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의 별호(別號, 고을의 별명)가 '수양'이었으며, 조선 세조의 왕자 시절 봉호로 유명한 '수양대군'의 '수양'도 여기서 딴 것이다.
을 등지고, 남쪽으로는 남산을 안고 있으며, 시가지 북쪽에서 남쪽방향으로 광석천(廣石川)이 흐른다. 남쪽으로 황해에 맞닿아 용당반도가 돌출해 있어 부동항인 해주항을 이루며, 옹진반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수백 미터 떨어져 있다.
1945년부터 1950년까지는 38선 바로 북쪽에 위치한 도시여서, 옹진반도 등 지역에 대한 대남(對南)공작의 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용당포가 속한 해주항 일부는(정도역 부근) 38선 남쪽으로 들어갔다. 이런 이유 때문에 38선 분계 당시 미 군정과 소련 군정이 예외 조항을 둬서 해주시는 북한이 모두 관할하기로 합의하였다. 하지만 남쪽으로 내려가기 유리한 위치라 용당반도의 남단인 용당포에서 바다를 건너 남한의 옹진반도로 탈출하는 사람이 많았다.[7]
가령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김형석이 이 방법으로 월남한 인물 중 한 명이다.
당장 바다는 38선 이남이어서 일단 배에 오르기만 하면 북측 군인들이 감시만 하고 사격하지는 못했다. 물론 반대로 남한에서 북한으로 몰래 넘어가는 월북 루트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인해 6.25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해주는 항구의 기능을 상실했다.
해주시 용당포(龍塘浦).
출신 인물을 살펴보자면 애국자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김구 또한 해주부 백운방[8]
백운방은 1914년 청산방(靑山坊)과 합쳐져 운산면(雲山面)이 되었고, 1938년 해주군 해주읍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벽성군이 되었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벽성군 운산면인 셈인데, 운산면은 해주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에서 태어났으며, 여기서 황해도 동학군으로 활약했다. 둘의 나이차는 겨우 3살. 김구가 수배를 피해 안중근의 집에 묵은 적도 있다고 한다.
고대 지형적으로 해안에 위치하고 기후가 온화하여 생활 자재의 취득이 용이하고, 많은 동굴이 있어 수렵, 채집, 농경 생활이 편리해 신석기 문화가 일찍 나타났다. 용당포의 패총과 남산의 원시 집터에서 신석기 시대의 도구들과 빗살무늬 토기, 질그릇이 발굴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민무늬 토기 역시 출토되었다.
고조선 이후 대방군(帶方郡) 해명현(海冥縣)에 속하였다. 한때 마한의 영역에 속했으며 삼국 시대에 들어와 근초고왕대에 백제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소수림왕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 내미홀군(內未忽郡, '나밋골'의 음차)으로 편성되었다. '내미(나미)'는 못(연못, 호수, 물)의 고구려어로, '못 지' 자를 따 지성(池城), 장지(長池) 또는 폭지(瀑池)라고도 불렸다.
고구려가 멸망하여 신라에 복속된 후 748년(경덕왕 7)에 폭지군(瀑池郡)으로 개칭하였다. 762년(경덕왕 21)에는 광개토대왕 또는 장수왕 당시 축조하였던 지성산성(池城山城)을 다시 수축하고 태수(太守)가 부임하였다.
고려태조가 936년(태조 19) 후삼국을 통일한 뒤 이곳에 이르러 지성산성에 있던 읍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남쪽으로 큰 바다에 임한 까닭에 해주(海州)라 명하였다. 그러나 기록에 지명이 해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마진 때인 905년부터다.
983년(성종 2)에 해주목(海州牧)으로 승격되어 목사가 부임하였고, 995년(성종 14) 전국의 12주(州)에 절도사(節度使)를 두면서 해주에도 절도사가 파견되었다. 이때 해주절도사의 소관을 우신책군(右神策軍)으로 하면서 양주(楊州)의 좌신책군과 함께 개경을 지키는 수도 방위의 요충지로 등장하였다. 1012년(현종 3) 절도사를 폐지하고, 1018년 전국에 4도호부를 설치하면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로 개편되었으며, 1122년(예종 17) 대도호부로 승격되는 등 군사적 성격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1247년(고종 34)에는 다시 해주목으로 고치고 목사가 부임하였다. 서해도(西海道)에는 다른 도보다 일찍이 11세기 전반 정종 때부터 안찰사(按察使)를 파견하였는데, 그 영(營)을 해주에 두었다. 1389년(창왕 1) 이후로는 관찰사영(觀察使營)의 소재지가 되어 서해도의 행정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조선 초기에도 대체로 황해도의 행정중심지로서의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1449년(세종 31) 병영을 황주(黃州)에 두기로 한 계획이 지역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바뀌어 해주에 병영을 두고 대신 관찰사영은 황주로 옮겨졌다. 관찰사영이 다시 해주로 확정되는 때는 1601년(선조 34)으로, 이후 관찰사영과 목사의 관아가 읍성 안에 함께 존속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파천에서 돌아오는 길에 머무르다 해주행궁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여기서 손자 인조와 정정옹주가 태어났다.
1616년(광해군 8) 변란을 고발하려던 사람을 해주목사가 형벌을 빙자하여 죽인 사건이 일어나 벽성현으로 강등되었다. 그동안 도명 또한 황연도(黃延道)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1623년(인조 1)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 말엽에 점차 도시의 면모를 갖춘 해주시는 서울, 평양, 전주, 개성과 함께 조선의 5대 고을 중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고종 32년(1895년) 을미개혁의 하나인 23부제 실시로 해주부가 되어 16군을 관하에 두었다. 해주는 해주군이 되어 관하에 29개 방을 두었다.
이후 평창방을 분리하여 용문방(龍門坊)과 청운방(靑雲坊)을, 태공리방을 분리하여 동대방(東大坊)과 서대방(西大坊)을, 동변방을 분리하여 주내방(州內坊)과 영동방(瀛東坊)을 각각 신설하였다. 고촌방을 금산방(錦山坊)으로, 아달방을 녹달방(祿達坊)으로, 서대방을 운곡방(雲谷坊)으로 각각 개칭하였다. 개편을 거쳐 32개 방을 관할하게 되었다.
1938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96호로 해주읍이 해주부(府)로 승격되었다. 해주읍을 제외한 해주군의 전 지역을 조선시대 해주의 별호인 '벽성'의 이름을 따 벽성군으로 개편하였다. 이때 서변면과 석동면을 병합하여 벽성군 서석면(西席面)으로, 천결면과 영동면 일부를 병합하여 벽성군 영천면(泳泉面)으로 각각 개편하였다.
1940년에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1943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296호로 벽성군 서석면 읍청리, 동양리, 율동리를 해주부로 편입하였다.
해주시는 바다 가까이에 솟은 수양산줄기(수양산맥)의 남쪽, 광석천이 퇴적한 소규모의 선상지 사면과 단구, 범람원에 자리잡고 있다. 북부에서 남부로 가면서 급격히 낮아지는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한국의 전형적 취락 입지 조건인 배산임해(背山臨海)를 이룬다.
북부에는 수양산줄기(수양산맥)의 주봉인 수양산(首陽山, 946m)과 장대산(將臺山, 686m), 응봉산(鷹峰山, 645m), 금봉(錦峯, 519m), 창검산(蒼劍山, 540m), 상산(518m) 등 해발 500m 이상의 산들이 솟아 있다. 수양산은 주거봉(周拒峰, 899m)·설류봉(雪留峰, 945m)·우이산(牛耳山, 907m) 등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남부에는 평야의 중앙에 남산(南山, 122m), 선녀산(善女山, 169m) 등 해발 50~100m 안팎의 구릉이 바다를 막아서 있다. 남산에서 용당반도(龍塘半島)가 리아스식 해안을 이루는 남쪽의 해주만(海州灣) 중앙에 길게 뻗어 있다.
동부에는 수양산의 설류봉에서 시작하여 해주만에 유입되는 읍천(邑川)이 경계를 이루어 읍천 연안에 장방벌(장방평야)이 전개되어 있다. 서부에는 신광천(神光川)이 경계를 이루며 신광천 연안에 신광벌(신광평야)이 펼쳐져 있다.
기본 수계는 읍천, 광석천(廣石川), 허청천 등이 있다. 만수산(萬壽山)에서 발원한 광석천(廣石川)이 해주시 중앙을 남류한다. 광석천은 물이 맑고 깨끗하여 하천 주변이 유원지로 조성되어 있다. 광석천 유역에 발달한 해안평야가 동서 방향의 해안을 따라 좁고 길게 펼쳐져 있다. 서쪽 경계선을 신광천(神光川)이, 동쪽 경계선을 읍천이 흐르고 있다.
신광저수지(神光貯水池)를 비롯하여 5개의 저수지가 있다. 농업 용수와 주민들의 생활 용수 그리고 공업 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해주는 전체 면적에서 해발 200m 미만의 평야 및 구릉 지역이 90% 이상을 차지한다. 산림은 해주시 전체 면적의 42%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식물보호구로 지정된 수양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해주 일대에는 온대남부식물과 온대북부식물이 함께 분포하여 식물 종 구성이 다양하다. 해주 일대 식물상에서 특이한 것은 서어나무, 초피나무를 비롯한 아열대수종이 섞여 있는 것이다. 해주설송나무, 해주벽오동나무, 서담느티나무는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주요 기반암은 시생누대에 형성된 화강암·편마암 등이며, 토양은 산림갈색토양이 주를 이루고 있다. 북쪽의 수양산 일대는 화강암층이고 시내는 여러 하천이 운반해 온 모래와 자갈로 된 마사층(磨砂層)으로 비가 와도 물이 그대로 잦아들었다.
예로부터 지리적인 요인으로 상공업이 발달하여 국내의 주요 도시들과는 물론 바다 건너 다른 나라들과도 경제, 문화적인 연계가 발전하였다. 일제는 1932년에 해주항(海州港) 공사를 마무리하고 황해도 지역의 많은 농산물과 지하자원 등을 약탈해갔다.
광복 후 1973년 해주항이 군항에서 국제무역항으로 변모하면서 북한 9대 공업 지구 중 하나가 되었다. 중공업과 경공업 기지가 마련되어 농업이 발달한 항구 문화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해주시의 공업은 건재, 화학, 기계, 금속, 식료품, 일용품, 방직 및 편직, 피복, 유리 및 도자기 등 부문들로 이루어졌다.
고난의 행군 시기 국영 기업소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배급이 중단돼도 심각한 기아 사태는 면할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생활이 어렵긴 했지만 사방이 농경지에 바다이기 때문에 암시장에 식료품은 그럭저럭 공급되었기 때문이다.[11]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의 식량난은 주로 식량 생산지인 농촌에서 피해가 덜하고 식량 공급지인 도시에서 피해가 심각했다. 이는 고난의 행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식량 생산량의 부족보다는 각종 자원을 공급할 국가 체제의 전면적인 마비 및 붕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대약진 운동 당시의 대기근은 생산지인 농촌이 피해를 뒤집어썼다. 이쪽은 식량을 수탈할 행정 체계는 작동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평야 지대라는 특성상 주변 지역에서 사람과 물자가 해주로 들어오는 것도 수월했던 점이 시장 형성을 촉진시켰고, 그에 수반해 자생적인 운송업이나 서비스업도 나타났다.
그러나 철도와 도로 교통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토 최남단인 해주까지 수입 공산품 물자를 운반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쌀이라는 상품을 매개로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시장 경제적인 행동 양태가 나타난 것에 비해 그 양적·질적 발전의 속도가 다른 지역보다 늦었던 것은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북한 시장 경제의 기형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농지가 별로 없어 농산물 생산도 적지만 가까이에 북한 최대의 곡창 지대인 연백평야와 은율평야가 이웃해 있어 이곳으로부터 유입되는 농작물이 많아 시민들의 식생활이 풍족하였다. 이 때문에 무수한 권력기관들이 가을이 되면 쌀을 사기 위해 해주로 내려오고 외화벌이 기관들도 해주에 여럿 사업소를 두고 있었다.
토지가 기름지고 기후가 온화해서 도시 교외에는 채소와 사과, 배, 포도, 복숭아 등을 생산하는 근교 농업이 발달하였다. 그러나 대규모 과수단지가 아니어서 생산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작천리의 청무와 석천리의 미나리는 그 질이 좋아 널리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해주양배는 새콤한 맛이 별미로 이 지역의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해주시는 황해남도의 주요 수산기지이다. 광석포(廣石浦)·용당포(龍塘浦)·결성포(結城浦) 등의 어항을 중심으로 경기만에서 조기, 민어, 광어, 숭어, 전어, 갈치, 새우, 조개, 굴, 바지락 등의 수산물이 잡힌다. 특히 연평도 근해에서 잡히는 조기는 전국 생산량의 80%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장연군과 옹진군, 강령군 등지에서는 수산물들이 해주시장으로 올라온다.
광업으로 우이산과 용수산에서 해주박석이 채굴된다. 엷고 넓은 화강암인 해주박석은 전국을 통틀어 이곳에서만 생산되는 진귀한 광물이라고 알려져 있다.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에 깔려있는 박석이 모두 이곳에서 생산된 것이다.
특산물로는 먹과 벼루가 품질이 좋아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규모의 공장 시설을 갖추지는 않아 많은 양을 생산하지는 못했다.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으며, 농도와 순도가 잘 조화된 것이 특색으로 글씨를 쓰는 데 조금도 손상과 마모되지 않아 서예가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개성공단이 성과를 거두자 해주 일대도 남한과 협력해서 같이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실제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 이른바 "서해평화협력지대"를 공동 선언문에 명시해서 개성에 이어 해주시, 강령군 일대까지 묶어서 개발하려는 계획이 세워졌지만 이듬해부터 북한의 도발로 남북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며 완전히 물건너 갔다.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북한 당국에서 해주 일대를 개방해서 개발하려고 하고 있으며, 향후 대북 제재가 해제되면 해주시의 발전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미래에 통일이 된다면 황해(남)도의 도청소재지로서 황해(남)도의 행정적 중심지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의 발전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주변에 큰 도시가 없기 때문에 남포, 인천처럼 외항 역할을 할 수 없고, 한반도 주요 교통축들 가운데 하나인 경부-경의 교통축에서 빗겨나 있기 때문에 크게 발전하기는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남포항이 부동항 지위를 상실하여 해주 이북의 서해안 항만들은 부동항이 아니기 때문에 부동항인 해주항이 주목받을 여지도 충분히 있다. 통일 뒤 경의고속철도를 서울, 개성, 해주를 거쳐 사리원, 평양, 신의주에 이르도록 건설하려는 계획이 있다. 또한 서해안고속도로를 해주까지 연장하려는 계획 및 인천국제공항과 해상교량을 통해 바로 연결되는 서해남북평화도로 계획 역시 있기 때문에, 서산, 당진처럼 성장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12]
무엇보다 통일 직후, 북한 재건및 재개발에 필요한 물자들이 이곳을 통해 운반되어질 것이고 초기에는 북한 개발의 전초기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해주시는 황해남도의 교통요지이다. 예로부터 서울과 평양, 중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의선 철도를 부설할 때 벽란도에 철교 가설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이 곳을 피해서 부설함에 따라 한때 쇠락의 위기에 서기도 했으며, 이 때 도청을 사리원으로 옮기자는 청원이 강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광복 전에 일제가 토해선(토성~해주), 사해선(사리원~해주), 옹진선(해주~옹진) 간 협궤를 부설하여 교통의 요지를 이루었다. 개풍-해주-옹진에 이르는 토해선과 사리원에서 해주에 이르는 황해선은 광복 후 다시 배치되었다.
현재 해주시 지역에는 황해남도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황해청년선, 황해남도 동부 지역과 연결되는 배천선, 황해남도 서부 지역과 연결되는 옹진선이 뻗어 있다. 옹진선의 지선인 정도선을 통하여 용당반도 및 정섬의 해주항과 연대수송을 보장하고 있다.
도로망은 해주~사리원(이북 5도 기준 51번 국도, 54번 국도), 해주~개성 간 1급도로(이북 5도 기준 50번 국도)가 지정되었다. 황해남도 내의 여러 지역과 이어지는 2급도로망이 구축되어 있다. 연안·배천을 지나 개성으로 통하는 도로와 재령을 지나 사리원·신천·안악으로 통하는 도로가 있으며, 그 밖에도 장연·송화·옹진·금천·남천 등지로 도로가 연결되어 있다.
해주시는 예로부터 황해의 주요 항구도시였다. 용당포의 해주항이 완성됨에 따라 서북지방의 유일한 부동항으로서 그 면모를 새로이 하였다. 해주항은 현대적인 대규모의 무역항으로 부상하여 북한의 여러 항구들과 뱃길로 연결되어 있다. 서울의 해상 관문인 인천과 가까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로 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오사카와의 사이에 1,500t급 화물선이 월 5회 운항되었다. 인천항과의 정기 항로가 있었고, 진포, 진남포와도 기선의 왕래가 많아 여객·물자수송이 활발했다. 해주항은 육지의 다른 곳과도 연결되고, 해상으로는 인천∼진남포 간 해상을 연결하여 상업 중심지이면서 교통상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살색이 희고 육질이 연한 봄철 도미를 통째로 전으로 부친 도미면을 주재료로 하여 고기와 표고버섯, 숙주나물, 황화채, 미나리, 목이버섯 등 채소를 둘러 육수를 넣고 국수를 넣어 끓인다. 최영년이 집필한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따르면 ‘해주의 전통적인 명물로서 서울의 도미면과 같고 맛이 뛰어나므로 도미 맛이 풍류와 계집보다 낫다는 의미로 승가기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해주향교가 있었다. 용수산 남쪽, 고려시대 학자인 최충의 옛 집터에 위치한 해주향교는 창건 연대는 명확하지 않으나 1499년(연산군 5)에 황해도관찰사 풍천심공(豊川沈公)이 중수하였다.
근대 교육기관으로는 1890년대에 김영택, 오돈근, 이승모 등이 대령학교와 제민학교를 세웠다. 감리교의 미국인 선교사 홀이 1904년에 의창학교, 1909년에 의정여학교를 세웠다. 1912년에는 전봉훈, 유훈영 등이 정내여학교를 세웠으며, 4년제 광덕학교도 세웠다.
중등 교육기관으로는 해주농업학교를 최초로 세웠으며, 3.1 운동 후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여 인문계 중학교로 1922년에 해주공립고등학교를 세웠다. 해주농업학교는 사리원으로 이전하였다. 그 뒤 1923년에 해주공립사범학교가 세워진 데 이어 해주공립공업실습학교, 해주직업학교 등이 문을 열었다. 여자중등교육기관으로는 1931년에 수양공립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다.
한편, 일본인 자녀들을 위하여 1907년에 해주공립심상고등학교가 세워졌으며, 이어 해주욱정고등여학교, 해주서중학교 등이 세워졌다.
해주시에는 10여 개의 대학과 20여 개의 전문학교, 28개의 중학교, 13개의 소학교, 56개의 유치원이 있다.
김종태대학(해주사범대학)
황해남도 내 중학교 교원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5년제 사범대학이다. 1961년 9월 1일 해주사범대학으로 개교하여 1969년 7월 12일 김종태사범대학으로 개칭하였으며, 1990년 10월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학교 명칭의 김종태는 남한에서 통일혁명당 사건을 주도한 전 통일혁명당 서울시위원장의 이름이다. 김일성동지 혁명력사학부, 어문학부, 외국어학부, 수학부, 물리학부, 생물화학부, 체육학부가 설치되어 있다.
해주제2사범대학
황해남도 내의 중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또 다른 사범대학이다. 1948년 10월 5일 2년제 해주교원대학으로 발족되어 초급중학교 교원을 양성하였다. 1961년 4월 해주사범전문학교와 통합되어 해주사범대학(4년제)으로 개편되었으며, 1962년 6월 황해남도 교육간부학교와 병합되었다. 1972년 9월 해주제2사범대학으로 되었다. 대학에는 청년동맹 및 소년단지도원학부, 국어문학학부, 역사지리학부, 수학부, 물리학부, 음악미술학부, 체육학부 등의 학부가 설치되어 있다.
김제원대학(해주농업대학)
황해남도 내 농촌경리 부문의 과학기술직을 육성해내는 농업대학이다. 1960년 12월 1일에 해주농업대학으로 발족되었다. 1990년 10월 31일에 김제원 농민의 이름을 따 개칭되었다. 김제원 농민은 이른바 애국미헌납운동을 1946년에 시작하였다. 대학에는 농학부, 과수학부, 산림하천학부, 수의축산학부, 농기계학부, 농업경영학부 등 학부와 학과들이 설치되어 있다. 농업과학연구소와 연구원, 박사원, 출판소가 있다. 이밖에 통신학부가 있다.
해주의학대학
수양산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황해남도와 개성의 보건직 양성을 위한 의학대학이다. 1959년 9월 1일에 해주의학대학으로 발족되었다. 1962년에 새로 대학청사를 건설하였다. 의학부와 한의학부, 약학부, 의생학부를 비롯한 본학부 및 특설학부가 설치되어 있다. 이밖에 통신학부, 오랜 현직 보건직들을 대상으로 하는 의사재교육학부가 있다. 과학연구사업의 주관 부서인 박사원과 연구소가 있으며 제약공장이 있다. 황해남도인민병원과 황해남도소아병원, 그리고 기타 황해남도와 개성시에 있는 인민병원들과 전문과 병원들을 임상 실습 기지로 이용하고 있다.
조옥희해주교원대학(해주교원대학)
황해남도 내의 소학교 교원과 유치원 교양원을 양성하는 3년제 사범교육기관이다. 1968년 9월에 발족되었다. 당시에는 유치원 교양원만을 양성하는 2년제 교양원대학이었는데, 1972년 9월에 3년제 교원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해주제1교원대학으로 승격되었다. 1987년 6월에 해주제2교원대학과 통합하여 해주교원대학으로 개편되었으며 1990년 10월 31일 조옥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조옥희대학으로 개칭되었다가, 1997년 2월 조옥희해주교원대학으로 되었다. 대학에는 교원학과, 교양원학과, 체육학과, 체육무용학과 등 학과가 있다.
해주공업대학
1961년 9월 1일에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계의 발전 지시에 따라 해주시멘트공장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발족되었다. 대학에는 화학공학과, 기계공학과, 전기공학과 등 여러 학과들과 관리일꾼양성반이 있다.
보건기관으로는 해주의학대학병원, 황해남도구강예방원을 비롯한 14개의 병원과 기타 예방치료기관들이 있다.
이중 해주의학대학병원은 황해남도 중앙병원으로 주로 근로자들의 예방 치료 사업을 담당 수행하며 해주의학대학 학생들의 임상 실습지로 되어 있다. 황해남도 보건일꾼들의 임상재교육기지이자 조선의학과학원의 하나의 임상연구기지로 되어 있다. X선 분야에 연구 중심을 두고 전문화되어 있다.
해주의학대학병원은 1946년 1월 9일 황해도인민병원으로 발족되었다. 1951년에 해주제1병원으로 개편 및 확장되어 전시 치료 예방 사업을 담당수행하였다. 전후 1954년 3월에는 해주제1병원자리에 황해남도중앙병원이 복구 및 확장되었다.
1957년에는 병원에 간호원학교를 새로 창설하였고 1961년에는 삼천군 달천에, 1963년에는 옹진군 대기리에 각각 분원을 창설하였다. 1963년 1월 1일에 황해남도중앙병원이 해주의학대학병원으로 개편되었으며 1965년 5월에 병원의 소아과를 분리하여 황해남도소아과병원을 창설하였다.
1971년 3월에 새 병원 건설을 시작하여 1978년 4월 15일에 준공되었다. 현재 병원의 총 부지는 5만여 제곱미터, 총건축면적은 3만여 제곱미터로서 외래환자치료건물, 입원실, 방사성동위원소과, 병리해부과, 약국 및 기타 후방 보장 부서 건물들로 이루어졌다.
부용동에 있는 누각으로 북한 국보 제68호로 지정돼 있다. 부용당은 1500년(연산군 6)에 해주읍성 앞의 누각으로 세운 것으로 ‘연못 안에 세운 건물’이라는 뜻이다. 1500년에 연못 바깥에 세운 누정을 ‘응향각(凝香閣)’, 20년 후 연못 안에 세운 누정은 ‘부용당’이라고 하였으나 점차 두 건물을 합쳐 부용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을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길에 이곳을 해주행궁으로 승격시키고 1593년(선조 26) 8월 18일에서 9월 22일까지 머무르며 조선 인조가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의 발달된 누정 형식과 건축술을 잘 갖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로서, 주위 환경과 잘 어울려 한때 해서팔경(海西八景)의 하나로 일컬어졌다. 황해도청 바로 앞 연못에 있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소실되어 돌기둥과 주춧돌만 남아있게 되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2003년에 복원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재북한문화재에 대한 조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인지 泰峯閣으로 나와있으나, 현판으로 보나 의미로 보나 이쪽이 맞아보인다.
인조가 해주에서 탄생하여 그 태를 묻은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과 건물. 169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6.25 때 크게 파손되었다가 북한 치하에서 몇 차례 보수하였다.
해주석빙고
옥계동에 있는 석빙고로 북한 국보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빙실의 길이 28.3m, 너비 4.5m, 높이 6m로 고려 초에 처음 세워 1735년(영조 11)에 개축하였다. 일정한 모양의 화강암으로 1.4m 정도의 사이를 두고 12개의 무지개형 골조를 세우고, 그 사이에 큰 판돌을 건너대어 아치 모양으로 만들었다. 밖에는 2m 두께로 흙과 석회를 섞어 다져서 덮고 그 위에 잔디를 입혀 무더운 여름철 태양열을 막도록 하였다. 위로부터 무거운 무게를 받고 있기 때문에 견고함을 유지하는 동시에 내부의 용적을 보다 크게 하기 위하여 천장을 궁륭(穹窿)형식으로 한 것이 특징이다. 안팎의 구조가 보존되어 있다.
해주다라니석당
해청동 해주공원 영내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당으로 북한 국보 제82호로 지정돼 있다. 높이 464cm인 육각형 구조물로, '다라니석당'은 다라니경을 새겨 기둥처럼 세운 돌구조물을 말한다. 굳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것으로서 풍화를 입었지만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잘 간직되어 있다. 고려시대의 돌 조각술의 발전 모습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의 다라니석당은 이 곳과 피현군 성동리 다라니석당, 두 곳이 있다.
백세청풍비
1728년에 세웠으며 높이 434cm이다. 백세청풍이란 백이와 숙제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며 마침 해주 북쪽에도 수양산이 있고 해서 세웠다고 한다. 글씨는 황해도관찰사 이언경이 주자의 것을 모사해 새긴 것이다.
신광사
신광리 북숭산에 있었던 사찰이다. 신라문무왕 때 원효와 의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고려 말기 원나라순제가 제위에 오르기 이전에 대청도에 귀양을 오게 되어 이곳을 지날 때에 풀 속에 한 부처가 있음을 보고, 그 부처에게 속히 귀국하여 왕이 되게 해주기를 빌었던 바, 그 후 귀국하여 왕이 되자 많은 재물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677년에 화재로 소실돼 그 후 다시 중건되었으나 현재는 폐사되었다. 경내 문화재로는 1324년(충숙왕 12)에 세워진 신광사 오층탑과, 신광사무자비(神光寺無字碑)가 있다. 무자비는 글자가 없는 비로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시의 서남쪽에 있는 동. 성을 축조한 듯이 산맥이 뻗어간 곳에 위치해 있다 하여 결성동이라 하였다. 남쪽에 결성포구가 있다. 당곶, 백석동(육섬몰), 서풍촌(하내켠몰), 평가리, 새마을(안촌마을), 조촌마을, 답동(논뚝몰), 임촌(샘몰), 찬밑골, 냉수몰 등의 지명이 있다.
광석동(廣石洞)
시의 동북쪽에 있는 동. 옛날에 돌내라 부르던 광석천을 끼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광석정이라 하였다. 조선 말에는 복숭아꽃이 많이 피는 마을이라 하여 도화동이라 불리던 지역이었다. 광복 후 광석천 연안 중 시내구간을 정비하여 광석천공원으로 건설하였다. 할딱고개, 어두운골, 가라지골 등의 지명이 있다.
광하동(廣河洞)
시의 동북쪽에 있는 동. 너럭바위가 많은 광석천 유역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광하동이라 하였다. 동해주 종합 식료 상점 광하분점이 있다. 장대산, 실골천, 배바위뒤산 등의 자연물과 실골, 장대골, 재령촌 등의 지명이 있다.
구제동(九濟洞)
시의 서북쪽에 있는 동. 거북바위가 있어 어암동이라 하였다. 광복 후 옛날 아홉 개의 서당이 있는 마을로 흐르는 구제천을 끼고 있다고 하여 구제리로 개칭하였다. 구제천 상류에 가재바위가 있고, 구제동 동부에 북산공원이 있다. 금봉, 용수봉, 붕어산 등의 자연물과 성터재, 붕어산고개, 막은답고개, 구용배미개울, 약물(애기당) 등의 지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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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2] 2022년[3]2013년에 고려투어가 업로드한 해주시의 한 광장 영상.[4] 유일한 황해남도의 시이다.[5] 실제 북한에서 쓰는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편의상 연구자들이 '도청 소재지'라고도 한다. 인민위원회는 선거로 수장을 뽑는 것 외에는 베트남 같은 나라와 달리 행정에 큰 권한이 없다. 당위원회보다 권한이 적은 곳이다.[6] 해주의 별호(別號, 고을의 별명)가 '수양'이었으며, 조선세조의 왕자 시절 봉호로 유명한 '수양대군'의 '수양'도 여기서 딴 것이다.[7] 가령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인 김형석이 이 방법으로 월남한 인물 중 한 명이다.[8] 백운방은 1914년 청산방(靑山坊)과 합쳐져 운산면(雲山面)이 되었고, 1938년 해주군 해주읍이 부(府)로 승격됨에 따라 벽성군이 되었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벽성군 운산면인 셈인데, 운산면은 해주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9]세종특별자치시와의 거리와 비슷하다.[10]대전역과 비슷한 거리에 있다.[11]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의 식량난은 주로 식량 생산지인 농촌에서 피해가 덜하고 식량 공급지인 도시에서 피해가 심각했다. 이는 고난의 행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식량 생산량의 부족보다는 각종 자원을 공급할 국가 체제의 전면적인 마비 및 붕괴라는 점을 보여준다. 반면 대약진 운동 당시의 대기근은 생산지인 농촌이 피해를 뒤집어썼다. 이쪽은 식량을 수탈할 행정 체계는 작동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12] 무엇보다 통일 직후, 북한 재건및 재개발에 필요한 물자들이 이곳을 통해 운반되어질 것이고 초기에는 북한 개발의 전초기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1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재북한문화재에 대한 조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인지 泰峯閣으로 나와있으나, 현판으로 보나 의미로 보나 이쪽이 맞아보인다.[14] 본명은 이종(李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