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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아 로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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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이탈리아의 배우.
2. 위상[편집]
할리우드와 이탈리아 영화계에서 연기력, 관능미를 모두 겸비했다고 평가받은 여배우이다.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21위[1] 에 선정되었다. 최초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비영어권 수상자[2] 다.
이탈리아 영화 전성기에 안나 마냐니, 지나 롤로브리지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모니카 비티와 더불어 세계의 주목을 받은 여성 배우 중 하나로, 이들 중 가장 큰 국제 인지도와 명성을 얻었다.
3. 외모 특징[편집]
어렸을 때는 지독한 가난과 6살 때 터진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너무 굶는 바람에 "비쩍 마르고 못생겼었다"고 자평할 정도였지만, "15살이 되면서 몸이 자라 굴곡이 생기자 길거리 남자들이 휘파람을 불어대기 시작했다." "얼굴은 뭉툭하고, 입은 너무 크고, 코가 너무 길어서" "카메라에 담을 수가 없다"고 불평을 듣던 독특한 외모와 아우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미인상으로 자리잡아 아직까지도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돌체 앤 가바나 같은 패션 브랜드에서 차용하기도 한다. 또한 그녀처럼 우아하게 늙고 싶다며[3] 본으로 삼는 후배 여배우들도 종종 있다.
노란색, 초록색, 갈색이 섞인 다채롭고 보석같은 눈색 덕에 호랑이의 눈이라는 뜻인 "eyes of tiger"라는 별명이 있다. 80세 때 인터뷰를 진행했던 한 기자는 "벌집 위에 초콜렛을 녹여 부은 것 같다"고 묘사했다.
4. 생애[편집]
4.1. 출생 비화[편집]
로렌은 MGM이 주최한 그레타 가르보 닮은꼴 대회에서 우승했던 배우지망생[4] 이 낳은 사생아였다. 자신을 영화관계자라고 속여 로렌의 어머니를 꼬드긴 귀족 출신의 부유한 친부 리카르도 시콜로네는[5] 로렌의 어머니가 로렌을 임신한 걸 알자마자 버려버렸다.[6] 그럼에도 어머니는 친부를 평생 사랑했고, 1938년엔 다시 로렌의 친부와의 사이에서 여동생까지 낳았다. 로렌은 이런 어머니를 매우 미련하게 여기면서도 안타까워했고, 아버지의 부재를 뼈 아파하는 한편 무책임한 아버지를 경멸했다.
어머니는 너무 굶어서 아기 로렌에게 먹일 젖마저 마르자 친정에 몸을 의탁했고, 로렌은 나폴리 인근 포츠올리라는 가난한 항구도시에 있던 외조부모 집에서 자랐다. 외조부모는 로렌에게 젖 먹이는 유모에게 돈을 지불하기 위해 고기를 일체 끊었다. 인심이랄 게 전혀 존재하지 않는 동네라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었다. 미군들에게 음식을 구걸해야 했고, 10대엔 너무 말라서 별명이 '이쑤시개 소피아'(Sofia Stuzzicadenti)였다.
1949년 엄마가 내보낸 미인대회인 'La Regina del Mare'(바다의 여왕) 대회에 나갈 때도 입을 예복이 없어 외할머니가 집에 걸려있던 분홍색 호박단 커튼을 뜯어서 드레스를 만들어주었다. 엄마는 로렌의 유일한 구두에 흰색을 칠해줬다. 부디 그날 비가 내려 물감이 씻겨내려가지 않기만을 하느님에게 빌며. 우승엔 실패했지만 12명의 공주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상품 중엔 로렌의 꿈을 이뤄줄 도시인 로마행 기차표가 포함돼있었다. 그렇게 로렌은 어머니와 로마에 왔다.
로렌은 영화 엑스트라로 일하다가 1950년에 미스 이탈리아에서 Miss Eleganza[7] 로 뽑혀 그림 대신 사진으로 만들어지는 여성독자 대상 만화책[8] 의 사진모델로 뛰었다.
이 와중에 막장 친부는 사생아인 로렌을 로마에서 쫓아내기 위해 "로렌과 어머니가 윤락업소를 운영하고 있다"고 거짓 신고를 해댔다. 로마 경찰의 조사에서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닌 걸로 드러났다.[9] 평소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천시하던 친부는 하필 자기 핏줄인 로렌이 연예인이 된 걸 매우 수치스러워했다.
친부 리카르도 시콜로네는 사생아인 로렌에게 시콜로네 성(姓)을 내준 것을 후회했던 모양으로, 로렌과 마찬가지로 사생아였던 여동생에게까지 자기 성을 주는 것만큼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래서 로렌은 처음 번 영화 출연료로 회유해 친아버지의 성을 '사서' 여동생에게 줘야만 했다. 물론 돈이 궁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돈이 필요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고, 사생아에게 자기 성을 그냥은 주기 싫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로렌은 이 막장 친부를 평생 딱 3번 만났다.[10]
마리안나 피아 빌라니 시콜로네(Marianna Pia Villani Scicolone), 보통 마리아 시콜로네(Maria Scicolone)라고 불리는 이 여동생도 연예계 활동을 했는데 1962년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의 막내 아들인 로마노 무솔리니[11] 와 결혼해 두 딸을 낳고 살다가 로마노 무솔리니의 잦은 외도 때문에 1976년 이혼했다.
즉 로렌은 무솔리니 가문과 한때 사돈이었고, 여동생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베니토 무솔리니의 손녀인 이탈리아의 극우 정치인 알레산드라 무솔리니에겐 이모가 된다.
공교롭게도 로렌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해바라기>(1970)와 <특별한 날>(1977)에 주인공으로 출연한 바 있다.
4.2. 사생활[편집]
1950년 친구들과 콜로세움 근처 식당에서 춤을 추고 있을 때, 이미 거물이었던 영화제작자 카를로 폰티가 다가왔다. 로렌은 자신에게서 큰 가능성을 발견해준 이 "작고" "통통한" 남자와 지금껏 살아온 얘기를 나누다가, 자신의 내면을 직관적으로 파악해주는 점에 마음을 빼앗겼다. 로렌이 16살, 카를로 폰티가 38살이었으므로, 둘의 나이 차이는 22살이었다.
그런데 로렌은 2015년에 발간한 자서전 "Yesterday, Today, Tomorrow: My Life"[12][13] 을 통해 폰티와 사귀고 있을 당시 케리 그랜트와 불륜 관계였음을 밝혔다. 1957년 최초의 미국 영화인 <자랑과 정열>을 스페인에서 찍을 때 벌어진 일이다. 폰티가 로렌을 위해 따낸 역할이었다.
그랜트는 감독 스탠리 크레이머에게 로렌을 "그 가슴덩어리 여자"라고 표현할 정도로 싫어해서 같이 작업하게 됐다는 걸 알았을 때 화를 냈지만, 정작 첫 만남에서 반해버렸다. 세 번째 아내와 결혼생활 중이었던 그랜트는 로렌보다 30살 연상[14] 이었고, 로렌은 폰티와의 결혼이 코앞이었다. 연상들에게 끌린 이유를 로렌은 "아버지상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15] 그러나 연상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었고 "제대로 된" 남자여야 했고, 그랜트와 폰티만이 그 기준에 부합했다. 그랜트는 "로렌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돼있었다. 그랜트는 1958년 당시 아내의 착상에서 만들어진 영화 <달빛 아래서>를 찍을 때 아내가 맡기로 했던 역할도 로렌에게 줘버렸다.[16] 로렌은 이 작품을 통해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된다. 감독 멜빌 쉐이벌선은 나중에 "두 사람 사이에 튀던 성적 긴장감 때문에 촬영이 매우 어려웠다"고 술회했다.
그렇게 "두 남자"와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던 로렌은, 고민 끝에 폰티를 택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폰티는 "같은 이탈리아 출신이라 자신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쐐기를 박는 일이 터진다. "로렌의 변호사들이 멕시코에서 폰티와 로렌을 대리결혼시켰다"는 기사가 뜬 것이다.
로렌은 "변호사들이 일방적으로 폰티와 내가 없는 자리에서 저질렀고, 나와 폰티 둘 모두에게 금시초문인 당혹스러운 일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멕시코에서 예식을 치른 건 사실 맞지만 증인이 없었으니 법적인 예식으로 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의 라이프지 등 공신력 있는 언론매체들의 기사들은 또 아예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로렌과 폰티가 로마에서 변호사들에게 직접 대리 결혼 공증을 부탁하며 서류에 사인을 해줬고, 그래서 변호사들은 이후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인데, 해당 서류가 멕시코 후아레스의 서류보관함에서 감쪽같이 없어져, 이 모든 게 어떻게든 결혼이 하고 싶었던 폰티와 로렌 커플이 작정하고 저지른 짓이라는 증거가 사라진 거라고.
어쨌든 그랜트도 어안이 벙벙했지만, 곧 "신사답게" 로렌의 "행복을 빌며" 물러나주었다고 한다.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 특성상[17] 폰티가 법적으로 이혼하진 못한 상태였다. 즉 중혼이 된 것.
언론과 정부는 매일 뭇매를 때렸고, 폰티와 로렌은 미국, 프랑스, 스위스로 망명을 다녔다. 같은 외국인인 잉그리드 버그먼의 예로 알 수 있듯이 당시 미국은 불륜을 저지른 모든 스타들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특정인물에게만 이중잣대를 적용해 매장 시키려 들었고[18] 특히 외국인에게 매정했는데, 로렌의 경우엔 이탈리아에서 하도 심하게 매도해서 미국에선 오히려 감싸주는 여론도 있었다. 이때 폰티와 관계가 소원해져있던 변호사 아내가 이혼이 허용돼있는 프랑스의 시민권을 같이 따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1962년 폰티는 멕시코에서 가졌던 결혼을 무효화했고, 1964년엔 아내와 프랑스 파리로 갔고, 1965년 아내와 공식 이혼을 한 뒤, 1966년 4월 9일 로렌과 재혼했다.
로렌은 대체로 남편에게 충실했으나, 잠시 그레고리 펙과는 관계가 있었음을 자서전에서 암시했다.[19] 반면 폰티는 무수한 여성들과 평생 바람을 피워 이탈리아 언론에 매일같이 오르내렸다. 이혼 위기도 자주 닥쳤다. 이처럼 로렌의 어머니, 로렌, 로렌의 여동생이 전부 자신이 가장 사랑한 남자에게 끝없이 배신 당하며 고통 받았기 때문에 이를 씁쓸한 인생유전으로 보기도 한다.
그래도 로렌은 폰티가 2007년 폐합병증으로 사망할 때까지 결혼생활을 지속했고 현재까지도 혼자 살고 있다. 인터뷰 중에 "재혼할 생각이 있냐"는 질문에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남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기도 했다. 로렌은 폰티가 자신을 "업계에서 보호하려고 매우 노력했다"며 이 점에 감사를 표했다. 로렌이 활동한 시대에 연예계를 쥐고 흔들던 마피아들을 떠올려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폰티가 오히려 불법도 서슴치 않던 부도덕한 인물이었기에 로렌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
로렌은 그랜트는 "매우 잘생기고 훌륭한 배우"였지만 "너무 거물이었고 삶에서 너무 큰 변화를 원친 않았기 때문에" 폰티를 택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미련이 남은 그랜트는 <두 여인>(1960)의 촬영장에 왔고, 나중엔 로렌이 뉴욕에서 영화를 찍을 때 집에 찾아오기까지도 했는데, 그때 로렌은 이미 폰티와 아들을 하나 얻은 상태였다.
로렌은 "그랜트가 청혼한 적이 있다"며 자세히 묘사했는데, 나중엔 "청혼한 적은 없다"고 말을 바꿨다. 어쨌거나 두 사람이 관계가 있었다는 건 당시 둘을 지켜본 제작진들도 확인해주는 바다. 영화 <자랑과 정열>의 작가 얼 펠튼의 할리우드 생활을 극화한 BBC Radio 4의 라디오극 "The Gun Goes to Hollywood"에서도 그랜트와 로렌의 관계가 어느 정도 다뤄지고 있다.
그랜트가 죽기 며칠 전에 전화를 걸어왔다고 한다. 당시 로렌은 여상하게 넘겼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여러 번 유산의 고통을 거친 끝에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에스트로겐 문제였다는 걸 뒤늦게 발견하고 관련 약을 먹자마자 바로 임신이 됐다고. 큰아들 카를로 폰티 주니어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고, 작은아들 에도아르도 폰티는 감독 겸 작가다. 드라마 "리졸리 앤 아일스"의 주연이며 "NCIS"에 나온 배우 사샤 알렉산더가 둘째 며느리다. 아들들을 통해 4명의 손주들을 봤다.
4.3. 탈세 사건[편집]
1977년 폰티는 불법 통화 거래 등 다양한 범죄를 저지른 게 발각돼, 이탈리아 내 재산이 압류되고 추방 당했다. 그런데 1980년엔 로렌이 1960년대에 탈세를 저지른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건 두 사람이 탈세로 얻은 부당 수익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지점이었다. 로렌 부부는 6-70년대에 사치스런 생활로 이탈리아 내에서 악명이 높았다.
로렌은 해외로 몸을 피했지만, "비행공포증이 있어 자신을 만나러 올 수 없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1982년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20] 카세르타 시의 여성교도소 앞은 로렌을 응원하는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고, 로렌이 수감된 동안 로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로렌이 갇힌 감방 창문 밑에서 다들 타란텔라 춤[21] 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팬들의 노력 덕에 로렌은 17일 만에 가택연금으로 풀려났다.
몇 번 속죄하는 심경을 털어놨던 로렌은 현재 사망한[22] 세금전문가의 단순 관리실수였을 뿐이었다고 입장을 바꿔 이를 수십 년 간 고수했는데, 이탈리아 법정도 똑같이 수십 년 동안 같은 입장을 고수해 로렌의 주장이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2013년 판결에서 1982년에 이미 조세사면을 받은 것으로 보고 로렌이 나라에 빚진 세금이 더는 없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그래도 로렌의 주장이 드디어 최초로 참작되어 나온 결론이며 유죄와 무죄의 차이는 크기 때문에 로렌 쪽의 승리로 여겨지고 있다.
5. 주요 출연 작품[편집]
전성기에 거장 비토리오 데 시카의 페르소나로 활동하며 수많은 대표작들을 만들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두 여인>도 데 시카 감독 작품이다.
- 쿠오 바디스(Quo Vadis)), 1951
여주인공인 리기아의 노예 중 1인인 단역이었다.
- 클레오파트라와 이틀밤(Due notti con Cleopatra), 1953 - 클레오파트라/니스카 역
희극. 클레오파트라판 왕자와 거지로, 클레오파트라가 군인들을 하룻밤 상대로 삼고 다음날 아침 죽이는 일을 반복하는 가운데 클레오파트라가 부재할 때마다 대역을 하는 소녀 니스카가 남자주인공인 한 군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이다. 두 여성은 쌍둥이처럼 닮았으나 클레오파트라는 흑발, 니스카는 금발로 머리색엔 차이가 있다는 설정이다. 니스카와 하룻밤을 보낸 남자주인공은 클레오파트라의 강압에 의해 클레오파트라와도 하룻밤을 보낼 - 그리고 살해 당할 - 위기에 처한다. 영화 평은 좋지 않다. 로렌의 연기는 호평을 받았다.
- 나폴리의 황금(L'Oro Di Napoli), 1954 - 소피아 역
비토리오 데 시카 연출. 실비아 망가노 출연.
- 소렌토의 염문(Pane, amore e...), 1955 - 소피아 코코짜 역
디노 리지 연출. 비토리오 데 시카 출연.
- 자랑과 정열(The Pride and the Passion), 1957 - 후아나 역
- 해녀(Boy on a Dolphin), 1957 - 페이드라 역
20세기 폭스 제작.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1953)을 연출한 쟌 네귤레스코가 감독했다. 로렌이 출연한 첫 영어 영화로 그리스의 이드라(Ύδρα)섬의 해면을 채취하는 해녀 역이다. 그리스에서 촬영된 최초의 할리우드 영화다. 작중 부른 <사랑이 뭐길래(Tι΄ναι αυτό που το λένε αγάπη)>가 매우 유명하다. 페이드라는 알바니아 이민자 출신의 남자친구가 있지만, 우연히 에게해에서 이 영화의 원제인 "돌고래를 타고 있는 소년"을 묘사한 2000년 전 고대 그리스 석상을 발견한 뒤 이 석상에 관심을 보이는 고고학자(앨런 래드 분)를 좋아하게 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 잃어버린 전설(Timbuctù; Legend of the Lost), 1957 - 디타 역
이탈리아-미국 합작. 활극. 헨리 해서웨이 제작/연출. 벡 헥트 대본. 존 웨인 출연.
- 열쇠(The Key), 1958 - 스텔러(스텔라) 역
영국-미국 합작. 캐럴 리드 연출. 윌리엄 홀든, 트레버 하워드 출연.
1941년 대서양 전투 와중의 영국. 예인선 선장들은 전 주인의 요절과 함께 연립 주택의 열쇠("the key")를 물려받으면서 전임자들의 애인인 스위스 출신 스텔라도 차례차례 물려받는다.
1941년 대서양 전투 와중의 영국. 예인선 선장들은 전 주인의 요절과 함께 연립 주택의 열쇠("the key")를 물려받으면서 전임자들의 애인인 스위스 출신 스텔라도 차례차례 물려받는다.
- 달빛 아래서(Houseboat), 1958 - 신찌아 자까르디 역
케리 그랜트 출연.
- 검은 난초(The Black Orchid), 1958 - 로세 비안코 역
앤서니 퀸 출연.
-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Desire Under the Elms), 1958 - 애너 캐벗 역
델버트 만 연출. 유진 오닐의 동명 희곡(1924)이 원작이며, 오닐이 직접 대본도 썼다. 혹평 받았으나 1958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출품됐다.
뉴 잉글랜드 농장. 죽은 두 아내들과 친자식들을 노예처럼 부려온 이프럼 캐벗(Ephraim Cabot, 벌 아이브즈 분)이 세 번째 아내인 25살 짜리 이탈리아인 애너(안나)를 집으로 데려온다. 농장은 둘째 아내의 것으로, 정당한 상속 권리는 원래 막내아들 이번(Eben, 앤서니 퍼킨스 분)에게 있으나 이프럼은 아들들한테 농장을 주느니 차라리 불태워 없애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애너는 이번과 가정 내 근친 불륜을 시작해 이번의 아기까지 갖는다. 아기를 자기 자식이라 믿은 이프럼은 농장을 아기에게 물려주려 한다. 이를 알게 된 이번은 자신의 자식이긴 하지만 동생이기도 한 아기에게 농장을 뺏기게 됐다고 여기고, 애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는데...[23]
뉴 잉글랜드 농장. 죽은 두 아내들과 친자식들을 노예처럼 부려온 이프럼 캐벗(Ephraim Cabot, 벌 아이브즈 분)이 세 번째 아내인 25살 짜리 이탈리아인 애너(안나)를 집으로 데려온다. 농장은 둘째 아내의 것으로, 정당한 상속 권리는 원래 막내아들 이번(Eben, 앤서니 퍼킨스 분)에게 있으나 이프럼은 아들들한테 농장을 주느니 차라리 불태워 없애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애너는 이번과 가정 내 근친 불륜을 시작해 이번의 아기까지 갖는다. 아기를 자기 자식이라 믿은 이프럼은 농장을 아기에게 물려주려 한다. 이를 알게 된 이번은 자신의 자식이긴 하지만 동생이기도 한 아기에게 농장을 뺏기게 됐다고 여기고, 애너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는데...[23]
- 그것은 나폴리에서 시작되었다(It Started in Naples), 1960 - 루시아 역
- 두 여인(La ciociara; Und dennoch leben sie), 1960 - 체시라 역
이탈리아-독일 합작. 몬테카시노 전투를 소재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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