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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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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경권 민영방송 사업자에 대한 내용은 TBC 문서
1. 개요[편집]
㈜중앙일보·동양방송 방송부문(삼성그룹 계열사)의 통칭으로 대한민국 민영방송의 선두 주자였다. 약칭은 TBC(Tongyang Broadcasting Company[9] )."정성을 다하는 동양방송"
"새 시대의 밝은 방송"
1980년 11월 30일 전두환 정부(신군부)의 언론통폐합 당시 공영방송인 KBS로 합병되면서 주식회사 동양방송은 없어졌다.[10] 1970년대 드라마 왕국이었으며, 당시 삼성의 홍보 창구 관련 보도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시사했다. 그래도 박정희,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 시절 중 주요 사건·사고인 신민당사 경찰 진입 사건, 김대중 독자회견 기념 생중계,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지역 민주항쟁 상황 보도를 추진하는 등 대체로 정론 차원에서의 노력은 성실히 임했던 방송사였다.
2. 특징[편집]
1964년 개국 당시부터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에 따른 신문-방송 겸영 금지를 이유로 KBS에 넘어갈 때까지 국내 방송계를 주름잡았던 대형 방송사였다. 텔레비전 방송은 서울과 수도권, 부산 및 일부 동남권이 주 시청권역이었으며, 라디오 방송은 제휴를 맺은 지역 민방들을 통해 호남(중파방송 한정) 및 대구·경북 지역(FM방송 한정)에 일부 방송을 송출했었다.
의외로 전국구가 아닌 방송국이었다. 이는 당시 TBC의 논조가 당대의 명 앵커 봉두완이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방송을 내보냈을 정도로 방송 3사 중에서 상대적으로 정부 비판적인 논조를 띠었고, 이 때문에 박정희 정권에게 수시로 밉보였기 때문인 것하고 연관이 있다.[11] 덕택에 전국 단위로 방송을 송출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지만 당국에 의해 번번이 퇴짜만 맞았고, 심지어 부산동양방송으로의 TV M/W 송출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부산동양방송에서 송출하는 각종 프로그램(특히 드라마)는 서울 본사에서 저장매체(비디오테이프, 릴테이프 등)로 공수해서 방송했고, 서울보다 1주일 늦게 편성되어야 했다. 뉴스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부산지국의 뉴스는 서울과 완전히 별도의 자체제작이었다. 라디오의 경우 부산에 지국이 있었고 호남권의 경우 서해방송(군산), 전일방송(광주)과 제휴하여 커버했다.
결국 동양방송 시절에는 진정한 의미의 전국방송을 할 수 없었고, 언론통폐합 이후가 되어서야 KBS 2TV를 통해 전국 방송이 된다. 그렇지만 동양FM이었던 KBS 2FM은 수도권만 방송되고 있고 그 외 지역은 음악FM채널 하나만 신설되고 1FM, 2FM 프로그램을 혼합 편성했으나 2001년 2FM 광고편성 이후 1FM 프로그램만 내보내고 있으며 이후 DMB U-KBS MUSIC과 지역 2라디오 일부 시간대에 2FM 프로그램을 편성하여 송출 중이다.
그래서 당시 (주)문화방송·경향신문이 5.16 장학회가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친정부 논조를 강하게 띄어서 정권 차원에서 열심히 밀어주었기 때문에 전국 방송화가 신속하게 진행되었던데 반해서, 동양방송은 방송사가 KBS로 흡수될 때까지 TV 방송 권역이 수도권 및 동남권으로 제한되었다. 그러다 보니 1970년대 중후반에는 전국구로 방송을 송출하게 된 MBC에게 제2의 TV 방송사 자리를 내주었다. TBC가 삼성그룹이 소유했기 때문에 간과하기 쉬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자본력에 있어서 MBC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12] 마찬가지로 당시 DBS 동아방송에서도 서울 이외 지역에서의 송출 및 TV 방송을 하려고 했지만 당대에는 동아일보가 정부에 비판적인 논조의 일명 야당지라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퇴짜만 맞았다는 후문도 있다.
여담으로 삼성그룹 호암 이병철 회장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대통령에게 새해 인사를 가지 않은 경제인으로도 유명했는데 연령에 있어서 1917년생인 박정희 대통령보다 더 먼저 출생한 1910년생이었고, 경남 의령의 유교 가문에서 자라와서 유교의 전통관습이 몸이 베여서 자신보다 더 늦게 출생한 박 대통령 앞에서 새해 인사를 하기에는 그렇기 때문이라는 일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이러한 사유도 있어서 찍힌 것이 아니냐고도 한다.[13][14][15]
중앙일보와 동일한 삼성그룹 계열사였으며 1974년 동양방송·중앙일보 합병 당시부터 1980년 언론통폐합 관계로 인한 동양방송 폐국 당시까지 중앙일보와 동일 법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라디오 시보 협찬 대부분이 삼성그룹 계열의 광고였다.
1976년 방송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FM 라디오 시보. 삼성전자 또는 삼성시계[19] 가 주로 시보 스폰서를 담당하는 방식이었다.광고(여자):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이 미 국무성[16]
문화 사절단으로 5월 11일, 13일 국립극장에서 역사적인 내한 공연을 갖습니다. 모던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세기의 안무가 알윈 니콜라이가 이끄는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은 빛과 율동의 환상적인 종합 예술로 벌써부터 국내 무용계에 큰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니콜라이 모던 발레단의 관람권은 본사 문화사업부, 시내 각 예매처에서 절찬 예매 중입니다.[17]시보멘션(여자): 89.1MHz, 즐거움과 안식의 샘, 동양FM 방송입니다. HLKC FM.
시보광고: 이코노 이코노 이코노~ 텔레비전은 이코노![18]
시보멘션: 삼성전자 제공시보, 다섯 시를 알려드립니다.(시보음~♪)
방송멘션: (오프닝 음악) 학생들의 노래 경연 학생 콩쿨...
3. 로고송 ID[편집]
TBC 동양방송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FM도 동양방송 동양방송
뉴스도 교양도 오락도
하늘을 전파로 수놓아
해가지고 달이떠도 아아아
사랑해 TBC 동양방송
4.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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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역대 사옥[편집]
6. 후신 논쟁[편집]
1990년 11월 20일 중앙일보는 공보처에 동양방송 폐업 신고 철회 통고문을 발송했다. 동양방송을 다시 돌려달라는 취지로, 직접 소송의 전단계로써 통고문 발송 절차를 밟았다. 당시 통고문 발송 사실은 방송 3사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그러나 모종의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실제 소송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30]
1995년에 삼성그룹은 삼성물산과 제일기획의 '캐치원'과 'Q채널'로 케이블 방송 사업에 재진출했으나 1998년에 모두 신규법인 중앙방송에 넘겼다.[31] 그리고 1999년 중앙방송조차 중앙일보와 함께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된다.
2009년 미디어법 개정에 의한 신문·방송 겸영 허용 덕에, 중앙미디어네트워크(현 중앙홀딩스)는 2011년 12월 1일 31년 만에 종편방송국 JTBC를 개국했다. 명칭은 TBC가 아니었다. TBC 대구방송 때문이다.[32]
JTBC는 개국기념으로 TBC 시절 인기 프로를 일부 방영했다.[33] 전두환의 측근 이원홍 전 KBS 사장이 TBC의 문을 닫은 전두환의 축하 메시지를 전해주었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계속 씹히는 중. 2020년 5월 18일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40주년을 맞자 당시 TBC 카메라에 녹화된 영상들을 많지는 않지만 공개하기도 했다. 이렇게 봤을 때 TBC를 소유했던 중앙일보[34] 가 JTBC로 종편 방송국을 재개국했기 때문에 TBC의 직계 후신을 JTBC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이고, 실제로 JTBC는 자신들이 TBC의 후신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하고 있다.[35]
또 다른 의견으로는 인적, 물적 자원을 승계한 KBS 2TV를 후신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 소수 있다. 상법 상 인수 합병의 의미도 그렇고, 무엇보다 KBS는 TBC의 모든 저작권까지 갖고 있다. KBS는 자사 예능 프로그램인 불후의 명곡에서 쇼쇼쇼나 해변가요제 관련 특집 등 TBC 자료를 자유롭게 사용중이다. 2019년 5월 KBS 아카이브 유튜브 계정 '옛날티비'에서 TBC 시절 방송 자료를 시청자에게 기증받아 유튜브에 올렸는데, 영상에는 KBS 워터마크가, 썸네일에는 TBC가 표시됐다. KBS는 공영 방송이자 흡수 합병의 주체다. 다만 JTBC가 가진 TBC 프로그램 판매는 SLL중앙이 맡고 있다.
따라서 JTBC의 저런 주장은 KBS측에서 걸고 넘어지려면 넘어질 수도 있다. 다만 인수 과정이 사실상 강제 탈취형식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역풍만 크게 맞을 판이다. 마치 일본이 과거의 불평등 조약등을 근거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이 때문에 실제 JTBC 개국 때 과거 TBC 자료들을 대량으로 사용했고 현재도 자료들을 가끔씩 사용함에도 KBS측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 현실적으로 KBS입장에서도 사실상 케이블 방송에 불과한 JTBC를 어떻게 해본들 별다른 이득이 없다.
한편 중앙일보와는 상관이 없지만 범삼성가라는 점에서 CJ E&M과의 연관성을 따져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CJ는 범 삼성계열이라는 점과 오락 중심의 방송전략 노선이 비슷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동양방송과는 뚜렷한 연관이 없다. 애초에 이맹희 등 CJ 쪽 인물들은 언론쪽 경영에 관여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36]
다만 2020년 하반기부터 기존의 CJ E&M에서 운영하고 있던 OTT 서비스인 티빙에 JTBC가 자사의 컨텐츠를 독점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뜬금없는 조합이라는 평이 많지만 알고 보면 범삼성가 기업들의 방송사 간 합작 서비스라는 부분과 대부분의 컨텐츠가 기존 방송사들과는 차별화된 엔터테인먼트 위주의 채널이라는 점에서 묘하게 동양방송의 정신이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라디오로 한정할 경우 종교방송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본다면 범삼성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종교인 원불교에서 운영하는 원음방송과의 연관성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원음방송은 다른 종교방송사들과 달리 최신가요, 트로트 등 가요 프로그램도 많이 방송하고 있고, 한때 종교방송답지 않게 야구 등 스포츠 중계를 했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과거 동양라디오와도 묘하게 닮아 있다.[37]
아무튼 현재는 TBC 후신문제와 관련해서 양측 다 별다른 말은 없다. 취미의 다양화와 OTT의 발달로 인해 TV방송 자체가 침체기에 접어들어 생존경쟁이 치열해졌음을 감안하면 KBS도 JTBC도 과거문제와 관련해서 한가롭게(?) 논쟁할 여력 자체가 없다. 현재는 실질적 정신적인 후계는 JTBC가, 법적인 후계는 KBS가 가지는쪽으로 어느정도 암묵적인 정리가 이뤄진 것으로 봐도 무방할 듯...
무엇보다 현재는 TBC에 대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 자체가 많이 줄었다. 베이비붐 후반 내지 n86 세대 출신 인원들조차도 이 방송국을 어린 시절에 잠깐 스쳐 지나간 정도로 경험했거나 아니면 집에 TV가 없어 아예 경험 자체를 못해봤을 가능성이 높다. 즉 현 50~60대들 마저도 기억속에서 흐릿한지라 그 밑에 연령대의 사람들에게는 역사책에서나 볼법한 방송사가 되어버린 것이다.[38] 상황이 이렇기에 양측 모두 동양방송의 후신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물론 2023년 현재 KBS2를 TBC의 후신으로 여기는 일반 국민은 손에 꼽기도 힘들 정도로 적다. 대부분 "중앙일보가 종편 열면서 TBC 이름을 따 오려고 했는데 대구방송 때문에 JTBC를 만들었다" 정도로만 여길 뿐이다.[39] 그나마 이렇게라도 알고 있으면 다행이고 이제는 JTBC가 과거 동양방송을 계승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심지어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방송 정도(...)로 기억하는 경우도 많다. 방송카페 등지에 서식하는 방송덕후들 정도나 동양방송의 후신을 KBS2냐 JTBC냐를 따져볼 뿐이다. 그리고 위에 언급했듯 이제는 동양방송이 없어진지 워낙 오래 지난지라 양쪽 모두 동양방송 얘기를 해봐야 별 이득이 없다.
여튼 동양방송은 2개의 대형 방송국을 유산으로 남기면서 아직도 방송계에서 적지않는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7. 사가 및 로고송[편집]
작사는 박두진, 작곡은 장일남이 맡았으며 1975년 9월 22일에 제정되었다. 1980년 언론통폐합 이후 후렴의 중앙일보 동양방송을 중앙일보 중앙일보로 변경하여 중앙일보의 사가로 쓰고 있다.
하지만, 시청자들의 기억에 더 남은 것은 사가보다도 로고송이다.
이 로고송은 라디오서울 시절부터 사용했으며[40] , TBC의 마지막 정규방송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의 오프닝 무대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다.
8. 역대 임원[편집]
9. 출신 방송인들[편집]
TBC 출신 탤런트 중 남성 연기자는 '실험극장' 단원 출신인 이순재와 이낙훈[41] , 김동훈, 오현경, 김순철, 김성옥, 정해창[42] 등을 비롯, 김성원[43] , 김세윤, 김인문, 박병호, 박용식, 홍성우[44] , 김성환, 현석[45] , 남성훈, 김종결, 정동남[46] , 연규진, 노주현, 한진희, 김영철[47] , 강태기, 이덕화[48] 등이 있고, 여성 연기자들 중 훗날 월드스타가 될 윤여정[49] 과 사미자, 강부자[50] , 선우용여[51] , 여운계, 정윤희, 김영란, 유지인, 장미희, 서승현, 김형자, 김창숙[52] , 서미경[53] , 원미경, 이미숙, 차화연, 백수련, 최란, 최화정, 정소녀[54] , 전문 MC는 허참[55] , 게스트 중 혜은이[56] 등도 있다. 그 외에 임성민, 김영철, 정한용, 유동근, 전광렬 등 일부는 무명 시절을 이 방송사에서 보냈다가 언론통폐합 후 몇년 지나 스타가 됐고, 박영목, 김동완(1945년생) 등도 나중에 유명 스타까진 아니지만 사극 등지를 통해 감초 역할로서 자기 몫을 톡톡히 했다.
아역들 중에는 김민희[57] 와 강수연[58] , 윤유선, 이승현[59] , 박길라, 안정훈 등도 이 방송국에서 배출됐다.
또한 TBC 성우극회 역시 인수 후 합쳐졌기에 KBS 성우극회 일부 인물들도 여기에 해당한다. 배한성이나 양지운, 유강진, 김종성, 장정진, 박영남, 나수란, 최수민, 강희선, 차재완[60][61] 같은 성우분들이 대표적. 또한 배우 김주혁의 부친 김무생도 이곳에서 성우로 처음 방송 활동을 시작했었다.[62]
배일집[63] , 배연정[64] , 김병조, 고영수[65] , 김영하[66] , 최용순, 방일수[67] , 임희춘, 이주일[68] 등의 코미디언들도 동양방송에서 활동했으며, 고전유모어극장을 위해 영입된 송해[69] , 서영춘 또한 적을 둔 적이 있다.[70] 1980년 5월에 진행되었던 'TBC 개그콘테스트' 출신으로는 주병진, 장두석, 김형곤, 이성미, 서세원, 이하원[71] 등이 있다.
또한, 5.16 군사정변 당시 '혁명정부'의 공약을 읽어내려갔던 박종세 아나운서[72][73] 와 '가로수를 누비며'[74] 등 굵직굵직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고려진 아나운서[75] , 국내에서 처음으로 '앵커맨'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봉두완 기자,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진행자로 명DJ였던 황인용 아나운서와 콤비 박초아 아나운서[76] 그리고 맹관영, 원종배 아나운서 등 60~70년대를 대표하는 아나운서 대부분이 TBC 출신이었다.[77] 훗날 지상파에서 앵커나 시사프로 MC로 이름을 날릴 길종섭[78] , 김양일[79] , 송도균, 신완수[80] , 유연채, 조순용, 차만순[81] 등도 TBC에서 배출되었고, 강용식 전 보도국 부국장과 김홍 기자[82] , 이남기 PD, 오홍근, 류현순 기자 등도 훗날 언론계와 정관계에서 중진으로 자리매김한다. 동양방송 스포츠 중계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언론통폐합 후엔 KBS의 스포츠 중계에서 주축으로 활약한 원종관, 서기원, 박병학, 이장우, 유수호, 허주 아나운서, 야구해설위원 하일성, 바둑해설의 레전드 노영하 9단과 김수영 7단, <독도는 우리땅>과 <힘내라 힘>을 작사/작곡한 프로듀서 박문영도 이곳 출신.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리랜서 방송인인 왕종근도 방송인 커리어는 여기에서 시작했고,[83] 재미 방송인 홍우창 아나운서도 미국 LA국에서 활동했다.
또한, 용의 눈물, 여인천하 등을 연출했던 김재형[84] , <아씨>의 고성원, 최상현 PD 등은 물론,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집필했던 신봉승과 '따발총 대사'로 이름 높은 김수현 작가, <고교생 일기>와 <순심이> 등을 연출한 운군일, <형사 25시> 및 <사랑의 굴레>의 염현섭[85] , 제일영상/제일방송 창업주 심현우, 배우 유인촌의 형 유길촌, 외화 더빙 전문 PD 박준영(전 대구방송 사장)과 박순웅[86] 등이 이 방송사에서 배출되었다. 차별화된 편성전략으로 '편성의 대가'라고 불리며 훗날 KBS 부사장과 SBS 사장을 지낸 윤혁기 전 편성국장도 TBC에서 활약한 방송인이다.# 그러나 김재형 PD는 JTBC 개국을 몇 개월 앞두고 숨을 거두었다.
80년대 MBC 뉴스데스크의 일기예보를 담당했던 김동완 위원도 TBC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했다가[87] 언론통폐합 이후 MBC에서 일기예보를 담당하게 되었다.[88][89] 또 가수 현미의 남편으로 잘 알려진 이봉조 작곡가는 TBC 전속 악단장으로 활약했다.[90] '한국 분장계 1세대' 중 하나인 전예출(1927~1996), 최효성이 이 방송사에서 궂은 일을 맡았다.
KBS 사장으로 알려진 홍두표(현 조선방송 회장)는 1964년 12월부터 TBC 창립요원부터 대표이사까지 활동해왔던 동양방송의 산 증인이며, 폐국 후에도 2000년대 중앙일보 고문으로 재직할 당시 'TBC 복원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2011년 JTBC 개국 전까지 TBC의 복원 운동을 주도해왔다. 단, 홍두표 회장은 처음에 KBS-TV 개국 당시 창립위원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같은 창립요원인 김덕보도 본사에서 전무, 사장, 대표이사 등을 거쳐 1980년 9월에 TBC를 떠나 1986년까지 제일기획 회장, 한국광고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위와 같이 서술된 동양방송 출신 방송인들의 결속력이 대단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유는 동양방송이 전속가수 및 탤런트, 성우들에게 타 방송국 대비 아낌없는 지원을 해줬다는 것이 꼽힌다. 대표적인 예로 1979년 말 완공된 동양방송 여의도 사옥(현 KBS 별관) 안에는 동양방송 전속 배우들의 대기실이 각각 1인실로 만들어져 있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개인 대기실이 기본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한 대기실을 여러 명의 배우들이 공유했던 게 일반적이었다고 하니 파격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미자의 증언에 따르면, '전속배우들을 위한 식당을 따로 배치해 무려 등가구를 배치했고, 물감들인 단무지같은 요리는 일절 제공금지' 했다고 하니, 전속배우들에 대한 지원이 대단했음을 알려준다. 또한 '31년만의 귀환 TBC' 다큐멘터리에서 이순재는 동양방송 방송인들이 대부분 전속 멤버 중심으로 이루어져서 어느 누구도 흔들지 못했던 구조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조연 배우들에 대한 지원이 많았는데, 이는 당시 경영진 및 창업주들이 주연 배우는 얼굴만 되면 그만이지만, 드라마를 빛내주는 이들은 결국 조연 배우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당시 미스롯데 대회 중계를 맡았기 때문에 미스롯데 입상자는 무조건 TBC 특채로 채용되는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이때문에 70년대 미스롯데 출신 연예인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방송활동 및 연예활동을 시작했다.
TBC 출신 방송인들은 이웃 중앙일보 사원 출신들과 함께 1993년에 '중앙매스컴 사우회'를 결성하여 친목을 다져오고 있다.
10. 역대 공채 사원[편집]
1965년 이후 중앙일보와 공동으로 뽑아왔다. 1960년대에 입사했던 인원 다수가 1969년 MBC TV 개국 때 이적했으며, 1970년대에 입사했다가 언론통폐합 때 KBS로 넘어간 인원 중 상당수가 1991년 SBS 창사 때 다시 이직했다.
10.1. 보도국[편집]
10.1.1. 기자[편집]
- 1964년 RSB 개국요원: 전응덕, 고일환, 윤명중, 한정준, 문찬홍, 이대식, 박상문, 정종진, 박광춘, 이창열, 조광식, 고석주
- 1964년 DTV 개국요원: 고일환, 김충기, 남정걸, 윤천영, 이창열, 오일룡, 장준우, 김재길
- 1964년 RSB 1기: 강용식, 김성호, 김우철, 노계원, 박영서, 석종현, 양정석, 윤명중, 이돈형, 이희준, 임응식
- 1965년 2기: 김경용, 김옥조, 정성진
- 1968년 5기: 고성광, 길종섭, 오홍근, 우석호, 이민희, 장영국
- 1969년 6기: 장종덕
- 1970년 7기: 김장년, 노기환, 노신영, 송도균, 이봉희[91]
- 1972년 9기: 김영수, 백낙천, 엄광석
- 1973년 10기: 유균, 차만순
- 1975년 12기: 박원훈, 이동근, 이재희
- 1976년 13기: 진홍순, 황호형
- 1977년 14기: 김벽수, 김봉규, 김종성[92] , 김청원, 김충환, 김홍, 민충기, 류현순, 이정봉, 이종학, 정희보, 조봉환, 조순용, 최춘애
- 1978년 15기: 김관상, 백낙범, 유연채, 주동원
- 1979년 16기: 강갑출, 김준범
10.1.1.1. 지방기자[편집]
- 1973년 10기: 유원우, 이성백
10.1.1.2. 촬영기자[편집]
- 1976년 13기: 이우승
- 1977년 14기: 민상기, 박종철, 한경렬
- 1979년 16기: 김창훈, 성기준, 홍성철
10.2. 아나운서[편집]
- 1964년 RSB 개국요원: 고려진, 길종휘, 김동건, 민창기, 박노설, 박종세, 원종관, 유욱자, 윤미자, 이성화, 이장우, 조봉남, 주수광, 최계환, 하성해
- 1964년 RSB 1기: 권귀순, 김동만, 구박, 남정우, 박병학, 서기원, 장세덕, 조문자, 최귀정
- 1964년 DTV 1기: 김경실, 박혜자, 성대석, 이강자
- 1965년 2기: 신화철, 이부미자, 이시일
- 1966년 3기: 이정혜, 황인용
- 1967년 4기: 고경중, 권윤기, 김민자, 김양일, 김영선, 김영애, 나동숙, 맹관영, 박태웅, 원종순, 유경영, 이보길, 임양근,[93] 임철호
- 1968년 5기: 고은숙, 김기덕, 김경옥, 김성덕, 김동숙, 박지호, 원창묵, 이주, 조천영, 최석희, 허경회
- 1969년 6기: 백순명, 백윤숙, 유수호, 유영순, 이혜자, 최운기, 홍아영
- 1970년 7기: 김동숙, 박계옥, 유선준, 윤정근, 최동철, 최봉현
- 1972년 8기: 김기남, 김미자, 박성옥, 안정희, 이미숙, 이상경, 이현애, 최인실
- 1973년 10기: 고수웅, 김기혜, 안계상, 양원자, 이재명, 함영미
- 1974년 11기: 남선현, 류인순, 이영희, 주성혜, 최간
- 1975년 12기: 공영주, 백상철, 윤여복, 정미호, 채관숙
- 1976년 13기: 김창매, 안희진, 허주, 홍우창
- 1977년 14기: 강미정, 김경태, 박성희, 박초아, 안영희, 이영재, 이영혜, 이정애, 이희옥, 하재숙
- 1978년 15기: 박성명, 안현정, 원종배, 이경숙, 이미령
- 1979년 16기: 박광호, 이정옥, 지영서, 최희선, 홍인화
10.3. 탤런트[편집]
- 일러두기
- 활동중인 탤런트를 중심으로 나열하며 전속배우 및 무명과 특채 탤런트도 함께 기재합니다.
- 취소선은 은퇴하거나 재직 중 사망하거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제명된 탤런트입니다.
10.3.1. 전속 어린이 연기자[편집]
10.4. 성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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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프로듀서[편집]
- 1964년 DTV 개국요원: 고성원, 김재형, 이기하, 최상현, 허규, 홍두표, 황은진, 황정태
- 1964년 1기: 공종원, 김경태, 나영세, 박세록, 손일석, 윤형대, 이대섭, 이선권, 이백천, 이증, 임채욱, 임형두, 장두원, 전영수, 조승환, 조용호, 진필홍, 최주호
- 1965년 2기: 박광희, 안승효, 정종운, 최창한, 황주자
- 1966년 3기: 김주철, 정형기, 한명희, 황동성, 현재훈
- 1967년 4기: 김광옥, 맹만재, 유길촌, 유수광, 윤혁기, 이해근, 임강호, 전세권[108] , 채경숙, 최충웅, 표재순
- 1968년 5기: 김인환, 목철수, 박정서, 박준영, 유규만, 윤효석, 이기재, 이상옥, 이재휘, 정병식, 최정웅, 홍황규, 황인태
- 1969년 6기: 강석기, 김창동, 옥충언, 이영식, 이정웅, 장정행, 정인섭, 하강일
- 1970년 7기: 고학찬, 김원택, 김일영, 손태익, 신광철, 오명환, 정의성
- 1972년 8기: 곽영범, 김군남, 김도홍, 김종원, 김홍소, 변동현, 송우천, 심현우, 이수담, 임재걸, 정주환
- 1972년 9기: 고석기, 김상혁, 김영철, 김한승, 정춘수
- 1973년 10기: 강석흥, 강영수, 김덕배, 김선옥, 김세웅, 김영룡, 김웅래, 남정헌, 윤재걸, 이동석, 이지언, 임재량, 임정훈, 장윤택, 전덕현
- 1974년 11기: 김인경, 남성우[109] , 신완수, 이남기, 이명룡, 이수철
- 1975년 12기: 김성묵, 김영택, 오흥진, 윤영호, 윤흥식, 이문태, 임진택
- 1976년 13기: 김기욱, 김재순, 김종건, 김창욱, 김태기, 서현숙, 이근용, 이종수, 장동욱, 정훈, 차성모, 최홍철, 홍순창, 홍지일
- 1977년 14기: 강관선, 권오규, 김성수, 김우광, 박문영, 송명구, 안영동, 염현섭[110] , 운군일, 이상흡, 이성연, 정동천, 정원조, 한정희, 홍성주
- 1978년 15기: 김종찬, 박태경, 백용철, 안인기[111] , 윤인섭, 이웅모[112] , 홍순호
- 1979년 16기: 강남준, 김광호, 김종현, 문영진, 배철호[113] , 이병효
10.6. 엔지니어[편집]
- 1964년 RSB 개국요원: 최당, 박준병, 김응경, 김순기(金順起), 한영식, 이충수, 오신팔, 백운춘, 박규진, 김양광, 이기택, 전해종, 강순희, 신종대, 김근배, 이철재, 홍기봉, 임일명, 조승연, 권창호, 전창식, 조동린, 김광수, 장복명
- 1964년 DTV 개국요원: 강진구[114] , 한기준, 계인, 이한익, 조준기, 김세대, 김무기, 강신호, 임경춘, 조병룡, 이국철, 노영남, 엄영진
- 1965년 2기: 박병화, 전상조, 최홍림[115] , 황길웅
- 1966년 3기: 김영천, 김용우, 박건진, 박찬웅, 홍석곤
- 1968년 4기: 김건일, 김현식, 이범식, 조건문, 조규식
- 1968년 5기: 경영문, 김승례, 배정광, 이성재, 장승천, 정우진, 조대제
- 1969년 6기: 김영구, 김원출, 김종명, 백영기, 백정훈, 이근조, 정구언
- 1970년 7기: 이광일, 장숭, 김부웅
- 1972년 9기: 김문중, 이기창, 이성춘, 이철, 장기현, 정태철, 김영진, 박충
- 1973년 10기: 고중현, 김기수, 맹경호, 윤공섭, 이강준, 진교성
- 1974년 11기: 권오광, 안상룡, 원우연, 천장호
- 1976년 13기: 김종윤, 최경순, 한재수
- 1977년 14기: 권순철, 고철수, 고항원, 김승필, 서경학, 오경근, 이승진, 박준, 지윤규
- 1978년 15기: 원세영, 조해남[116] , 최영민
- 1979년 16기: 강명관, 김동욱, 송낙운, 안석종, 오병선, 원종화
10.7. 미술[편집]
- 1978년 15기: 김득영, 김문경, 서동화, 양회조
11. 방송망[편집]
- 동양텔레비전 (HLKC-TV, CH 7 / 10kW)
- 부산동양방송 (HLSX, CH 9 / 5kW)
- 로스앤젤레스 동양방송 (KBSC, CH 5)
- 동양라디오 (HLKC, 639kHz / 20kW)
철산송신소 폐쇄 당시 AM 639kHz는 라디오 서울(1980년 동아방송에서 한국방송공사 제4방송, 1981년 KBS 제4방송에서 라디오서울로 개칭) AM 792kHz가 송출되고 있었던 개봉송신소로 통합 이전되었으며[120] , KBS 제2라디오(1981년 9월 7일~1999년 12월 31일)→KBS 제3라디오(2000년 1월 1일~2009년 12월 31일) 방송 송출 시설로 사용되었다가(KBS 제3라디오는 2000년 1월 1일 개국하였다.) 2010년 1월 1일부터 3라디오(사랑의 소리 방송) 주파수를 AM 1134kHz로 변경하고 종전 사회교육(현 한민족) 제1방송을 송출하던 화성송신소로 이전하면서 개봉송신소는 방송 송출을 중단하였고, 동년 4월 20일 FM 104.9MHz[121] 를 개국하였다. 2000년 1월 1일부터는 HLKC는 KBS 제3라디오의 자체 호출부호로 사용하고 있다.
- 파일:전일방송 로고.png (VOC, HLAA, 1224kHz / 20kW)
- 파일:서해방송 로고.png (SBC, HLAS, 675kHz / 10kW)
- 동양FM (HLKC-FM, 89.1MHz / 1kW)
- 대구 파일:한국에프엠방송 수정본.png (BBC-FM, HLCB, 89.7MHz / 1kW)
12. 프로그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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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관련 어록[편집]
"온 국민에게 보다 잘 살 수 있는 내일에 대한 희망을 주고 그를 위해서 스스로 땀 흘려 일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를 일깨우며, 이 나라에 모든 개인과 가정과 촌락 그리고 국가 사회 구석구석에 맑게 샘솟는 도의심이 충만하도록 하자"
1964년 개국 당시 슬로건
"우리는 전진합니다. 우리는 창조합니다. 우리는 듣고, 우리는 보고, 우리는 표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증언할 것입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괴로움을 넘어서는 즐거움을, 역경을 극복하는 맑은 웃음의 원천을 마련하고, 우리는 자유의 화신, 우리는 평화의 역군임을 선언합니다."
1964년 개국방송 당시 멘션 중
"이제 비록 저희들은 TBC 브라운관을 떠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과 항상 영원히 같이 있겠습니다."
1980년 11월 30일 고별 프로그램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중 강부자의 작별인사
"끝으로 동양방송의 호출부호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알려드리겠습니다. 여기는 639 KHz… HLKC… (울먹이며) 동양방송입니다…"
1980년 11월 30일 '밤을 잊은 그대에게' 중 황인용 아나운서의 멘션
TBC는 永遠하리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TBC 석간 방송과 그 날 정파 직전 나온 문구.[124]
이 문구는 'TBC 복원추진위원회' 슬로건으로도 사용했다.#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운이 깃들기를 바라며, 마지막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1980년 11월 30일 TV 정파 순간에 나온 고별 멘트.
14. 여담[편집]
1977년 동양방송에서 권투선수 홍수환의 타이틀전을 파나마로부터 중계하던 당시, 대구 앞산 기슭의 동네와 김천 산간지역에서 동양방송이 잡혀 시청했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이 때 대구 앞산 기슭 마을 주민들이 당시 500원씩 거두어 모아서 산꼭대기에 안테나와 부스터 동축 케이블 1km를 가설하고 사설중계소를 몇 달간 운용했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이 현상은 스포라딕 E층 반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125] 또 당시 경상남도 거창군에서 TBC를 시청했다는 증언도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한국FM방송에서 TBC 방송을 시험 송출 한 것이었는데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한국FM방송에 TV중계를 막았다. 당시에 다른 지방총국에서 TV중계를 몰래 하다가 관계자들이 끌려가는 일이 흔했다고 전해진다. 아무래도 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한국FM방송 TV중계 시험전파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126]
2004년 6월 23일, TBC 프로듀서 출신 박광희가 웹 디자이너인 아들 박찬웅의 도움으로 TBCi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한 적이 있다. 본래는 동양방송 사우회(tbcradio.net)라는 사우모임 소식을 교류하는 작은 홈페이지였으나, 그 이후 tbci.co.kr로 도메인을 바꾸면서 TBC 시절 자료를 인터넷으로 복원했다. 유튜브 등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TBC 관련 자료들은 대부분 TBCi에서 복원된 자료들이다. 다만 2007년경 운영에 대한 논란이 수 없이 일어나서 여러 비판을 받아왔고[127] , JTBC의 개국으로 인해 TBC의 부활이라는 목적을 충분히 이뤘다고 판단, 2012년 1월 22일 서비스를 종료하였다. 한동안 페이스북에도 박광희가 만든 TBCi가 있었으나 모든 역할을 JTBC로 넘긴 걸로 보여진다.
한편 이장춘 전 KBS제주방송총국장[128] 이 운영하는 티스토리 블로그 춘하추동방송에도 잔존하는 TBC 방송 영상과 TBC 관련 비하인드 스토리가 나온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와 중앙일보 사이트를 통해 당시 프로그램들이 어떠했고, 편성표는 어떠하였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영화 쎄시봉에서 민자영이 오근태에게 동양방송 드라마에 출연한다고 말했는데, 당시 고향에 내려가 있었던 오근태는 "우리 동네에 TBC 안 나오는데" 라고 했다. [129]
2021년 방송한 KBS 2TV 드라마 오월의 청춘에서 하숙집 딸로 나오는 이진아가 TBC 방송국에 들어가서 라디오PD하는 게 꿈이라고 나온다. 이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으로 나오는 광주광역시는 TBC 방송의 가청권은 아니지만 당시 TBC 방송국과 프로그램을 제휴하다 언론통폐합으로 사라진 광주 지역방송인 전일방송이 존재해서 TBC의 라디오 프로그램을 청취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시청자와 청취자를 부르는 호칭이 TBC 가족이었는데, 방송국 수뇌부부터 전속 탤런트, 코미디언, 말단 직원에 이르기까지 가족 같았던 당시 TBC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호칭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1980년 11월 30일 마지막 고별방송 타이틀도 TBC 가족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였다.
동양 라디오 AM, FM의 시보음이 괘종시계가 올리는 시보음인데 시보음 치곤 좀 무섭다. 이 시보음은 1974년부터 1980년 폐국할 때까지 쓰였다.
또한 이 방송국의 프로그램 말미에는 성우, 아나운서 또는 출연자[130] 가 일본 방송에 쓰이고 있는 직접 제공자막을 소개하는 형식으로 끝을 낸다.... 라지만 당시에는 경쟁사이던 MBC도 이렇게 했다. #수사반장 1979년 오프닝에서 제공 수파(자막)가 기업로고를 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 사실 이건 일본이 현재까지 안 바뀐 것이다. 원조는 미국의 "Sponsered by ~" 혹은 "brought to you by ~"하는 것이며 예컨대 미국 킹월드 프로덕션 제작의 인사이드 에디션 1991년도 초창기 방송 같은 경우에는 LA에 있는 미용실[131] 로고까지 나온다. 미국이나 한국은 스폰서 제공 자막 형태가 중간광고나 배너 등으로 다양해진데 반해[132] 일본은 아직도 그 시절 수파를 그대로 쓰고 있다.
여담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 방송국과 같은 운명을 선택한 방송국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브라질의 헤지 투피(Rede Tupi)다. 차이점이라면 이쪽은 재허가 연장 미승인으로 인한 경영난이 그 원인이었고 폐국 시기도 4개월 빨랐다.[133] 당시 분위기도 비슷했고 방송 중간에 "여러분, 다음에 봐요(Até breve, telespectadores amigos)."라는 자막이 등장하면서 끝을 맺었다.
지상파 방송국중에는 최초로 방송 시작전 로고송(ID)을 삽입한 곳이기도 하다. 당시 KBS, MBC는 단순히 성우가 방송국명을 말해주는 방식이었다.
2005년경에 영화사 '마술피리'[134] 가 TBC 폐국 과정을 다룬 영화 <TBC 가족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를 제작하려 했으나 모종의 사정으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