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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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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편집]
신라 경순왕의 10대손이며, 본관은 구 안동 김씨의 중시조이고, 자는 본연(本然). 생전 작위는 상락군 공작이다. 사후 시호 충렬(忠烈). 고려의 장군이다.
원나라의 일본원정에서 놀라운 지휘력을 발휘해 고려군의 피해를 최소화하였다. 또한 고려의 노익장 중 한 명으로 기록상 매우 장수했다.[1][2]
2. 생애[편집]
2.1. 일본 정벌 이전[편집]
김방경의 어머니가 김방경을 뱃속에 잉태하였을 때 여러 차례 신선세계에서 구름과 노을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김방경의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며 “아기가 반드시 신선 세계에서 내려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한 고집 했는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길바닥에 드러누워 울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바닥에서 이랬는데도 지나가는 소와 말이 어린 김방경을 피해서 지나가서 주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김방경이 태어나서 조부 김민성의 집에서 자랐는데 뜻에 조금만 마땅치 않고 노여운 일이 생기면 반드시 거리에 나가서 울었으나 오가는 소와 말이 그를 피해서 다녔으므로 사람들이 이상한 일이라고 여겼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1229년 음서로 산원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1248년 서북면 병마사에 임명되어 위도(葦島)[3] 에서 1차례 소규모 접전 끝에 몽골군을 몰아내는 전공을 세웠다. 위도에 주둔할 당시 위도에는 경작할만한 땅이 10여 개 정도 있었으나 조수물이 들어와서 경작을 못하고 있었는데 김방경은 방파제를 쌓고 이 땅에 파종을 하도록 시켰다. 그래서 처음에는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으나 가을이 되자 추수한 식량이 많아서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또한 위도에는 샘이나 우물이 없어서 식수를 구하기 위해 백성들이 육지로 나갔다가 몽골군에 잡혀가는 일이 많았는데 김방경은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다 저장해 뒀다가 그 물로 저수지를 만들어서 식수 걱정을 없앴다. 행정 수완도 제법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 1263년 지어사대사(知御史大使)에 임명되어 진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쳤으며 이 공로로 상장군에 제수되었다.
모함을 받기도 해 좌천되기도 했으나 다시 지어사대사로 임명되어 삼별초 토벌에 앞장섰다. 삼별초의 난 당시 함락 직전이던 광주와 나주를 지켜내고 1273년 탐라도에서 농성 중이던 삼별초 잔존 세력까지 모조리 일소하며 이에 문하시중에 올랐다. 삼별초 토벌 당시 진도 해협[4] 에서 그 곳의 심한 물살에 휘말린데다가 대장선에까지 삼별초군이 뛰어올라 달려들었으나 김천록[5] 이 단창으로 이를 저지해 위기를 모면했다. 직후 "물고기밥이 될지언정 어찌 반적의 손에 죽겠느냐"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 했으나 부관들이 말렸고 부상당해 쓰러진 병사들이 김방경을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분투했다. 김방경은 생각을 고치고 병사들을 지휘했는데 안색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는 간신히 장군 양동무가 몽충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진도를 함락시킬 때는 원종의 명을 받고 삼별초가 세운 왕인 승화후 왕온을 구출하려 했으나 그의 가문에 원한이 있었던 홍복원의 아들 홍다구[6] 가 먼저 왕온을 붙잡아 살해했다.[7]
2.2. 1차 일본 정벌[편집]
1273년 삼별초의 난이 진압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원나라의 요구로 합포현(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에 성을 쌓게 되었는데 이 때 감독관으로 가게 되었다. 1274년 10월 1차 원정군이 출발하였고 도독사로 임명된 김방경은 박지량, 김문비 등과 함께 고려군 8000여 명을 이끌고 원나라 정벌군과 함께 출진하였다. 1273년 10월 19일 모모치바라에 상륙한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은 사와라(삼랑포)를 넘던 도중 기쿠치가 이끌던 일본군을 맞았으나 근처에 있던 원나라군과 합심해 격파하였다. 이 때 <고려사>에는 고려군은 분전하였으나 원나라 병사들은 도망갔는데 이것은 원나라군이 전진만 외치는 김방경을 질투해서라고 적혀 있다. 이 때의 승리 이후 김방경은 쪽수가 밀려도 지금 여기서 싸우면 배수진 친거라 이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훈둔은 병력들이 지친 상황에서 더 들어갈 수 없다고 반대했다. 이 때 김방경의 나이는 62세이며 당시 정벌 동안 고려인이지만 몽골의 앞잡이로 유명한 남양 홍씨(당홍) 홍다구와의 마찰이 매우 잦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몽골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
1차 정벌의 실패 후 고려로 복귀한 김방경은 원나라 간섭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충렬왕의 명령으로 성절사[9] 에 임명되어 수 차례 원나라를 왕래하고 고려의 뜻을 전하였다. 1276년 7월에는 쿠빌라이 칸의 생일 축하 사절단으로 가기도 했다. 이 때 김방경은 호두금패라는 물건을 하사받는데 원나라 문무 2품 이상이 차는 상징으로 고려인 중에서는 유일하게 받았다고 한다. 쿠빌라이 칸이 그를 좋게 보았는지 생일 잔치 당시 멸망한 남송의 황제보다도 높은 자리에 앉혔다고 하는 루머가 있지만 실제로는 조금 다르다. 정확히는 잔치 자리에서 서열대로 앉혀졌는데 이 때 김방경 바로 위 서열이 멸망한 남송 황족 중에 직위는 왕에 해당하는 자였으며 남송 황제도 아니고 그보다 윗자리를 받지는 못했다.[10]
2.3. 2차 일본 정벌[편집]
1277년 위득유, 노진의, 김복대[11] 가 사람을 모아 김방경과 그의 가족 및 측근들을 모함했다. 당시 몽골에서 고려를 제어하기 위해 보낸 다루가치를 죽여 역모를 꾀한다고 훈둔에게 익명의 투서를 보내 모함한 것. 결국 왕에게까지 일이 알려져 충렬왕은 이를 의심스러워 하면서도 위득유 일당, 김방경과 그 측근들을 소환하여 심문을 하게 되었다. 심문 중 위득유 일당에 동조했던 자들 중 일부가 위득유의 강압에 못 이겨 김방경을 무고했다며 자백하자 위득유가 뒤늦게 김방경이 자신에게 "관군을 다 죽이고 해도(海島)[12] 에 들어가 머물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류경[13] 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냐"고 강경하게 따져 묻자 위득유 일당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고 김방경의 부장 김천록이
"너희들은 개돼지같은 놈들이다. 진도(珍島)를 칠 때에 너희 두 사람이 군법을 어겨 중찬(中贊)[14]
이 너희 장물을 몰수하여 관에 들였는데 너희들은 이를 원망할 뿐이다. 이제 거짓 말을 꾸며서 대신(大臣)을 모함하고자 하니 하늘이 너희를 죽이지 않으면 하늘이 없다 할 것이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라며 크게 꾸짖으니 김복대 등의 나머지 일당들도 무고를 실토하며 발을 빼버렸고 이에 충렬왕은 김방경이 결백하다고 판단해 그를 석방시켰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나 했지만 홍다구가 다시 이 일을 꺼내들어 기어이 김방경을 심문대에 세워서는 잔혹하게 고문을 한다. 김방경을 심하게 매질하자 우연히 고려에 왔던 원나라 관리가 이를 보고 너무 심하다고 말렸고 그래도 고문을 하자 "그 이상 하면 황제께 직접 아뢰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멈췄는데 그 후 다시 심문을 하고 누명을 씌우는 등 끝까지 처리하려고 했다.
"다구는 쇠사슬로 그의 머리를 감고 못질을 할 것처럼 하며, 매질하는 자에게 그 머리를 치라고 소리쳤다. 종일 알몸으로 서서 추운 날씨에 살이 얼어서 먹장빛처럼 되었다."
《고려사》 김방경 열전
○2월. 왕이 흔도(忻都)·홍다구(洪茶丘)와 함께 김방경(金方慶)을 재차 국문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소국이 상국(上國)을 하늘과 같이 떠받들고 어버이처럼 사랑하는데, 어찌 하늘을 배반하고 어버이를 거슬러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거짓으로 자복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홍차구가 기필코 그를 자복시키고자 참혹한 형을 더하니, 몸에 멀쩡한 피부가 없었고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ㅡ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왕이 홍차구 등과 김방경을 다시 국문하고 유배보내다
그럼에도 거짓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자 홍다구는 충렬왕을 협박해 "자백하면 귀양으로 끝내겠다"라는 말을 하게 하지만 김방경은 거절했다. 결국 그는 대청도, 그의 아들 김흔은 백령도로 각각 귀양을 가게 된다.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신이 군졸 출신으로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이몸이 짓이겨 없어질지라도 국가에 보답하기에 부족합니다. 어떻게 저의 몸을 아껴서 허위로 자백하여 나라를 저버리겠습니까? 홍다구야! 나를 죽이려거든 바로 죽여라. 나는 정의에 어긋나는 일로 너에게 굴복하지는 않겠다."
ㅡ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왕이 홍다구 등과 김방경을 다시 국문하고 유배보내다
이에 갑옷을 숨긴 일만을 죄로 삼아 김방경을 대청도(大靑島)에, 김흔(金忻)을 백령도(白翎島)에 유배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유배를 갈 때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ㅡ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왕이 홍차구 등과 김방경을 다시 국문하고 유배보내다
○장군(將軍) 인후(印侯)를 원(元)에 보내어 김방경(金方慶)을 유배 보내었다고 아뢰었다.
ㅡ 1278년 2월 미상(음) 원에 김방경을 유배보내었음을 보고하다
하지만 쿠빌라이 칸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홍다구와 위득유 등을 소환하여 꾸짖고는 곧바로 김방경을 풀어주라 이른다. 그러나 정작 홍다구나 훈둔은 큰 벌을 받지 않았는데 이유는 홍다구와 훈둔이 당시 원나라 입장에서 고려를 관리하는데 매우 유용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홍다구가 작정하고 김방경을 처리하려고 했던 일인데 이를 겨우 쿠빌라이 칸이 직접 중재하면서 넘어간 것이다.
1280년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지만 믿을건 김방경밖에 없던 충렬왕은 거절한다. 이 때도 고려군의 물자 준비를 준비하던건 김방경이었는데 원나라 식으로 만들려고 했던 배들을 전부 고려 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1281년 2차 일본 정벌군의 고려군 도원수로 임명되어 고려군을 이끌고 공을 세운다. 이후 전염병[15] 과 악조건[16] 으로 여몽연합군이 밀리게 되자 철군을 고민하던 때에 "우린 너네 왕이 3달이면 된다고 해서 3달 먹을 쌀 가져 왔는데 지금 도망가자고? 아직 1달 먹을거 남았고 남송 병력이 오면 저 일본군 놈들 잡아 족칠 수 있으니까 기다리셈"이라며 강력 제안해 퇴각을 막았다. 하지만 뒤늦게 온 남송 병력은 농기구나 들고 온 잡병들이 전부였던데다 병력들이 도착하고 3일 뒤에 태풍이 닥쳐 수군의 절반 가량이 쓸려가면서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전쟁이 끝나고 말았다. 이 때 나이는 68세였다.
김방경ㆍ김주정ㆍ박구ㆍ박지량ㆍ형만호 등이 일본군과 힘껏 싸워 일본 군사의 머리 3백여 급을 베었다. 일본군이 돌진하여 오니 관군이 무너져 다구가 말을 타고 달아났는데, 왕만호가 다시 측면에서 공격하여 50여 급을 베니, 일본군이 마침내 불러가고 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고려사》
86세 나이인 1298년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이 시기 고려의 암흑기를 지탱한 유일한 위인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활약이 많았다.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89세였는데 현재 기록에 남아있는 고려인 중에서 최고 장수한 사람이다.[17] 사후 1307년 공로를 인정받아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18]
이제 이왕 일본과 대적한 이 중에, 족히 우리나라 민족의 명예를 대표할 만한 거룩한 인물을 구하건대, 고대에는 두 사람이니, 첫째는 고구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요, 둘째는 신라 태종왕(太宗王)[19]
이요, 근대에는 세 사람이니, 첫째는 김방경(金方慶)이요, 둘째는 정지(鄭地)요, 셋째는 이순신(李舜臣)이니 모두 다섯 사람이라.
- 단재 신채호, <이순신전>에서
3. 대중매체에서[편집]
여몽연합군의 고려군 대장으로 참전했기 때문인지 일본에서도 유명해서 칭기즈 칸 게임 등에서 고려의 장수로 나온다. 문제는 고증을 잘못 해서 열전에 삼별초의 장수로 분류되는데 실제 김방경은 삼별초를 토벌한 장수다.
원조비사에선 유저 시나리오의 장수들 중 그나마 가장 강한 장수. 지휘가 B 정도였던가... 이 게임은 능력치가 5 종류(A, B, C, D, E)뿐이라 C 이상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장수이니 말이다. 징기스칸 4에서 고려 최강의 장수(...)의 자리는 김통정에게 빼앗겼다. 능력치는 정치 43, 전투 54, 지모 51에 특기는 내정 특기 등용 하나뿐이고 전투에 관련된 특기는 하나도 없다. 병과 특성도 보병 B, 궁병 D, 기병 C, 수군 C로 특별할 게 없다. 그나마 플스판에선 전투가 62로 올라갔지만 사실상 이 게임의 고려 장수 중 부당할 정도로 피해를 본 장수 중 하나로, 일본 원정에 참여한 장수라는 이유만으로 저평가됐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노우에 야스시[21] 의 소설 <검푸른 해협>[22] 에서는 원종, 충렬왕과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63년에 나온 이 소설은 미군정하의 일본을 몽골 지배하의 고려에 빗대어 냉전 때 군사기지화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한 작품이지만, 작가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원사와 고려사를 탐독하는 것은 물론 한국에도 세 번 방문했다고 한다. 김방경은 냉혹한 매국노인 홍다구와 대립각을 세우는 열렬한 충신으로 등장해서 어떻게든 원나라가 고려에 끼치는 피해를 최소화하고 고려를 살아남게 하려고 애를 쓴다. 소설의 형식이 굉장히 특이한데, 사료를 거의 나열하다시피 하면서 사이사이에 창작신을 끼워넣는 식이다.
드라마 무신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일본의 쓰시마가 주인공이 되어 여몽연합군을 막아내는 내용을 다룬 일본의 만화 앙골모아 ~원구전투기~에서는 두뇌와 용맹이 출중한 중간보스로 등장한다. 담당성우는 마츠야마 타카시. 주인공이 이끄는 쓰시마군 잔당에 의해 자식을 잃어도[23] 냉정함을 확실히 유지하고 야간기습을 당한 상황에서 소리만 듣고도 적들의 수를 바로 알아차리는 등 능력있고 현명한 장군으로 묘사된다. 한편 원정군 부원수씩이나 돼서 직접 칼 들고 단독으로 쓰시마군을 사냥하려고 날뛰는 유복형을 여진족 놈이라 부르며 불쾌하게 생각한다.[24] 그가 이끄는 고려군 또한 효율적인 집단 전술을 통해 쓰시마 도주의 소규모 군대를 간단히 분쇄해버리는 등 강력한 모습을 보인다.
4. 평가[편집]
충직하고 근엄했다고 하나, 일본원정 도중 고려군들이 일본의 민간백성들에게 저지른 약탈과 겁탈과 같은 큰 잘못들을 고려군의 대장된 자로서 막지 못해 민심을 잃었다고 한다.[25] 그래도 사실 이 시대의 인물들 중 최고의 인물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로 통솔력은 물론 정치적 수완까지 고루 갖춘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하지만 삼별초 토벌군의 지휘관을 맡았던 탓에 삼별초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몽골의 앞잡이라고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몽골를 이길 힘이 없었고 몽골이 시키는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또 몽골은 트집을 잡아 고려를 침략할 테고 그러면 죄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갈 테니 김방경도 나라와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26]
오히려 김방경은 대몽항쟁 때 위도에서 몽골군을 물리치고 고려의 백성들을 보호한 전공도 있으며 이후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준비 당시 매우 혹독하기 그지없는 준비를 막고자 몽골과 고려 조정에 목숨을 건 충언을 올리기도 했다. 실제로 부원배들한테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고려 중기를 빛낸 충신이었지만 김경손 장군과 더불어서 정적들이 굉장히 많았다. 정치는 전쟁의 도구라는 점을 볼 때 김경손처럼 숱한 목숨을 뺏길 뻔한 매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충신이다. 또한 삼별초 진압 내내 한때 같이 싸운 동지들이자 같은 동족들과 싸우는 것 때문인지 심기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5. 기타[편집]
한편으론 김방경이 성년으로 있을 시점에 드라마 무신의 주인공을 난신적자인 김준보단 충신인 김방경으로 하는 게 더 나을 뻔했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못해도 1년 이상의 분량을 찍어야하고, 제작비 문제와 그로 인해 시청률 문제가 역시 크다는 것이다. 고증도 어느 정도 나아지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는게, 삼별초를 왜구와 결탁했다는 설정을 넣다가 또 종친회니 뭐니 하면서 시끄러워진다. 시청률 면에서도 문제인데 알다시피 교과서나 역사서에 나오는 것대로 충실하면 사람들이 너무 지루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김준이 주인공인 무신보단 훨씬 고증면에서 좋아진다는 것이다. 김방경과 관련해서 사극을 찍자면 이렇다.
- 1) 귀족으로 태어났으나 고려왕조가 신라계의 멸시를 꽤 오래하고 그로 인한 신라부흥운동과 관련된 이비 폐좌의 난과 관련해서 가문조차도 친인척이 연루되어 반역자로 찍히나 이내 부친과 본인이 관직을 얻어 백성들과 병사들에게 귀감이 되었던 인물로 훌륭한 귀족들이 있다는 이야기
- 이것은 불멸의 이순신에 이순신 가문의 설정과 매우 비슷하지만 부친 김효인의 친인척이 이비 폐좌의 난 등과 연루되었다는 일각의 제기가 있긴하나 어디까지나 일각이다. 하지만 본관이 경주가 아닌 안동이라는 점을 봤을 때는 실제 역사는 몰라도 사극에선 그런 설을 제기할 법도 하다. 적어도 무신과 같이 아버지가 만적의 난에 연루되어 아버지는 죽고 이후 아들이 승려가 되어 이후 노비가 되어 호국영웅이 된다는 이야기 따위보단 낫다.
- 2) 권력 다툼으로 외지에 쫓겨나고, 죽을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고생함.
- 무신과 같이 주인공의 고생담과 암살 떡밥을 넣다가 암살로 죽는 것을 넣는데, 죄다 불법행위로 인한 것이었다. 암살 또한 뇌물을 비롯해 온갖 부정한 방법과 관련한 다툼 끝에 죽었다. 김방경은 진짜로 권신들한테 찍혀 정계에 복귀를 하지 못했고, 그러한 불법행위와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부원배나 삼별초의 난 때 반역자들에게도 죽을 위기를 실제로 수차례나 넘겼다.
- 3) 신라황족의 후손으로 고려 역시 신라 후손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는 설정과 삼국시대는 물론 신라만도 못한 여몽전쟁때 고려를 개탄하나 자신을 돕던 일연의 이야기로 고려의 충신으로 남음.
- 4) 복귀하여 2인자가 됨
- 5) 내우외환으로 인한 고난을 겪음. 그리고 모두 극복 그리고 남은 여생을 무사히 마침.
- 몽골군의 침입과 반란군의 진압과 일본 원정전에 활약 등등으로 참소를 당하나 끈질기게 버틴 무인인 것은 맞다.
- 6) 왕조의 사직을 그나마 연명했던 고려 중기 최고의 충신
등등이 있다. 실제로 드라마 무신에서도 김방경 장군이 이미 성년이 된지 오래임에도 불구하고 나와야 하는데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고, 그리고 드라마 무신에서 김준이 했던 바깥에서 나가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실은 김방경 장군이 그 몫을 대신했다. 김방경 장군뿐만 아니라 후일 김방경 장군의 편에 선 사람들 죄다 김준이 했던 좋은 것을 대신 다 했고, 고려사 류경 열전과 고려사 김방경 열전만 봐도 드라마 무신에 나오는 김준의 왜곡이 꽤 황당한 편이다.
진주 대첩의 영웅인 충무공 김시민이 김방경의 12대손이며 백범 김구가 24대손이다.
일본쪽 위키에는 원정 도중에 쿠빌라이가 금지한 양민학살을 여러 차례 자행한 무법자로 기록되어있다. 일본 위키에서는 入對馬島、撃殺甚衆라는 고려사의 기록을 예로 들지만, 여기서 衆은 백성 외에도 무리라고도 번역이 된다. 따라서 이 기록만 가지고 김방경이 양민학살을 저질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팔번우동기(八幡愚童記)이라는 기록 역시 김방경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하고는 있으나 기록의 신빙성이 의심된다. 팔번우동기는 하치만신에 대해 가르치는 아이들용 교과서인데 출전부터가 불명인데다가 실제로 거짓으로 판명된 일부 기록들도 있다. 가령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 대표적이다. 저런 기록들은 실제로 저랬다기보다는 그냥 '옛날옛날에 무시무시한 마녀가 살았대.'라는 수준의 기록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집안은 일본과는 참 악연이 깊다. 김방경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때 고려군의 대장으로 임명되어 일본을 쳤고 김방경의 외현손 박위[27] 는 고려말 경상도에 침입한 왜구 토벌을 통해 명성을 쌓았으며 1390년 창왕 2년에 제1차 대마도 정벌을 지휘 했다. 김방경의 12대 후손인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3800여 명의 수비군으로 3만 명의 일본군 중 2만의 일본군을 몰살시켰고 24대손인 김구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으로 홍커우공원 의거 등을 조직하며 일본의 간담을 서늘케했다.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때 일본이 저지른 악행만을 두고서 볼때는 그야말로 충신이자 구국의 영웅들을 배출한 충신가문이라 할 수 있다.[28] 물론 김자점의 존재 때문에 빛이 바랜 감이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