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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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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宗廟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3] 1-2번지에 자리한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를 모신 조선 왕실, 대한제국 황실의 유교 사당. 면적은 186,786 ㎡.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종묘사직'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전제왕조 당시 왕실과 나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였다. 1963년 1월 18일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조선의 종묘[편집]
2.1. 역사[편집]
2.1.1. 창건과 정립[편집]
1. 태조
새 왕조의 태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새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태조의 즉위 교서 제 1항이 바로 종묘와 사직의 제도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이었으며[4] , 이는 옛 제도의 회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새 왕조의 종묘사직을 세운다는 의미였다. 태조는 처음부터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발언한 것으로 보이나 천도 계획이 미뤄지자,[5][6] 태조는 개경 내에서(당시 종묘는 성 밖에 있었다.) 새로운 입지를 찾아 지으려 하였다. 이마저도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하자[7] 결국 기존의 태묘를 허물고 그 자리에 조선의 종묘를 세우도록 했다.[8] 그러나, 태조 3년(1394년) 10월에 한양천도가 확정되면서 개경의 종묘는 공사가 중단되었고, 궁궐(경복궁), 사직과 함께 태조 4년 9월 새로운 종묘가 완공되었다.
창건 당시의 종묘는 담 안쪽에 대실 7칸[9] , 대실 좌우의 익랑 각 2칸, 공신당 5칸, 신문 3칸, 동문 3칸, 서문 1칸이 있었고 담 바깥에는 신주 7칸, 향관청 5칸, 좌우 행랑 각 5칸, 남행랑 9칸, 재궁 5칸 규모였다.[10][11]
제도적으로는 5묘(시조묘 + 당대 군주의 4대조)였으며, 고려 종묘의 전통을 이어받아 동당이실(同堂異室)[12] , 서상(西上)[13] 제도를 취했다. 이 때 종묘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왕(穆王), 익왕(翼王), 도왕(度王), 환왕(桓王)[14] 을 모셨다.
태조의 뒤를 이은 정종은 당시 여론 등을 반영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종묘를 한양에 두고 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경에 다시 종묘를 지으려고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대신 매번 대신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15][16] 이러한 상황은 태종이 다시 한양에 환도하면서 해소되었다.
2. 태종
태종은 조선 종묘의 건축적 특성에 있어서 큰 기여를 하였다. 태종은 종묘 앞에 인공으로 가산을 만들어 땅의 기운을 보한 뒤 一자 형식의 종묘 정전에 양 끝에서 직각으로 꺾여진 월랑을 잇대어 건축해 가운데가 길쭉한 ㄷ자 형식으로 바꾸었다. 이는 비를 피할 곳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는데, 월랑을 대는 것은 옛 제도(중화식)에 어긋나며 중국 사신들이 보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웃을지 모른다고 대언 김여지가 간언하자[17] 태종은 "사신이 무엇 때문에 종묘에 오겠느냐? 혹시 본다 하더라도, 조선의 법이 이러한가 보다 하겠지, 어찌 비난하고 웃겠느냐?"하고는 그대로 월랑(越廊)을 짓게 했다. 또한, 공신당이 비루하다 하여 크게 수리하였다.[18]
3. 세종
세종은 조선 종묘의 시조묘를 확정하는 등 제도 상 주요 원칙을 마련하였다. 즉위 초만 해도 종묘에는 정전(正殿)만 있었으나 세종 2년(1419년)에 정종(당시 공정왕)이 세상을 떠나 신위를 모셔야 할 상황에서 기존의 정전 5실이 만원[19] 이 되자, 예조에서 조사한 결과
(2) 별묘를 지어 태조 4대조의 신위를 하나씩 이안(移安: 신위를 옮김)할 것 (당나라 덕종[德宗], 송나라 영종[寧宗]의 예)
(3) 별묘를 짓지 않고 매안(埋安: 땅에 신위를 묻음)할 것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원칙)
(2) 태조의 4대조는 별묘(영녕전永寧殿)에 모신다.
이후 10월 정전 서쪽 곁에 영녕전을 세웠으며[22]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에 옮기는 것을 시작으로 차례로 태조의 4대조를 영녕전으로 옮기어 태조를 종묘 1실에 고정하였다.[23] 창건 당시의 영녕전은 대실 4칸, 대실 좌우의 익실 각 1칸 총 6칸이었다. 명나라, 청나라는 별묘 제도를 채택하지 않아, 종묘-별묘 체제는 현 조선 종묘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제도가 되었다.
2.1.2. 증축과 중건[편집]
4. 연산군
시간이 지나면서 종묘의 신실은 점차 채워져 연산군 1년에는
과 같이 모든 대실(大室)이 가득찼고, 태조 1세, 태종 1세, 세종 1세, 문종·세조 1세, 덕종[24] ·예종 1세로 5세(5묘 원칙)가 가득차 다음 대인 성종을 모시는 데 문제가 발생하였다.[25] 예조에서는 원래 태종을 옮길 차례(친진親盡)이나 대업을 세운 태종을 옮길 수 없으므로 문종을 협실로 옮길 것을 건의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최초의 불천지주(不遷之主: 옮기거나 묻지 않고 종묘에 계속 모시는 신위)가 탄생하였다.[26] 시간이 흐르면서, 불천지주는 대업을 이룬 군주에게 해당된다는 원칙에서 점차 벗어나 직계를 따라 모두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질된다.
5. 명종
중종이 승하했을 당시, 종묘는 다음과 같이 채워져 있었다.
태조, 태종, 세종은 불천지주였으며 세조, 덕종/예종, 성종은 각각 1세대를 차지하였으므로 중종을 모실 공간이 없었다. 조선은 5묘제였으므로 불천지주는 옮기지 못하고, 그 이하도 아직 옮길 차례(친진)가 되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종묘 증축이 이루어졌다.[27] 이로써 종묘는 11칸이 되었으며, 조선 종묘가 지금처럼 크게 길어지는 시작점이 되었다. 이러한 결정들은 어디까지나 당시 제도의 현실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에 가까웠으며 명백히 종묘 제도의 "이론"으로부터의 일탈을 의미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도 종묘 제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논란이 일어났으며, 특히 이러한 논란은 종묘가 한 번 불타는 선조 대에 가장 크게 일어났다.
6. 선조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선조는 황급히 북쪽으로 몽진하면서도 종묘의 모든 신주를 챙겨갔고, 이어 한양으로 들어온 왜군들 중 우키다 히데이에의 부대는 한성 내 종묘에 집결, 주둔했다. 그런데 밤만 되면 곡소리나 괴성이 들리고 병졸이 비명횡사로 급사하는 등 괴변이 속출하여 진영이 술렁였고, 종묘에 신령(神靈)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은 우키다는 종묘에 불을 질러 전소(全燒)시키고 남별궁[28] 으로 주둔지를 옮겼다. 종묘를 제외한 궁궐들(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의 방화 시기와 주체는 명확히 추정하기가 어려운 것에 반해, 종묘는 그 방화 시기와 주체가 명확하다.
한양을 수복한 후 종묘를 재건하는 논의의 일부로써, 선조의 발제 하에 홍문관, 예조 등을 중심으로 조선 종묘의 기존 제도를 역대 왕조의 종묘 제도와 비교해보는 자리가 마련되었다.[29] 그런데 그때까지 조선 종묘는 수많은 변칙을 수용하면서 운용되었기에 이를 계기로 고제(특히, 주나라)를 회복할지, 혹은 지금까지 조선의 전통을 유지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큰 논쟁이 벌어졌다.[30][31][32][33][34][35][36]
(1) 가장 크게 논란이 된 부분은 동당이실(同堂異室)로, 이는 주나라 본래의 제도인 각 항렬[37] 을 다른 건물에 모시는 방식(일세일묘一世一廟)[38] 에서 벗어나 한명제(漢明帝)부터 시작된 전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희가 크게 비판한 바 있다. 주나라 제도로 되돌려야 한다는 견해(예조, 홍문관), 기존 제도가 오래되었고 종묘 외에 영녕전까지 모두 고쳐야 하며 지형을 살폈을 때 각각의 건물을 따로 짓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견해(이항복, 심희수 등 대신)가 충돌하였다.
(2) 제사를 지내는 전(殿)이 없는 것 역시 논란이었다. 명·청 태묘의 경우 제사를 지내는 건물(전殿)과 신주를 모시는 건물(침寢)이 따로 있어서 제사 때마다 신주를 옮겨다 치렀다(전전후침前殿後寢). 조선의 경우엔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실내에서 바로 제사를 치렀다.
(3) 조선의 종묘는 신주가 동쪽을 향해 있는데, 이는 서상(西上)제와 결합하여 같은 당(堂) 안에서 태조가 가장 뒤에 위치한 형세가 되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논란이 매우 거셌으나 선조는 결국 조선의 전통을 유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39] 다만 신주를 남향으로 고치는 것, 제사 공간을 넓히는 것 등의 작은 변화도 이루어졌다. 이렇게 다시 11칸짜리 종묘를 짓기로 결정되었으며. 소실된 종묘에 대한 중건 사업은 선조 41년(1608년) 1월에 시작해 5개월 뒤 광해군이 즉위한 뒤에 겨우 끝났다.
이후에도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서 영원히 제사지내는 불천위(不遷位)가 계속 늘면서 정전의 감실(龕室)이 또 부족해지자 영조 2년(1726)에 4칸을, 헌종 2년(1836년)에 다시 4칸을 더 증축해 지금과 같은 19칸의 매우 기다란 건물이 되었다. 이것이 정전의 마지막 증축이다.
영녕전은 선조 41년(1608년) 종묘 중건 사업 당시 종전보다 4칸을 더 증축한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이후 현종 8년(1667년) 2칸을, 헌종 2년(1836년) 다시 4칸을 더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7. 고종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조선 종묘는 5묘제에서 7묘제로 바뀌었으며, 시조묘인 태조는 태조 고황제로 추존되었다.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할 시점에는 정말 우연히도 영녕전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제실에 의민태자와 자행비의 신위를 모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정전과 영녕전의 감실이 정확히 딱 채워져서 감실이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되었다. 영친왕 내외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신위를 추가할 일도 없기 때문에 마치 딱 맞춘 것처럼 일이 된 것.
현재 조선의 종묘는 형식적으로는 태조 + 순조~순종의 7묘제를 따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불천위가 늘어나면서 이러한 독특한 형식이 완성되었다. 나머지 신위 또한 영녕전에 따로 모시므로, 매안(埋安)되는 신위 없이 전부 종묘에 그대로 모시는 형태가 되었다.
한편, 재위 도중 폐위된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은 공식적으로는 임금이 아닌 일개 왕자 신분으로 강등되었으므로 신위가 모셔지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숙종대에 노산군이 단종으로 추숭 복위되면서, 연산군과 광해군을 제외한 조선왕조 재위 임금 신위 총 25위가 모셔지게 되었다. 이 외에도 정식으로 재위한 임금은 아니지만 덕종, 원종, 장조, 문조 등 추존 임금들도 종묘에 모셔져 있다.
2.1.3. 일제강점기[편집]
종묘는 원래 창경궁과 연결되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경성부의 교통을 원활히 한다는 미명 아래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도로를 개통하려 했다. 그러나 순종이 그것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결사반대해 총독부도 어쩌지 못하다가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마자 바로 착공하고 완공시켜버렸다. 이 도로가 바로 지금의 율곡로.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는 콘크리트 육교로 연결되었는데, 2011년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이 구간을 복원하면서 육교를 철거했다. 이때 끊어져 버린 구간이 다시 이어지는 데까지는 90년이나 걸렸다.
조선총독부에서 종묘 담장에 새긴 '쇼와 8년 3월 개축'[41] 이라는 문구가 아직까지 남아있어 현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이후, 안내판을 붙인채 존치하는 쪽으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모든 문구 위치에 붙은 것은 아니라 이후 국감에서 다시 문제제기가 되었다. #
2.1.4. 대한민국 시기[편집]
1985년 종묘광장공원(宗廟廣場公圓)이 조성되었다. 1988 서울 올림픽 준비를 위한 정리 사업이었다. 그리고 1991년 민자 유치로 종묘 지하주차장을 건설하면서 임금이 종묘에 배향할 때 쓰던 우물인 어정(御井)이 마르고 상당한 지하 유물이 멸실되었다. 당시 관점에는 비는 공간을 실용적으로 쓰자는 목적이었겠지만, 현재 기준에서 보면 세계유산 종묘 권역에 주차장을 건설하거나 세계 유산인 태릉에 선수촌을 건설하는 것은 기겁할 노릇이다.
2011년 5월 3일부터 853억 원을 들여 2013년 완공을 목표로 율곡로를 지하화하여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2010년 10월 착공한 율곡로 구조개선 공사 과정에서 문화재인 궁궐 담장 기초석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해 공사가 연기되어 2014년말 복원 완료 예정이었다. 그러나 설계, 공사 방식 변경으로 2020년 12월로 연기되었다.
종묘의 정문 바로 앞에는 1985년부터 종묘광장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은 탑골공원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인 노인들의 쉼터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각종 집회 장소로도 자주 사용되어서 종묘 방문객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등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었다. 1985년 공원 조성 당시 부터 공연장인 국악정, 대형버스 주차장, 무료급식소 등의 시설이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데다가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들이 등장하면서 각종 소음과 고성방가, 무료급식소로 인해 꼬이는 노숙자들[42] 로 난장판이었다. 종묘가 일종의 성역인 것을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었을 정도. 결국 서울시가 2007년 종묘광장 성역화 사업을 시작했다. 국악정 및 매점, 자판기 등 중구난방으로 들어선 시설을 일부 철거하고 광장 내부의 버스 주차장과 무료급식소를 외부로 이전했다. 그리고 이동식 노래방 기계나 각종 노점상등의 불법 상행위를 단속했다. 이어서 성역화 사업으로 어도, 홍살문, 하마비, 어정, 피맛길, 순라길 등의 문화재를 원형 복원 예정이며 발굴 조사 중이다. 원래 계획은 2010년경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종묘 앞 발굴 조사에서 예상 이상으로 유물이 쏟아져 나와 2010년 발굴 조사 지역을 한 차례 확대하면서 2014년까지도 계속 발굴 조사 중이다. 유물 발굴로 종묘광장 정비사업은 2016년 12월까지 계획 된 상태다.
2016년 3월 말 종묘전교 복원 및 제세동천 복원 및 녹지 정비를 완료한 종묘 서측 광장을 개방했다. 이후 2016년 말까지 종묘 동측 광장을 신성림 조성 및 정비를 진행 했다.
2020년 5월부터 종묘 정전이 30년 만에 보수공사를 가지면서, 2022년에 재개방을 할 예정이다.# 이번 공사는 2015년 안전 점검 당시에 일부에서 물이 새거나 파손이 된 부분이 많아서 전면 보수를 할 예정이다.[43] 이 때문에 정전에 모셔져 있던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가 2021년 6월 5일에 창덕궁 내 구 선원전으로 이전하는 이안식을 거행했다.[44] 관련 기사 1관련 기사 2
2022년 7월 20일, ′창경궁-종묘 연결 역사복원사업′이 시작(2011년 5월)된 지 11년, 율곡로가 개통된 지 90년 만에 율곡로를 지하화하고 그 위로 8천㎡ 가량 수풀을 덮어 끊어졌던 녹지 축을 잇는 복원 공사가 완료되어 22일에 개방되었다. 새로 조성한 녹지공간엔 참나무와 소나무, 국수나무 등, 우리 고유의 나무를 심었으며 왕이 종묘를 방문할 때 이용했던 ′북신문′도 최대한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위로 길이 나 있어서 아홉 시부터 저녁 여섯 시 사이에는 개방되어 들어갈 수 있으며, 북신문 앞에서는 철담장 너머로 작게 창경궁이 내다 보인다. 장기적으로는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를 오가듯 창경궁과 종묘 사이도 바로 오갈 수 있도록 할 듯. 참고로 창경궁에 일제가 설치한 위락 시설을 철거하 이름도 창경원에서 창경궁으로 복원하고 공사 완료하여 재 개방 된 이후, 율곡로가 아래 있고 다리로 연결 되었던 시절에도 종묘와 창경궁이 모두 개방된 시간에 한해서 어느 쪽에서든 자유롭게 걸어서 넘어갈 수 있었다. 통로 개방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달랐지만 대략 일몰 전이었으므로, 그 이후엔 종묘 또는 창경궁 안에 더 물러 있을 수는 있었다. 통로(=육교)그냥 열려 있는 것은 아니었고, 한 쪽에 철문은 있었다. 당시엔 상시 입장이었고, 입장료도 무료였다.
2.2. 건축[편집]
2.2.1. 정문 주변[편집]
2.2.1.1. 종묘 어정[편집]
2.2.2. 어숙실[편집]
2.2.3. 정전 주변[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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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4. 악공청[편집]
2.2.5. 영녕전 주변[편집]
2.3. 신주 배치도[편집]
부묘일은 양력으로 환산. 참고. 배향공신 문서 참조.
2.3.1. 정전[편집]
2.3.2. 영녕전[편집]
2.3.2.1. 중앙[편집]
2.3.2.2. 서쪽 협실[편집]
2.3.2.3. 동쪽 협실[편집]
2.4. 종묘제례[편집]
자세한 내용은 종묘제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5. 종묘 묘현례[편집]
자세한 내용은 종묘 묘현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2.6. 관람 안내[편집]
평일에는 1시간 간격으로 문화재 해설사와 함께 관람할 수 있다. 반드시 단체 인원을 꾸려야 하는 건 아니고, 해당 시간대에 입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모아다가 같이 들어가고 나오는 방식이다. 물론 단체 인원을 꾸려도 관계 없다.
시간제 관람은 코로나19로 인해 2020년 12월 말부터 중단되었다가 2022년 6월 1일부터 거리두기 해제와 함께 재개되었다. #, 자유관람일도 개방하고 있으므로 시간대와 휴관일을 잘 보고 방문하여야 한다.
3. 이야깃거리[편집]
3.1. 기원과 맥[편집]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묘의 시초는 옛 중화권 국가인 상(은)나라에서 처음 그 개념을 정립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주나라 대에 이르러 《예기》에 실린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의 개념이 잡혔다.[51]
주나라식 왕실 예법을 기록한 예기에는 "천자(天子)는 7묘, 제후(諸侯)는 5묘, 대부(가신)는 3묘, 그 밑에는 따로 사당을 두지 않는다." 라고 되어있다. 종묘의 세부 규칙은 더 많지만 기본적으로 이 문장이 종묘의 대표적 규칙이 되었다. 종묘에 안치된 천자는 묘호와 시호를 올려 찬양한다. 제후와 대부는 천자가 내려준 시호로만 공덕을 찬양한다. 묘호는 당나라 이전까지는 큰 공이 있는 천자에게만 올렸는데, 당 이후로는 모든 천자가 가지게 되었다. 천자의 공덕을 후대가 감히 논한다는 것이 맘에 안 들었던 진시황은 시호 제도를 없애 버린 적이 있다.[52]
그렇게 중국 내 왕조들은 주나라 예법에 따라 전부 7묘제를 따랐고 명나라 때는 9묘제로 바뀌었다. 청나라도 9묘제를 따랐는지는 불명.
현재 중국 자금성 앞에 자리한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태묘는 1924년 화평공원이란 이름으로 바뀌어 공원화되었다가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지배하기 시작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노동인민문화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바뀌면서 황실의 제사가 중단되는 바람에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므로 본고장에서 말살된 전통의 명맥을 어찌보면 한국의 종묘가 잇고 있는 셈이다. 결국 중국의 종묘제도가 구시대 착취의 상징 비슷한 뉘앙스로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며 박살난지라 중국학자들이 이 부분을 연구하려면 한국의 종묘를 연구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53]
3.2. 한국사의 시조묘[편집]
고대의 한국 왕조 또한 전통적인 시조묘(始祖廟)/조상숭배 신앙이 존재했다. 이런 시조묘, 시조상 등은 사서에서 중국의 종묘와 같은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고조선 건국신화에서 건국자와 천신을 혈연적 관계로 묶은 것에 기초해 신단수를 천신 제사와 더불어 조상 제사를 지낸 성지로 보며, 고조선 때부터 시조 숭배의 전통이 시작되었다. 이후 삼국시대 각 나라의 관련 기록에서 초기부터 시조묘에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근거로 든다.
'종묘(宗廟)'라는 단어가 한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고구려였다. 동천왕 때 위나라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평양성을 새로 쌓으면서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외에 3세기까지 종묘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나와, 종묘라는 시설의 존재를 확실히 입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종묘는 이후 왕조처럼 완전한 유교식이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던 시조묘의 연장선상에 있었기에, 왕실이 아닌 유력 귀족 가문에서도 자신들만의 종묘를 만들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 다른 근거로는 647년(보장왕 5년)에 동명왕모의 소상이 3일이나 눈에서 피를 흘렸다는 기록인데, 위패가 아닌 신상을 모셨다는 것 역시 중국식 유교의 종묘는 아니다.[54]
백제의 경우 동명묘와 구태묘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국 사서인 《책부원귀》, 《수서》에서는 구태설을 채택하여 '백제에서 사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시조 구태묘를 세워 일년에 네 번 제사를 지낸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동명설을 채택하고 있으며, 온조왕 때 동명왕과 국모(國母)에게 제사지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또한 백제는 시조신 제사를 지내면서 동시에 천지신 제사를 올렸는데, 백제 법왕 때부터는 천지신 제사나 시조신 제사보다 불교의례가 중시되는 경향을 보이며, 이후 백제 관련 기록에서는 제사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다가 멸망 당시 부여풍이 제사권만을 갖고 있었다는 기록이 짤막하게 나오는 것이 전부다.
신라에서도 초기부터 전통적 시조묘가 존재했으며, 이는 시조인 박혁거세를 모시는 역할로 추정된다. 6세기에 시조묘를 대체하는 신궁(神宮)을 짓고 4계절마다 제사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신궁은 신라 말기까지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제사를 크게 지내는 장소였다.[55]
덧붙여, 조선 이전에는 불교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경주 황복사와 같은 불교 사찰이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종묘 기능을 명시한 황복사지 사리함 하지만 삼국의 어느 기록이나 유교적인 형태의 종묘는 아니다.
3.3. 한국사의 유교적 종묘[편집]
3.3.1. 신라[편집]
이후 고려와 조선의 종묘로 이어지는 중국식 유교적 형태의 종묘 제도의 도입은 통일신라 초기에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통적 시조묘-신궁과 별개의 추모시설로 공존했으며, 상세한 기록을 통해 후대에 이어지는 완전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의 유교적 종묘시설의 위치는 경주 월성 북쪽, 첨성대 남쪽, 황남동 123-2번지 건물지로 추정되고 있다.
다만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앞서서,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인 665년에 당나라에서 주도, 사실상 강요한 백제 부여융과 신라 문무왕 간의 취리산에서의 회맹을 기록한 금서철계(단서철권)의 반쪽을 신라의 종묘에 보관하게 했다고 하는데, 신문왕 이전에 이미 신라에 종묘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다만 '기록상 명확하게' 등장하는 건 좀 더 시간이 지나서 687년 신문왕 때 태조, 진지왕, 문흥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의 5위를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신을 보내 조상묘에 제사를 올렸다. 제문에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再拜)하며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ㆍ진지대왕(眞智大王)ㆍ문흥대왕(文興大王)ㆍ태종대왕(太宗大王)ㆍ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이었기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보살핌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의 할 도리를 잃어서 정의가 하늘의 뜻에 어긋났는지, 별의 형상이 괴이하고 해는 빛을 잃어가니, 두려워 몸이 벌벌 떨려옴이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듯하옵니다. 모모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제물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 신령 앞에 정성을 드리며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자그마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몸을 가련히 여기시어, 사철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이 없어지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가 갖추어지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자손들에게 넉넉히 남겨 오래도록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삼가 아뢰옵니다.”
- 《삼국사기》 - 〈신라본기〉 신문왕조 7년(687) 4월
혜공왕(765 ~ 780) 때 이르러서 미추왕을 김씨 왕조의 시조로 삼고,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2위를 삼국통일의 공을 감안해 불천위로 정하는 동시에 혜공왕의 조부 성덕왕과 부친 경덕왕의 친묘(親廟) 2위를 합쳐 5묘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일반적인 종묘의 운영과는 다른 신라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제후식 오묘제 종묘를 만들었음에도 태조, 태종 같은 천자식 묘호를 올린 것 또한 신라 종묘의 특이점이다.[56][57]
... 제36대 혜공왕(惠恭王) 때에 비로소 5묘(五廟)를 제정했는데, 미추왕(味鄒王)을 김씨의 시조로 세우고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큰 공덕이 있었다 하여 모두 대대로 제사를 지내는 조상(불천위)으로 삼고,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사당 둘을 합하여 5묘(五廟)를 만들었다....
- 《삼국사기》 잡지 제사
신라 하대를 연 선덕왕은 경덕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부친 개성대왕을 부묘했다. 성덕왕의 신위를 그대로 둔 이유는 선덕왕의 어머니 정의태후가 성덕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외가 쪽을 통해 정통성을 인정받으려는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덕왕의 뒤를 이은 원성왕은 성덕왕과 개성대왕의 신위를 내보내고 조부 흥평대왕과 부친 명덕대왕을 부묘함으로써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했으며 이후 애장왕 때는 별묘(別廟)를 세워 불천위였던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신위를 따로 봉안하고 자신의 직계 4위인 고조부 명덕대왕, 증조부 원성왕, 조부 혜충대왕, 부친 소성왕을 부묘했다. 애장왕 이후의 부묘 상황에 대한 기록은 없다.[58]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또한 경주 황복사(皇福寺)지 삼층석탑의 1942년 해체 수리 중 발견된 사리함에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고 적힌 명문이 확인되었는데, 불교를 국가차원에서 숭상했던 나라답게 사찰이 종묘의 기능을 맡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시대에는 특정 인물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또는 창건주가 자신의 개인적인 소원 성취를 위해 발원해 짓는 절을 원찰(願刹)이라고 불렀고, 신라에서 국왕들은 물론 고위 귀족들도 모두 이러한 원찰을 가지고 있었다. 원찰(원당)은 고려 시대는 물론 숭유억불을 기조로 삼았던 조선 시대까지 근근히 이어졌는데,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고 왕릉 관리를 맡기기 위해 지었던 흥천사나 왕실로부터 영녕릉과 광릉을 관리하는 역할을 부여맡게 된 신륵사와 봉선사, 정릉 관리를 맡은 봉은사, 조선 정조가 현륭원 관리 및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중창한 용주사도 원찰에 속한다.# 왕실에서 발원해 지은 원찰(원당)의 경우는 사실상 '불교화된 종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3.3.2. 발해[편집]
발해도 3성6부제와 같이 당의 제도를 다방면에서 수용한 나라이므로 종묘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발해라는 나라가 워낙에 자체적으로 남긴 문헌 자료가 없는 데다 관련 유적 발굴 결과도 발해의 종묘 흔적을 보여주는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2011년에 한국과 러시아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연해주 콕샤로브카 1평지성터[61] 에 대한 네 번째 발굴조사에서 '종묘'의 흔적으로 보이는 유적이 확인되었는데, 발해 당대의 것이 아니라 10세기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한 뒤에 현지에서 일어난 부흥세력이 지은 종묘의 흔적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62] 송기호 교수에 따르면 해당 유적은 7묘제, 그러니까 천자국의 제도를 따라서 지어져 있다고 하며, 같은 시기 당나라(그리고 당나라의 제도를 본받은 고려와 조선)에서 후한 명제 이래의 동당이실(同堂異室)[63] 에 따라 종묘를 지었던 것과는 달리 고대 주나라의 제도를 본따서 동당동실(同堂同室)[64] 형식으로 태묘를 가운데 두고 그 앞으로 세로 2열로 소목을 배치한 구조였을 거라고 한다. 그리고 유적에서는 쪽구들을 배치한 흔적도 확인되었는데, 죽은 자가 살아있을 때처럼 모셔지는 공간이라서 살림집처럼 온돌을 설치한 것이라고.[65] 중국의 주례 고공기에 따르면 종묘는 좌묘우사(左廟右社)[66] 라는 원칙에 따라 왕이 거주하는 궁성 동쪽에 짓도록 되어 있어서 발해에서 한때, 혹은 멸망 직전까지 수도로 기능했던 상경이나 동경 등의 유적에서 실제 발해 당시의 종묘 흔적이 발견된다면 동부 구역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3.3.3. 고려[편집]
고려시대에 들어서 최초의 종묘 기록은 성종 7년 처음 오묘제(五廟祭)를 정하고 묘호를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음 해 4월에 종묘 건설공사를 시작해 3년 뒤 공사를 마쳤다.[67]
본격적인 종묘제례가 시작되었으며, 처음엔 신라의 1세대당 1위의 신주를 모시는 제도였다. 하지만 성종 9년에 5묘 9실제를 채택하여 종묘에 9실을 설치하고 네 위패는 불천위로, 나머지 다섯 위패는 세대가 지날 때마다 옛 신위를 옮겼다.
지속적으로 9실제를 이용하다가 덕종 때 태조, 혜종, 현종 세 군주를 불천지주(不遷之主)로 정했다. 예종 대엔 9실제를 썼다. 인종 대에 잠시 5묘제로 바뀌었지만 의종 대에 들어서서 천자식 7묘제로 개편, 구실을 만들어 신위를 보관한다. 또한 별묘를 만들어서 다른 군주들을 섬겼다.
이후 몽골의 침략을 겪으면서 태묘를 재정비하게 되는데 강화도로 천도하면서 개경(개성)의 종묘는 무너져 버렸고 강도(江都)에 태묘를 다시 짓는다. 고려 고종은 태조, 혜종, 현종, 선종, 숙종, 예종, 인종, 신종, 강종 9명을 다시 모셨다.
이후 원종이 1270년 개경 환도하면서 7묘제 종묘를 재건설한다. 하지만 묘호 같은 천자식 예법은 아들 충렬왕 대부터 쓰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충렬왕 때 다시 5묘제로 바뀐다.
충선왕 때는 기존의 5실 외에 동서에 협실을 하나씩 두고 동실에는 문종과 명종을, 서실에는 혜종과 현종을 모셨다. 또한 공민왕 시기 이제현의 상소를 보면 강화도에서 나온 후 형식적으로는 1당 5실의 제도지만 실제로는 22개의 신주를 일렬로 모셨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의 종묘 건물을 3개의 실로 나누고, 실은 다시 방으로 나누는 동당이실이방 제도로서 조선의 종묘 제도에 영향을 주었다.
《고려사》엔 군주가 태묘에 제사 지내러 갈 때의 예법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고려사 악지엔 태묘 악장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종, 공민왕 대의 악장만이 남아있다.
예종은 태조, 혜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숙종 아홉 명을 모셨고 공민왕은 태조, 혜종, 현종, 원종,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아홉 명을 모셨다.
고려의 종묘는 고려왕조가 멸망한뒤 새로운 왕조의 종묘 부지가 되어 헐리고 태조 이하 고려 국왕들의 위패는 배에 실어서 강에 띄웠는데, 강물에 떠내려가서 도착한 곳에 사당을 짓고 그곳에서 위패를 맡아 보관하게 된 것이 연천 숭의전(崇義殿)의 유래라고 알려져 있다. 이 숭의전도 현존하는 것은 6.25 전쟁 때 불타서 다시 지은 것.
4. 여담[편집]
- 종묘는 다른 궁들에 비해 대중의 관심을 덜 받지만 건축의 권위자들에게는 반대로 반드시 방문하는 한국 대표 건축물로 자주 언급된다. 대표적으로 일본 현대건축의 거장 시라이 세이이치는 "서양에 파르테논 신전이 있다면, 동양에는 종묘가 있다."며 종묘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고, 프랭크 게리는 종묘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세계 최고의 건물 중 하나이며, 한국 사람들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하며 15년 만에 한국에 왔을 때도 가족들과 다시 종묘에 방문하고, "이같이 장엄한 공간은 세계 어디서도 찾기 힘들다.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곳을 굳이 말하라면 파르테논 신전 정도?"라고 말했다.## 거기에 이미 한국에서 작업을 했던 렘 콜하스, 장 누벨, 자하 하디드 처럼 건축 역사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들은 한번씩 다녀갔고 건축 사진작가 중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헬렌 비네는 오직 종묘, 병산서원, 소쇄원의 사진만 찍어 책[68] 으로 출간하는 등 건축가들에게는 조선 궁궐보다 더 높은 취급을 받고는 한다.
- 여기에도 연못이 세 개가 있는데 주변에는 향나무와 같은 수목이 식재되어 있는 편이며 후원에는 화계(花階)[69] 가 있으나 궁궐 화계들이 기본적으로 상당히 화려한 걸 감안하면 수수한 걸 떠나서 상당히 살풍경스러운데, 그 이유는 죽은 자를 추모하는 신성한 공간이므로 그냥 이런 화계는 구색 맞추기용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 7월 말이나 8월 초쯤에 가면 습도와 온도 조절을 위해 정전과 영녕전 묘실의 문을 모두 열어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꽤 볼만한 광경이니 그쯤 가는 것도 추천한다.
- 구글 코리아에 서울특별시 관광명소로 검색하면 신전(神殿)으로 표기된다. 대한민국으로 체제가 전환된 지금이야 종묘는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를 모셔놓은 사당이지만 사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신전이 맞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