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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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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이자 관료, 정치인. 정미칠적 중 한 명인 이재곤의 5남으로 아버지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인데 아들은 독립운동가이다. 이순용의 바로 윗형 이관용도 독립운동을 했다. [4]
이순용의 집안은 조선 14대 왕 선조의 9남 경창군의 종가이다. 왕실 직계와는 300년 전에 갈라져 사실상 남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이순용의 큰아버지이자 이재곤의 형 완순군 이재완이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가 되면서 완순군의 생가인 그의 집안 역시 가까운 왕실의 일원으로 대접받았다.
2. 생애[편집]
한성부 재동[5] 에서 태어났다. 1913년에 휘문의숙을, 1918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했고 동일은행과 연희전문학교 강사로 일했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쫓겨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2년 4월에 월남 이상재의 추천장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이승만의 집에 머물며 그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이후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미국 시민권을 얻고 UCLA에서 수학했다. 1942년 미국 정보조정국 COI[6] 에서 중국을 통해 일본에 침투하려는 특수첩보작전에 투입할 대원을 모집하자 이승만의 추천으로 미국 육군 하사로 입대했다.# 이후 매릴랜드에 있는 샹그리라[7] 에서 정운수, 장기현, 이문상, 현승엽, 조종익 등 11명과 함께 비밀 군사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6월에 작전이 중단되었고, 한 달 뒤 COI가 OSS[8] 로 바뀌었다. 이순용은 OSS 요원 자격으로 인도로 가서 활동했다.
1944년 5월에 중국 쿤밍에 있는 미국 전략첩보대 본부로 전출갔다. 이후 미 공군 정운수 소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연락장교 김우전 대위 등과 함께 OSS 본부 한국분야 담당부서에 들어가 한글 암호표를 만들기 위한 무전훈련반 교재 제작에 참여하는 등# 한국 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작전 개시 전에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작전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1945년 8.15 광복 후 그해 10월에 귀국하여 미국 육군 중사 신분으로 CIC(미군 방첩대)에서 국무부 촉탁으로 일하며 백의사와 CIC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기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미군정이 해체되면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9년 12월 말에 타이프라이터를 만드는 회사 레밍턴 대표로 귀국하여 체신부 국제통신전화국 촉탁으로 일했다. 1951년 5월 7일에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받았으나 미국 국적 문제 때문에 국회에서 논란이 일었다. 임용 직후 바로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지만 6개월 후 국회에서 내무부 장관 불신임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이듬해 1월 12일에 내무부 장관 직에서 물러났다. 경질 3일 뒤 체신부 장관으로 임명받아 2달 간 재임했다.#
1952년 5월에는 대한해운공사 사장 직을 맡았고, 다음해 5월에는 대통령 직속 외자구매처 처장 직과 임시외자관리청장 직을 동시에 역임했다. 1955년 2월에 두 기관이 외자청으로 합쳐지면서 초대 외자청장으로 부임해 이듬해 1월까지 재임했다.#
1957년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 개인위원과 국민종합경기장 건설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 이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8년 10월 9일에 서울특별시 강동구 길동 성심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묘는 경기도 김포군 하성면 가금리에 있다.부고 기사[9]
3. 여담[편집]
- 외자구매처 처장 시절인 1953년 11월에 서울 컨트리 클럽을 만들고 골프장을 지었다. 이는 한국인이 처음 지은 최초의 한국 골프장이었다. 서울 컨트리 클럽 창설의 공로를 인정받아 골프계에서는 1984년 10월부터 ‘이순용 배 골프대회’를 만들어 매년 대회를 열고 있다.
- 8.15 광복 이후 이승만과 대한제국 황실 간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위에 썼듯, 이순용은 이승만의 측근이었고, 이순용의 실제 큰아버지 완순군 이재완이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양자였기 때문.
- 1954년 11월에 이정재가 이기붕을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방해가 되는 인물들, 이를테면 야당 인사들 및 기타 조직의 방해자들 40여 명을 이른바 ‘제3세력’이란 이름으로 묶어 동시 다발적 암살 기도를 획책한 것이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밝혀졌다.[10] 이 때 이순용도 암살 대상자 명단에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던 것.
- 1961년에 이승만이 새 양자를 구할 때 많은 도움을 주었다.[11] 이승만의 부탁으로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문중에 양자를 천거해달라는 말을 전해주었고, 이승만 부부가 원하는 조건[12] 에 부합한, 당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이인수를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이순용의 설득 끝에 이인수는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했다.
- 송좌빈의 처숙부이다.
4. 가족과 후손[편집]
슬하에 아들 둘 이해성(李海誠)과 이해정(李海正)을 두었다. 이후 손자에 증손자로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서 이재곤의 아들들 중 후손이 가장 번성하다.
5. 둘러보기[편집]
[1] 91세 생일을 두 달 앞두고 사망했다.[2] 경창군파 11대손 ○용(○鎔) 항렬.[3] 외자구매처장과 겸직.[4] 저런 경우는 생각보다 종종 일어난다. 각 나라의 매국노는 자식들에게 최고급 교육을 해주길 마련이다.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사회 현실에 눈을 뜬 사람은 식민지 본국과 본래 민족에게도 속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고민하면서 마침내는 자국의 독립운동에 뛰어들 게 되는 것. 이외에도 이순용의 손자 뻘 친척 이철주(이순용의 혈연 상 큰아버지 완순군 이재완의 증손자), 박제순의 손자 박승유, 민규현의 아들 민태곤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에리트레아의 독립을 주도한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의 아버지는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완전한 합병을 추진하는 정당 소속이었던, 한마디로 한국으로 치면 일진회 회원이랑 다를 바 없던 인물이었다. 매국노 가족 출신은 아니긴 하나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이나 카메룬의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처럼 식민지배국을 위해 부역했던 사람들이 후에 독립운동가로 전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대부분 매국노 자식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부모처럼 반민족행위를 하는 경우가 많다.[5]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6] Coordinator of Information.[7] 현재 캠프 데이비드, 미국 대통령 별장이 있는 곳이다.[8] Office of Strategic Service.[9] 기사 원문에는 별세 당시 나이를 세는나이 92세로 적었다.[10]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김동진(이일재 분)이 이정재(김영호 분)에게 지령을 받았으나 실행하지 않고 언론에 공개한 바로 그 사건이다.[11]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절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친자 이강석은 4.19 혁명 직후 친가족들과 함께 자살했다.[12] 양녕대군 17대손(이승만이 16대손이므로.), 영어에 능통해야함(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가 외국인이므로.), 너무 어려서는 안되며 노인을 모실 수준의 가정교육을 받았어야 함(양부모가 연로하므로.), 미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