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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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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상 기록이 확인된 인물
김춘추, 김순정, 김옹, 김주원





首乙夫
생몰연대 미상

1. 소개
2. 생애
3. 대중매체에서
3.1. 드라마 선덕여왕



1. 소개[편집]


신라 상대귀족. 관등은 이찬.


2. 생애[편집]


선임 상대등인 김세종이 588년 12월에 사망하면서 수을부가 상대등에 취임했다. 삼국사기 기록이 부족해서 수을부가 언제 퇴임했는지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에 나오는 죽지의 아버지 술종공(述宗公)[1]과 음운상 유사성이 있어[2] 동일인물로 추정이 가능하므로 최소 진덕여왕 때 까지는 생존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수을부가 김술종의 다른 이름이고 동일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삭주 도독으로 부임해 죽령에서 만난 거사와의 인연으로 아들 이름을 죽지라 지었으며 진덕여왕 시기에는 알천, 임종, 호림, 염장, 김유신과 함께 화백회의에 참석하는 중신이 되었다.

그리고 진평왕 7년(585)에 아찬 수힐부(首肹夫)를 양궁이란 궁궐을 관리하는 사신으로 임명했는데, 이 역시 수을부 이름의 다른 표기로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그 이후에 취임하는 기록에 있는 상대등은 632년에 상대등에 취임한 을제인데, 만약 수을부가 계속 상대등으로 있었다면 무려 44년이나 재임한 셈. 보통 중도에 퇴임하고 후임자가 기록에 남지 않았다고 추정되고 있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3.1. 드라마 선덕여왕[편집]


파일:수을부(선덕여왕).png

배우는 최한호. 화백회의에 참석하는 대등으로서 미실을 옹호하였으나, 미실이 본격적으로 왕위를 노리면서 조정에서 대신을 참살하는 초강수까지 두자, 주진과 함께 덕만공주의 편에 섰다. 이후 사실상 미실의 뒤를 잇게 된 비담을 따랐고 여왕을 흠모하는 비담으로 인해 여왕의 정책을 지지했으나 그로 인해 사병들을 모조리 빼앗기자, 위기감을 느낀 다른 비담의 추종자들과 함께 음모를 꾸며 비담이 여왕을 배신하게끔 했다.

결국 비담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따라 명활성에 주둔했으나 패배해 박의에게 잡혀 끌려나왔다. 다소 허망하다는 표정을 짓는 주진과는 달리 유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게 백미. 아마 반역의 대가로 처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의 모습과 상당히 다르게 묘사되었는데 우선 진평왕 통치 시기에 노리부(세종) 다음으로 상대등이 되었고 고작 9년 역임한 노리부와는 달리 훨씬 긴 기간 동안 상대등을 맡았음에도 작중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묘사되어 있지 않고[3] 법도를 강조하던 수을부가 김용수와는 반대 파벌이었던 점은 있으나 비담을 추대해 반역을 주도했다는 점은 창작의 영역을 넘어선 왜곡에 가까운 묘사이다.

[1] 삼국유사에 성씨가 김씨로 기록되어 있다.[2] '종(宗)'과 '부(夫)'는 중고기 신라 인명에서 일대일 대응이 확인된다.[3] 사서와는 달리 드라마에서 노리부와 세종을 분리해 다른 인물로 묘사하면서 생긴 오류로 보인다. 만약 한 인물이었으면 수을부가 상대등이 될 여지가 있으나, 미실파가 모든 권한을 쥐었다는 설정에 충실하기 위해 세종이 진평왕 시기 내내 해먹은 것으로 나오기 때문. 사실 그 역시 미실을 따르는 인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다음 상대등으로 묘사되도 문제는 없었으나 독고영재 씨가 담당한 세종의 캐릭터가 상당히 줄어들기 때문에 이런 방식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