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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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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관료, 정치인.
2. 생애[편집]
2.1. 군인 시절[편집]
1932년 9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나[4] 대구남산초등학교, 경북중학교[5] ,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군사관학교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는데 경북고등학교-육군사관학교 동기로 김복동도 있다.[6]
1951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해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7] 1964년 전두환, 노태우, 손영길, 김복동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77년 특전사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하였고 1978년 제50보병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50사단이 비수도권이라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엔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8] , 반란이 성공한 직후인 12월 13일 하나회 입김으로 정병주의 뒤를 이어 육군특수전사령관에 취임했다.[9]
1980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세 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에게서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1980년 5월 27일 '상무충정 작전' 직전 육군본부로부터 가발과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부대에 제공했는데 이때 폭동 진압 명령자라는 논란이 있었다. 특전사령관 보직 수행 중 중장으로 진급했고, 다시 1981년 12월 대장 진급과 함께 제3야전군사령관이 되었으며 1983년 12월 황영시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2.2. 예편 이후[편집]
1985년 12월 2년의 참모총장 임기를 끝으로 예편한 다음 일해재단 연구위원에 임명되었다. 1987년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초기 수습책으로 김종호의 뒤를 이어 내무부장관에 임명되었다가[10] 4개월 만인 1987년 5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축소 의혹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등에 의해 폭로되면서 민심 수습 차원에서 개각이 일어나 노신영 국무총리,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 등과 함께 경질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11]
한편 1999년 10월 10일 방영된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6.29의 진실 편의 본인의 인터뷰에 의하면 6월 항쟁 당시 현직에 있는 후배들이 찾아와서 부대가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 준비를 하고 있다며 자신에게 군 투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개진해왔고, 자신 역시 이에 동의하여 당시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에게 그 의견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6월 항쟁과 6.29 선언 이후인 1987년 7월 국방부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하여 전두환이 퇴임할 때까지 재임하였다. 짧은 재임 기간 때문에 국방부 장관으로서 눈에 띄는 치적은 없었지만 해병대사령부의 재창설이 실현된 것과 2군 지역에 군단 2개를 만든 것 정도가 그나마 기억될 만한 성과.[12]
2.3. 정치 활동[편집]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구직할시 서구 갑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5공 비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 사퇴 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3당 합당을 앞둔 1990년 1월 8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13][14] 이후 명예 회복을 위해 1990년 4·3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고 서구 갑 보궐선거에선 문희갑이 친야 무소속 백승홍 후보와 비교적 적은 표차로 당선되었다.[15] 당시 재보궐 선거는 3당 합당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선거라 매우 치열했고 전국적으로 이목을 끌었던 선거였다. 정호용 본인에 의하면 노태우가 의원직 사퇴 후 열리는 재보궐선거에 공천을 주겠다고 해서 사퇴했으나 공천을 받은 사람은 문희갑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었으며# 안기부에서 자신을 밀착 감시하고 주변 사람들을 샅샅이 뒤지며 못살게 굴었으며#, 국회의원들까지 동원하자 결국 견디다 못한 부인이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되자 후보직을 사퇴했다고 한다. 정호용의 사퇴로 남은 선거 자금이 후일 문희갑의 대구광역시장 임기 말 발생한 비자금 파동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다.#[16]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친여 무소속으로 출마해 민주자유당 문희갑 후보를 꺾고 당선되자 후에 민주정의당의 후신 민주자유당에 복당하고 지구당위원장 자리도 되찾았다.[17] 이후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의 제14대 대통령 선거 운동을 도왔으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대구광역시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본인이 완고하게 불출마 의사를 표했고[18] , 김영삼 정부의 과거사 청산 작업에 따라 1996년에 다시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로 구속되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 중에서 대구광역시 서구 갑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친야 무소속 백승홍에게 밀려 낙선했다.
정호용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수 차례나 광주광역시와 서울특별시를 오갔으며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이었기 때문에 특전사 소속 부대의 잔혹 행위를 둘러싸고 훗날 책임론이 제기됐다. 1989년에 열린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정호용은 당시 특전사 소속의 진압 부대들은 당시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투교육사령부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식적인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사조직 하나회의 인맥에 의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빈발했고 실제 재판에서 이것이 밝혀진다. 1996년 1월 5.18 광주민주화운동 검찰 수사 결과 정호용이 5.17 내란에서의 내란 모의 참여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1997년 4월 대법원은 정호용에게 내란 모의 참여죄와 내란 목적 살인죄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2.4. 정계 은퇴 이후[편집]
1997년 김영삼 정부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를 사면하면서 석방된 정호용은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2002년 정씨연합회 회장 자격으로 정몽준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다. 2015년 경북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이맹희의 빈소에 방문해서 너무 일찍 갔다고 통곡하기도 했다. 2019년 12월 12일 12.12 군사반란 40주년에 전두환, 최세창 등과 같이 어울려 호화만찬을 즐겨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2021년 5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자진해 개인 자격으로 조사를 신청한 것이 밝혀졌다. 본인은 광주 진압 작전에서 배제됐고[19] 총 4차례 광주를 방문한 것은 통신 보안, 인사, 군수 지원 업무를 위해서였지 작전을 지휘하러 간 것이 아니었으며 노태우가 3당 합당을 성사시키기 위해 당시 야당에 각서까지 써주며 자신을 5.18 관련 책임자로 몰아 정계에서 제거했다고[20] 주장했다. 또 자신은 12.12에 직접 가담하지 않아 전두환 집권 시나리오도 몰랐고[21] , 5공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전두환 정부 초창기의 실세 3허(허화평, 허삼수, 허문도)와 특전사령관 재임 당시 행보[22] , 민주정의당 창당 자금 모금과 언론통폐합 반대 등으로 불화가 심했다고 주장했다. 그간 5.18 관련해서 전두환계와 노태우계 간의 입장 차이와 갈등은 꾸준히 존재했지만 전두환계 내에서 입장 차이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23]
다만 5.18 관련 정호용의 발언은 상당수 거짓일 확률도 있는게,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진이나 영상을 보면 관련 회의에 참석해 실세처럼 군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호용의 주장은 나는 특전사령관으로서 광주에 몇번 내려갔지만 그때도 예하부대 지휘권은 이미 넘긴 바지사장 상태였고 실제 지휘한 인물은 따로 있다 정도였는데, 사진과 영상이 공개되면서 정호용이 자신보다 상급자인 국무총리, 도지사 앞에서도 다리를 꼬고 팔장을 낀 채로 담배도 피는 등 회의를 주도하고 발언을 이어나가는 게 고스란히 드러났다. 물론 영상에서 육성이 녹음되지는 않아서 이것만으로 진압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했는지까진 밝히지 못했지만 적어도 정호용이 주장한대로 본인은 조언 정도만 해주는 바지사장이었다거나 작전지휘권이 없는 방관자였다는 식의 주장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영상 속 모습임에는 분명하다. 이런 이유와 전두환, 노태우가 2021년 차례로 사망하면서 재차 심경의 변화가 온 것인지 어쨌는지 2021년 11월 돌연 미국으로 출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3. 대중매체에서[편집]
- 1995년 SBS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성우 전국근이 연기했다. 후덕한 인상의 정종준이 연기하여 커다란 갭이 있는 전두환이나 고증오류에 가까운 <제5공화국>과 달리, 실제 인물과 판박이 수준으로 닮았다.
2005년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배우 윤승원[24] 이 연기했다. '특전사령관', '경상도 출신'이라는 이미지를 반영해서 경상도 사투리를 즐겨 쓰는 호탕한 사나이 타입의 캐릭터로 나왔다.[25]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장세동과 대립각을 세우고, 박철언과 함께 노태우의 조력자 역할이 부각되었다. 또한 대통령이 된 전두환에게도 둘이서만 있는 자리에서 유일하게 반말을 사용하는 등, 극 중에서 전두환과 노태우 둘을 모두 친구로 대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인물로 나온다. 드라마 방영 후 당사자인 정호용은 "자신이 전두환, 이학봉, 황영시, 최세창보다도 내성적인데도 실제로 매우 다른 인물로 묘사되었다"며 유감섞인 평을 했는데 정호용 고유의 목소리도 실제로 크지 않고 카랑카랑한 비음이 섞인 얇은 중저음 목소리 톤이라 배우 윤승원의 목소리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호용이 인터뷰에서 보여준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거만한 성격을 잘 재현해냈다.
-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배우 박용수가 맡아서 연기했다. 작중에서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으나[26] 계급이 소장인데 당시 특전사령관은 중장이 아니라 소장이었으므로 정호용이 확실하며 배역 역시 '정 소장'이라고 되어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육사 11기 동기이자 하나회 핵심 멤버 중 한 사람이었고[27] 당시 특전사령관으로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의 주요 책임자 중 한 사람이었음에도 여단장으로 보이는 준장보다 훨씬 더 진압에 소극적이며 유연해보이기까지 하는 캐릭터로 나와 고증 오류나 마찬가지의 캐릭터로 표현되었다.
4. 여담[편집]
- 전두환, 노태우와 동기생이라는 특성상 그들에게 사석에서 말을 놓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사람이였다고 한다. 2019년 12월 12일에 전두환과 호화만찬을 즐겼을 당시에도 전두환에게 "두환이"라고 호칭할 정도.[28] 다만 전두환의 동기라는 포지션으로 인해 5공화국 당시에도 전두환과 노태우는 물론 장세동, 허화평 등에게 견제를 당했으며 예편 이후 정계에 진출해서도 노태우의 심복 격인 박철언, 최병렬 등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 경북고 동기였던 이맹희 전 삼성그룹 부사장에 따르면, "학자같은 면모가 있는 수재"였다고 한다. 이맹희는 정호용이 학자의 길을 걸을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29] 그에 대해 공부를 잘 하고 머리가 뛰어났다는 주변 인물들의 회고가 늘 따라다녔지만 그게 독으로 작용해 많은 견제를 받기도 했다.[30]
-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에 저항했다가 고초를 겪는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은 이후 하나회는 열심히 디스했지만 정호용에 대해선 꽤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 아무래도 정호용이 하나회 멤버긴 하지만 12.12 군사반란 당시엔 후방인 50사단에 있어 참여하지 않았다는 점도 한몫할듯.
- 12.12 군사반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지키다 전사한 故 김오랑 중령의 장례를 부대장으로 치러줬다고 한다. 김오랑 중령이 전사한 이후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반란에 참여했던 특잔사 예하 군인들이 그를 부대 뒷산에 암매장(!)했는데 이를 알게 된 정호용 사령관이 아무리 그래도 한솥밥을 먹었던 식구인데 말이 되느냐며 노발대발했다고.[31] 결국 정호용의 주도 하에 김오랑 중령의 장례는 부대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고 한다.
- 전두환의 대통령 재임 시기, 당시 서울 내 대학가에서는 민주화 시위가 한창이었다. 이때 시위대에서는 전경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도록 여학생들을 맨 앞줄에 내세웠는데,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정호용은 이것을 보고 과감하게 옷을 벗겨라(...)고 경찰한테 지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 옷을 막 벗길려고 덤벼드니 여학생들은 도망가버리고 시위대는 쉽게 진압되었다. 이를 보고 받은 전두환은 정호용을 크게 신뢰하게 되었다고 한다.
좋은 머리를 또 나쁜 짓에..
- 전두환 정부 때 재산을 불리기 시작해 천억 원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육군참모총장 재직 시절 당시 군사보호구역이던 양주 은현면 용광리 산 87 일대의 토지를 투기한 후 국방부장관 사임 무렵에 해제하여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겼으며, 이를 바탕으로 1992년 서울 강남구 논현동 부지 443m^2와 건물을 쌍방울개발로부터 59억 원에 구매해 도이치모터스 미니 전시장으로 임대를 주다가 2021년 12월 415억 원에 되팔았다. 이외에도 정부과천청사 인근 문원동과 과천동 단독주택과 토지 약 10,000m^2 등 수십 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다.[32]
-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호탕한 인물로 그려진 것과는 다르게 실제 성격은 엄청나게 꼬장꼬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고 출신인 기자가 '정호용이 사조직을 만들어 불법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 는 제보를 받고[33] 지역구 사무실로 찾아가 취재를 시도하자 경북고 후배라는 사실을 알고 선배에 대한 예의가 없다면서 욕설을 하기도 했다.# 늘그막에 가졌던 인터뷰 자료에서도 조곤조곤하고 비음섞인 말투를 가졌으며 뉴스타파에서 인터뷰를 시도할 당시에도 택도 없는 소리하지 말라며 신경질적으로 쫓아내는 모습을 보였다.
- 2023년 기준 12.12 군사반란을 주도하고[34] 5.18 학살을 벌인 신군부 핵심 5인(전두환, 노태우, 이희성, 황영시, 정호용) 중 유일하게 생존 중이다. 1932년생으로 현재 91세의 고령인데 2019년도에 진행한 인터뷰나 그 이후에 공개된 모습을 봐도 과거에 비해 많이 노쇠하긴 했어도 나이에 비해 꽤나 정정한 모습이다.
5. 선거 이력[편집]
6. 둘러보기[편집]
[1] 원래 표기는 鄭鎬鎔이었다.[2] 대구 서구 갑 국회의원 시절엔 서구 내당동 황제맨션에 거주했다.[3] #[4] 경상북도 청도군 출신이라는 이야기도 있다.[5] 중학교 평준화 조치로 폐교 후 경운중학교로 재개교.[6] 경북고등학교 32회로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외에도 김윤환 전 의원, 유수호 전 의원,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이상경 전 대구은행장이 있으며 동기생은 약 130명이다.[7] 전두환과 노태우가 육군사관학교 11기 동기생이다.[8] 때문에 훗날 본인은 특전사령관에 임명될 때까지만 해도 전두환 세력이 5공 집권을 노리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고 주장했다. 전두환도 말을 안해줬다고.[9] 이 시절만 해도 특전사령관과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은 소장 보직이었다.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를 거치며 중장 보직으로 격상된 것.[10] 당시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라는 망언을 남기기도 했다.[11]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거짓 해명을 하며 한 말. 5.18 당시 발포 명령자로 의심되며 적어도 5.18에 깊이 연관된 그가 한 말이라는 것이 유머 포인트.[12] 2군 지역은 후방이라는 특성상 동원사단 위주로 구성되어있어서 중요도가 낮다보니 군단이 없고 군단보다 급이 낮은 관구사령부가 군단의 역할을 대신했었는데 2군 지역에 있던 관구사령부를 통폐합하여 9군단, 11군단으로 격상시켰다. 다만 군단으로 격상되긴 했지만 워낙 규모가 작았던데다 예산 낭비라는 지적이 끊이질 않았었고 결국 9군단과 11군단은 참여정부 시절에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해체되어 2군 지역에는 현재 군단 편제 자체가 없고 사령부 - 사단이라는 해괴한 편제를 가지게 되었다.[13] 정호용의 경북고-육사 동기인 노태우는 제1야당 평화민주당 대표인 김대중과의 영수회담에서, 정호용의 경북고 동기동창이자 당시 민주정의당 원내총무였던 허주 김윤환은 평화민주당 원내총무 김원기와의 밀실 합의에서 정호용의 의원직 사퇴만은 막아달라고 간곡히 사정했지만, 호남을 주 지지기반으로 둔 평화민주당 입장에서는 수용할 수 없었다.# 사실 말이 자진 사퇴이지 박철언 당시 정무제1장관이나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 문제로 경북고 후배인 서동권 당시 안기부장에게 멱살을 잡히기까지 했다고.[14] 여론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정호용 본인이 자기 무덤을 판 것도 한 몫 했는데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정호용이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왔는데 여기서 정호용이 "저는 절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광주사람이 미워서 아녀자를 쏘고 아기들을 쏘고 할 이런 군인은 대한민국에 없다고 봅니다."라며 거만한 태도로 야당 의원에게 호통을 쳤고 야당 의원들이 준비해 온 자료를 보여주며 학동 주남마을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책임을 묻자 정호용은 대뜸 글자도 제대로 안보이는데 뭐 어떻게 알아먹으란 말이냐며 해당 의원을 조롱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유혈진압의 핵심 책임자인 특전사령관이었던 데다 청문회에서 보인 고압적이고 비아냥거리는 태도 때문인지 여당인 민정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막나간다는 이미지가 있었다고 한다. 반면 똑같이 현역 의원이었던 정동호나 1992년 14대 총선에서 국회에 입성하게 되는 허화평 같은 경우 모른다는 태도로 일관하긴 했어도 정호용처럼 동료 의원을 대놓고 조롱하면서 막나가진 않아서 반감이 훨씬 덜했다고.[15] 당시 백승홍 후보가 선전한 요인은 정호용의 후보직 사퇴에 서구 갑 선거구 주민들이 지역구 주민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국회의원직을 사퇴한 데 이어 후보직도 마음대로 사퇴했다는 데에 불만을 느낀 것과 백승홍 후보가 이를 잘 캐치해 낸 것이 주 원인이다.[16] 이 같은 일로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기에 서구 갑은 1990년대 당시 지금의 수성구 갑 못지 않은 정치적 위상을 자랑했다. 지금은 선거구 자체가 단일 선거구로 통폐합되었지만 말이다.[17] 이를 계기로 문희갑은 민주자유당을 탈당 후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친여 무소속으로 대구광역시장에 출마해 당선된다.[18] 1990년 서 갑 재보궐선거 당시 맞붙었던 문희갑과 다시 경쟁해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19] 도청 진압도 조언(?)만 해줬을 뿐 방관자 입장이었다고 주장했다.[20] 노태우 정부 말인 1992년 14대 총선에서 국회 복귀에는 성공했지만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과거사 청산에 따라 구속되며 정계를 완전 떠나게 된다.[21] 다만 5.17 내란 당시엔 정호용도 군 개입을 적극 옹호한 사례가 드러난다.[22] 예를 들어 특전사령관에 임명되자말자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못했던 것도 있지만) 다신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된다며 상관을 저격한 최세창 3여단장의 발포를 문책하고, 당시 가족장으로 조용히 마무리하려던 보안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2.12 쿠데타 당시 정병주 사령관을 지키다 사망한 김오랑 소령의 부대장을 승인해 3허에 찍혔다고 주장했다. 본인이 전임 특전사령관의 말로를 봤으니 여러 생각이 들었던 모양. 때문에 3허에 찍혀 이후 특전사령부 내부 권력도 특전사작전참모로 온 장세동에게 점점 집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23] 노태우계 인사들은 이전부터 꾸준히 광주 문제에 대해 사죄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지만 전두환 측 인사들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북한 개입설을 주장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왔는데 5공 측 인사라고 할 수 있는 정호용이 처음으로 5.18 진상규명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5공 정권 내에서 핵심 실세였던 장세동, 박희도, 허화평과 상대적으로 겉돌았다고 볼 수 있는 정호용 간에도 상당한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도 있다.[24] 2003년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만적 역,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김유신 역, 2010년 KBS 대하드라마 근초고왕에서 비류왕 역.[25] 노태우가 "쓰리 허 수석들 일명 허 가 허 가들이 우릴 물로 본다"고 말하자 "뭐 물? 크하하하하하하핳 야! 물은 너 아니가? 크하하하하하하핳..."하는게 웃음 포인트다.[26] 이름이 언급되지도 않고 이름표도 점퍼를 입고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27] 그 덕분에 12.12 군사 쿠데타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음에도 신군부의 집권 후 군과 정부에서 주요 고위직들을 많이 역임했다.[28] 참고로 노태우랑은 동갑이고 전두환보단 1살 어리다. 전두환은 1931년 1월생으로 빠른 생일이라 어찌보면 정호용이 2살 어리다고 볼 여지도 있다.[29] 훗날 정호용이 정치를 하게 되면서, '실탄'이 필요할 때마다 찾아왔다는 내용도 나온다.[30] 사실 정호용이 육사에 입교하던 50년대 당시에는 고등교육기관이 육사를 제외하면 서울대(舊 경성제국대학)나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 정도밖에 없기도 했고 50년대 당시의 육사는 미군과 유엔의 지원으로 소위 미국물을 먹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육사 11기는 첫 4년제 정규 육사였으니 아무리 하나회가 육사 내에서 소위 노는 사람들이였어도 당시로서는 나름 엘리트 집단이긴 했다. 물론 그 머리 이용해서 나쁜 짓 한게 문제지만.[31] 사실 정호용은 12.12와 직접적인 연관도 없을 뿐더러 반란군과 진압군으로 나뉘어 서로 싸워야 했던 부대를 수습해야했기 때문에 좋든싫든 김오랑을 매몰차게 대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더군다나 김오랑도 엄연히 하나회가 아니였다 뿐이지 본인의 육사 후배였기 때문에 후배를 저런 식으로 모질게 대한다는게 좋게 보였을리도 없다.[32] 이에 뉴스타파에서 정호용을 찾아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정호용은 "아 그때 살던데? 많이 올랐지... 근데 그거는 당신도 집 사서 팔아봐... 그러면 올라..."라는 말을 남겼다.[33] 물론 거짓 제보로 드러났고 정호용 입장에서 억울할 만한 상황인지라 욕을 한 게 아주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은 아니었다.[34] 다만 정호용은 12.12 당시엔 후방 50사단에 있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35] 1990.1.8. 의원직 사퇴.[36] 전임자 정호용(본인 맞다) 의원직 사퇴로 발생한 선거. 이 당시는 소위 맹형규법이라 불리는 법이 제정되기 전이어서 본인의 사퇴로 벌어진 재보선에 본인이 재출마할 수 있었다.[37] 1992.11.21. 민주자유당 입당.
1995.12.22. 신한국당 탈당.[38] 옥중출마.
1995.12.22. 신한국당 탈당.[38] 옥중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