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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성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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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노예의 점검'. 줄리오 로사티. 1917년 작(作).[1]

1. 개요
2. 상세
2.1. 여성 인권사
2.2. 여성들의 생활
2.4. 성노예
2.5. 동성애
2.5.1. 미소년 무희 '쾨젝'




1. 개요[편집]


오스만 제국성문화를 정리한 문서.


2. 상세[편집]



2.1. 여성 인권사[편집]


오스만 제국 극초기, 약 14세기와 15세기 경에도 여성들은 생각보다 나름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샤리아, 카눈 등 경전들을 해석하고 남편들에게 조언해주는 데에 은근히 여성들의 입김이 많이 들어갔던 것. 하지만 아직 오스만 제국은 그 무엇보다 힘이 중요시되는 정복 국가였고, 아직 전쟁이 끊이지 않던 터라 남성의 목소리가 압도적으로 더 컸다.

이후 16세기 들어 나름대로 제국에 안정이 찾아오고 쉴레이만 1세가 즉위하면서 여자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정도가 더욱 강해진다. 쉴레이만은 황실 궁빈들 중 가장 격이 높은 여인을 위하여 '하세키 술탄'이라는 칭호를 제정, 휘렘 술탄에게 부여했고, 황제의 어머니를 위한 칭호로 '발리데 술탄'이라는 칭호를 새로 만들었다. 정식 칭호를 만들어 여인들에게 수여했을 정도로 여인들의 정치 참여를 어느 정도 용인했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쉴레이만의 통치기에 들어 여인들의 입김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고, 황실 하렘의 정치싸움이 곧 제국의 정치와 직결될 정도로 여인네들의 영향력은 넓어졌다.

물론 16세기에 여성 인권이 지나치게 강해지며 반발이 생기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카이막을 파는 상점들에 여성들의 출입을 통제한 조처였다. 카이막을 파는 상점들에 여성과 남성들이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마음껏 드나들어 이야기를 나누자 보수적인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황제에게 탄원했던 것이다. 결국 1573년에 여성들이 카이막 상점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공표된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로 나중에 폐지되긴 하지만.

오스만 제국의 17세기와 18세기는 본격적인 서구화, 근대화 개혁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시대였다. 이 시기 여성의 권리는 진보하기도, 후퇴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다른 문화권들과 비교해보았을 때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당대 오스만 여인들에게는 이혼할 권리, 재산을 소유할 권리, 남편과의 성관계를 거부할 권리 등이 모두 인정되고 있었는데, 이 권리들 중 몇 가지는 심지어 당대 유럽에서조차 인정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시대의 성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적인 편이었고 현대 이슬람에서는 천벌을 받을 중죄에 해당되는 동성애 역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행해졌다.

다만 남자와의 동성애는 관대했으나 여성들간의 동성애는 비교적 억압적이었다. 여성들의 인간관계는 사적이고 남성들에게 종속된 것인데 여성들이 자기 마음대로 동성 관계를 즐긴다는 것이 사회 관념에 어긋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문에 남성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서적은 별 제재 없이 유통되었으나 여성들의 아름다움을 다루는 책들은 '지나치게 음란'하다고 해서 비판을 받거나 서점에서 검열되곤 했다. 오스만 3세 같은 술탄들은 대놓고 여자들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수도 이스탄불의 여인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밖에 나가는 걸 금지하기까지 했다. 평범한 옷만을 걸치고 얼굴은 베일로 가릴 것을 강요했던 것이다. 심지어 술탄의 명을 어기고 조금 화려한 옷을 입고 나갔다가 참수당해 죽은 여인까지 있다고 한다.

19세기는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다. 늙은 제국이 혼란에 빠지고 서구화의 물결이 밀려오면서 여성들의 권리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논란이 일어났다. 청년 튀르크당과 같은 비밀결사들이 나타나 개혁을 외치는가 하면 서구 열강들이 대놓고 오스만 제국 내부에 간섭했다. 결국 개혁주의자들의 목소리와 열강들의 압력 때문에 19세기 후반에는 산파학교와 여자들을 위한 중등학교가 문을 열었다.

다만 압뒬하미트 2세, 보수적인 이슬람 율법학자들은 여성들이 사회로 진출해나가는 것을 꼴보기 싫어했으며, 특히 오스만 제국이 서구에 암묵적으로 굴복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자존심 강한 오스만인들이 여성 인권 신장을 서양의 개입으로 여겼기에 여러 차례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는 일부다처제에 대한 아내의 허락 필요, 결혼에 대한 국가 통제를 명시한 법률안이 개정되는 진보를 이룩했다. 물론 얼마 못가 오스만 제국 자체가 멸망하면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은 못줬다.


2.2. 여성들의 생활[편집]


오스만 제국이 여성 권리가 양호한 수준이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시대에 국한되었을 뿐, 여성에 대한 직간접적인 차별은 분명히 존재했다. 여성들의 인간 관계는 남편과 가족들을 제외하면 오직 여성들 사이에서만으로 제한되었다. 여자들이 주로 만나 수다를 떨었던 장소는 서로의 집이나 대중 목욕탕. 그나마 이 것도 평민 여성들에 한정된 것이었고 황실이나 귀족 여성들은 마음대로 밖에 나가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했다.[2] 여자들은 서로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기 위해 사교장에 화려하게 수를 놓은 수건, 높은 나무 샌들 등을 가지고 왔다. 옷이 화려할수록 뭇 여성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었기에 여자들은 일부러 사교장에 나갈 때마다 특별히 화려한 옷들을 입고 나갔다고. 물론 앞서 말한 오스만 3세처럼 여성의 화려한 옷차림을 금지한 시절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의 복장은 별다른 제한을 받지 않았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들을 위한 공교육 과정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즉 여자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 소녀들은 하렘 교육을 전수받는 것이 전부였다. 배우는 과목 역시 크게 제한되어 바느질, 자수, 하프 연주, 노래, 관습 및 예절 암기 따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탄지마트 시절에 개혁이 이루어지며 여성 교육에도 큰 변혁이 일어난다. 1858년 'Rüştiyes'라는 최초의 여학교가 문을 열었고 1869년에는 여자들에게도 초등 교육이 의무화되었다. 'İnas Sanayi Mektepleri'라는 여성용 중급 학교가 생겨났으며 여교사 양성 학교, 산업 학교 등 다양한 학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노동력이 절실한 시대에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여자들의 노동력을 그냥 버리기에는 지나치게 아까웠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때 역시 차별은 존재하여, 남성들이 받는 공교육은 주로 직업 위주였다면 여성들의 교육은 좋은 어머니가 되는 법, 좋은 자식을 길러내는 법 정도에 한정됐다. 그래도 여성들이 읽기와 쓰기, 화술, 기술 등을 공식적으로 배울 수 있었던 점에서는 분명히 큰 진보가 맞다. 'Hanımlara Mahsus Gazette'라는 여성용 잡지가 창간되어 무려 14년 간이나 발행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3]

앞서 언급했듯이 오스만 제국에서도 여자들의 치맛바람이 굉장히 강했다. 휘렘 술탄 이래로 여자들이 하렘 내부에서 파벌을 만들어 살벌하게 치고 싸우면서 제국의 정치를 반쯤 주도했던 것이다. 아흐메드 1세의 황후 쾨셈 술탄, 이브라힘의 황후 투르한 술탄은 자신의 아들을 황위에 앉힌 다음 대놓고 국정에 개입했다. 황태후들은 모자 관계라는 사적인 관계를 아예 공적인 관계로 못박아 국정에 관여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여인들도 어느 정도 제한은 있어서, 황태후 '발리데 술탄'만이 황궁 밖을 제한적으로나마 출입할 수 있었고 나머지 하렘 여인들은 아예 궁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불허됐다. 공적 행사에 참석할 수 있는 것 역시 발리데 술탄 1명 한정이었고 나머지는 죄다 궁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하렘 여인들은 주로 노예나 환관들을 이용해 황궁 안에서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했다.[4]

오스만 시절의 법은 '카눈'이라고 부른다. 무슬림 법체계에 역대 황제들이 따로 제정한 법들을 기워넣은 것으로 샤리아와 함께 오스만 제국 법의 양대산맥이었다. 그리고 이 카눈을 보면 여성들은 이례적일 정도로 많은 권리가 인정됐다.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 이혼 청구를 법원에 제기할 수 있는 권리, 남자와의 상의 없이 스스로 사법 제도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 종교 및 학술 분야에서 비공식적으로나마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 등등이 모두 인정됐다.

하지만 오스만 민법이 여자와 남자를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여자들에게는 법정에서 발언할 수 있는 발언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여자들은 소송에 휘말리면 자신을 변호해줄 남자 증인들을 찾아야만 했는데, 여자들은 보통 여자들끼리만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에 증언해줄 남자 증인들을 찾는다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젊은 여성들은 결혼 생활에서도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소녀의 가족, 그중에서도 특히 아버지가 나서서 결혼 문제나 재산 문제를 처리했고 여자들의 뜻은 딱히 반영되지 않았다.

강간은 중대범죄로 취급되었으나 이 법이 항상 여성 피해자를 보호하는 쪽으로 작용되진 않았다. 여성들을 보호하겠답시고 만들었던 법이 실제로는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소녀가 강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원에서는 애초에 소녀의 가족이 왜 소녀를 혼자 놔두었냐고 비난하며 적반하장으로 남자 가해자 편을 들어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렘에서 휴식을 취하는 여인들
오스만 시대의 하렘 풍경
여자가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권리 자체는 인정되었으나 그게 이혼 절차가 쉽다거나 이혼에 대한 사회적 눈초리가 좋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오스만인들은 이혼하는 사람들은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여자도 이혼은 가능했다. 하지만 남자들은 별 이유 없이 아내를 내치고 처가로부터 보상을 받아낼 수 있는 반면에, 여자들은 이혼하기 위해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야했고시댁에서 보상을 받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웠다.시댁에서 보상을 받기는커녕 그동안의 생활비를 돌려준다는 명목으로 전 남편에게 돈을 지불해야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다만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미망인이 되었을 경우 법원에 가서 재혼 허가를 받으면 됐고,[5] 재혼 허가가 떨어지면 재가가 허용됐다.

상속을 받을 권리도 있었다. 아버지나 남편이 사망하면 그 유산을 여자의 명의로 물려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게 여자가 '진짜로' 상속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여자가 받아야할 유산이 '남성 상속자에 대한 선물' 형식으로 죄다 여자에게 넘어갔다. 17세기 부르사에서 작성된 문서들만 봐도 여자가 재산을 상속받을 시에 수많은 분쟁들이 일어났으며, 결과적으로는 원래 받아야할 유산보다 한참 적은 양의 유산을 받았다. 명목상으로는 농지를 물려받을 수도 있었지만 여자에게 땅이 돌아가는 일은 아예 없었다. 농토는 그 어떤 재산들보다도 알짜배기 재산이었고 이 것을 여자가 물려받는 건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 게다가 토지를 나라에서 빌려줄 뿐 상속을 금지한 '티마르 제도' 때문에 상속 자체가 금지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훗날 제정된 황실 칙령에서도 남자 지주는 오직 남성 후계자에게만 땅을 물려줄 수 있었고, 여자가 땅을 물려받기 위해서는 특별세를 지급해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부유한 여성들은 경제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남자 가주 대신에 농장을 경영하거나 집안을 관리했고, 재산들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도 있었다. 이슬람 문화권에는 '와크프'라고 하여 종교재단에 재산을 기부하면 그 돈으로 사람들을 먹여살리거나 사원, 공공시설을 짓는 기부 제도가 있는데, 여성들도 독자적으로 이 와크프에 재산을 기부할 수 있었다. 상당수의 와크프가 여인들의 명의로 되어 있었는데, 1930년대 기준 이스탄불의 491개에 달하는 공공 분수들 중 30% 가까이가 여인들이 소유한 와크프에서 지은 것이었을 정도였다. 수도 이스탄불 뿐만 아니라 제국 내 수많은 도시들에도 여인 소유의 와크프들이 많았는데 일부 지방에서는 심지어 여자들이 소유한 와크프가 남자 명의의 와크프들보다도 수가 많았다.

여자들은 제 재산을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었다. 일례로 1683년 남편이 죽고 물려받은 한 상점에 누군가가 들어와 강제로 점유하자 이를 되찾기 위해 소송을 걸었던 한 여인의 기록이 남아있으며, 자신의 집에 추가 건물을 지었다는 이유로 남편을 고소한 여자도 있었다. 결국 법정이 여자의 손을 들어주면서 남편은 건물을 억지로 헐어야 했다고. 여성들은 꽤나 부유한 편이어서 제국 내 여성들 가운데에 3분의 1이 자기 명의의 집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여자들은 과수원, 농지들을 마음대로 사고 팔았으며[6] 신용거래, 무역, 고리대금, 길드,[7] 수공업 등에 종사하면서 활발히 오스만 경제에 참여했다.


2.3. 하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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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성노예[편집]




체르케스 노예 출신 후궁[8]
백인 노예를 팔아넘기는 이슬람 상인들
노예를 두고 흥정하는 오스만인들의 모습
오스만 제국은 수많은 영토들을 정복하면서 그 곳에 살고있던 원주민들을 끌고와 노예로 부렸다. 정복자 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한 이후 그 곳에 최초의 노예시장을 세웠는데, 특히 개중에서도 젊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은 노예의 품질을 확인한다는 이유로 알몸으로 전시했다. 이스탄불이 아닌 다른 곳들에도 노예시장들이 많았다. 이 시장들은 보통 도시 한복판에 있었으며 '예지르'라고 불렸다.

크레타 섬에 남아있는 오스만 제국 시절 기록들을 보면 당시 노예들의 시세와 대접 등을 대강 파악할 수 있다. 연령, 인종, 처녀성 따위가 노예 가격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가장 비싼 연령대는 젊어서 팔팔한 10세에서 35세 사이의 노예였다. 특히 13세에서 25세 사이의 유럽 백인계 소녀들, 그리고 노동력을 오래 뽑아먹을 수 있는 어린 소년들이 비쌌다. 가장 값싼 노예들은 장애인들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잡아온 흑인 노예들이었다.

하지만 값싸다고 해서 아무나 살 수 있는건 절대 아니었다. 고소득층이 아니라면 노예를 소유한다는 건 아예 불가능했다. 예를 들어 1717년 정신장애가 있는 12세 소년이 27 구루슈에 팔렸는데, 이 27 구루슈면 각각 양고기 462kg, 빵 933kg, 우유 1,385L를 살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웬만한 재력가가 아니면 노예는 그림 속의 떡에 불과했던 것이다. 장애인 노예조차 이 가격이니 웬만한 노예는 더 심했다. 1671년 여성 노예는 약 350 구루슈에 팔렸는데 당시 정원이 딸린 거대한 2층 저택의 가격이 300 구루슈였다. 게다가 이슬람 율법에 따라 노예를 사들일 때 그 노예 가격의 5분의 1을 따로 세금으로 지불해야했는데, 이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스만 제국 내에서도 많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에서 남자 주인이 소유한 여성 노예는 주인에게 접근이 가능했지만 여자 주인이 소유한 여성 노예는 주인의 남편에게 접근이 불가능했다. 여자 노예가 주인의 아이를 배게 되면 그 아이는 자유 시민과 같은 대우를 받았으며, 여자 노예는 다른 주인에게 팔아넘길 수도 없었다. 게다가 주인이 죽으면 여자 노예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보통 노예들은 자신의 자식들을 사고 파는 것도 금지됐다. 하지만 너무나도 살기 어려웠던 노예들은 자식을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성노예는 '카리예'라고 부른다. 오스만 제국 내부에서 가장 대중적이었던 성노예 인종은 체르케스인, 시리아인, 누비아인 이렇게 셋이었다.

체르케스인 소녀들은 밝은 피부색과 뚜렷한 이목구비로 인기가 엄청났다. 타타르인들과 크림 칸국러시아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방의 백인들을 납치해 오스만 제국에 팔아넘겼는데 이들은 성노예들 중에서도 최상급으로 여겨졌다. 체르케스인 소녀들은 보통 500파운드 스털링에 팔렸고 웬만한 저택 하나보다 비쌌다. 두 번째는 아나톨리아 해안가에서 잡아온 시리아계 소녀들이었다. 하지만 질은 체르케스인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아 최대 30파운드 스털링이었다. 가장 저렴한 건 누비아와 북아프리카에서 잡아온 누비아인들이었다. 가장 수도 많고 대중적이었지만 인기가 없어 최대 20파운드 스털링에 그쳤다. 물론 누비아 소녀 노예들 역시 일반인이 사기에는 엄청난 금값이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값이 쌌을 뿐.

소년들도 성노예가 될 수 있었다. 이들은 보통 터키식 대중목욕탕 '함맘'이나 커피숍에서 주로 일했다. 이들은 신체 특정 부위에 노예라는 낙인을 찍혔으며 주인의 허락 없이 인간관계를 맺는 게 금지됐다. 일부 소년들은 안마사, 무희 '쾨젝' 등으로 뽑혀가기도 했다. 소년들 중 미색이 뛰어난 이들은 동성애의 대상이 되어 상류층들의 오락거리가 되었다. 이들은 상류 계급의 애인 대접을 받아 좋은 호사를 누렸으나 시간이 지나 미색이 쇠하면 내쫒겼다.

여자 주인들은 성노예를 사는 경우가 드물었다. 애초에 남편들이 제 아내들에게 남자 성노예를 사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여주인들은 성적인 목적이 아니라 가사 목적이나 잡일을 시킬 목적으로 노예를 사들였다. 의외로 여주인들도 여노예의 미색에 신경을 썼다. 아름다운 노예를 거느릴수록 주인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매춘은 거의 처벌받지 않았고 기껏해봐야 매춘부나 포주가 지역에서 추방당하는 것에 그쳤다.[9]

시간이 흐르면서 오스만 제국의 노예제도 쇠퇴했다. 19세기 들어 유럽 열강들의 힘은 날로 강해졌는데, 유럽인들의 눈에 오스만인들이 기독교도 백인들을 노예로 부리는게 마음에 들 리가 없었기 때문. 코카서스 지방에서는 러시아 제국이 더이상 오스만인들이 노예 장사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단속에 들어갔다. 결국 외교적 압력이 갈수록 심해지자 술탄 마흐무트 2세가 1830년 체르케스인, 그리스인 등을 포함한 모든 백인 노예들을 해방했다. 하지만 노예 제도 자체는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심지어 100년이 지난 1930년대까지 남아있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이 일어나자 튀르키예인들이 기회를 노려 백인계 아르메니아인들을 대거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겼다는 기록도 있다. 튀르키예에서는 1964년에야 공식적으로 노예제를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됐다.


2.5. 동성애[편집]


보통 근현대 이전의 동성애 문화를 논할 때에는 고대 그리스고대 로마, 그리고 에도 시대와카슈도 정도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오스만 제국 역시 상당히 동성애 문화가 발달했던 나라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 문화권이었고, 현대 이슬람이 동성애를 철저하게 하늘이 내린 죄악으로 여기는 문화권인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운 사실.

오스만 제국에서 동성애가 유행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들 중 하나는 쿠란에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적었기 때문이다. 무함마드간통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엄격하게 다루었지만, 동성애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이기는 하였으나 간통죄나 다른 범죄에 비하여 많지 않은 수준이었다. 따라서 후대 이슬람 학자들은 무함마드의 뜻을 어떻게 해석해야되는지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였는데, 동성애를 간음죄로 처벌해야 하는가, 아니면 아예 처벌하지 말아야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주요 종파였던 수니파 계열의 하나피 종파는 동성애를 간음과는 분리했으며, 역시 동성애를 자연스럽지 못한 것이라고 여겨 처벌 대상으로 여겼다.

오스만 제국은 건국 이래로 동성애를 좋게 보지는 않았으나 할 사람들은 물밑에서 다 하고 다녔다. 물론 셀림 1세가 공포한 법안이나 쉴레이만 1세의 법전을 보면 동성애 처벌 조항이 등장하나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의 욕망을 막기는 어려웠고 암암리에 즐기고 다녔던 것이었다. 1480년대에 프랑스에 살았던 오스만 왕자 젬 술탄은 프랑스 소년과의 동성애 경험을 묘사한 시를 쓰기까지 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에서도 오스만 제국 시대의 동성애가 묘사 된다.

202조. 겸허와 수치심에 반하여 공개적으로 가증한 행위를 저지르는 자는 3개월에서 1년까지의 징역에 처하며, 1메히디에 금화에서 10메히디에 금화까지의 벌금을 부과한다.

- 오스만 제국 법전.[10]

(1858년)

탄지마트 개혁 당시 제정된 법조항으로, 언뜻보면 동성애 금지 조항으로 보이지만 그게 아니다. 해당 조항에서 눈여겨볼 것은 공개적이라는 단어다. 즉 '공개적'으로 하지만 않는다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뜻. 이때문에 남성들의 동성애 관계는 압도적으로 비밀리에 이루어졌으며 공개적으로 대놓고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스만 사회에서 인정받는 유일한 형태의 결혼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결합이었고 동성 간의 결혼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당사자들이 자신들끼리 몰래 즐기는 건 처벌받을 것이 아니었으나 사회에 대놓고 언급한다거나 결혼 등 공개적으로 드러내놓고 한다면 당장에 사회의 응징을 받았다.

다만 시간이 지나며 역시 오스만 제국의 동성애 역시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19세기 말 들어 어린 소년들을 상대로 한 동성애 유행이 끝나가면서 그 욕구는 대신 어린 소녀들에게 향했다. 서구 세계에서 동성애에 대한 취급이 점점 악화되었던 것이 큰 원인으로, 서구식 근대화 개혁을 진행하던 오스만 제국에서도 서양의 영향을 받아 동성애 배척 풍조가 생겨났던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동성애 배척 풍조는 현대까지 이어져 지금의 튀르키예에서도 동성애는 전혀 좋은 취급을 못받는 상태. 그나마 이슬람권 국가들 중 가장 세속적인 튀르키예답게 동성애자들에 대한 취급이 다른 이슬람 국가들에 비하면 좋은 편이다.

오스만 사람들도 현대처럼 성을 남자여자, 이렇게 2개로 나누었다. 하지만 오스만인들은 '생물학적인 성'과 '사랑과 연애의 성'을 다르게 나누어 생각했다. 고대 로마와 비슷하게 남자 역할에 가깝고 능동적인 '사랑하는 자', 그리고 여자 역할에 가까운 수동적인 '사랑받는 자' 이렇게 2개로 분류했던 것이다. 사랑과 연애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능동성과 수동성이었지 연인들의 성별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성 - 남성 관계나 여성 - 여성 관계가 가능했다. 허나 여성 인권이 남자에 비하면 상당히 떨어졌던 오스만 제국이었던만큼 여자들은 서로 간에 자유로운 교류조차 어려웠고, 이에 따라 레즈비언들보다는 게이들이 압도적인 비율로 더 많았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야막(yamak)'이라는 보조 병종이 있었다. 야막은 스스로 자원한 젊은 소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야막에 입단하면 납세 의무에서 면제되어 인기가 높았다. 야막은 8세부터 20세 사이의 남성들로 이루어졌는데, 오직 남자들만 있는 기숙사에서 소년 시절 내내 고된 훈련을 받으며 지냈다. 문제는 한창 성적 욕구에 눈을 뜰 나이에 소년들을 한 곳에 몰아넣다보니 동성 관계가 발생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던 것.[11] 예니체리들이 야막을 건드리는 경우도 있었고 야막끼리 동성 관계를 맺는 경우도 많았다. 야막들은 술탄에 대한 충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결혼이나 가정을 꾸리는 것에 제한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동성 관계는 더욱 빈번했다.

동성애를 묘사한 오스만 시대의 작품. 노골적인 성교 장면이 묘사되어있으니 열람시 주의 [펼치기ㆍ접기]

동성애를 묘사한 작품들도 많다. 동성애를 다룬 가장 유명한 오스만 작가가 바로 '엔데룰루 파질'. 수많은 시집과 책들을 썼으나 현재 남아있는 건 5권에 불과하다. 이 남아있는 5권조차도 수위가 높은데 'Defter-i Aşk'는 자신의 수많은 동성 연인들에 대하여 써놓았고, 'Hubanname'은 세계 방방곳곳에서 온 남자들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 'Çenginame'는 수도 이스탄불의 유명 남성 무희들에 대하여 설명해놓았고 'Zenanname'은 여러 국적을 가진 여자들의 아름다움을 다룬다.

'네비자데 아카이'는 도덕, 진부함, 동성애 관계를 묘사한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함세'라는 작품을 저술하였는데 단순히 동성애만 쓴 건 아니고 황실 내부의 연회, 사회의 도덕적 가치, 도덕 및 윤리 규범 등등 다양한 화두를 다룬다. 개중 함세의 네 번째 장에는 두 젊은이의 이스탄불 여행 이야기가 나온다. 두 젊은 청년들은 이스탄불을 떠나 바다를 통해 이집트로 향하는데, 여행 도중 유럽 백인 해적들에게 사로잡힌다. 해적들은 청년들을 털어버린 뒤 감금해놓는데, 결국에는 해적들이 청년들과 사랑에 빠진다는(...) 해피엔딩이다. 동성애 관계를 축복하고 긍정적인 분위기로 묘사하는 몇 안되는 작품으로 유려한 문학적 필체로 쓰여있다는 점에서도 그 가치가 높다.

남성 간의 동성애 뿐만 아니라 여성 간의 동성애도 분명 존재하긴 했다. 다만 작가나 시인들의 비율 중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아 상대적으로 부각되어보이지 않는 것 뿐이다. 동성애에 관해 여류 시인들이 남긴 몇 안되는 시들이 존재하는데 이 시들의 특징은 연인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하지가 않다.[12] 가장 유명한 여류 시인은 '미흐리 하맘'으로 평생을 미혼으로 살았다. 미흐리 하맘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자인 것처럼 자신을 표현하지만 그녀 역시 여자였던 것으로 보아 동성애 관계를 묘사한 것으로 해석한다. 종종 시인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의 사랑이 가장 아름다운지에 대해 토론을 벌이곤 했는데, 어떤 시인은 남자 - 남자 관계가 가장 아름답다고 주장했고 다른 시인은 여자 - 여자 관계가 제일 낫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2.5.1. 미소년 무희 '쾨젝'[편집]


오스만 동성애의 중심에는 '쾨젝(köçek)'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매우 잘생긴 젊은 남성 노예를 '쾨젝'이라고 불렀는데 오스만판 남성 무희, 혹은 연예인이라고 보면 편하다. 보통 할례를 받고 7~8세부터 훈련을 받기 시작해 약 6년 동안의 혹독한 연습을 통해 양성되었고 항상 깨끗하게 면도한 모습을 유지해야만 했다. 나이는 10세 ~ 18세 사이였다. 쾨젝들은 춤, 노래, 악기 연주 등 다양한 분야에 모두 능해야 했다. 이들이 추었던 춤을 따로 'köçek oyunu(쾨젝 오윤누)라고 불렀으며 이들이 연주했던 음악은 'köçekçe'라고 불렀다.[13] '다불 쾨젝'이라 불리는 북으로 반주를 맞추었는데 한쪽은 양가죽으로, 반대쪽은 염소가죽으로 덮여있어 서로 다른 음색을 내었다고. 쾨젝들의 역할은 수많은 악사, 무용수, 곡예사 등과 함께 연회의 흥을 돋구게 하는 용도였다.[14]

쾨젝들은 짙은 화장을 했고 동전, 보석, 금붙이 따위로 장식된 작은 검은색 혹은 붉은색 벨벳 모자 아래에 긴 머리를 말아넣은 뒤 기다란 베일로 장식했다. 일상복이 금자수가 들어간 붉은 벨벳 재킷, 역시 금자수가 들어간 실크 셔츠, 헐렁한 바지 '샬바르', 긴 치마, 등에 묶인 금박 벨트였을 정도로 대단히 화려하게 차려입고 다녔다. 다만 이 화려한 복장의 목적은 개인의 위엄을 과시하는게 아니라 관객들의 성적 욕구를 북돋는 것이었다.

오스만인들은 쾨젝들을 '감각적이고 매력적이며 여성적'이라고 평가했고 쾨젝들의 춤을 '성적으로 도발적'이라는 기록을 남기기까지 했다. 보통 엉덩이로 느리게 수평, 혹은 수직으로 8자를 그리며 춤을 추었고 리듬에 맞추어 손가락을 튕기는 게 쾨젝들이 추는 춤이었다. 딱 느낌이 오겠지만 대놓고 성적인 춤이었다. 쾨젝들이 관객들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일도 흔했다.

이스탄불의 수많은 야간 술집들은 손님들을 모으기 위해 쾨젝들을 고용했다. 1805년 기준으로 이스탄불에만 600여 명이 넘는 쾨젝들이 활동했다고 할 정도. 쾨젝들은 관중들 사이에서 춤을 추며 손님들을 흥분시키는 역할을 했다. 손님들은 사이사이로 돌아다니는 쾨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소리를 지르거나 안경을 던져 깨뜨리곤 했다고. 술에 취한 청중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니 당연히 쾨젝들이 성추행을 당하거나 심하면 강간을 당하는 일도 자주 일어났다. 보다못한 압뒬메지트 1세가 이스탄불 야간 주점에서의 쾨젝 고용을 규제하기 시작했고, 1837년 이스탄불에서 쾨젝을 두고 손님들이 패싸움을 일으키자 아예 금지당했다. 압뒬아지즈압뒬하미트 2세 황제가 하렘 문화 자체를 탄압하면서 쾨젝들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쾨젝들은 밸리댄스를 주로 추는 여성 무희 '첸기(çengi)'들보다 훨씬 인기가 많았다. 쾨젝들이 손님들에게 지명되어 불려나가는 횟수가 지나치게 많자 이를 극도로 질투한 첸기들이 일부러 쾨젝들을 독살해 죽여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1] 당대 오스만 제국에서는 유럽계 백인 여성 노예들을 사들여 하렘에서 부리는 것이 유행이었다. 해당 작품은 오스만의 하렘으로 팔려나간 백인 노예가 새로운 주인으로부터 검사받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이다. 오스만 제국 아래에서 고통받았던 여성 노예들의 기구한 삶을 오리엔탈리즘적인 화풍으로 그려낸 작품.[2] 이같은 경향은 19세기 들어서 완화된다. 서양과의 교류가 증가하면서 오스만 여성들도 유럽 여성들과 교류가 늘어났고, 서양의 자유로운 기풍을 받아들여 고위층 여자들도 마음대로 사람들을 집에 초대할 수 있게 되었다.[3] 페미니즘, 패션, 경제적 제국주의 등 다양한 화두를 다루었다. 19세기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 법한 여성 잡지의 면모를 띠고 있었는데 왕실 가십거리, 주부의 관심사, 요리, 건강, 여성향 소설 등등도 같이 실려있었다.[4] 특히 황태후 발리데 술탄이나 황후 하세키 술탄은 공주들의 결혼과 노예들의 결혼을 주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하렘 관리들의 승진과 처벌을 내릴 수도 있어서 하렘을 휘어잡는 게 가능했다.[5] 재혼 허가란 남편의 죽음이 여자의 잘못이 아님을 확인받는 절차였다. 아내들이 남편의 재산을 타내거나 기타 등등의 이유로 남편을 독살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 그래서 여러 증인들을 함께 데리고 가서 남편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증명해야 했다.[6] 앞서 말했듯이 여자가 농지를 매매하기 위해서는 특별세를 내야했지만 여자가 남자들의 대리인으로 나서는 경우도 많았고 현실적으로 일일이 특별세를 매기기는 어려웠던 탓에 사실상 유명무실한 법이었다.[7] 다만 남성들이 주축이었던 길드들과 여자들의 관계는 적대적인 편이었다. 한 여자는 양초 길드에 가입하려 했으나 길드 측에서 이전까지 여자가 길드에 가입한 사례가 없다는 근거로 소송을 걸었다. 그러자 여자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길드에 가입할 수 있는 권리를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며 맞받아쳤다고. 결국 여자는 길드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8] 구스타프 리히터 작(作). 체르케스 출신 황실 후궁의 모습을 그려냈다. 현재는 보스턴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9] 물론 아닌 경우도 많았다. 포주나 매춘부가 당국의 심기를 거슬렸을 경우 매춘부가 병사들에게 강간당하기도 했고, 포주가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는 형벌을 내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10] 당시 탄지마트 개혁에 착수하던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의 법전을 모델로 삼아 자체적인 법전을 제작했다. 위의 조항 역시 동성애를 원천금지하지는 않았던 프랑스 법전 330조에서 따왔다.[11]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유명한 스파르타 역시 이런 일들이 많았다. 한 곳에 소년들을 몰아넣고 키우다보니 동성 관계가 빈번했던 것이다.[12] 이는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여류 시인 사포 역시 마찬가지로 사포도 동성애자였다.[13] 수피즘, 아나톨리아, 발칸 지방의 전통춤들이 모두 합쳐져 만들어진 음악이다. 이 쾨젝 오윤누의 영향은 아직도 터키 음악에 남아있다.[14] 오스만 궁정에서는 보통 20명 정도의 악단이 쾨젝과 함께 공연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단순히 술탄과 귀족의 연회에만 불려다니던 건 아니었고 결혼식, 할례 행사, 잔치나 축제 등 큰 행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