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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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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우리는 세계사에 전례가 없는 범죄 사실과 마주하고 있다.
乙未事變
일본어: 乙未事変 (いつびじへん)
1895년 10월 8일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인 미우라 고로를 중심으로[2][3] 일본군 공사관 수비대와 경관, 일본군 경성 수비대 일부[4] , 일본인 낭인들[5] , 조선군 훈련대[6] 가 경복궁에 무력으로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포함한 조선인 궁중 인사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
한국 학계의 다수 견해는 을미사변의 배후가 당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총리와[7] 내각의 각료 및 원로들이었고 미우라 고로 직전에 조선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가 구체적인 계획을 만들었다는 것이다.[8] #
일본은 이 사건으로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으려 했던[9] 고종의 가장 큰 조력자인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다시 친일 대신으로 내각을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일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해 을미의병이 발발하고 경복궁에 감금되었던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10] 을 앞세워 을미사변을 조선의 내부 분쟁 사건으로 꾸미려 했지만 미군 다이 대령과 러시아 건축기사 사바틴 등 외국인들이 현장을 목격하고 공사관과 외신에 사실을 알렸고 각국의 공사관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들이 명성황후 살해를 주도하였음이 세계에 알려졌다.[11]
2. 배경[편집]
그동안 러시아와 우호적인 외교를 해 왔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간의 공조를 논의했다.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와 가까이 하고 일본을 멀리한다)' 노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이에 따라 친일 내각에 대한 축출을 단행했다.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인 고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의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되었고 이완용을[12]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되었다.
그러자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명성황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은 뒤 명성황후의 암살을 모의하지만 이후 을미사변에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인해 실패하자 일본으로 도주했다.[13]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 혐의로 수배되면서 상당수 친일 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게 되어 일본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다.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 의혹을 점점 신빙성있게 여겼다.[14] 이에 따라 일본의 향후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 내각과 정계, 육해군부 내에선 갑론을박이 오갔는데 이때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 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이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15] 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하고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16] 은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고자 했다.
3. 진행[편집]
1895년 7월 8일, 야마가타 아리토모 육군대신은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17]
별첨한 글을 보고 실로 경악해 마지않았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한 것은 세외(世外·이노우에 가오루 공사) 백작을 즉각 도한(渡韓)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18]
내외(內外·고종 부부)에 대해 방관 좌시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묘의(廟議·각의)에서 결정(決定)되는 대로 단행(斷行)하시기를 희망(希望)합니다'
한국 학계에서 을미사변 배후설의 증거라고 평가받는 이 편지[19] 가 쓰인 7월 8일 이후 조선공사는 유신지사 이노우에 가오루에서 존재감 없는 미우라로 교체되었다.[20][21]
6월 25일부터 7월 1일까지 이노우에 가오루가 사이온지 외상대행 및 주요 관계자들에게 조선 자금지원, 재정, 철도, 전신, 그리고 논란이 된 주둔군 교체여부 등에 대해 의견서를 제출했다. 대부분 6월 4일 각의 결정사항과 비슷한 유화책이 주요 골자였다.[22]
7월 17일 훈련대의 충성심을 의심한 고종은 자신과 명성황후가 신임하던 홍계훈을 새 훈련대 연대장으로 임명했다.
9월 1일 , 이노우에를 대신해 일본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가 새로운 조선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미우라는 이노우에와 같이 입궐해서 고종을 만났고 독실한 불교 신자인 척 연기를 하였다.[23] 조선 왕실의 경계를 돌리려는 위장술이었다.[24]
부임한 미우라는 명성황후 암살을 위해 공사관 1등 서기관 스리무라 후카시[25] , 조선국 군무고문 겸 주재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 중좌 등 일부 측근들과 협력하며 우치다 경성총영사를 소외시키고 새로운 실무라인을 구성했다.
9월 24일 무쓰 무네미쓰의 병환 악화와 이노우에 가오루의 2선 후퇴로 외상대행을 맡게 된 사이온지 긴모치가 멋대로 육군 경성수비대의 통제권을 장악하려던 미우라의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10월 3일 일본 공사관 지하실에서 황후 암살 계획이 구체적으로 짜였다. 흥선대원군과 친밀한 관계에 있던 궁내부 고문이자 일본 공사관 무관인 오카모토 류노스케 육군 대위가 대원군을 데리고 경복궁에 들어가기로 했다.
동원된 낭인들은 주로 일본의 몰락한 사무라이 출신자였는데, 주로 한성신보[26] 의 직원들로 사장인 아다치 겐조를 비롯해 편집장과 기자들, 그리고 구마모토현 출신 인사들이 참여했다.[27] 그리고 그 나머지는 (도쿄)제국대학[28] 출신의 극우 엘리트 학생들이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삼은 것은 나중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일본 정부와는 무관한 일로 발뺌하기 위한 속셈이었다.[29] 또한 사건을 조선 내부의 분쟁에 의한 결과로 만들려는 속셈에 따라 해산될 예정이었던 훈련대 대대장 3명을 끌어들였다.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이 이렇게 포섭된 인물로, 사전에 훈련대 해산계획을 알게 된 뒤 훈련대를 양성한 일본인 교관들을 통해 미우라 공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1대대장이었던 이두황은 우범선과 일본 공사관에 찾아왔다가 처음엔 거절했다가 미우라가 그러면 체포 구금하고 중대장 이범내로 바꾸겠다고 협박해 가담자로 만들었다.[30] 3대대장은 이진호.
일본의 작전명은 '여우사냥'. 당초 계획으로는 10월 10일에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7일 일본 교관에게 훈련받은 훈련대와 미국 등 비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은 시위대 간에 충돌 사태가 벌어졌고 고종은 훈련대 해산 결정을 내렸다. 급작스럽게 해산절차를 밟게 되는 바람에 실행일을 10월 8일로 앞당겼다. 변경된 일자는 10월 8일 새벽 4시였지만, 이것 역시 틀어져 버렸다. 계획대로라면 흥선대원군은 적어도 새벽 3시에는 경복궁에 들어와 있어야 했지만 흥선대원군이 늑장을 부렸는지 아니면 강제로 끌고 오느라고 늦어졌는지는 몰라도 새벽 3시에야 공덕리(지금의 공덕동) 아소정(애오개역 부근)을 출발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에 도달한 것은 이미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새벽 5시를 넘겨서였다. 그렇게 이미 아침이 가까운 시간이 되어 버린 탓에 예정과는 달리 많은 목격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잠자던 중에 낭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전후 사정을 미루어 볼 때 황후 시해까지는 몰라도 폐위까지는 분명 가담했다.
일각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일본의 의도를 따를 수 밖에 없던 것은 일본이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용[31] 을 두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고 흥선대원군이 이준용을 선호했던 것은 맞지만 이준용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권력을 위한 꼭두각시로 세울 존재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저 당시 대원군과 고종, 명성황후의 사이가 그렇게 콩가루는 아니었고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외세와 손을 잡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고 싶은 현재 사람들의 바람이 만들어낸 설 중 하나다.[32]
치밀했던 사전 계획과는 달리 사건은 상당히 엉성하게 진행되었다. 흥선대원군을 기다리는 사이에 일본 공사관 수비대 1중대는 장소를 착각해 낭인들과 우범선이 지휘하는 훈련대 제2대대와의 합류가 늦어졌다. 이들은 겨우 춘생문 앞에 집결한 뒤, 명성황후가 거처하는 건청궁을 향해 돌격했다.
오전 4시가 되자 일본 공관 수비대와 조선군 훈련대는 춘생문과 추성문 등을 포위했다. 이때 고종은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황후도 건청궁에서 벗어나 은신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고종은 이범진을 보내 미국과 러시아 공사관에 도움을 요청하게 했다. 이범진은 4m~5m나 되는 궁궐의 담장을 뛰어넘은 뒤(!) 먼저 미국 공사관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고 이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했다.
4시 30분, 일본 공사관 일본군 수비대와 조선인 훈련대 병력 등 수백여 명, 이들과 합류한 일본인 낭인 3~40여 명, 그리고 미우라에게 을미사변을 부추긴 도카이 산시(東海散士) 당시 일본 중의원[33] 의 숙소에서 나온 낭인 십수명이 광화문에 집결해 전열을 다지고 한번에 궁내로 돌격했다. 사다리를 타고 궁으로 침입하는 일본군과 반란군을 조선군 시위대[34] 가 미국인 교관 월리엄 다이의 지휘를 받으며 맞섰지만 무기와 탄약이 빈약하여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35][36]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37] 이 달려와 반란에 가담한 훈련대 병사들을 꾸짖고 제지하다가 일본군에게 사살당했다.[38] 시위대가 무너지는 와중에 끝까지 저항하던 무예청 무사들과 충성적인 경비병력 200여 명은 흥선대원군이 입궐하자 혼란스러워하며 전투를 중단했다.
건청궁에서는 의화군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치자고 왕비께 간청했지만 왕비는 대비를 홀로 남겨 놓고 갈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이에 정병하가 "두 분 전하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그대로 머물게 했다.[39]
경비 병력의 저항이 멈추자 훈련대는 흥선대원군이 대기하고 있는[40] 강녕전 앞 뜰에서 대기하고 낭인들은 건청궁으로 몰려가서 왕비를 찾으며 닥치는 대로 궁녀들을 잡아 행방을 캐물으며 머리채를 쥐어잡고 마구 구타를 가했다. 이때 고종의 외국인 고용자들도 일본 낭인들의 만행에 피해를 입었으며 태자비 민씨(순명효황후)는 복부를 낭인에게 가격당하여 이후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왕태자(순종)가 머리채를 잡혔다.
건청궁 곤녕합에 도착한 일본인 폭도들 앞에 궁내부 대신 이경직이 가로막았지만 권총에 맞았고 이어 낭인들의 칼에 두 팔이 잘려나가고 사망했다.[41] 그 뒤편 옥호루에는 황후와 궁녀들이 같은 복장으로 구분이 힘들도록 앉아 있었다.
이후 황후의 신원을 어떻게 확인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들의 설명이 제각각 엇갈린다. 매천야록은 황후의 양녀가 된 고무라의 딸이 그 얼굴을 확인해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처음부터 초상화 혹은 사진을 들고 와서 궁녀들의 얼굴과 대조했을 것이라는 설, 혹은 마마 자국을 보고 확인했다는 설도 있다. 을미사변에 가담한 우범선의 진술을 기록한 《우범선 최후사》에서는 낭인들이 우범선을 데려와서 황후의 얼굴을 확인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일설에는 황후와 주위에 있던 황후로 의심되는 궁녀들을 전부 발가벗겨서 임신했던 흔적을 찾아 확인했다고 한다.[42][43]
폭도들은 황후를 찾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상의를 벗겨 가슴 검사를 하고 이후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아 2m가 넘는 옥호루의 창문 너머로 한 명씩 던졌다.[44] 수많은 궁녀들이 죽어나가자 황후는 옥호루를 뛰쳐나와 장안당으로 달려갔다. 일본군 장교가 뒤쫓았고 복도에 대기하고 있던 낭인이 발로 차 황후를 넘어뜨렸다. 황후는 재차 뛰어 장안당 밖으로 나갔지만 그 곳에서 붙잡혀 칼에 찔렸다.[45] 그리고 폭도들은 황후를 옥호루로 옮긴 후 미우라가 도착하기 전 국부 검사를 했다. 대체로 그 시각은 새벽 5시 50분에서 6시, 6시 정각 직후 등인 것으로 추정된다.
을미사변에 가담했던 고바야카와는 왕비가 숨진 모습을 목격한 당사자로 훗날 이런 기록을 남겼다.
마침 그때, 시위대의 연대장인 현흥택(玄興澤)이 군복을 입은 채 다만 허리에 찬 칼만을 버리고 겁에 질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어찌 이를 그대로 놓칠쏘냐?! 낭인들의 철권(鐵券)이 그에게 마구 내리 쏟아졌다. 그러나, 현흥택은 겨우 숨을 건져 도망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숨어버렸다. 재수 좋은 사나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고 있는 사이 곤녕합 방안에 쓰러져 있는 부인이 민비라고 하는 사실이 누군가로부터 퍼뜨려졌다. 나는 직접 방안으로 들어가 그 쓰러져 있는 부인을 보았다. 이 부인은 아직 침소에서 나온 그대로였는지, 상체엔 짧은 속적삼을 입었을 뿐이고, 허리로부터 아래로는 백색 속옷을 입고 있었으나, 무릎으로부터 그 아래는 흰 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잘 보니, 가냘픈 몸매에 유순하게 생긴 얼굴과 하얀 살결은 아무리 보아도 스물 대여섯살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죽었다기보단 인형을 눕혀 놓은 것 같은 모양으로 아름답게 영원한 잠이 들어 있었다. 가냘픈 손으로 8도(八道)를 움직여 군호(群豪)를 조종했던 민비, 그 사람의 유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이다. 웅혼(雄魂)은 가서 돌아오지 않고, 방안엔 유해를 지키는 단 한 명의 그림자도 없었다. 실로 처참을 극한 광경이었다. 민왕비(閔王妃)의 치명상은 이마 위에 교차된 2개의 칼날 자국에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어떻게 손을 내리쳤을까? 오전 8시경이 되어서 모두들 제각기 들고 있었던 일본도(日本刀)를 담요에다 말아싸고, 나와 식자생(植字生) 두 사람의 것은 쿠마베(隈部)라고 하는 장한(壯漢)한테 지워서 광화문을 나왔다. 문을 나서니, 구경을 나온 한국인들이 문전(門前) 한 길에 구름처럼 모여서 놀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지나가고 있었다. -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
일본 문서들을 보면 명성황후를 살해한 주범은 일본군 장교로 나온다.
을미사변 당일 우치다 사다쓰치 경성총영사가 일본의 하라 다카시[46] 외무차관에게 보낸 문서에 그 내용이 나온다.
또 사건 1달 뒤 우치다 경성총영사는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검사장에게 보낸 공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 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소위이다.
당시 경성수비대에는 모두 4명의 소위가 있었는데 그 중 살해 현장인 건청궁에 들어간 소위는 미야모토 소위가 유일했다.# 다만 이 재판은 세계가 주목하는 상황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자로 장교를 내세웠을 것이기에 처음으로 칼로 찌른 자인지는 불확실하다고 보는 주장도 있다.왕비는 먼저 우리 육군사관의 칼에 맞고..
미우라 고로 공사는 아침에 경복궁에 들어와 고종을 알현하고 도중 밖으로 나와 직접 왕후의 시체를 확인한 뒤 낭인들에게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시체를 불태워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미우라가 고종, 흥선대원군과 함께 3자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낭인들은 경복궁 뒤편 건청궁 동쪽 녹원으로 가서 시체에 기름을 끼얹고 불태웠다.
남은 유골은 훈련대에 소속된 윤석우가 몰래 빼돌려 산속에 묻었다가 나중에 다시 세상에 내놓았다고 한다.[47] 그러나 윤석우는 훗날 황후의 시신을 멋대로 처리했다는 누명을 쓰고 교수형에 쳐해졌는데 다시 복권되어 유족이 보상금을 지급받기도 하였다.
을미사변 직후 오전 11시 미우라는 사이온지 외상대행에게 흥선대원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허위 보고를 보낸 뒤 하루종일 조작된 내용의 보고로 일관하다가 그날 저녁에 보낸 마지막 보고에서야 사실을 실토했다. 그 직후 사이온지는 외무성 정무차관이 이끄는 조사단을 파견해 정확한 사건 파악을 지시했다.
4. 사건 이후[편집]
왕태자(훗날의 순종)는 폐서인 조칙에 반발하며 태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거세게 항의했고 이에 놀란 김홍집은 폐서인 조치를 바꿔서 명성황후를 빈으로 승격시킨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민심이 급격하게 악화되었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를 중심으로 서양 각국도 명성황후 살해 사건의 책임을 추궁하여 국제 여론도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때 일본은 책임을 추궁당하자 "조선인 말을 어찌 그대로 믿나"고 반박했지만 "이건 조선인이 말한 게 아니라 서양인이 본 거다!"라고 재반박당했다. 목격자가 좀 많았어야지(…).[48]
결국 명성황후 살해를 조선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속이려 했던 일본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우라 고로 등 사건 가담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수감하고 재판에 회부했으나 일본 법정은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주장했고 이완용을 비롯한 친미파 관료들과 서구의 선교사, 외교관이 대거 개입된 고종 탈출 작전인 춘생문 사건이 터지자 "봐라, 구미도 조선에 개입하는데 왜 우리라고 개입 못하냐?"며 사건 가담자 전원을 석방했다. 석방된 이들은 일본에서 애국자로 칭송받았고 이후에 출세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했는데, 혹자는 이를 보더라도 명성황후 살해의 배후에는 일본 정부의 입김이 개입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49]
"유진 벨은 또 하룻밤을 궁중에서 보냈습니다. 왕은 밤에 두려움을 느끼고 선교사들을 부릅니다. 선교사들은 매일 밤 두 사람씩 고종의 침소 앞에서 권총을 들고 불침번을 서며, 내일도 그는 경호하러 갈 겁니다."
고종은 미국 영국계 선교사가 경호를 하는 것이 신변에 더 안전하다 느낄 만큼 신뢰하며 동시에 일본의 암살을 두려워했다. 식사도 철가방에 담은 후 자물쇠로 봉인된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음식만 먹었다.[50]
이후 고종은 춘생문 사건을 거쳐 아관파천으로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였고 을미사변에 가담한 이들과 김홍집 내각을 잡아들였다.
5. 흥선대원군의 가담[편집]
명성황후 축출을 원했던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손을 잡았다. 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했다. 그는 별장 사랑에서 흥선대원군에게 자신들이 명성황후 일파를 축출해 주는 대신 "거사 후 대군주를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체 간섭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 등 4가지 조건의 사실상 대원군의 정계은퇴를 강요하는 각서를 제시하고 자필 확인을 받아냈다.[51] 실행 일자는 적당한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해 주기로 했다.
일본은 출발에 앞서 명분 확보를 위해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하였고 그것을 한양 시내에 붙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일 소인배들이 어진 사람을 배척하고 간사한 무리를 기용하여, 유신의 대업을 중도에 폐지하고 5백년 종사도 하루가 급하게 위기에 처해 있으니, 나는 종친으로서 이를 좌시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번에 입궐하여 대군주(고종)를 보익하고, 사악한 무리들을 쫓아내 유신의 대업을 이루고, 5백년 종사를 지키려 하니, 너희 백성들은 안심하고 생업을 지킬 것이며 섣불리 경거망동하지 말라. 만일 너희 백성과 군사 가운데 나의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이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 너희들은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을미사변 동안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내 강녕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봤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을미사변을 주도했고 실행 역시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명분 면에서 도움을 줬다.
미국인 선교사 겸 외교관이었던 호머 헐버트는 '한국의 죽음(The Passing of Korea, 1906년)'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이런 까닭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조선에서 맨 먼저 상의하고자 했던 사람이 전임 섭정(흥선대원군)이었다는 사정은 이해하기 쉽고, 흥선대원군은 문제 해결에 대해 단 한 마디밖에 할 말이 없었다는 것도 확실하다. 20년 동안의 그(흥선대원군)의 경험은, 공사가 겨냥한 목표를 이루는 길은 하나뿐임을 그는 확신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미우라 고로 자작은 당연히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을 꺼렸지만, 그도 마침내 그것이 유일한 현실적 계획임을 확신하게 된 듯하다.
그리고 1896년 1월 히로시마에서 열린 판결을 인용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10월 8일 새벽 3시, 장사(壯士)들을 포함하는 일본인 대집단이 조선인 몇 사람들과 함게 한강에 가까운 흥선대원군의 거소로 가서 그와 함께 서울로 향했다. 그들이 출발할 때, 그들의 우두머리가 사정에 따라 '여우'를 처리하라고 그들을 독려했다. 그 말의 분명한 뜻은, 황후가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이 틀 무렵, 그 무리는 광화문을 통해 궁궐에 들어갔고, 바로 대군주의 거처로 향했다.
캐나다 출신의 영국인 기자 프레더릭 매켄지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들의 죄에 더해서, 일본인들은 그들의 입 노릇을 한 흥선대원군을 통해 살해된 명성황후의 기억을 더럽히고 낮추기 위해 온갖 짓들을 다했다.
그래서였는지 1898년 흥선대원군의 사망 때에도 아들인 고종은 장례식에 불참하여 부자간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았음을 알 수 있다.[52]
흥선대원군은 그전에도 권력을 탈환하기 위해서라면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에 납치되기 전에도 대원군은 청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임오군란 당시 일본 대사관이 습격당했기에 일본이 외교적으로 조선을 압박을 해 오면 청나라를 이용해 견제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게 대원군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난의 주동자라는 고종 세력의 밀고로 그는 청나라로 압송되었고 이홍장은 고종을 택했다. 이후 고종이 일본을 통한 개화를 추진하자 도리어 청은 이를 견제키 위해 대원군을 조선에 돌려보냈다. 그러다 이번에는 반대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김홍집 내각을 세운 후 민심을 잠재우기 위하여 대원군에게 손을 뻗었고 대원군은 주저 없이 그 손을 받았다. 더구나 그는 이때 고종을 폐위하고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그런데 실권은 김홍집 내각이 쥐고 있었고 자신은 그저 허수아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동학군, 청군과 함께 일본군을 협공하려고 했지만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둬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권력을 위해서 누구도 가리지 않고 손을 잡는 그의 행보를 보았을 때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인 명성황후를 제거해 준다는 일본의 제안은 달콤하게 들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고종과는 을미사변 이전에도 그가 주도한 폐위 시도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권력 때문에 사이가 틀어진 부자 관계가 조선시대만 해도 상당한 편이긴 하지만[53] 흥선대원군이 비판받아야 하는 가장 주된 이유는 이전에 비슷한 기만을 당한 경험이 있음에도 일본과 결탁해 참여했다는 것이다.[54]
6. 황후에 대한 능욕[편집]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郎, 1905∼1977)는 1964년 《코리아평론》 10월호에 〈민비사건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 1966년 9월 《일본의 한국병합》(日本の 韓國倂合)을 발간했다. 그는 일한병합소사에서 ‘사체 능욕’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고, 이 책을 신학자 안병무가 번역하여 《한일합병사》로 1982년 한국에 출판되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 한일병합사(1982)
야마베 겐타로가 무엇을 보고 일한병합소사에서 사체능욕이라고 서술했는지 나오진 않지만 야마베 겐타로가 일본의 한국병합을 서술하면서 에이조 보고서를 언급하였기에 에이조 보고서를 토대로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쓰노다 후사코는 1988년 1월 발간한 《민비암살(閔妃暗殺)》에서 '민비의 유체 곁에 있던 일본인들 중 나는 동포로서 도저히 글로 쓸 수 없는 행위를 한 것이 보고되었다.'고 서술하였다.
나카츠카 아키라(中塚明)는 1992년《건건록의 세계『蹇蹇錄』の世界》에서 '사체를 능욕하고 불태워버렸다'고 서술하였다.
해당 자료인 에이조 보고서의 작성자는 공무원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이다. 사이온지[55] 의 지시를 받은 쓰에마쓰는 에이조에게[56]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게 하였고 에이조는 을미사변 다음날 이 보고서를 쓰에마쓰에게 보냈다.
이 '에이조 보고서' 에 국부검사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57]
四 実行者
コノ荒仕事ノ実行者ハ訓練隊ノ外守備隊ノ後援アリ。(後援ハ或ハ当ラザルガ如シ。) 尚守備隊ノ外ニ日本人二十名弱アリ。熊本県人多数ヲ占ム。(漢城新報社連)中ニ新聞記者數名又醫師商人モアリ 隨テ洋装和装相混ぜリ 岡本ハ大院君ト同時入城シ實行ノ任ニ當レリ 守備隊ノ将校兵卒ハ門警護ニ止マラズ門内ニ侵入セリ。殊ニ弥次馬連ハ深ク内部ニ入リ込ミ王妃ヲ引キ出シ二,三ヵ所刃傷ニ及ビ、且ツ裸体ニシテ局部検査(可笑又可怒)ヲ為シ最後ニ油ヲ注ギ焼失セル等誠ニ之レ筆ニスルニ忍ビザルナリ。ソノ他宮内大臣ハ頗ル残酷ナル方法ヲ以ツテ殺害シタリト言ウ。右ハ士官モ手伝イタリシモ王トシテ兵士外日本人ノ所以ニ係ルモノノ如シ。大凡三時間ヲ費ヤシテ右荒仕事ヲ了ラシタル後、右日本人ハ短銃又ハ刀剣ヲ手ニシ、徐徐トシテ光化門(王城正門)ヲ出テ群衆ノ中ヲ通リ抜ケタリ。時巳ニ八時過ニシテ王城前ノ広小路ハ人ヲ以ツテ充塞セリ。
이 사건의 실행자로는 훈련대 이외 수비병의 후원이 있었다.(혹은 후원이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수비병 외에 일본인 20명 쯤 있었다. 구마모토현 출신자가 다수를 차지하며 (한성신보사와 연관된)그들 중 신문기자 몇명과 의사, 상인도 있었다. 그래서 양장, 화장(일본옷)이 서로 섞여 있었다. 수비대의 장교 및 병졸들은 궁궐 문의 경비병력의 제지에도 멈추지 않고 문 안쪽으로 침입하였다. 특히 이들 무리들은 깊이 안으로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 두세군데 칼질을 하고(칼로 상처를 입히고 나서) 나체로 만들고 국부검사(우습고 화가 치민다)를 하고 마지막으로 기름을 뿌려서 태워버렸다든가 하는 참으로 이를 쓰기가 염려된다. 차마 쓰기 어렵다. 기타 궁내대신은 몹시 잔혹한 방법으로 살해했다고 한다. 위는 사관도 돕기는 했지만 주로 병사 외 일본인들이 저지른 짓인 것 같다. 대략 3시간 남짓을 소비하여 위 막된 짓을 저지른 후 위 일본인들은 단총 또는 도검을 손에 쥐고 서서히 광화문(왕성 정문)을 나가 군중 가운데를 뚫고 나갔다. 그 때가 벌써 8시가 지났고 왕성 앞에는 사람으로 가득차 막혀있었다.[58]
칼로 상처를 입힌 뒤 나체로 만들고 국부검사를 하고라고 되어 있다. 야마베 겐타로는 이를 두고 '사체능욕'이라고 하고 쓰노다 후사코는 '민비의 유체 곁에 있던 일본인들 중 나는 동포로서 도저히 글로 쓸 수 없는 행위를 한 것이 보고되었다.' 고 서술한 것이다. 이 표현을 두고 간음의 순화된 표현으로 본다면 살아 있었다면 강간으로도 볼 수 있고 죽었다면 시간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에 대해서 일본에서 국부(局部)가 다리 사이의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데 기록된 것은 1936년 아베 사다 사건이 시초이며 을미사변 당시에는 현재의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다.
혹은 '국부검사'라는 것이 강간이나 시간까지는 아니고 간음하는 시늉을 했거나[59] 성기를 관찰하거나 만져서 능욕하였거나 임신 여부를 검사하였다는 해석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쪽으로 보든 간에 에이조 보고서에 따르면 추악한 짓거리를 벌였다는 말이 된다.
소설가 김진명은 야마베 겐타로의 책을 본 뒤 당시 일본에서 외교사를 전공하던 권용석 씨를 통해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에 있던 에조보고서 전문을 입수하고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에서 명성황후가 강간살해당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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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지학자 김종욱,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김진명의 강간 주장에 대해서 "상식에 위배되는 거짓 낭설"이라고 주장했다.# #
7. 황후의 생존 오보[편집]
2013년 7월 1일, 정상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통합 인문학 연구소 연구교수는 독일 외교부 정치문서 보관소와 영국 국립 문서보관소에서 '황후가 을미사변 때 죽지 않고 탈출했다'는 내용의 외교 문서를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는 1896년 2월 6일 러시아 주재 독일 공사 후고 라돌린이 총리 앞으로 보낸 암호 문서 해독문인데 '러시아 외무대신 로바노프가, 자신의 정보에 따르면 죽었다고 이야기되는 조선의 황후가 아직 살아있다고 나에게 말했다.'고 한다.한국 주재 러시아 공사(베베르)는, 황후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는지를 한 명의 한국인으로부터 매우 비밀리에 요청받았다고 한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성 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힐리어가 보낸 문서도 발견했는데 이 문서에는 "대군주와 왕태자(순종)는 피살을 모면한 것 같다. 그리고 '대군주는 황후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말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는 것. 힐리어는 을미사변 직후 작성한 문서에서도 '일본인들이 궁녀 서너 명을 죽였으며, 황후는 사라졌는데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으며 이후 힐리어는 베베르의 방문을 받았는데 베베르가 황후의 생존 가능성이 있음을 말했다는 보고서도 작성했다고 한다.
과연 정 교수가 발견한 문서가 실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건지는 의문 부호가 달리기는 한다. 만약 황후가 탈출했다면 왜 이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는지 쉽게 납득하기는 힘들다. 황후가 살아 있었다면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이후에라도 드러내서 일본을 궁지로 몰 수도 있었는데 왜 고종이나 명성황후가 그런 카드를 활용하지 않았을까? 명성황후는 이전 임오군란 때도 큰 난리통에 궁녀 옷으로 변장하고 궁을 탈출해 숨었고 조정에서는 황후 실종을 '사망'으로 공식 선포하여 황후의 국상(國喪)을 선포한 적이 있다. 만일 황후가 살았다면 임오군란의 해프닝이 그대로 재연된 셈인데 그때는 사태가 진정된 후 황후가 직접 돌아왔지만 이 때는 그러지 않았다.
또 일각에서는 일본이 외교가에 역선전을 살포한 걸 독일과 영국이 착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그러나 정 교수와 일부에서는 "당대 최강대국인 독일과 영국이 일본의 역선전을 아무 확인도 않고 덜컥 믿고 본국에 보고했겠느냐??", "황후는 일본의 재암살 시도를 피하기 위해 숨어 살다가 곧 사망했을 것이다"라는 반론도 나왔다.
8. 당대 기록[편집]
1895년 10월 8일 아침에 우리는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는 평화로운 때였기 때문에 그 소리가 틀림없이 불길한 징조임을 알 수 있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알수가 없었고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다만 일본 군대가 새벽 세시에 대원군(임금의 아버지이며 왕비의 가혹한 적이다)을 호위하고 대궐에 도착하여 지금 대궐문을 지키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후까지는 아무 것도 알수 없었다. 오후에 한 조선 양반을 만나자 그는 기절할 듯이 놀란 얼굴로 지금 막 왕비가 살해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 뒤 몇 시간 동안 좀 더 상세한 소식이 들려왔는데 이 소식은 확실한 것으로 굳어졌다. 그 즈음에 대원군은 대궐에서 쫓겨나 시골집에 연금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손자 편을 들어 임금에게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는 왕비에게 반대하는 음모꾼들의 지도자가 되어 그 무리의 앞장을 서서 대궐로 들어가 두 분 전하를 사로잡은 뒤에 왕비를 쫓아내는데 이미 그들과 합의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해진 소식들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외국인 두 사람 곧 러시아 사람인 사바틴씨와 미국인인 다이 장군이 그대 일어난 일을 거의 모두 보았던 사람들인데 이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이 서로 맞아 떨어지는 말을 하였다. 곧, 일본인 장교 휘하의 군대가 대궐 마당과 왕족의 처소를 에워쌌다는 것, 일본인 장교들이 대궐 마당에 저질러진 난폭한 짓을 눈으로 보고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을 일본인 ‘소시’(壮士, 낭인)나 직업적인 칼잡이들이 저지른 것임을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는 점들이다. 서른 명쯤 되는 이 암살자들은 “왕비, 왕비” 어디 있어“하고 외치면서 왕족의 숙소에 들이 닥쳤다.
공격부대는 총을 쏜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대궐 안으로 쳐들어왔다. 의화군(의친왕)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치자고 왕비에게 간청했지만 대비를 홀로 남겨놓고 갈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정병하가 "두 분 전하(고종, 명성황후)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저자는 천한 사람이 왕비 덕에 출세하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암살자의 하수인이 됐다고 했다.
일본인 하나가 임금의 어깨를 잡고 밀어 제쳤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은 전하의 눈 앞에서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자 저하도 일본인에게 붙들렸다. 그들은 저하의 모자를 찢어발기고 머리채를 끌어당겼다. ‘소시’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를 대라고 하면서 칼로 저하를 위협했다. 마침내 그들은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서는 칼로 찔러 죽였다. 시체를 덮어 두었다가 궁녀들을 데려 와서 갑자기 그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공포에 질려 ‘중전마마! 중전마마!’ 하고 소리쳤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이런 계략으로서 이 암살자들은 자기들이 원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쓰러뜨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에 곧 거기서 그다지 머지않은 작은 숲으로 시체들을 옮겼고 그 위에 등유를 부었다. 그리고 불을 붙였고 뼈 몇 줌만이 남았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독살의 공포를 느껴 음식을 거의 들지 않았다. 언더우드 부인이 음식을 만들어 임금에게 보냈다. 음식은 통에 담은 뒤 자물쇠로 잠갔다. 언더우드는 매번 자물쇠를 왕에게 전달했다. 그러던 그가 흥선대원군을 만났다. 을미사변의 주모자인 흥선대원군은 "그 좋은 음식을 왜 전하에게 드리오? 늙은 내게 그 음식이 더 필요하오"라고 했다.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 # #
오전 4시에 이순근(李巡根)이 나를 깨웠다. 길거리에서 주웠다는 서신을 내게 보여주었는데, 이두황(李斗璜)과 일본인 교관 무라이(村井) 휘하에 있는 대대병력이 부대를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을 향해 갔다고 하는 것을 제1연대장에게 알리는 내용이었다. 그 서한은 군 장교 이민굉(李敏宏)이 서명한 것이었다. 이순근에게 그 편지를 경무사에게 가져가 보이라고 했다.
5시에 의화군이 궁으로부터 찾아왔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데 일본 군인들이 큰 무리를 지어 영추문 즉 궁의 서쪽 문으로 이동하고, 조선군 훈련대가 건춘문과 춘생문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단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피기 위해 전하가 왕자를 내보냈던 것이다.
5시 30분 쯤 날카로운 총소리가 몇 분 동안 들렸다. 사방이 고요했다. 일본군이 궁중으로 쳐들어갔다. 그 공격에 가담하기를 거부한 조선군 훈련대는 달아났다. 홍 장군(洪載熙)이 피살되었다. 일본군이 대원군을 옹위해 궁으로 쳐들어갔다. 일본군이 각 문을 경계했다. 김홍집·김윤식·조희연만이 입궐이 허용되었다.3
오후 1시 의화군이 와서 이렇게 전해 주었다. 그가 궁을 떠난 직후 칼 찬 일군의 일본인이 전하와 세자가 거처하던 침소를 공격했다. 그들은 황후를 찾아다녔다. 그들을 시녀 두세 명을 황후가 틀림없다고 여겨 아주 잔인하게 살해했다. 그들은 세자비의 머리를 잡아채어 발로 차고 구타하고 질질 끌면서 황후가 어디 있는지를 말하도록 강요했다.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그들은 세자비를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죽은 군인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한 일본인이 세자의 머리를 잡아채고 발로 걷어찼다. 그 사이에 100명에 이르는 궁녀가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 황후가 나타났다. 일본인 하나가 황후를 붙잡아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황후는 자신이 황후가 아니라 먹을 것을 찾으러 들어왔을 뿐이라고 외쳤다. 자객들이 황후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걷어찼다. 그러고 나서 암살자들은 그녀를 한 방으로 끌고 가서 홑이불로 그녀를 덮었다. 그러고 나서 황후인지를 확인하고자 일본인 통역 스즈키(鈴木)가 궁을 가리키면서 한 상궁에게 말하기를 황후가 “그 방”에 누워있다고 말했다. 그 상궁은 방으로 들어갔고 유혈이 낭자한 광경에 충격을 받아 공포에 질려 달려 나오면서, “오, 황후께서 승하하셨다!”고 울부짖었다. 이 소리를 들은 암살자들은 달려 들어와 황후의 시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꽃밭으로 끌고 갔다. 거기서 그들은 황후의 시신을 내려놓고 불을 질렀다. 이 모든 얘기는 너무 공포스러워 상상하기도 어렵다
국역 윤치호의 일기 1895년 10월 8일(음력 20일)
일본인 폭도들은 10~12명의 궁녀들을 황후의 침전에서 2m가 넘는 창 밖의 뜰에 내던졌다... 머리채를 잡혔을 때도 창 밖으로 던져졌을 때도 시종일관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무서운 고통을 참고… 궁녀들은 옥호루에 있었으며 뜰에 내쳐진 궁녀들은 전원이 사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확실히 알 수는... 폭도들은 두 명의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끌고와 내가 서있던 곳에서 겨우 5~6보 던져진 곳에 던지고 갔으나… 궁녀들이 살아서 호흡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 버려진 궁녀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한 궁녀는 넘어져 눈을 뜨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건축기사 사바틴의 증언을 담은 러시아 공사관 보고서
(중략) 모든 일이 끝나기까지에는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처소 2층에 몇 명의 시녀들과 함께 있던 왕비는 머리채를 잡힌 채, 칼을 맞고 쓰러졌다. 궁내부 대신인 이경직은 왕비를 보호하려함으로써 오히려 그가 왕비인 것을 그들에게 알려준 셈이 되었다. 그는 두 팔을 잃은 등 부상을 입고도 베란다까지 기어가 왕비를 바라보는 가운데 장렬하게 죽었다.
왕비는 침입자들을 피해 달아나다 넘어져 칼에 찔려 상처를 입었다. 그때 한 일본인이 그에게 덤벼들어 가슴을 마구 찔렀다. … 일본인들은 왕비를 널빤지에 올려놓고 비단으로 싸서 녹원의 소나무 숲으로 옮겨가 나뭇단에 등유를 부은 뒤 시신을 불태웠다. 남은 것이라고는 뼈 몇 마디뿐이었다.
44세 나이의 왕비는 한 우방국 공사의 피비린내 나는 음모에 자극을 받은 자객들의 손에 그렇게 죽어갔다. 그녀는 영리하고 야망이 있으며 음모적이고 매력있고 아름다웠던 왕비였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9. 일본 사회의 인식[편집]
과거 많은 일본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 이 같은 인식은 일본인 중장년층의 여러 증언으로 알 수 있다.
가이 토시오는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젊은 시절, 한 여학생이 명성황후 사건을 아느냐고 질문을 해 충격을 받았다”며 “일본인들도 정확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퇴직 후 전직 교사 중심의 모임을 만들었다”고 말했다.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일본 교과서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일본 사람들도 정확히 공부해야 한다.”(가이 토시오 전 일본 중학교 교사) #
이렇게 만들어진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은 살해 가담자 48명 중 21명이 태어난 규슈 구마모토현에서 전·현직 교사들로 구성했다.#
110년 만에 후손들이 사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모임은 1대 협회장 가이 도시오가 교사로 재직하던 당시 조선인 제자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아시나요?'라는 질문을 계기로 일제의 만행을 파헤쳤고, 국가적인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교과서에는 기술되지 않은 것을 알고 경악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이 끔찍한 역사를 알리고 한국에 사죄해야겠다"고 마음먹고서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을 교사들과 설립한 것이었다. 게다가 을미사변에 가담한 범인들의 후손 약 20명을 찾아내고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 등을 발견한 후 경찰, 군인 등 주범의 정체를 밝혀냈다고 한다. 가와노 다쓰미는 2012년 유언으로 '대를 이어 참회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청년 시절 도쿄대학 금속공학과에서 재학 중 우연히 잡지에서 명성황후 살해 사건에 대해 알게 됐는데, 일본에서는 이런 내용을 전혀 교육하지 않아 무척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로 한국인들과 이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가진게 계기가 되어 1988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했고 이후 귀화까지 했다고 밝혔다.# # # #"일본 사람들은 과거를 진짜 모릅니다. 여성분들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남의 나라 황후를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 과거를 알게 되면 깊은 반성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수)#
이 같이 많은 일본인들이 을미사변에 대해 몰랐던 것은 1948년 이래 일본 교과 과정에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1989년 학습지도요령 개정으로 일본사는 필수 과목에서 선택 과목이 되기도 했다.
일본 사회에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이래로, 당시 쓰노다 후사코가 출판한 '민비암살' 이 화두가 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 전후로 사용된 교과서만 하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교과서에서 언급이 없었으나 역사 바로 알리기 등의 운동이 벌어지며 2000년대 중반부터 일부 역사 교과서에서 기술되기 시작한다.
이후 을미사변은 대입시험문제에서 가끔 출제되며 # 이를 강의하는 일본인 강사 중에는 일본 정부의 입장이나 일본교과서의 서술과는 다르게 일본 정부가 을미사변을 주도한 것으로 인정하는 이들도 있다. #[60][61] 이를 봤을 때 대학을 가기 위해 출제범위 전반을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조선에서는 일본 공사 일당이 조선의 황후를 암살했으나, 친일 정권을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朝鮮では、日本公使らが朝鮮の皇后を暗殺したが、日本よりの政権をつくることには失敗した。
일본서적신사 '우리들의 중학 사회' (2005).
2008년 고교과정에서는 대부분의 역사교과서에서 을미사변을 기술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을미사변의 기술은 삭제되거나 축소되기도 하였다.
2018년에는 일본의 중학교 역사교과서 8종 중 7종이 을미사변이 삭제된 것으로 확인되었고 마나비샤[62] 1종만이 아래와 같이 기술하였다.#
1895年、日本公使らは、ロシア寄りの政策をすすめる朝鮮王妃を殺害した。日本に対する非難と反発は強く、日本の影響力は弱まった。
1895년, 일본 공사 일당은 친 러시아 정책을 추진하는 조선 왕비를 살해했다. 일본에 대한 비난과 반발은 강했고, 일본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그동안 일본사는 선택과목이었으나 2022년 4월부터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세계사와 일본사를 합친 ‘역사총합’이라는 고등학교 필수 이수 과목이 신설되었다.#
역사총합을 편찬한 총 12개의 출판사 중 7개 출판사가 명성황후 관련 서술을 하지 않았다. 서술한 출판사도 대부분 명성황후를 ‘민비’로 표기했고 명성황후라고 병기한 곳은 소수였다.[63]
10. 대중매체에서[편집]
명성황후가 나오는 조선 후기 사극에서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인데 예를 들자면 영화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965)>를 비롯해 드라마 <풍운(1982, KBS1)> 51회, <조선왕조 오백년: 대원군(1990, MBC)> 31회, <찬란한 여명(1995~1996, KBS1)> 99회, <명성황후(2001~2002, KBS2)> 120회, 조수미의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 등이 있다. 이 중 <명성황후>에서 명성황후 역의 최명길이 시해 직전 "내가 조선의 국모이니라"는 대사를 외침으로써 을미사변의 새로운 클리셰를 창조해냈고 2022년에 개봉한 영화 <영웅>에선 명성황후를 시해한 낭인들이 그녀의 시체에서 심장을 도려내어 꺼내는 섬뜩한 연출도 나왔다.
영국-미국 소설인《코레아 황제 시카고 공주(Corea Emperor Chicago Princess)》라는 에밀리 브라운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로버트 바 소설에서도 등장하는데, 명성황후가 죽자 여주인공은 "명성황후가 좀 더 권력지향적[64] 이었다면 암살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명성황후를 디스한다.[65] 이 사건으로 고종이 여주인공을 정식 황후로 들이려고 시도하는게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 여기서도 일본인들이 죽였다고 정확히 나온다.
굽시니스트의 역사만화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는 이노우에가 실패한 후 이토와 야마가타가 조선에서 흥선대원군을 등에 업고 쿠데타를 다시 한번 일으키라는 것까지는 미우라와 합의되었지만 명성황후 살해까지는 이토도 미처 생각하지 않았는데 미우라가 폭주한 것으로 묘사하고, 흥선대원군도 명성황후 폐위까지는 미우라 측과 합의했지만 사변 당일 황후 살해라는 말을 듣고는 자기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일본의 속셈을 그때서야 알고 동참하지 않으려고 몇시간동안 버티다가 반강제로 일본군과 동행한 것으로 묘사한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몇몇 사료에 기술된 것처럼 정체를 들키자 방문을 박차고 도주하려다가 칼에 맞은 것으로 묘사되어 관계자 모두에게 어느정도 동정표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11. 여담[편집]
-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898년 간행되자마자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을미사변에 대해서는 서양에도 소식은 퍼져 있었으나 일부 외교 관계자들을 제외하면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건조한 사실 외에 배경이 되는 조선이란 나라 자체에 대한 정보는 널리 퍼지진 않았는데 이 책이 당대 조선과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에 대한 일종의 교양서 역할을 겸했기 때문이다.
- 토오 가쓰아키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난입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의 문인 쓰노다 후사코의 〈명성황후- 최후의 새벽〉에는[66] 사건 당시 살해 용의자들의 수기와 증언들을 적어 놓았다. 그중에 실린 데라사키의 편지에는 “ 나카무라 다테오, 토오 가쓰아키, 나(데라사키) 세 사람은 국왕의 제지를 무시하고 왕비의 방으로 들어갔다”고 적어 놓았다. 이 책에는 “나카무라 다테오가 왕비의 침전인 곤녕합(坤寧閤)에 숨어 있던 명성황후를 발견하여 넘어뜨리고 처음 칼을 대었고, 곧 이어 달려온 토오 가쓰야키가 2번째로 칼을 대어 절명시켰다”는 대목도 기재되어 있다. 토오 가쓰아키는 왕비의 침전으로 최초 난입한 세 사람 중 하나였고 명성황후를 향해 이 칼을 휘둘러 절명시킨 가장 유력한 사람인 것이다. 훗날 토오 가쓰아키는 그 날의 범행을 참회하고 칼을 신사에 맡기며 “다시는 이 칼이 세상에 나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현재 일본 후쿠오카현 구시다(櫛田) 신사에 그가 사용한 칼[67] 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칼의 나무 칼집에는 그가 직접 새겨 넣은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는 문구가 그대로 있다. 이 칼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 재일교포 2세인 나라여자대학 김문자 교수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게 민간 신분의 일본 낭인이 아닌 일본 육군 경성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였다고 밝혔다. 한극 학계에서도 일본 낭인이 아닌 일본군 장교의 범행이었다는 주장이 우세해지는 추세다. #
-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은 다른 방향에서 이 을미사변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 일로 인해 명성황후가 '나라를 위해 노력했으나 무참히 살해된 비운의 왕비'로 미화되었기 때문. 그것과는 별개로 을미사변으로 당시 저항하던 시위대와 관리, 궁녀들도 대거 희생당한 시점에서 을미사변은 명성황후를 비판하는 이들도 만행으로 보는 사건이다.
- 명성황후 살해범 48명 중 1명인 구니토모 시게아키의 후손이 홍릉에서 사죄하기도 하였다. 이 후손은 ‘명성황후를 생각하는 모임’의 일원으로, 일본 규슈 구마모토현의 전·현직 교사들로 구성된 이 모임은 명성황후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고, 일본인들에게 이 사건을 알리는 일을 해 오고 있다.명성황후 살해 가담자 후손들 처음 한국찾은 날
- 2021년에 외교관이 조선에 영사관보(補)로 머물던 호리구치 구마이치(堀口九万一·1865∼1945)가 발송인으로 돼 있는 편지 8통을 발견되었다.# 모두 8통의 편지 중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자 편지에는 사건 현장에서 자신이 했던 행동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보니 가치가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12. 관련 인물들의 행보[편집]
우범선, 이두황, 권동진, 정난교는 을미사변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고 권동진의 형 권형진은 1900년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죽었고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게 죽었으며 이두황과 정난교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으나 권동진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미우라 고로는 다이쇼 덴노 시기 호헌삼파를 주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