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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시/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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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개성시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개성은 서울, 평양, 경주와 더불어 한국사를 대표하는 4대 고도로 한국 중세사의 중심지이다.[1]
송악(송도, 송경)은 옛 개성을 지칭하는 별칭이다. 옛 고려왕조 400여년간의 수도이자 조선시대 대표적 상업도시였다. 그리고 남북분단 초기 대한민국의 실지배 영토였으나 6.25 전쟁 이후 북한에 빼앗긴 도시로, 현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비운의 도시인 곳이다.
2. 삼국시대~후삼국시대[편집]
원래 '개성'과 '송악'은 비록 가깝지만 엄연히 다른 고을이었다. 고려 이전 원래 개성은 대한민국 이북 5도 행정구역상 개풍군 서면 개성리(開城里)를 중심으로 한 개풍군 서부 지역이었고, 고려의 도읍 이래 개성시내 및 개풍군 동부 지역이 고려 이전의 송악에 해당했다.[2] 최초에는 고조선의 영역이었다가 위만조선 멸망 후 전한의 진번군에 속하게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현지 주민들의 거센 반항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폐지되어 낙랑군 남부도위가 설치되었다가 동연이 대방군을 설치하면서 그 영역으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백제가 근초고왕대 대방군으로부터 빼앗아 주된 북방 군사 거점으로 운영한 것으로 유력하다. 광개토대왕 시절 고구려가 백제로부터 빼앗게 되면서 처음으로 고구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아신왕이 온갖 수단을 다해 왜국과 연계해서 어떻게든 수복했었는데, 백제가 의외로 충청북도 충주 일대와 강원도 영서 지역보다 이 개성 일대를 우선 수복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을 보면 이미 5~6세기 백제-고구려의 쟁패 시절부터, 한성 일대 보호에서 개성 지역이 대단히 중요했음[3] 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서기 475년 장수왕이 위례성을 함락해서 개로왕을 죽인 사건 이후 백제는 두 번 다시 개성 지역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되며, 이후 개성 일대는 고구려가 668년에 망하기 전까지 고구려의 중요한 거점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후 나당전쟁 후반부에는 격전지였고 결국은 남북국시대 후기신라의 영향력 아래 들어갔고, 690년대 초반 즈음에 신라가 군진을 정식으로 설치하고 군관을 파견하면서 패서 지역 중에선 가장 먼저 신라의 직접 지배령이 된다. 그러나 당나라가 여전히 732년까진 이곳의 신라 영유권을 공식적으론 인정하지 않았기에, 신라는 옛 백제 지역과는 달리 개성 및 그 이북 지역에는 직접 지배력을 관철하진 못하였다. 732년 이후부터는 신라가 서서히 패서 일대를 개척하게 되는데, 그 시기에 개성과 송악 둘 다 신라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해 있었다.[4] 둘 중 '개성'은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동비홀(冬比忽)'이었다가 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 한화 정책에 따라 개성군(開城郡)으로 바꿨으며, '송악'은 '부소갑(扶蘇岬)'이었다가 757년 개성과 마찬가지로 경덕왕 때 송악으로 고쳤다.[5] 694년 신라 효소왕이 송악에 성을 쌓았고, 703년에 성덕왕이 개성(開城, 개풍군 서면 개성리)을 쌓았다. 이렇게 신라 때는 두 성이 따로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로, 통일신라가 이 당시 개성을 치소로 삼아 구축했던 서북방 방어선은 옛 근초고왕 백제의 대고구려 방어선과 거의 일치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신라는 근초고왕 시절 백제와는 달리, 황해도 서해안 일대에도 군진을 설치해서 당나라와 활발하게 무역하여 경제적 이익까지 챙겼다는 점.[6]
후삼국시대 왕건 가문의 기반지역으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해상 호족으로 유명했고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 귀부하면서 궁예가 고구려계 호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태봉(후고구려) 건국 초기에 잠깐 수도로 삼았다. 이것이 개성 전성기의 미약한 시작. 이 시기 개성은 훗날의 황해도 지역과 함께 패서(浿西) 지방으로 묶였고, 궁예는 패서 지방 주민들의 고구려 유민 의식을 건국의 정당성으로 삼았기에 그 도움을 얻으려고 처음에 개성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궁예는 나라를 세우고 몇 년이 지나자 왕건 가문을 비롯한 패서호족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 유민의식과 관련성이 적은 새로운 근거지 철원군으로 천도했다.[7] 그러나 이것이 패서 호족 세력의 반발을 샀고, 결국 918년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웠다. 그리고 건국 이듬해인 919년에 철원에서 왕건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다시 천도했고 동시에 왕궁과 시전(재래시장)을 건설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개성의 최전성기 개경 시대가 시작되었다.
3. 고려시대[편집]
자세한 내용은 개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조선시대[편집]
조선 건국 직후에는 수도의 위상을 유지했으나, 태조 3년 신왕조의 확립 기반을 위하여 남쪽의 한양으로 이전했다. 이 때 나성 안쪽에 다시 내성(1391~1393, 반월성)을 쌓았다. 수도가 바뀌었으므로 개성을 중심으로 한 고려시대의 경기를 폐지하고 남쪽 한양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기도 행정구역을 만들었다.[8] 이 때 개성은 신설 경기도 북쪽 끝으로 들어갔다. 정종과 태종(조선) 초기 6년간 일시적으로 개성으로 환도했는데 이 때 제2차 왕자의 난이 조선의 수도 개성에서 발생했다.
태종 5년 한양으로 이전하며 개성과 한양의 양경 체제는 형식상으로 남게 된다. 세종 20년 개성유후사를 개성부로 개편하면서 계기로 양경 체제는 완전히 종식되지만 수도 한양을 제외한 경기도의 행정을 책임지는 경기 관찰사를 개성 부윤이 겸하게 하여 수도 한양을 보좌하는 주요한 배후 도시로서 무시할수 없는 위상을 유지했다. 경기도 중심도시로서 경상도의 경주나 진주, 전라도의 전주에 비견되는 위상이었다. 한양과 사실상 같은 권역으로 취급되며 성종~연산군 연간엔 개성에서 연줄있고 재주있는 이들은 진즉에 한양으로 건너와서 개성에 남은 사람중에는 인재가 드물다는 인식이 공공연히 돌만큼 접근성이 좋았다. 게다가 학당, 사원 같은 고려시대부터 구축된 교육, 전승 인프라가 풍부해 16세기 이전까진 상당한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16세기 들어 조선의 중앙집권적 행정체계가 완전히 정착하고 사화와 당쟁으로 중앙의 관인층이 각 지방으로 흩어져 서원을 통한 자체적인 교육과 전승 체계를 마련하면서 개성과 타 지방에 가지는 이점은 퇴식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란 미증유의 재난으로 도시가 개발살이 나면서 학문교육 시설도 재가 되어버렸고 이후에 인프라가 제대로 복구되지 못해 제2도시로서 개성의 이점은 완전히 사라졌다.
서경덕(徐敬德), 최립(崔岦), 차천로(車天輅), 마상원(馬尙遠) 같은 걸출한 문인들을 배출한 15~16세기의 영예도 끊어져 버렸다. 과거 누려온 메리트가 모두 사라지고 자부심을 드높일 문인들도 영 배출되지 않은 상실감과 박탈감, 피해의식은 조선 조정이 국초부터 고려수도인 개성주민들을 차별하고 소외시켰다는 개성소외론이란 대중사관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개성의 떨어진 자존감은 18세기에 노론 낙론 종장들에게 수학한 유학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나서야 회복된다.
이와 별도로 태조 왕건의 선조대부터 융성했고 고려왕조 500년간 수도로 기능하며 원래 종사자가 많았던 상업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져 송도상인은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간혹 개성인들이 고려를 멸망시키고 왕씨 몰살을 주도한 조선 왕조에 혐오감을 느꼈다는 이야기 요즘 인터넷상에서 만연한 편인데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9] 19세기 선교사들의 증언 역시 구한말 특유의 상황과 지역감정을 타고 조선 중기부터 정설인양 여겨지게 된 개성소외론에 경도된 일부 개성 백성들의 발언이 묘하게 맞물린 것이지 500년 내내 차별당한 적도 없고 500년 내내 개성 출신들이 조선과 한양에 악감정을 품은 것도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물론 수도 지위를 빼앗겼다는 데에서 오는 박탈감 등은 있었을 수 있지만 이는 왕조의 교체와 수도 이전에서 오는 자연적인 감정일 뿐이지 조선 왕실이 주도적으로 개성을 차별하고 탄압한 데에서 온게 절대 아니다. 16세기 이후 개성이 역사적 중심에서 멀어진 것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시대와 시차가 벌어지면서 발생한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무슨 개성에 대한 차별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으로나 비명문가를 차별하여 영호남을 비롯한 한양이 아닌 모든 지역 출신은 비명문가였기 때문에 출세가 어려운 점이 지적된 정도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지역'에 대한 차별이 아니고, 가문에 대한 차별이다. # 조선에서 대놓고 역사성이나 경제성을 두고 폄하당한 곳은 아무곳도 없었고, 오지인 함경도 마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점이나 백두산 등이 중시되기도 하였다.
2010년대 들어 이러한 낭설이 퍼지게 된 이유는 왕씨 몰살, 성계탕, 두문동 72현 전설 등 일부 사실과 다량의 역사적 왜곡이 가미된 자극적인 야사들이 인터넷을 통해 퍼지게 되었다는 점, 현대 남북분단으로 인해 개성에 대한 실상 파악이 어려워졌다는 점, 그리고 북한의 현 중심지인, 한양 위주 명문가의 서북 지방에 대한 비명문가라는 이유[10] 의 정치적 차별을 같은 북한령이라는 이유로 개성까지 확대해 일반화해서 바라보려는 시각 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개성이 조선시대 교통으로도 한양에서 이틀거리인 서울과 무척 가까운 도시인데 이러한 사실이 분단으로 체감이 안되는 것 뿐이다.[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