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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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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대구광역시
대구의 옛 명칭으로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 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다. 즉, 원래는 이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가 있었으나,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자로 그 음을 빌려 표기하다가 가장 널리 쓰이는 '대구', '달구벌'이 정착한 것이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연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1] , 신라의 계림 사상에서 기원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했다는 연구자료도 있다. 즉, '닭의 벌판'을 뜻하는 '닭벌'을 음차한 게 '달구벌'.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구시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다.[2] 다만, '달구' 또는 '달구화'와 같은 지명이 오늘날 확대된 대구광역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대구광역시 중구와 달서구 성서, 서구 및 금호강 이남의 북구에 해당한다.
대구광역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과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유물의 존재로 말미암아, 삼한시대 혹은 그 전부터 군장 국가 형태의 소부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대 삼한시대에 들어서는 진한의 소국인 다벌국, 혹은 달구벌국 혹은 탁국(卓國)이었으며, 서기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44년 조분 이사금 때 달성(현재 달성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261년 첨해 이사금 때 완공되었다. 달성은 경주 월성과 비슷한 구조였으며, 해자를 포함했다. 달성 완공과 함께 나마 극종(奈麻 克宗)을 성주로 임명했다. 이후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는 9주 5소경 중 양주 소속이었다. 이 때 지금의 대구 땅에는 위화군(喟火郡, 수성구), 위화군의 소속 영현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중구), 팔거리현(八居里縣, 북구 칠곡지구), 다사지현(多斯只縣, 달성군 하빈면), 설화현(舌火縣, 달성군 화원읍)이 있었다.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 팔거리현은 팔리현(八里縣),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으로 고쳤다.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이 이 때 많이 등장했지만 신라 때는 이전 지명과 경덕왕이 고친 지명이 혼용되어 달구벌, 달벌 등의 지명도 계속 사용되었다.[3]
참조
689년 신문왕이 이 곳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장보고군이 민애왕의 신라 관군을 상대로 20배 병력을 격파한 달벌대전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
후삼국시대에는 수창군 호족 이재가 대구 지역을 다스렸다.
대구광역시의 지명 문서들에 가면 볼 수 있는 태조 왕건의 굴욕이 펼쳐졌던 곳이다. 한 눈에 보려면 여기로.
대구현 지역은 경산부(현 성주군)에 속했다. 수창군을 수성군(壽城郡)으로 고쳤고 지금의 수성구로 이어졌다.
1. 삼한시대 ~ 남북국시대[편집]
대구의 옛 명칭으로는 다벌(多伐), 달벌(達伐), 달불성(達弗城), 달구벌(達句伐), 달구화(達句火), 대구(大丘) 등이 있다. 모두 어딘가 비슷한데 한자의 뜻과는 관계 없는 고유어의 음차이다. 즉, 원래는 이 지역을 부르던 고유어가 있었으나,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라 한자로 그 음을 빌려 표기하다가 가장 널리 쓰이는 '대구', '달구벌'이 정착한 것이다. 달구벌이라는 말의 연원에 대한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에 '달구'의 '달'에 "높다", "크다"의 의미가 있고[1] , 신라의 계림 사상에서 기원한 새로움 혹은 철기 문화의 상징인 '닭'에서 유래했다는 연구자료도 있다. 즉, '닭의 벌판'을 뜻하는 '닭벌'을 음차한 게 '달구벌'.
달구벌은 대체로 '크고 넓은 벌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대구시를 상징하는 새는 독수리다.[2] 다만, '달구' 또는 '달구화'와 같은 지명이 오늘날 확대된 대구광역시 전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대구광역시 중구와 달서구 성서, 서구 및 금호강 이남의 북구에 해당한다.
대구광역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엄청난 규모의 지석묘(고인돌)군과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 유물의 존재로 말미암아, 삼한시대 혹은 그 전부터 군장 국가 형태의 소부족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고대 삼한시대에 들어서는 진한의 소국인 다벌국, 혹은 달구벌국 혹은 탁국(卓國)이었으며, 서기 108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244년 조분 이사금 때 달성(현재 달성토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261년 첨해 이사금 때 완공되었다. 달성은 경주 월성과 비슷한 구조였으며, 해자를 포함했다. 달성 완공과 함께 나마 극종(奈麻 克宗)을 성주로 임명했다. 이후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중시되었다.
통일신라시기에는 9주 5소경 중 양주 소속이었다. 이 때 지금의 대구 땅에는 위화군(喟火郡, 수성구), 위화군의 소속 영현으로 달구화현(達句火縣, 중구), 팔거리현(八居里縣, 북구 칠곡지구), 다사지현(多斯只縣, 달성군 하빈면), 설화현(舌火縣, 달성군 화원읍)이 있었다.
경덕왕 때인 757년, 전국 지명 한화정책을 시행하면서 위화군은 수창군(壽昌郡), 달구화현은 대구현(大丘縣), 팔거리현은 팔리현(八里縣), 다사지현은 하빈현(河濱縣), 설화현은 화원현(花園縣)으로 고쳤다. 지금까지 사용하는 지명이 이 때 많이 등장했지만 신라 때는 이전 지명과 경덕왕이 고친 지명이 혼용되어 달구벌, 달벌 등의 지명도 계속 사용되었다.[3]
참조
689년 신문왕이 이 곳으로 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기존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장보고군이 민애왕의 신라 관군을 상대로 20배 병력을 격파한 달벌대전이 이 곳에서 일어났다.
후삼국시대에는 수창군 호족 이재가 대구 지역을 다스렸다.
2. 고려[편집]
대구광역시의 지명 문서들에 가면 볼 수 있는 태조 왕건의 굴욕이 펼쳐졌던 곳이다. 한 눈에 보려면 여기로.
대구현 지역은 경산부(현 성주군)에 속했다. 수창군을 수성군(壽城郡)으로 고쳤고 지금의 수성구로 이어졌다.
3. 조선 ~ 대한제국[편집]
조선시대에서는 '대구'의 한자가 공자의 이름인 구(丘)와 같아 이름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영조 때는 반려되었으나, 정조 초기 1783년 대구(大邱)로 한자를 바꿨는데 이 역시 순조 때까지도 함께 쓰이다가 이후 정착했다고 한다. 현재는 대구(大邱)로만 쓴다.
중국어권에서는 간혹 구(邱)와 구(丘)를 헷갈려 "大丘"로 쓴 사례도 있다. 둘 다 뜻이 언덕이고 현대 중국어 발음에서도 발음(qiu)과 성조(1성)가 같다. 일본어로는 그 쪽의 외국어 표기법에 따라 가타카나로 "テグ(大邱)"로 쓰는데 간혹 일반인의 경우 한자를 헷갈려서 글자꼴이 비슷한 "대저(大邸)"로 쓰는 사례도 발견된다.
대구의 진산(鎭山)인 달성산의 명칭은 옛 지명 '달구벌'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대구광역시로 편입된 달성군이 정식 행정구역 명칭으로 남아 있어 도시명의 유래를 잇고 있다.
1419년(조선 세종 원년) 대구현[4] (중구, 달서구 성서, 서구, 북구 중 금호강 이남[5] )·수성현(시지를 제외한 수성구, 남구 일대)·해안현(동구 동촌, 공산)·하빈현(달성군 하빈면, 다사읍 일대)을 통합하여 대구군으로 승격하였다. 이후 1601년과 1685년에는 화원현(달서구 월배, 달성군 화원읍, 옥포면)까지도 대구로 통합. 같은 시기에 풍각현도 대구로 통합되었지만 구 풍각현은 구한말 월경지 정리 개편으로 청도군에 편입되었다.
1466년 대구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01년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다. 경상감영은 역사가 참 복잡한데, 조선 초기에는 경주부에 있었다가, 태종 7년(1407년)에 경상도를 낙동강을 기준으로 좌/우도로 나누면서, 좌도는 경주부, 우도는 상주목에서 관할하도록 했다. 그러다 여러 가지 부작용 때문에 다시 경상좌/우도를 하나로 합치며 경상감영을 상주목에 두었다. 그 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분리됐다가 합쳐지기를 반복하면서 성주의 속현 팔거현(현재 칠곡군), 대구도호부, 안동대도호부 등으로 이전하면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9년(1596년) 대구도호부에 경상감영이 세워졌는데, 왜군의 침략으로 인해 대구도호부는 아예 개발살이 나고(...) 감영은 안동대도호부로 옮겨갔다. 그러다 1601년, 안동대도호부가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시 한 번 대구도호부에 세워졌고 그 후로 경상감영은 쭉 대구도호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구한말 대구 일대의 행정구역 상황. 현재의 청도군 각북면, 각남면, 풍각면(이상 구 풍각현 지역)까지도 대구부 관할에 있었으나, 1906년 청도군으로 편입되었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23부제로 개편되었을 때 대구부 소재지가 되었다.[6] 1896년 다시 13도제로 바뀌면서부터는 경상북도 관찰사 소재지가 되었다. 1906년 풍각면, 각남면, 각북면을 청도군으로 이관했다. 또한 현풍군의 낙동강 북부 지역을 고령군으로 이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