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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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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原王 諱寶延 安藏王之弟也.
안원왕(安原王)의 이름은 보연(寶延)이며, 안장왕(安藏王)의 아우이다.
1. 개요[편집]
고구려의 제23대 태왕.
2. 생애[편집]
문자명왕의 차남으로 후사가 없었던 형 안장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았다.[8] 《일본서기》에 의하면 형인 안장왕이 시해를 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고구려 내부의 혼란이 가속되어 폭발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안원왕이 형 안장왕을 시해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기록의 부재로 근거는 빈약하다.[9] 체격이 매우 장대하여 키가 7척 5촌[10][11] 이나 되었다고 하며 도량도 넓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쇠퇴기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안원왕의 재위기간에는 큰 사건 없이 조용한 치세가 이어졌다. 오히려 중국에서 북위가 6진의 대란과 이주씨의 난으로 분열하고 화북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는데 고구려는 국경을 맞댄 동위와 화친했다. 한편 535년부터 자연재해가 연달아 일어나는데 535년 5월에 홍수, 10월에 지진, 12월에 우레가 쳤고, 전염병이 돌았다. 536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었으며, 8월에 메뚜기 떼가 농사를 망쳤고, 537년 3월에는 기근까지 이어졌다. 이에 안원왕 본인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위로하고 수습해 해결하기도 했다.
동위와 외교 관계를 맺는 한편 남량과도 교류를 유지하며 남북조 양면 외교 기조를 유지했다. 백제와는 투닥거렸는데, 540년 성왕이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해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12] 여기까지만 보면 기근에 시달렸지만 명군까지는 몰라도 안장왕이 회복시킨 고구려의 전성기를 어느 정도 유지한 제법 나쁘지 않은 군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선 행적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사실은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때 강성하여 광개토대왕 때부터 전성기를 구가해 온 고구려가 안원왕의 재위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13] 나제동맹에게 연달아 박살나며 망신을 제대로 당한 것은 아들 양원왕 때지만 전조는 안원왕 때부터 배경으로 짙게 깔려있었던 것. 무엇보다 후계 계승 문제가 아주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大亂)이 있었다.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백제본기》에는 “12월 갑오(20일)에 고려국의 세군(細群)과 추군(麁群)이 궁문에서 싸웠다.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이 패하였으나 3일 동안 군사를 해산하지 않았다. 세군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무술(戊戌, 24일)에 코마노쿠니(狛國, 박국)[14]
의 누타노스오리코케(鵠香岡上王, 곡향강상왕)[15][16] 가 죽었다(薨).”고 한다.】
《일본서기》 권38 〈긴메이 덴노〉 6년(545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이 해에 고려(高麗)에 대란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백제본기》에서 “고려에서 정월 병오에 쿠노오리쿠쿠(中夫人, 중부인)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었다. 코쿠오리코케(狛王, 박왕)에게는 3명의 오리쿠쿠(夫人, 부인)[17]
가 있었다. 마카리오리쿠쿠(正夫人, 정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쿠노오리쿠쿠가 마카리요모(世子, 세자)를 낳았다. 그쪽의 외척이 추군(麁群)이었다. 시소오리쿠쿠(小夫人, 소부인)[18] 도 아들을 낳았다. 그쪽의 외척은 세군(細群)이었다. 코쿠오리코케가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세군과 추군이 각각 부인이 낳은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세군 측에서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권41 〈긴메이 덴노〉 7년(546년) 고구려에서의 대란(大亂)
안원왕의 제1왕후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결국 두 소왕후를 들였는데 공교롭게도 모두 아들을 1명씩 낳게 되었다. 결국 고구려의 외척인 추군 세력과 세군 세력이 자기네 소생의 왕자를 옹립하려고 대판 싸움을 벌이기에 이르렀고 추군 측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 결과 세군 측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족히 2,000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 등 한반도 측 사서에는 보이지 않으며 《백제본기》를 인용한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왕권이 약화되고 국력이 쇠퇴하는 정황과 일치하기 때문에 다수의 국사학자들은 이 내용을 신뢰하고 있다. 더군다나 《삼국사기》 〈거칠부 열전〉에 의하면 551년 고구려의 혜량법사가 고구려를 정탐하러 온 신라인 거칠부에게
운운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상기한 정치적 혼란과 관련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지금 우리나라는 정사가 어지러워 멸망할 날이 멀지않았으니 귀국으로 데려가 주기를 바라오(我國政亂 滅亡無日 願致之貴域 於是)."
여기까지만 보면 단순한 후계 문제로 인한 전쟁인 것 같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전쟁을 후계 전쟁을 빙자한 뿌리깊은 국내성계 vs 평양성계의 갈등이 터진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장수왕이 추진한 평양성 천도로 인해 전통적인 북방귀족+동부여계열 귀족들로 이루어진 국내파와 낙랑-대방계열 귀족+왕의 친위귀족으로 이루어진 평양파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 당시 자세한 기록은 나오지 않지만 개로왕이 쓴 국서에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장이 나오며 그 외 장수왕-문자명왕 시기 《삼국사기》뿐 아니라 《일본서기》, 중국 사서 등에도 조공 기록을 제외한 별다른 내용이 나오지 않는 공백기가 나타나는데 이를 근거로 거대한 내전이 벌어진 것 아니었냐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19]
거기에 문자명왕 시기에는 할아버지 대와 달리 점점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고구려 내부 귀족들의 불만이 점점 커짐 → 안원왕이 즉위하고 후계자 문제가 거하게 터지자 이것이 트리거가 되어 갈등이 폭발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일본서기》에서 나온 세군을 국내파, 추군을 평양파로 보았을 때 이후 양원왕 대에 승리한 평양파가 정국을 주도하여 왕권이 약해졌다가 평원왕 대에 온달처럼 둘 모두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세력을 끌어들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이후 추군은 평원왕 대에 온달 등 친위세력의 성장으로 세력이 약해졌다가 온달의 죽음, 영양왕 대에 고구려-수 전쟁을 계기로 부활한다.
고구려는 이 때부터 사실 쇠락이 본격화되는데 이전까지는 군주를 도와 내각을 통할하는 국무총리, 즉 국상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양원왕 이후로는 군주를 견제하는 국회의장, 즉 대대로/막리지가 중요해진다. 즉 왕권이 매우 약해졌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승하한 해가 545년 3월로 기록되어 있으나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서는 545년 12월 24일 무술일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 《양서》와 《남사》에서는 548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다른 기록들과 3년의 차이가 난다. 선왕들의 연혁을 이용하여 계산해보면 안원왕도 평균적으로는 장수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편집]
“원하옵건대 왕의 영혼이 도솔천(兜率天)으로 올라가 미륵(彌勒)을 뵙고 천손(天孫)이 함께 만나며, 모든 생명이 경사스러움을 입으소서.”
-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 명문 중에서 출처
- 1988년 6월 함경남도 신포시 오매리의 이른바 절골 유적에서 출토된 명문(銘文·새긴 글씨) 금동판이 외척 세력 간에 발생한 왕위 계승 분쟁 와중에 승하한 안원왕을 위한 추복(追福) 불탑의 탑지(塔誌)가 아니냐는 의견이 있다. 이 불탑을 봉헌한 측은 옛 동옥저(東沃沮) 지역의 유력 가문이었으나 왕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세력일 것이라는게 학계의 추론이다. 특히 명문에는 탑을 건조한 내력과 함께 ‘○和三年 歲次 丙寅 二月二十六日’(○화 3년 세차 병인 2월 26일)이라는 작성 일자가 나와 있다. 여기서 ‘○和’라는 연호는 자획이 떨어져 나가 분명치 않으나 북한 측은 이를 ‘태화(太和)’로 판독하고, 고구려 양원왕(544년 또는 545년∼559년) 때인 546년 2월 26일에 금동판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명문 가운데 ‘천손’이라는 말은 중국의 천자(天子)나 일본의 천황(天皇)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그 이전까지 발해 문왕(文王)이 사용했던 ‘천손’이라는 단어가 이웃나라를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금동판의 발견으로 발해 ‘천손’의 원류가 고구려임이 확인되었다.
4. 《삼국사기》 기록[편집]
《삼국사기》 〈안원왕 본기〉
一年夏五月 안원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三月 북위가 왕을 책봉하다
二年夏四月 양에 조공하다
二年夏六月 북위에 조공하다
二年冬十一月 양에 조공하다
三年春一月 왕자 평성이 태자가 되었다
三年春二月 북위에 조공하다
四年 동위가 왕을 책봉하다
四年 동위에 조공하다
五年春二月 양에 조공하다
五年夏五月 남쪽에 수해가 발생하다
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다
五年冬十二月 큰 전염병이 돌다
六年 큰 가뭄이 들어 백성을 구제하다
六年秋八月 병충해가 발생하다
六年秋八月 동위에 조공하다
七年春三月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다
七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九年夏五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年秋九月 백제의 침입을 물리치다
十年冬十月 겨울에 날씨가 온난하다
十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一年春三月 양에 조공하다
十二年春三月 큰 바람이 불다
十二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十二年冬十二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三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四年冬十一月 동위에 조공하다
十五年春三月 안원왕이 죽다
5. 대중매체에서[편집]
채널A의 <천 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 안원왕이 태자 책봉을 중부인의 아들 혹은 소부인의 아들 중 하나로 정하는데 고민을 하던 중 중부인이 아들 양원왕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소부인과 싸우면서 그게 내전으로 번지는 스토리가 소개되었다.
6. 둘러보기[편집]
[1] 출생년도가 501년이라는 위키 백과발 주장이 존재하나(지금은 위키 백과에서도 출생년도가 미상으로 나온다.), 그의 선대 생년 연혁을 보면 신빙성이 없다. 형인 안장왕이 498년 1월에 태자가 된 것을 보면 동생인 안원왕은 498년 1월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선대 연혁을 계산하면 5세기 후반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2] 증조할아버지 장수왕의 연혁을 보면 아버지 문자명왕도 거의 80세 전후까지 장수한 것으로 추정되고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되는 형인 안장왕 역시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았고 10년 정도 살아 사망 당시에는 70세 전후일 가능성이 크기에, 안원왕 역시 형 안장왕의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을 감안하면 거의 60이 다 되어서 왕위를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크고 그 점을 감안하면 사망 당시는 70세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도 증조할아버지보다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보단 양호하다. 물론 늦둥이면 이 계산도 틀리긴 하지만 승하 당시 최소 60대 정도었을 것이다.[3]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기〉에 따르면 545년 12월 24일 무술일에 사망했다고 하고, 《양서》와 《남사》에서는 548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4] 이전 태왕들의 장지형 시호와 고국원왕의 사례처럼 原과 崗上이 무덤을 뜻하는 동의어일시[5] 호남리 사신총 추정[6] 《일본서기》에 의하면 14년 7개월.[7] 《양서》와 《남사》에서는 526년에 즉위하여 548년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이걸 따르면 22년 간 재위했다.[8] 앞서 전성기를 유지시킨 안장왕이 재위 12년만에 승하했을 당시 선대를 이용하여 보령을 계산해보면 꽤 노년의 나이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웬일인지 후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 측 기록에 고복귀라고 하는 안장왕의 아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참고로 형인 안장왕과는 나이 차가 제법 날 것으로 추정된다.[9] 《삼국사기》에는 형인 안장왕이 안원왕을 아꼈고, 사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물론 그것이 안원왕이 안장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근거로 쓰기에는 부족하다.[10] 고구려척은 35.6cm인데 이 경우 거의 2.7m에 육박하는 거인이 된다. 아마 사람의 키를 잴 때는 고구려척이 아닌 후한시대 쓰인 척을 쓰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한나라의 척인 23cm을 쓸 경우 173cm 정도로 현실적인 수치가 나온다.#[11] 아니면 단순하게 생각하여 당시 삼국사기가 이런저런 사서를 인용했으니 후한시대 척이 쓰인 중국의 기록을 갖다 붙였을 수도 있다.[12] 양원왕 대의 일이지만 백제 성왕은 한강 유역을 되찾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인 공격이 아니라 사전 답사였던 듯하다.[13] 《일본서기》에 따르면 형 안장왕이 시해당했다고 한다. 다만 안장왕이 시해당했다는 기록은 《일본서기》 이외의 당대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무엇보다 안원왕 말엽부터 혼란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무조건 시해당했다고 단정짓기도 어려운 실정이다.[14] 일본에서는 고구려를 '박(狛), '구'(駒)로 표기해놓고 '코마'(こま)라고 훈독했다. 이는 백제에서 부르던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가 백제를 '백잔'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것처럼 삼국은 서로를 오랑캐, 짐승 등 나쁜 의미로 부르곤 했다. 현대 일본에서는 '고려'(高麗)를 '코라이'(こうらい)라고 음독하지만, '코마신사'(高麗神社), '코마씨'(高麗氏)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부문에서는 관습적으로 '코마'라고 훈독하기도 한다.[15] 여기서 '곡향'은 곡림향화(鵠林香火)라는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용어라고 한다. 곡림은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었던 사라쌍수가 있는 쿠시나가르의 숲을 가리키며,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던 날 숲의 나무들이 부처의 열반을 슬퍼하여 그만 하얗게 말라버렸고, 그 모습이 마치 고니떼와 같았다는 데서 고니 곡 자를 써서 '곡림'이라고 부른 것이다.[16] 이를 근거로 추군은 국내성에 정치적 기반을 두고 있었던 귀족 불교 세력, 세군은 평양성을 중심으로 한 신진 불교 세력이었다고 보는 의견이 있다. 6세기 이후 국왕 중심적인 불교가 쇠퇴하면서, 추군과 세군으로 나누어진 귀족 불교 세력 사이의 갈등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 상황이 닥치게 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17] 백제에서 왕후를 가리키던 말인 '어륙'(於陸)과 동일 계통의 단어임이 분명하다.[18] '시무(シム)'로 적혀있기도 하다. 여기에 근거해 '시소'(シソ)를 '신'(シン)의 오기로 보기도 한다. '시소'를 '신'의 오기로 보는 이유는 《일본서기》에 '간'(干)이 '칸'(カン)이 아닌 '카무'(カ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고, 세군(細群)의 군(群)이 '군'(グン)이 아닌 '쿠무'(クム)로 적혀있는 경우가 있기에 '시무'(シム)에 대응되는 것은 '시소'(シソ)가 아니라 '신'(シン)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의 발음(撥音)으로 '시무'의 원형은 '신'으로 보인다.[19] 대표적으로 임용한 교수가 이 내용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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