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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웰과 프레스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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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well and Pressburger
1. 개요
2. 역사
3. 마이클 파웰
4. 에머릭 프레스버거


1. 개요[편집]


주로 193-50년대에 활동했으며,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로맨티시즘과 표현주의 양식으로 영국 영화를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오페라연극에 영향을 받은 세트 촬영과 호사스러운 테크닉컬러, 영국식 유머와 극문화 전통, 환상성, 전원적 풍경, 휴머니즘적 통찰이 특징으로 이후 영화 감독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대표작으로는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 삶과 죽음의 문제[1], 분홍신, 검은 수선화가 있다.

다만 활동 당시엔 은근히 무시당하던 콤비였다. 당시 영국 영화의 주류 스타일하고 거리가 멀었던데다 반응들도 썩 신통치 않았다. 또한 히치콕과 달리 전성기에도 철저하게 독립 제작 체계로 영국 영화계에 머물고 있었기에 인지도도 낮은 편이다. 한국 영화광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없는 편이다. 국내에서는 박찬욱이 이들의 팬으로 알려져 있다.


2. 역사[편집]


1939년 원래 단독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던 마이클 파웰이 The Spy in Black 작업 당시 각본가 에머릭 프레스버거를 만나면서 협업 체제를 시행하게 된다. 첫 두 영화를 찍고 난 뒤 그들은 독립 스튜디오 더 아처스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협업에 들어가게 된다.

이들의 협업은 1950년대 중후반까지 이어졌으며, 원만하게 해산한 이후에도 간헐적으로 협업을 하기도 했다.


3. 마이클 파웰[편집]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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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1971년1972년
오슨 웰스잉마르 베리만마르셀 카르네존 포드찰리 채플린
1972년1982년
아나톨리 골로브냐빌리 와일더알레산드로 블라세티루이스 부뉴엘프랭크 카프라
1982년
조지 큐커장뤽 고다르세르게이 유트케비치알렉산더 클루게구로사와 아키라
1982년1983년
마이클 파웰사티야지트 레이킹 비더세자르 자바티니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1985년1986년1987년
마노엘 드 올리베이라존 휴스턴페데리코 펠리니타비아니 형제루이지 코멘치니
1988년1989년1990년1991년
요리스 이벤스로베르 브레송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얀초 미클로시마리오 모니첼리
1991년1992년1993년
지안 마리아 볼론테잔느 모로프랜시스 포드 코폴라파올로 빌라조스티븐 스필버그
1993년1994년
로버트 드 니로로만 폴란스키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알 파치노수소 체키 다미코
1994년1995년
켄 로치우디 앨런모니카 비티마틴 스코세이지알베르토 소르디
1995년1996년
엔니오 모리코네주세페 드 산티스조프레도 롬바르도알랭 레네로버트 올트먼
1996년1997년
비토리오 가스만더스틴 호프먼미셸 모르강제라르 드파르디유스탠리 큐브릭
1997년1998년1999년
알리다 발리워렌 비티소피아 로렌안제이 바이다제리 루이스
2000년2001년2002년2003년
클린트 이스트우드에릭 로메르디노 리시디노 드 로렌티스오마 샤리프
2004년2005년2006년
스탠리 도넌마노엘 드 올리베이라미야자키 하야오스테파니아 산드렐리데이비드 린치
2007년2008년2009년
팀 버튼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르만노 올미존 라세터브래드 버드
2009년2010년2011년
피트 닥터앤드루 스탠튼리 언크리치오우삼마르코 벨로키오
2012년2013년2014년2015년
프란체스코 로시윌리엄 프리드킨델마 스쿤메이커프레더릭 와이즈먼베르트랑 타베르니에
2016년2017년2018년
장폴 벨몽도예지 스콜리모프스키제인 폰다로버트 레드포드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8년2019년2020년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줄리 앤드류스페드로 알모도바르허안화틸다 스윈튼
2021년2022년2023년
로베르토 베니니제이미 리 커티스카트린 드뇌브폴 슈레이더양조위
2023년
릴리아나 카바니




Michael Powell (1905–1990)

원래 은행원이였다가 1925년 연출부로 경력을 시작, 히치콕의 <샴페인>(1928) 촬영 현장에서 스틸 촬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다양한 현장에서 촬영, 편집,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쌓은 파웰은 1932년에 첫 장편 <내 친구는 왕이야 My Friend the King>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다. 협업 체제를 하기 전에도 감독으로써 경력이 있었던 사람이다.

협업 체제가 종료된 이후로도 감독 생활을 했는데, 피핑 탐으로 주류 평단의 분노를 일으켜 매장되고 말았다. 다행히도 세월이 지나서 피핑 탐은 영화사의 걸작으로 복권된 상태이다.

말년의 마틴 스코세이지의 편집자로 유명한 델마 스쿤메이커와 결혼했다.


4. 에머릭 프레스버거[편집]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원안상
제14회
(1942년)
제15회
(1943년)
제16회
(1944년)
해리 시갈
(천국의 사도 조단)
에머릭 프레스버거
(북위 49도선)
윌리엄 서로이언
(더 휴먼 코미디)

Emeric Pressburger (1902-1988)

헝가리 유대인으로 미슈콜츠 출신이다. 독일과 체코에서 언론학을 공부했다. 원래 독일 영화계에서 일하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탄압을 피해 프랑스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왔다. [2] 거기서도 각본가로 일하다가 파웰과 의기투합해 지금과 같은 협업 체계를 이루게 된다.

협엽 체계가 종료된 이후로는 각본가에 중점을 두며 활동했다. 말기 파웰 영화 각본으로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

아스날 FC 서포터였다고 한다.

손자는 터칭 더 보이드, 휘트니(영화),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를 감독한 영화감독 케빈 맥도널드다. 맥도널드가 밝히길 자기 아내가 자신에게 반한게 맥도널드 외할아버지가 콤비의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안다' 각본을 썼다는 걸 알고나서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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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다.[2] 귀화는 1946년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