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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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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崔圭夏 | Choi Kyu-hah


파일:최규하프로필.png

출생
1919년 7월 16일
강원도 원주군 원주면 봉산리
(현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봉산로 134)[1]
사망
2006년 10월 22일 (향년 87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사저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15길 10[2]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묘역-1호[3]
재임기간
제10대 대통령[4]
1979년 12월 6일[5] ~ 1980년 8월 16일
서명
파일:최규하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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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강릉 최씨[1]
부모
아버지 최양오, 어머니 이응선[2]
형제자매
8남매 중 장남[3]
배우자
홍기
자녀
아들 최윤홍, 최종석
딸 최종혜
학력
원주보통학교 (졸업)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졸업 / 33회)
도쿄고등사범학교[4] (영문과 / 졸업)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 / 졸업)
병역
해당사항 없음
종교
무종교[5]
신체
182cm[6], 75kg, A형
약칭


서옥(瑞玉)

현석(玄石)



파일:최규하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1. 개요
2. 약력
4. 평가
5. 묘소
6. 선거 이력
7. 소속 정당
8. 각종 타이틀
9. 여담
10. 대중매체에서
11. 어록
11.1. 제10대 대통령 취임사
12. 관련 단체
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취임 선서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

제12대 국무총리이자 박정희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였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어 대통령직이 궐위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의 표결을 거쳐 당선되어 그 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그러나 신군부가 주도한 12.12 군사반란으로 말미암아 재임 8개월 만에 축출되었으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짧은 임기를 지낸 대통령으로 남게 되었다.

이후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2006년 10월 22일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2. 약력[편집]


  • 1932.2. 원주보통학교 졸업[6]
  • 1937.2.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7]
  • 1941.2.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8]
  • 1943.2. 만주국 국립대동학원 정치행정반 졸업
  • 1943. 만주국 길림성 통양현사무소 행정과장
  • 1945.9. 경성사범대학[9] 영문과 조교수
  • 1946.4.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 (서기관 상당)
  • 1947. 미군정청 중앙식량행정처 행정실장 (서기관 상당)
  • 1948.8. 농림부 양정과장 (부이사관 상당)
  • 1948. 국제연합 식량농업기구 아시아지역 미곡위원회 대한민국 대표
  • 1951.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서리 (부이사관 상당)
  • 1951. 외무부 통상국장 (이사관 상당)
  • 1951. ECAFE 무역진흥회 대한민국 수석대표
  • 1952.7. 주 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총영사 (이사관 상당)
  • 1957.5. 주 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 (이사관 상당)
  • 1957.12. 재일교포체육회 회장
  • 1958.4. 제4차 한일회담 대한민국 대표
  • 1959.3. 주 일본 대한민국 대표부 공사 (관리관 상당)
  • 1959. 아시아 극동경제위원회 제11·12·13차 총회 대한민국 대표
  • 1959.9. 제7대 외무부 차관
  • 1959.12. 외무부장관 직무대행[10]
  • 1962.1. 동양화학 주식회사[11] 창립발기인
  • 1962. 아시아반공연맹 민족반공연맹임시총회 의장
  • 1962. 외무부장관 고문
  • 1962.7. 한일회담 고문
  • 1963. 외무부 본부 대사
  • 1963.3.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외교담당 고문
  • 1964.11. 주 말레이시아 대한민국 대사
  • 1967.6.30.~1971.6.3. 제14대 외무부장관
  • 1967. 제22차 UN총회 대한민국 수석대표
  • 1968. 제19차 콜롬보계획자문위원회 각료회의 의장
  • 1970. 한국외국어대학교 명예 문학박사
  • 1970. 일등수교훈장 수훈
  • 1971. 대통령비서실 외교담당 특별보좌관
  • 1971. 청조근정훈장 수훈
  • 1972.10. 남북조절위원회 위원
  • 1972. 대통령 특사
  • 1975.12. 국무총리 서리
  • 1976. 수교훈장 광화대장 수훈
  • 1976.3.12.~1979.12.5. 제12대 국무총리
  • 1977. 태국 백상훈장 수훈
  • 1979.10. 대한민국 대통령 권한대행[12]
  • 1979.12. 제10대 대통령 선거 후보 (무소속)
  • 1979.12.6.~1980.8.16.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
  • 1979.12.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장[13]
  • 1979.12.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80.5.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의장
  • 1980.5.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경식대훈장 수훈
  • 1980.5.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경식대훈장 수훈
  • 1980.8. 대한민국 대통령직 사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수훈
  • 1981.4. 국정자문회의 의장
  • 1985. 강원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 1988.11.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
  • 1991. 제3대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 1999.6. 백범기념관 건립위원회 고문


3.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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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편집]


대중에게는 보통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께 존재감이 없는 대통령이자 전두환의 12.12 쿠데타 이후 허수아비 대통령으로 전락한 인물 정도로 인식된다. 실제로도 대통령직을 본인이 직접 수행하는 데 욕심이 있었던 윤보선과는 달리 최규하는 정치적인 욕심이 전혀 없었다.[14] 따라서 정치적으로 평가를 받는 일은 드물다.

10.26 이후 박정희 사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가진 유신헌법에 따라 긴급조치까지 내릴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승화 체포동의, 전두환 중앙정보부 서리 겸직 인정, 5.18 등을 묵인하는 등 당시 전두환을 반대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어 최규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반대로 최규하의 입장에서 보자면 북한 문제도 있었지만 자신이 저항했다가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신군부라서 이 이상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쩔수 없는 조치였다. 만약 반기를 들었다면 전두환이 12.12 반란이 성공한 뒤 군부를 완전히 장악하여 미국마저 타협한 이상 사실상 1인자가 된 전두환인데 여기서 대통령권한을 발휘해 파면시키려는 순간 총칼이 날아올게 뻔 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전두환이 좋아서 했다기보다는 신군부에게 보복 당할 위험이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묵인하고 전두환의 비민주적 행위를 사실상 지지한거나 다름없는 행동은 비판받아야 마땅하긴 하지만 실권없는 상황에서 이는 너무 가혹한 비판이기도 하다. 게다가 12월 쿠데타가 터지기 이전 전두환의 월권행위에 최규하도 전두환에게 "당신은 정치인이 아니라 군인"이라고 꼽을 주거나, 주는 돈도 지금 뇌물 주는 거냐면서 거부하면서 탐탁치 않아했고, 전두환의 사조직이 군대를 뒤흔드는 것도 잘 알고 있어 어떻게든 견제하려 하는 등 전두환과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웠다. 문제는 12월 쿠데타로 한 방에 주도권이 전두환에게로 넘어가버린게 컸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진실을 밝히려는 각계의 노력을 외면하면서 증언을 거부하고, 문민정부 들어서 12.12와 5.18을 단죄하는 국면에서도 끝끝내 침묵을 지키겠다고 선언한 행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비판점이다.



5. 묘소[편집]


파일:external/pbs.twimg.com/CbgyinfVAAA55xS.jpg
파일:external/pbs.twimg.com/CbgykH7UAAAOJ3r.jpg
현석(玄石)[15] 최규하 전 대통령과 배우자 홍기[16] 묘소.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 내 국가원수 묘역.[17]
사후 2006년 10월 26일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원수 묘역에 안장되었다. 1985년에 설립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최초의 대통령이자, 현재 유일한 대통령이다.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79
제10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무소속(정치)|
무소속
]]

2,465 (96.29%)
당선 (1위)
[18]


7.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75 - 2006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8. 각종 타이틀[편집]


  • 역대 최단기 재임 대통령이자 유일하게 재임 기간이 1년 미만인 대통령(8개월간 재임)[19][20]
  • 2023년 기준 역대 최장신(182cm) 대통령[21]
  • 2023년 기준 두 번째로 체중이 많이 나가는(75kg) 대통령[22]
  • 윤보선과 함께 재임기간 내내 무소속이었던 둘 뿐인 대통령[23]
  • 유일하게 당적 보유 이력이 없는 대통령
  • 유일한 관료(외교관) 출신 대통령
  • 역대 두 번째 국무위원(외무부장관) 출신 대통령[24]
  • 유일한 국무총리 출신 대통령[25]
  • 유일한 강원도 출신 대통령
  • 유일하게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대통령[26]
  •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김일성을 만난 대통령 #[27]
  • 21세기에 사망한 첫 전직 대통령[28]
  • 최초로 연상 영부인을 둔 대통령[29]
  • 최초의 초혼 대통령[30]
  • 유일한 최(崔)씨 대통령
  • 박정희와 함께 대통령 권한대행 경험이 있는 둘뿐인 대통령.
  • 임기 중 국군의 날 기념식을 주관하지 않은 유일한 대통령.[31]

9. 여담[편집]


  • 일제강점기 말기 창씨개명한 일본식 이름은 '우메하라 케이이치(梅原圭一)'이다.

  • 할아버지 최재민이 조선 말기에 성균관 박사를 지낸 이름 높은 한학자였기에 3살 때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선비로서의 훈도와 한학, 예절을 배웠으며, 덕분에 한자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과 고문학에도 실력이 뛰어났다. 원주보통학교(지금의 원주초등학교) 출신이어서 이 학교에 몇 점의 휘호와 자필 서신을 남겼으며 전통적인 한문 필체로 평가받는다.
파일:external/www.artday.co.kr/W5666kor1371436401.jpg

  • 윤보선과 함께 존재감 없는 대통령으로 꼽힌다. 하지만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대통령으로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일 뿐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장면 총리를 견제하는 등 힘이 아예 없지는 않았고, 퇴임 후에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서 박정희와 두 번이나 붙는 등 정치 활동을 계속해서 나름대로 존재감이 있지만, 최규하는 막강한 유신헌법 하의 대통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권이 신군부에게 있었고, 퇴임 후에도 바로 정계를 은퇴해서 조용히 살다 죽었기 때문에, 존재감이 가장 작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윤보선은 의원 내각제 하의 대통령이긴 하지만, 장면이 도피하여 대통령이 5.16 군사반란을 진압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우유부단하게 행동했기에 신군부에 의해 이미 취임 때부터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던 최규하보다 더 무능하다는 평가가 있다. 게다가 윤보선은 이후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후에는 전두환과 친하게 지내고 1987년 대선 때는 노태우 지지선언까지 하면서 최규하에 비해 존재감과는 별도로 평가가 좋지 않다.

  • 대통령 중에 가장 처음으로 생전에 살던 가옥이 문화재[32]로 지정되었다. 개방 시설이므로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다. 위치는 망원역합정역의 딱 중간이며 주소는 "서울특별시 마포구 동교로15길 10"이다. 여담으로 그의 자택은 2015년에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 동룡이네 집으로 등장했다. 관련기사

  • 광부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평생 연탄을 때겠다고 약속했고[33], 실제로도 노년까지 직접 연탄을 집게로 날라 때운 연탄 보일러로 방을 덥혔다. 냉방 기계인 선풍기 또한 딸이 태어날 때 사들인 옛날 물건이었고, 에어컨 역시 장남이 미국서 사용하던 것 그대로 들여온 것이었다. 메모지도 달력을 잘라 제작했으며 그 달력에 빽빽히 매일매일의 일정을 기입했다. 볼펜 또한 1968년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당시 한미회담에서 썼던 볼펜을 쓰고 있었다. 심지어 맷돌과 돌절구도 썼다고 하니 그가 얼마나 검소한 삶을 추구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느 하루는 꽃동네의 신부가 우연히 산삼을 얻어 최규하에게 선물했는데, 그 산삼을 돌려보내며 다른 불우한 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했던 적도 있었다. 때문에 정치인 최규하를 비웃는 사람들은 있을지언정 그런 사람들조차 그의 개인적인 면모는 존경하는 경우가 많다.

  • 식단도 역대 대통령중 굉장히 검소하기로 유명하다. 재직시절 즐기던 음식도 국수, 콩자반, 냉면, 나물 등이었으며, 술도 즐기지 않았다. 그나마 술을 마실 때에는 과일주나물에, 생선구이나 전골 등을 즐겼다고 한다.

  • 영부인 홍기와는 무려 69년을 함께 살았으며, 부인이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자 8년 동안 직접 간호한 애처가. 홍기가 와병하던 안방에 온도계를 달고 매일마다 실내 온도를 체크했으며, 화장실 출입이 어려울 것을 염려해 안방과 통하는 곳을 화장실로 개조하기까지 했다. 미국에서는 반대로 전직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영부인인 낸시 레이건이 그를 돌봤다.

  • 협박에 의해 긴급조치를 묵인한 것 외에는 특별한 악행을 하지 않았고 전직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국민장을 치렀지만, 정작 대부분의 국민들은 국민장을 치렀는지 안 치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최규하가 아직도 살아 있었어? 같은 반응도 나왔다. 국민장 당일에는 2,000여 명 가량이 참여했다. 그래도 전직 대통령의 장례에 걸맞게 KBS, MBC, SBS, YTN 등 주요 언론사들에서 주요 뉴스로 보도했고, 정계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 내외와 한명숙 전 총리, 김대중, 김영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했다.

  • 대통령에 취임해서 뭔가 좀 해보려고 하는데 뭘 시작도 하기 전에 쫓겨난 탓에 역사적 평가에서 동정을 많이 받는다. 실권도 거의 없었고. 한국사로 치면 공양왕과 비슷한 포지션.

  • 신장이 182cm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중 최장신이다. 2020년대 기준으로 봐도 장신이며, 대한민국 남성 평균 신장보다 훨씬 크다.


  • 긍정적 수식어로 많이 붙는 표현이 '선비'. 언론에서나 다른 정치인들이 최규하를 수식하는 단어로 '선비 대통령', '선비 정신을 갖춘 대통령' 이런 식으로 간간히 쓰였고, 장례 때도 한명숙 전 총리의 조사에서 "선비의 표상"라는 표현이 쓰이기도 했었다. 이는 사실 그가 한학을 배우기도 했었고,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살았던 걸 가리키는 수식어로 많이 쓰였지만, 정작 현대 한국에서는 '선비'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강한 경향이 있고, 검소함이나 절제와 함께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라고 할 부분인 '절개'나 '기개'라는 부분에서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했던 행적을 생각하면 묘한 느낌이 드는 표현이다.

  •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늘 따라 다니는 인물평은 '남이 돌다리를 두드려 건너는 것을 본 뒤에 그 위를 건너는 사람'이였다. 이 인물평처럼 최규하는 대단히 꼼꼼한 성격이라서 결재할 때 영어 스펠링이나 한글의 맞춤법 사소한 것까지 모두 지적했고, 외교관이면서도 골프를 일절 치지 않았다. 실제로 '골프 안 치고도 총리, 대통령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외교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일할 때, 한 번은 돈지갑을 안 가지고 구내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가 동석한 다른 특보로부터 500원을 빌려 점심값을 냈다. 그 며칠 뒤에 500원짜리 지폐를 봉투에 넣어 그 특보에게 상환을 했다. 남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 성격인 최규하는 결코 인맥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총리 시절 경기고[34] 동창회에 초대돼도 '총리가 동문회에 참석하면 교육계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거절했었다. 그는 깨끗한 처신으로써 주위의 존경을 받기도 한 반면 지나친 조심성으로 해서 업무 처리가 늦어진다는 불평을 사기도 했다. 경성제일고보 동문인 최세황 전 국방차관은 학창 시절 최규하를 '특징이 없었던 점이 특징이었다'고 평할 정도였다. 일제가 만든 괴뢰국만주국의 관리로서 출세를 시작한 그는 4.19 직후를 제외하곤 자유당, 공화당 정권 아래에서 중단 없고 순탄한 관리생활을 해왔다. 최규하는 룰이 확립된 외교관 생활에 젖어 그의 행동은 극히 규격적이었다. #

  • 최규하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권영민 전 주독대사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최규하의 우유부단함이나 신중함을 비꼬는 의미로 국민들이 "최 주사"라고 부르기도 했었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 본인은 당연히 매우 불쾌해 했는데, 권 전 대사는 평소에 온화하던 최 전 대통령이 그 말을 듣고는 그렇게 불같이 화를 냈었다고 회고했다.[35] 사실 '주사'라는 표현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6급 공무원을 지칭하는 직급명이긴 하나, 지방직 공무원들의 경우 공무원끼리 서로, 또 민원인들이 공무원을 부를 때 적당히 사용할 만한 경칭으로 'OOO주사(님)을 사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소시민적 공무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널리 쓰였다[36]. 특히 9급으로 공무원 경력을 시작할 경우, 승진 시험 없이 경력 차면 연공만으로 승진 가능한 직급이 대개 6급 주사까지인 점을 감안하면, '동사무소나 면사무소 등에서 특별한 권한이나 재량 없이 지시와 규정대로 정해진 일이나 하는 중년, 또는 초로의 아저씨' 이고 행정의 권위주의 성향이 강하던 시절에는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하면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인데도 형식적인 규정에 얽매여 민원인을 죽도록 번거롭게 만든다'거나, 사회 전반이 민주화된 이후에는 '민원인이 화나서 찾아와도 자기가 문제를 해결해줄 능력은 없고, 그저 일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적당히 달래 돌려 보내기 급급하다'와 같이 공무원의 초라하고 무기력한, 더 나아가 무능하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상당히 함축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직급상으로도 주사 위에 사무관, 서기관, 부이사관, 이사관, 관리관, 차관, 장관, 부총리, 국무총리, 국가원수 총 11직급 차이나지만, 불과 한 급 차이인 5급 사무관과도 호칭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의 차이는 상당하다[37]. 이런 이미지를 생각하면 최규하를 지칭하던 '최 주사'라는 표현은 단순히 우유부단함과 신중함만을 비꼰 것이 아니라 대통령씩이나 하면서 하는 일은 말단 공무원같다, 즉 자기 권한과 재량으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는 못하고 그저 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서식 맞춰 서류나 써낸다는 식으로 무기력하고 무능력하고 자리나 차지하고 앉아있을 뿐 딱히 하는 일도 없다는 굉장히 심한 조롱이다. 그의 장점으로 꼽히는 검소함이나 자기절제 역시 이런 부정적인 평가와 얽혀서 '좀스럽고 쩨쩨하다'는 나쁜 의미로 해석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은 최규하 자신의 책임이고, 이런 평가가 억울하다고만 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의 행적이긴 하지만 대놓고 이런 모욕적인 소리를 들었으면 불같이 화내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이다.

  • 대통령 때 탔던 1979년식 푸조 604는 원주역사박물관 1층에 정태보존 형태로 전시돼 있고, 말년에 현대 뉴 그랜저를 소유하고 있었다. 얽힌 이야기는 현대 그랜저 문서로.

  • 1994년에 원주 생가 터가 원주시에 기증되어 1997년 원주시립박물관 조성 당시 원래 초가집이 아닌 기와집 형태로 복원되었고, 2016년 원주시립박물관이 10주기 추모전 '치악의 푸른 소나무', 2019년 탄생 100주년 기획전 '청렴의 지도자, 최규하 전 대통령'을 각각 열었으며 2021년 1층 기획전시실에 '현석실'을 열었다.


10.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ChoiGH.jpg
  • 역대 최규하 전문배우들 중 최다 출연자는 배우 김성겸인데, 1993년 KBS1 <다큐멘터리극장>을 비롯해 1995년 MBC 특별기획 제4공화국[38], 2005년 제5공화국, 2014년 대한민국 정치비사까지 4번 연기했다. 해당 배우가 최규하와 비슷한 외모 및 체격을 갖추고 있다 보니 엄청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최규하가 전두환을 군사반란 이전부터 견제를 하는 등 했으나 군사반란 이후 사실상 실권을 잃은 상태라서 끌려다녔지만 그래도 전두환에게 5.16 군사정변을 재현하는 건 한번으로 족하다며 반대하거나 국정원까지 겸직하는 것에 반대하는 등 할 말을 하는 등 나름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 1993년작 MBC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김성원이 연기했다.
  • 1995년작 SBS 창사 5주년 특별기획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김진태가 연기했는데, 3년 후 동 방송사의 정치 대하드라마 <삼김시대>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2023년작 영화 서울의 봄에서는 정동환이 배역을 맡았다. '최한규'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최규하 대통령과 비교하면 체격이 훨씬 작다.

11. 어록[편집]



11.1. 제10대 대통령 취임사[편집]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귀빈 여러분!

오늘 본인은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함에 즈음하여, 먼저 본인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주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여러분과 국민 여러분에게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방금 본인은 헌법이 규정한 바에 따라 선서를 하면서, 숙연한 마음으로 대통령으로서의 막중한 책임을 다시 한 번 통감하였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각하의 돌연한 서거 후, 우리 정부와 국민은 경악과 충격과 애도 속에서도 국장을 엄수하고, 그 뒤의 사태들에 냉철하게 대처하여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여 왔습니다.

우리 군은 철통 같은 전후방 방위태세를 유지하였으며, 미국방부는 신속한 외교적, 군사적 조치를 취하여 대한방위공약의 확고함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안정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의 염원을 바탕으로 사실상의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지고, 지난 12월 6일 합헌적 절차에 의거하여 대통령을 선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국내정세의 추이와 더불어 우리 나라를 둘러싼 주변정세와 국제환경의 험난한 현실에는 완화나 호전의 징후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갖가지의 어려움이 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0.26 사태 후 계속되고 있는 대내의 문제들과 상관작용을 하게 됨으로써 당면한 국가적 난국의 심각성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세계도처에서 대립과 분쟁이 거듭되는 가운데 국제정치 전반에 걸쳐 격동이 야기되고 있으며, 군사적 충돌의 위험성마저 엿보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침체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세계경제는 각국마다 자국의 권익옹호를 위한 치열한 경쟁 속에서 국제정치면의 불안을 반영하여 앞으로의 전망을 더욱 불투명하게 하고 있습니다.

근자의 중동사태에 연유한 석유파동은 잇단 원유가격의 앙등뿐만 아니라, 공급사정의 악화를 수반함으로써 세계경제 전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는 가운데, 특히 한국과 같은 비산유 개발도상국들에게 극심한 타격을 가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주변정세도 여전히 복잡하고 유동적인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이에 편승하여 군사력 증강을 계속해 온 북한공산집단은, 특히 [10.26 사태] 후 우리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혼란을 야기하고자 모략과 선동을 격화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무모한 군사적 도발마저 저지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국민 여러분에게 우리 나라는 비상시국에 처해 있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같은 우리의 내외현실을 직시할 때, 국기를 튼튼히 다지면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해야 할 현정부의 소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막중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이끄는 현정부는 국난타개를 위한 [위기관리정부]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같은 배경과 인식에 입각하여 본인은 앞으로 국정의 기본목표를 국가안전보장을 공고히 하고, 사회안정과 공공의 안녕질서를 유지하며, 국민생활의 안정과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도모하는 동시에 착실한 정치적 발전을 추진하여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이룩해 나가는 데 두고자 합니다.

먼저 국가의 안전보장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하여 국군전력증강계획을 계속 추진하면서 전국군장병의 사기를 진작하여 자주국방태세를 더욱 강화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우리 국군은 그 본연의 자세를 견지하고, 정연한 통솔지휘체제에서 국토방위의 초석이 될 결의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안보·경제·문화·사회 등 각분야에 걸친 한·미간의 우호협력관계를 더욱 증진하고 양국간의 상호방위협력체제를 공고히 하며 한·미연합군사령부의 효율적인 운영 등에 힘 쓸 것입니다.

대일관계에 있어서는 한·일간의 우호협력관계가 동북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에 긴요하다는 공동의 인식하에 양국간의 선린협력관계를 증진시키고자 합니다. 또한 정부는 기타 우방들과도 기존우호협력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한편, 평화적 통일의 기반을 확대하기 위하여 우리와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나라들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을 촉진해 나갈 것입니다.

비동맹제국과의 실질적인 협력관계도 증진하여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지지기반을 확대해 나갈 것입니다.

한편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우리 측의 정책기조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며, 앞으로도 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7·4 남북공동성명에 의한 남북조절위원회의 재개와 남북적십자회담의 재개, 남북한의 경제 및 기술교류를 위한 관계각료회담의 개최, 남북한의 책임있는 당국간 회담, 그리고 남북한 및 미국의 3당국 회의의 개최 등 우리측의 일련의 대화제의는 지금도 유효하다는 것을 명백히 하면서, 북한측이 이상의 어느 방식의 대화이든간에 조속히 응해 올 것을 거듭 촉구하는 바입니다.

국민 여러분!

국가의 안전보장을 굳건히 하기 위한 대내외적인 노력이 아무리 강화된다 하더라도 우리 내부에 대립과 분열이 파생되어 무질서와 혼란이 조성된다면 국가방위능력을 저상시키게 될 뿐만 아니라, 북한공산집단의 오판을 낳게 하여 그들의 대남도발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부는 국민의 이해와 협조를 얻어 국법질서의 유지와 공공의 안녕확보등 사회안정기반을 다지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가 당면한 어려움 중에서도 세계적인 경제난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시련이라고 하 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 국제경제의 혼미와 침체는 앞으로 각국의 경제에 대하여 공통적으로 물가고와 저성장, 교역의 부진과 실업증대 등의 현상을 심화할 것이 예측되며, 개방체제인 우리나라의 경제도 이에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이같은 국제경제의 여건은 내년도 우리 나라의 경제에 큰 어려움을 주게 될 것이며, 예컨대 원자재가격의 앙등 등으로 인한 수출신장력 둔화, 성장률의 저하, 그리고 고용면의 문제 등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특히 우리 경제는 거듭되는 석유가격 앙등으로 추가적 부담이 가중되어 국제수지의 불균형이 더욱 확대될 것이 우려됩니다.

최근의 원유가격의 동향으로 보아 내년도 원유확보에 따른 추가적인 부담이 30억불에 달할 경우마저 상정되고 있습니다. 단언하면 이는 우리 국민의 소득이 그만큼 삭감 당함을 뜻하며, 국민생활에 큰 어려움을 안겨 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에 대처하여 정부는 외부의 충격을 가능한 한 완화 흡수하여 우리 경제의 안정화를 도모하고 국민생활의 안정을 이룩하는 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할 것입니다.

또한 [에너지]를 비롯한 각종자원의 효율적인 사용을 위하여 기술 및 과학의 진흥에 힘쓰면서 범국민적인 [에너지] 절약운동을 전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여 정부의 힘만으로는 이같은 난국을 타개하고 우리 경제의 안정적 성장을 이룩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정부와 국민 전체, 그리고 노동자와 기업인이 각기 참고 견디며, 근검절약하는 가운데 혼연일체가 되어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해 나가야만 하겠습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리는 이처럼 우리 나라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권에 대한 위협을 방지하는 한편, 시대적 변천에 대응하여 점진적인 변화와 향상을 추구해 나가야 할 정치적 발전의 과제도 안고 있습니다.

본인은 지난 11월 10일 [시국에 관한 특별담화]에서 헌법개정을 포함한 정치적 발전문제에 관하여 [새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규정된 잔여임기를 채우지 않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빠른 기간내에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하게 들어서 헌법을 개정하고 그 헌법에 따라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습니다.

또한 본인은 이 문제가 신중하고도 진지한 연구와 검토를 거쳐 한시라도 헌정이 중단됨이 없이 합헌적 절차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이같은 본인의 소신에는 현재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것을 우선 이 기회에 명백히 하고자 합니다.

정치적 발전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전제는, 지금의 국가적 현실을 우리 역사의 흐름속에서 옳게 파악하고, 이러한 인식에 입각하여 연속성을 지닌 우리의 미래를 용의주도하게 설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정치적 발전을 기함에 있어서는 당면한 위기의 실상을 바로 보고, 안정과 질서를 바라는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한편, 국가의 장래를 길게 내다보면서 신중하고 착실하게 추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8·15 해방 이후 우리의 헌정사를 잠깐 회고해 보건대, 국민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가지 형태의 헌법을 제정 또는 개정하여 시행하여 왔습니다.

1952년 7월에는 1948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른 대통령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었으며, 4·19 후 1960년 6월에는 내각책임제 헌법이 채택된 바 있었습니다.

이 때 개정된 헌법은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불안도 있었고 우리의 적응능력도 미흡하여 이 제도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함으로써 정국의 불안정과 혼란이 거듭되고, 1년도 못가서 결국 헌정의 중단을 초래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5·16군사혁명 후, 1962년 12월에는 민정이양을 위한 헌법개정이 있었고, 1972년 12월에 현행헌법이 채택되었습니다.

이 일련의 개헌을 거치는 동안 우리는 한번도 정부의 평화적인 이양을 실현하지 못하였으며, 또 경제적·사회적 성장과 정치적 성장간에는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양자간에 항상 괴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금후의 헌법개정에 있어서는 이같은 우리 헌정사의 과오를 깊이 자성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른 경험을 교훈으로 삼아 국가적인 견지에서 장래에 후회를 남기지 않을, 또 지속성 있는 민주발전의 기틀이 되는 그러한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같은 전제에서 헌법개정문제에 대한 본인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조국의 분단으로 말미암은 남북한의 대치라는 냉엄한 상황하에서 국가의 계속성을 수호하고 국가안위를 확고히 할 수 있는 헌법이라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정치권력의 남용과 부패의 발생을 사전에 방지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극단적인 국론의 분열과 사회혼란을 초래하는 소지가 있는 헌법이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사회정의와 형평의 구현은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 하겠으나, 이것이 우리의 자유경제체제 자체에 도전하는 결과를 빚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기회균등의 원칙하에 개인의 창의와 노력을 존중하여 사회적 활력을 고무하는 것이 우리가 지향하는 바 자유롭고 번영된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본인은 헌법개정절차에 관하여도 이것이 어떤 정당이나 단체 등의 범주 안에서만 처리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또 어떤 이해관계자들간의 편의적인 타협의 산물이 되어서도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믿습니다.

현재 국회를 위시하여 각계각층에서 헌법문제에 관한 논의와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훌륭한 구상과 방안이 나오기를 기대하여 마지 않습니다. 국가의 최고기본법을 제정함에 있어서 본인은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에, 이미 천명한 바와 같이 정부로서의 앞으로 전국의 각계각층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어 가면서 적절한 시기에 구체적인 연구와 검토를 시작할 것입니다.

당면한 난국의 수습과 헌법문제의 중요성 등 제반사정을 고려할 때, 본인으로서는 앞으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동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어서 이에 수반되는 필요한 제반조치를 착실하게 취해 서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공명정대한 선거를 실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부언하고 싶은 것은 현행헌법의 시행에 있어 시대적 변천과 국민적 요망에 부응하는 운용의 필요성이 있다고 믿고 있으며, 적어도 본인은 앞으로 이러한 자세로 임할 방침임을 밝혀 두고자 합니다.

여하간 헌법논의에 있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여론의 최대공약수를 귀납하는 데 상호협력해야 할 것이며, 국민 모두가 국법질서를 확립하여 사회안정을 이룩하는 가운데 시국난과 정치적 입장에 관한 소이에 집착하지 말고 자제와 호양과 신뢰로 화합함으로써 국민적 합의기반을 형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께서는 우리 사회의 튼튼한 안정기반이 곧 앞으로 닥쳐올 경제난국을 타개하면서, 정치적 발전을 추진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이해와 인내와 협조로 정부와 국민이 다같이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이런 때일수록 사회 각 분야에서 국민 각자가 자기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안정과 발전의 요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1970년대를 마무리하고 1980년대를 맞이하는 역사의 큰 전환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날 3차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으로 이미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하고 신생공업국가로 국제무대에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경제적·사회적 변동이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자치체제의 불안정이 초래됨으로써 부분적으로 마찰과 갈등, 그리고 새로운 문제가 파생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우리가 희구하는 자유민주주의의 원칙하의 발전과제와는 서로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란 단순히 외형적인 제도의 모방만으로는 정착되기 어렵고, 먼저 국가적인 현실에 입각하여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을 합리화함으로써 구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유에 대한 책임, 권리에 대한 의무 등이 서로 균형을 이루도록 국민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문명국가의 불가결의 요건은 법치국가의 국민이라는 자각과 긍지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경제적·사회적 변화에 대응하는 적응능력을 기르면서, 제반문제 등을 슬기롭게 해결해 나가고, 또 우리의 기약하는 바 국가발전을 순조롭게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본인은 평화와 안정과 발전을 위한 국민적인 참여의 영역을 확대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지혜와 경험을 시국타개와 국정운영에 동원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또한 본인이 거듭 말한대로 국민 각계각층의 광범위한 의견을 듣기 위하여 그들과의 대화를 폭넓게 갖고자 하며, 또 국정의 기본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하여 정계원로, 중진, 그리고 인격과 덕망이 겸비된 분들로 구성되는 기구를 만들 용의가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우리 민족은 장구한 역사를 통하여 무수한 국난과 파경을 겪어 왔으나, 그때마다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스스로의 생존과 문화전통을 수호하여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한번의 국가적 시련기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국민 모두에게 애국심과 단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때입니다.

또한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 인내와 자제로 대동단결하여 보다 차원높은 국가건설에의 준비를 갖추어 나가야 할 시기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모여 도도한 대하를 형성하듯 우리 국민 모두가 영광된 조국의 새역사를 창조하기 위하여 다같이 전진해 나갑시다.

1979년 12월 21일 대한민국 대통령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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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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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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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조부 최재민 · 아버지 최양오 · 어머니 이응선 · 아내 홍기 · 아들 최윤홍 · 아들 최종석 · 딸 최종혜
역대 선거
제10대 대통령 선거
사건사고
10.26 사건 · 12.12 군사반란 · 5.17 내란
관련 단체
박정희 정부 · 최규하 정부 · 외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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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번: 봉산동 836-1[2] 서교동 467-5.[3] 추도식 사진 자료[4] 취임 전까지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1979년 10월 26일 ~ 1979년 12월 6일)[5] 재보궐선거로 선출되었기 때문에 당선 확정과 동시에 임기 시작. 관보. 1984년 12월 26일로 예정된 박정희의 잔여임기를 수행하게 되었다.[6] 현 원주초등학교, 3학년 월반 입학.[7]경기중학교, 경기고등학교.[8]쓰쿠바대학.[9]서울대학교 사범대학.[10] 조정환 전 장관 사퇴 후 해가 넘어가도록 후임자가 임명되지 않아 꽤 오랫동안 직무대행을 했다. 이때문에 외무부장관이 1순위로 겸직하던 수석국무위원(국무총리의 대체 직책)도 차순위자인 홍진기내무부장관이 겸직했으며, 후임자는 이승만 전 대통령 하야 직전인 1960년 4월에야 임명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허정 전 대통령 권한대행 겸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이었다. 본인의 직속 상사도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고, 본인도 훗날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을 했다가 진짜 대통령까지 되는 상당히 기묘한 인연이라 볼 수도 있다.[11] 민주공화당 창당을 위한 사전 위장 조직.[12] 전임자 박정희 피살.[13] 헌법 상 당연직.[14] 대표적으로 윤보선은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압박 등으로 사임한 후에도 이후 제3공화국 체제에서 직선제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 두번이나 출마한 반면 최규하는 취임 시부터 새 헌법이 마련되면 자신은 후임자에게 권력을 넘겨주고 퇴임하겠다고 발표했고, 하야한 후에도 비교적 조용히 지냈다.[15] 하늘 아래 겸손하고 신중한 사람이란 의미이다.[16] 2004년 영면하여 선영에 묻혀있다가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합장되었다.[17] 사진 블로그 발췌[18]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의 간접선거.
1980.8.16. 대통령 사임.
[19] 대통령 권한대행기간을 포함해도 10개월이 채 되지 않는다.[20] 실권행사 자체는 1979년 10월 26일부터 1979년 12월 12일까지.[21] 대통령기록관엔 178로 적혀있으나 이는 말년에 줄어든 키로 보이며 실제로 대통령들과 찍은 사진을 보면 최규하가 지팡이를 짚고 있음에도 173cm인 김대중은 물론 178cm인 노태우와도 눈에 띌 정도로 키가 차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1910년대생의 평균 키가 162cm였으니 평균보다 무려 20cm나 큰, 평균 키가 174cm인 요즘으로 치면 195cm가 되는 엄청난 장신이다.[22] 90kg인 윤석열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면서 2위를 기록하고 있다.[23] 윤보선 전 대통령은 제2공화국 헌법상 대통령이 당적을 보유할 수 없었기에 임기 내내 무소속이었다.[24]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상공부장관을 역임한 바 있다. 이후 내무부장관을 역임한 노태우가 세 번째,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한 노무현이 네 번째 국무위원 출신 대통령이 된다.[25] 김종필, 이회창 등 유력한 대선 후보까지 나갔거나 박충훈 서리, 허정, 고건, 황교안처럼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한 적은 있어도 실제로 된 것은 최규하가 유일하다.[26] 현재까지 13명의 대통령 중 최규하 포함 9명이 사망했고 4명이 생존해 있는데, 사망한 9명 중 4명은 서울현충원 안장, 전두환, 노태우 2명은 구속과 형 확정으로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박탈되었고 윤보선, 노무현 2명은 국립묘지 안장 자격이 됨에도 본인의 의사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지 않았다. 생존해 있는 이명박, 박근혜 역시 형 확정으로 국립묘지에 못 들어가며 문재인 또한 노무현처럼 현충원에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했기에 오랫동안 대전현충원의 유일한 대통령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27] 다만 만난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니었다. 1972년 11월 3일 2차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한 이후락 위원장과 보좌단이 김일성 등 북한요인들과 기념촬영. 왼쪽부터(당시 직함) 최규하 청와대 특별보좌관, 김일 북한 내각 제1부상,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일성 북한 내각수상, 장기영 부총리.[28] 1991년~2005년까지는 전직 대통령 사망 등으로 속보가 나오지 않았다.[29] 최규하가 1919년생이고 영부인인 홍기가 1916년생으로 3살이 더 많다. 이 타이틀은 2살 연상의 영부인을 둔 김대중의 취임 전까지 최규하만 갖고 있었으나 김대중의 취임으로 유이한 타이틀 홀더가 됐다.[30] 이승만은 중혼, 윤보선박정희는 재혼 상태에서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에는 김대중이 재혼 대통령이 되었으며 박근혜는 미혼이었다.[31] 1979년 국군의 날 기념식은 최규하의 전임 대통령인 박정희가 주관했고 1980년 국군의 날 기념식은 최규하의 후임 대통령인 전두환이 주관했다. 그래서 영상 기록이 남아있는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부대 열중쉬어" 구령을 하는 장면이 없다.[32]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413호[33] 이 부분이 살짝 와전되어서 훗날 사북 사건으로 유명한 탄광을 방문한 뒤 저 약속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최규하가 총리 시절 탄광을 방문한 적은 있지만, 사북 사건의 배경인 정선 탄광이 아닌 삼척군 장성읍(현재의 태백시) 장성광업소 탄광이다. [34] 최규하가 졸업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후신이다.[35] 권영민, <자네 출세했네>에서.[36] 2010년대 이후에는 9~6급 공무원(서기보, 서기, 주사보, 주사)을 통칭하는 호칭으로 '주무관'을 사용할 것이 권장되어 많이 대체되기는 하였으나, 사실 2020년대 이후에도 특히 노인 인구가 많은 시골 지자체등에서는 '주사(님)'이라는 호칭을 흔히 쓰는 곳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주사라는 호칭은 흔히 쓰이던 것이다. 하물며 최규하가 현역 대통령질 하던 시절이야 말할것도 없이, '주사'가 바로 현장에서 일하는 말단 현역 공무원의 대명사였다. 굳이 특이사항을 찾는다면 진짜 주사인 6급은 주사라고 부르지 않고 직책에 따라 '계장' 정도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는 것 정도.[37] '주사'에 대한 저런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비교적 나이 지긋한 세대의 경우, 5급인 '사무관'에 대해서는 공무원 사회에서 슬슬 관리직의 초입에 들어서기 시작한 만만찮은 직급이라는 이미지를 가진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70~80년대생 이상의 나이 지긋한 이들 중에는 면사무소의 면장이 보통 5급이라고 하면 생각보다 높은 직급이라고 깜짝 놀라는 이들도 적지 않을 정도.[38] 박정희에게 수시로 까이는 경우가 많아서 의도하지 않은 코믹함을 자아내었다. 이후 속편 제5공화국에서는 약간 코믹함을 가미해서 연기했다는 게 차이점이다. 일례로 전두환정승화를 체포하는 건에 대해서 최규하에게 사인을 받으러 간 장면에서 나온 "국방장관을 찾아오세요."라는 대사의 톤이 상당히 다르다. 후자는 아자개의 톤이 가미된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