔 하여 직접세 폐지 여론에 불을 붙였던 것. 문제는 곧바로 크림 전쟁이 터지면서 산통 다 깨졌어요

이 시기 얻은 명성을 바탕으로 점점 자신의 지위를 키워나간 글래드스턴은 1850년대 후반 이후 자유당 당수로 등극하게 된다. 디즈레일리와 인생매치의 시작

재무대신 시절에는 "정신이 온전한 모든 성인남성에게 투표권이 주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7] 라고 발언한 적이 있는데,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급진적인 주장이라서 총리 파머스턴 경은 격노하여 선동적인 언행이라고 비난했고 심지어는 빅토리아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가 여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고 한다[8]

이후 존 러셀 내각에서 노동자 계급 중 상당수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개혁을 추진하지만 당 내 보수파들의 반발로 인해 실패로 돌아간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적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정부가 글래드스턴의 개혁안보다 오히려 더 급진적인 투표권 확대 정책을 실시하였고[9] 이것이 큰 반발을 불러오는 바람에 1868년 선거에서 승리, 글래드스턴이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죽 쒀서 자유당 줬다

2.2. 대영제국의 총리로[편집]



2.2.1. 1기: 41대 총리, 5년 77일간[편집]


1868년부터 1874년까지 이어진 그의 1차 내각 시기 글래드스턴이 보여준 주요 자유주의적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아일랜드종교의 자유 허용(1869)[10]
  • 아일랜드 내 토지법을 실시하여 아일랜드인의 다수였던 소작농 권리를 보호(1870) [11]
  • 의무교육 실시(1870)
  • 비밀투표 실시(1872)

이 시기는 영국 내 자유주의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민족주의제국주의의 광풍이 유럽을 휩쓸고 있었고,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3대 파머스턴 자작 헨리 존 템플의 주도하에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우고 있었고, 식민지와 제국주의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관심했던 글래드스턴 내각에게 민중은 실망했고 디즈레일리가 이 점을 집요히 공격하면서 민심을 사로잡는다. 결국 1874년 총선에서 디즈레일리의 보수당이 다시 글래드스턴의 자유당을 누르고 2차 디즈레일리 내각이 성립하게 된다.

18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 글래드스턴은 자유당의 당수직에서도 내려오고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1876년 불가리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글래드스턴은 오스만 제국의 잔학행위에 분노하여 영국의 인도주의적 개입을 호소[12]하는 팸플릿을 쓴다.


2.2.2. 2기: 43대 총리, 5년 48일간[편집]


그런데 호소문이 대중 사이에서 대폭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발판으로 글래드스턴은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디즈레일리 내각의 제국주의적 외교의 비도덕성을 비판하면서[13] 1880년 선거에서 승리, 다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 1881년 제2차 아일랜드 토지법을 성립시켰으나 외교적으로는 이집트에서 반영 독립항쟁 및 마흐디 신국 건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의 유약함[14] 등을 비판당하면서 1885년 다시 총리직에서 물러난다.

여담으로 거문도 점령 사건이 이 시기 일어났다.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이어가는 사이 고종이 인아거청[15] 전략을 펼치며 러시아에 부동항을 내주려고 하자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일환으로 선제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 결국 거문도 점령 사건은 글래드스턴의 후임인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총리가 처리해야했다.


2.2.3. 3기: 45대 총리, 169일간[편집]


이후에도 3차, 4차 내각에서 아일랜드 자치 법안을 상정했으나 3차 내각의 첫번째 법안은 하원의 보수당과 자유당 반란표[16]로 부결되었다.


2.2.4. 4기: 47대 총리, 1년 199일[편집]


아일랜드 민족당의 도움으로 구성된 4차 내각의 두번째 법안은 하원에서 통과되었으나 보수당이 지배하는 상원에서 부결되었다.[17] 또한 독일 제국과의 군비 경쟁에도 반대하다가 물러난다.


2.3. 여생[편집]


이후 연구와 강연으로 여생을 보내다 1898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무덤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다. 은퇴한 그에게 백작 작위를 서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는 평민의 신분으로 죽겠다며 이를 거절했고, 그에게는 '가장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이라는 찬사가 붙게 됐다.[18][19]

글래드스턴의 사상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의 총리를 지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등에게 계승된 것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자유주의와 도덕 정치라는 개념 자체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호소력 있는 사상이지만 이것을 영국의 제도권 정치로 본격적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3. 정치[편집]


그는 대표적인 도덕정치(Moralpolitik)[20]의 지지자였다. 경쟁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나 마찰을 국제적 여론과 중재에 의해 해결한다는 것이 글래드스턴 총리의 정치관이었다. 국제적 위기가 있을 때 주로 강경책을 내놓았던 디즈레일리 내각과는 달리, 글래드스턴의 내각은 주로 유화책을 사용했다. 1870년 러시아에게 흑해 재무장을 허용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 1856년 크림 전쟁 종전 이후 흑해는 무장 중립지역으로 남았었는데, 이 '런던 협약'으로 러시아는 이 조항을 파기해 버렸다. 또 하나의 예는 1872년의 '앨라배마 호 보상사건'인데, 미국 남북전쟁에 남부연합 소속의 영국 배가 입힌 손실을 영국이 배상해 내라는 요구를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대영제국의 위상을 생각하면 쿨하게 씹었어도 될 요구였으나, 글래드스턴은 "보상액은 (영국이 얻게 될) 도덕적 가치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한 수준"이라 말했다고 한다.

자유주의와 도덕정치를 중시했던 그의 관점은 많은 영국인들에게 찬사를 받으며 그에게 G.O.M(Grand Old Man)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게 했지만, 말년에는 실각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1881년 이집트에서 일어난 반영항쟁에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한 것도 한몫 했고, 1883년 수단에서 민족주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군대 투입을 지나치게 망설인 것도 결정적이었다. 뒤이은 1885년 이집트 주둔군의 장군이었던 찰스 고든이 자의적으로 군대를 끌고 수단 문제에 개입했다가 포위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글래드스턴은 구원군을 신속히 보내지 못해 고든은 효수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마흐디 운동, 파쇼다 사건 참조. 사건 이후 그의 별명이었던 G.O.M은 안티들에게 '고든 살해자'라는 M.O.G(Murderer of Gordon)로 전위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 상기했듯 인류애 주창, 의무교육, 비밀투표 등 다양한 행적을 남겼다. 기타 다른 사상은 글래드스턴 자유주의 항목도 참조.

4. 선거 이력[편집]


연도선거 종류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득표율)당선 여부비고
18321832년 영국 총선뉴어크

887 (36.8%)당선(1위)초선
18351835년 영국 총선

무투표 당선재선
18371837년 영국 총선3선
1841.61841년 영국 총선633 (38.2%)당선(1위)4선
1841.91841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무투표 당선
18471847년 영국 총선옥스퍼드 대학
필라이트

997 (28.3%)당선(2위)5선
18521852년 영국 총선1,108 (34.3%)6선
18531853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1,022 (53.2%)당선(1위)
18571857년 영국 총선무투표 당선7선
1859.21859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1859.41859년 영국 총선

8선
1859.71859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1,050 (55.0%)당선(1위)
18651865년 영국 총선1,724 (25.1%)낙선(2위)
1865사우스 랭커셔8,786 (17.4%)당선(3위)9선
18681868년 영국 총선사우스 웨스트 랭커셔7,415 (24.9%)낙선(2위)
그리니치6,386 (28.8%)당선(2위)10선
1868.121868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무투표 당선
18741874년 영국 총선5,968 (26.0%)당선(2위)11선
18801880년 영국 총선미들로시안1,579 (53.6%)당선(1위)12선
리즈24,622 (33.5%)
1880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미들로시안무투표 당선
18851885년 영국 총선7,879 (70.8%)당선(1위)13선
18861886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무투표 당선
1886년 영국 총선14선
18921892년 영국 총선5,845 (53.1%)당선(1위)15선
1892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무투표 당선

5. 그 외[편집]


  • 당대 최고의 과학자인 마이클 패러데이가 어느 날 간단한 전기 장치와 함께 글래드스턴을 찾아왔는데, 글래드스턴 총리가 "이걸로 뭘 할 수 있소?"라고 시큰둥하게 묻자, 패러데이가 "훗날 여기세금을 매길 수 있을 겁니다"라면서 설득했다는 카더라성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글래드스턴이 총리가 되기 전에 이미 사망했기에, 아마도 다른 정치인들을 상대로 했던 말로 여겨진다.


  • 축음기가 발명된 시점을 살았던 인물이기 때문에 음성 녹음이 남아 있다.# 에디슨을 언급하는거 보면 에디슨의 축음기로 녹음한 모양. 리버풀 사투리가 약간 묻어나는 억양이 특징이다.

  • 정치 라이벌 관계인 디즈레일리와는 사적으로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디즈레일리가 사망했을 당시에도 빅토리아 여왕의 강권으로 마지못해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평생토록 이렇게 추도사를 읽는 게 힘들었던 자리는 처음이었다."고 불평했다고 전해진다.

  • 미국 원주민 배우 릴리 글래드스턴과는 8촌 관계다. 남이나 다름없지만 성을 공유하는 걸 보아, 릴리 부계 쪽이 글래드스턴 가문인듯.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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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작 작위를 거부하고 평민 신분으로 죽겠다고 하면서 얻게 된 별칭.[2] 체통 있는 노동자들에게 선거권을 주어 참정권을 부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선언하면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얻은 별칭.[3] 이 루머가 황당하게도 꼴에 유대인에 대하여 분석했다는 책자(90년대 후반에 나온 책이었음)에 유대인 유명인이라며 여러 위인들, 인물들과 같이 나온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름만 보고 대충 비슷하면 유대인이라고 싸그리 넣어뒀는데, 같은 이유로 존 굿맨, 찰턴 헤스턴도 유태인이라고 엉터리로 서술하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티븐 소더버그까지 유대인이라고 기재했다.우피 골드버그도 넣지 그랬냐? 태양중심설로 유명한 코페르니쿠스도 유대인으로 올라왔다.[4] 지금 와서 보면 마약으로 전쟁을 일으킨 아편전쟁은 대표적인 영국의 흑역사로 취급되니 글래드스턴의 말이 옳았던 셈.[5] 당시 아일랜드의 가톨릭 세력을 달래기 위해 필 내각에서 각종 국비를 지원하기로 결의했는데 이 시기 글래드스턴은 아직 자유주의로 성향이 바뀌기 전인 보수주의자였고 열렬한 성공회 지지자였다.[6] 150파운드에서 100파운드.[7] "다만 노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된 이후에야 그것이 가능할 것이다" 라고 덧붙이기는 했다.[8] 차티스트 운동을 무엄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던 사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여왕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귀족들과 상류층의 생각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 당시(19세기 중반)는 영국, 미국 정도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전제군주제가 유지되고 있던 시절이었으니 뭐...[9] 상술한 글래드스턴의 발언에 불쾌해했던 빅토리아 여왕은 정작 디즈레일리의 개혁에는 찬성했다. 실제로 여왕은 사적인 관계에서도 글래드스턴을 싫어하고 디즈레일리를 더 총애하기도 했다.[10] 정확히 서술하자면, 아일랜드의 국교성공회로 지정해놓았던 법령을 폐기했다. 이것으로 아일랜드는 마침내 믿지도 않던 국교회에 내던 1/10의 교구세를 내지 않게 되었다.[11] 실제로 아일랜드의 소작농들은 이전까지 세금을 똑같이 바치면서도 영국 본국의 소작농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대우를 받았다. 가장 대표적으로 감자 역병 창궐로 인한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에 영국 정부는 자국의 소작농들에게만 지원을 해주었고 아일랜드 소작농들의 경우에는 지주들에게 지원을 맡겨버렸으며, 이로 인해 아일랜드 소작농들 대다수는 미국으로 망명하거나 굶어 죽었었다.[12] 디즈레일리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디즈레일리는 불가리아의 독립이 러시아의 남방진출을 불러올 것을 뻔히 알고있어서 개입에 소극적이었다.[13] 미들로디언 연설(Midlothian Campaign)이라고도 한다. 이 연설에서 글래드스턴은 제국주의의 배제와 자유주의의 수용을 선언했다.[14] 어떤 영국인 학자는 '네빌 체임벌린보다도 외교를 못했다'라고 까기도 했다. 근데 체임벌린은 히틀러가 희대의 돌아이였다는 핑계거리라도 있잖아.[15] 톈진 조약의 결과로 청일 양군이 철군한 사이 러시아에 접근하는 방식으로 청의 간섭을 거부하려 했다.[16] 자유당 내의 신흥자본가와 구 휘그파가 중심이 되었으며, 제국주의에도 우호적이었던 이 반대세력은 탈당 후 "자유통일당(Liberal Unionist)"을 차리고 보수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점차 보수당에 섞여갔다.[17] 자치권 관련 투표를 하루 앞두고 영국의 한 진보적인 성향의 일간지에서 가결은 평화, 부결은 피바다로 가는 길을 그린 시사만화를 그렸었는데 그대로 들어맞았다. 글래드스턴 총리의 후계자이자 아일랜드 수석장관이었던 였던 캐번디쉬경과 아일랜드 최고위 관료였던 토마스 버크가 더블린의 피닉스 공원에서 칼에 찔려 살해당한 것은 덤. 흠좀무.[18] 다만 전통적인 귀족 가문이 아닐뿐, 아버지가 하원의원을 역임하는 등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집안이긴 했다. 흔히 '평민'이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일반 서민 집안과 거리는 있었던 셈. 물론 신분상 평민은 맞기에, 그의 행보를 기리기 위해 지지자들이 붙여준 별칭 정도라고 보면 될듯.[19] 여담으로 그의 자손들은 귀족 작위를 받게 되는데, 글래드스턴의 3남 헨리가 남작, 4남 허버트가 자작 작위를 받았다. 하지만 모두 자녀가 없어 1대로 끝났다.[20] '현실정치'를 뜻하는 Realpolitik과는 대립하는 성격의 정치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