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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계 멕시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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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독일인 혈통의 멕시코인. 멕시코는 한 때 브라질, 아르헨티나 못지않게 독일계 인구 비중이 높았었으나 미멕전쟁 이후 독일계 이민자들이 거주하던 텍사스를 상실한 여파도 있고, 이후로 이주한 독일계 이주민들이 대개 멕시코인들과 통혼하며 그 후손들이 멕시코인들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에 독일계 조상이 있었다고 아는 정도로만 여기는 경우가 많아 오늘날에는 소수만이 독일계로 정체성을 지니고있다. 독일인들이 유럽의 독일어권 국가(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리히텐슈타인)에서 직접 멕시코로 이민한 경우보다는 독일계 미국인·독일계 캐나다인 등 독일계 혈통의 비독일어권 주민들이 이주해온 경우가 더 많은 편이기도 하다. 공식적으로 추산되는 독일계 주민들의 인구가 20만명에도 못미치지만 조상중에 독일인이 있다는 응답이나 독일계 성씨를 지닌 인구를 합치면 수백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2. 이민[편집]
멕시코 독립 이전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독일인 가톨릭 수도자들이 멕시코 땅에 유입된 것이 최초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결혼 동맹으로 근세 스페인은 한동안 독일, 오스트리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이러한 연유로 근세 독일, 오스트리아 출신 유럽인들 일부가 오늘날의 멕시코 땅으로도 유입되었던 것. 그러나 멕시코에 독일인들이 영구 정착촌을 건설하는 시점은 멕시코가 독립한 이후인 1830년대 이후이다.
19세기 독립한 신생국 멕시코는 유럽발 이민에 적대적이었고 스페인에서 멕시코로 온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 사태와 학살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같은 맥락에서 코아우일라 주에서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학살이 일어나 3백여 명이 목숨을 잃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멕시코는 북쪽 국경을 미국과 접하고 있었고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 이민오는 사람들에 한해서는 미국 눈치 때문에 이렇다할 제재를 가하지 못했다.
19세기 프로이센 왕국은 인구 급증으로 인한 빈곤 문제가 심각했고 많은 프로이센 국민들이 미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에는 독일인들이 대다수였지만 독일인 이외에도 폴란드인, 마주리아인, 실레시아인 등등 비독일계도 적지는 않았다.[1] 대서양을 건너 미국 동북부 항구에 입항한 독일인 이민자들을 농경지를 찾아 서진하였고, 1830년대 프리드리히 에른스트라는 사람이 자신의 고향 올덴부르크에 있는 사람들에게 텍사스 이민을 홍보한 것을 계기로 상당수는 당시 멕시코 영토였던 텍사스로 유입되었다.
멕시코 정부는 이들에게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가톨릭을 믿는다는 조건 하에서 입국 및 정착을 허용하였으나 당시 텍사스는 멕시코인 인구보다는 독일계 이민자 인구가 월등히 많았고 이들은 멕시코 중앙 정부의 말을 무시하였다. 여기에는 텍사스에 정착한 독일인 중에서는 가톨릭 신도들도 있었지만 프로이센 출신 개신교 신자 인구가 더 많았던 것도 있었다. 멕시코 제2연방공화국에서 이들을 탄압하자 텍사스의 독일계 인구는 텍사스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한 뒤 미국 편으로 붙었고, 이를 계기로 일어난 미멕전쟁에서 미국이 멕시코를 박살내고 대승을 거두면서 멕시코는 독일계 이민 인구가 유입되었던 북부 영토를 거의 다 상실하고 만다. 미멕전쟁이 아니었다면 멕시코 내 독일계 인구는 브라질 내 독일계 브라질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여담으로 오늘날 텍사스는 과거와는 반대로 히스패닉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멕시코 중부, 남부에 정착한, 독일인 인구도 적지는 않았다. 텍사스에 정착한 독일인 중 가톨릭 신도들은 멕시코가 미멕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다시 남하하여 멕시코 중부, 남부에 정착하였던 것이다. 아무래도 멕시코가 스페인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가톨릭이 주류인 만큼 독일의 가톨릭 신자들이 이주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 시대 멕시코 정부는 멕시코 북부나 중부에 독일인들이 정착하면 또다시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독일계 이민자들을 주로 멕시코 남부 해안 지대에 정착시켰다.
독일계 러시아인 혈통의 멕시코인은 조상이 러시아 제국의 재침례파 탄압을 피해 캐나다로 이주했다가 1910년대 캐나다에서 의무 교육을 요구하자 이를 피해 1920년대 멕시코로 재이민한 경우이다. 주로 치와와 주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캐나다에서 라틴 아메리카로 이주한 메노나이트파 신도들은 현재도 출산율이 엄청 높은데 한 예로 1920년대 7,000여 명의 메노나이트 신도들이 멕시코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다산 풍조를 유지하였으며 2020년대에는 10만명대로 추산된다. 다만 멕시코의 출산율이 1970년대까지는 평균 5명대를 넘었기 때문에 이 당시에는 매노나이트들의 인구증가율이 특출나게 높은 편은 아니었고, 1980년대에는 일반 멕시코인들이 해외이민과 출산율 저하로 매노나이트들의 인구증가율이 더 높아지기는 햇으나 2000년대 중반 마약과의 전쟁 이후로 멕시코의 치안이 급속히 나빠지다보니 매노나이트인들도 더 나은 삶을 위해 해외 이민을 단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주로 캐나다로 이주하거나 땅값이 비교적 싼 파라과이로 이주가는 편이고, 일부는 인구를 늘릴려는 러시아 지방정부(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초청을 받아 러시아로 이주가기도 한다.[2] 메노나이트파 신도들은 멕시코 이민 후에도 종파 차이로 가톨릭을 믿는 다른 멕시코인들과 거의 통혼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다.
3. 식문화[편집]
멕시코의 커피 재배 및 대중화는 1890년대 멕시코 남부 과테말라와 접한 치아파스에 정착한 독일인 농민 450여 명이 커피 농장을 운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한다.
전간기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상당수의 독일 유대인들이 멕시코로 망명하였는데, 오늘날 이들은 주로 멕시코 시티를 중심으로 거주하는 편이다. 일부는 칸쿤, 플라야 델 카르멘으로 이주하여 북미 출신 유대인 관광객들을 타깃으로 코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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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매니토바에서 치와와 주로 이민 온 재침례파 신도들이 생산하는 치즈는 케소 메노니타(Queso Menonita), 케소 치와와(Queso Chihuahua)로 불리며 체다 치즈의 대체품으로 주로 케사디야용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
4. 유명 인물[편집]
편의상 독일 본토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등 타 독일어권 국가 혈통도 포함한다.
5. 관련 문서[편집]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1-23 23:27:36에 나무위키 독일계 멕시코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텍사스의 일부 시골 마을에서는 실레시아계 이민자들이 사용하던 텍사스 실레시아어 방언이 사용되기도 했다.[2] 이때 조건 자체가 군병역의 의무를 져야된다는것이기 때문에 매노나이트들에게는 영 달갑지 않았지만, 그걸 가안해도 멕시코의 치안이 위낙에 시궁창이고, 땅을 공짜나 다름없는 헐값에 준다는것이 매력적이라 받아들여서 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