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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례 명칭 변천 : 합동참모회의의장(초대) ▸ 연합참모본부총장(초대~6대) ▸ 연합참모회의의장(7대) ▸ 합동참모의장(~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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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 직위 및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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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0000> || ||<bgcolor=#B0C4DE,#5c6169> 초대 김홍일 ||<bgcolor=#B0C4DE,#5c6169> 2대 김백일 ||<bgcolor=#B0C4DE,#5c6169> 3대 백선엽 || 4대 이형근 || 5대 김종오 || || 6대 전부일 || 7대 김익렬 || 8대 장창국 || 9대 양국진 || 10대 김용배 || || 11대 최석 || 12대 박임항 || 13대 임부택 || 14대 김익렬 || 15대 문형태 || || 16대 이상철 || 17대 김상복 || 18대 심흥선 || 19대 전부일 || 20대 김재명 || || 21대 최우근 || 22대 박희동 || 23대 양봉직 || 24대 이희성 || 25대 황영시 || || 26대 김윤호 || 27대 이기백 || 28대 백운택 || 29대 박희도 || 30대 최세창 || || 31대 류승국 || 32대 문영일 || 33대 이필섭 || 34대 이병태 || 35대 김상준 || || 36대 조성태 || 37대 김척 || 38대 박영익 || 39대 강신육 || 40대 정중민 || || 41대 오현구 || 42대 김선홍 || 43대 임충빈 || 44대 장광일 || 45대 황중선 || || 46대 권오성 || 47대 최종일 || 48대 모종화 || 49대 엄기학 || 50대 김용우 || || 51대 서욱 || 52대 안영호 || 53대 황대일 || 54대 안병석 || 55대 이두희 || || 56대 강호필 || 57대 주성운 |||||||| ||<-5><bgcolor=#004ea2> 관련 직위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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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국 대사관 겸 주 국제해사기구 대표부 대한민국 특명전권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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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0000> || ||<width=20%><rowbgcolor=#dcffed,#003318> 초대 이형근 ||<width=20%> 2대 원용덕 ||<width=20%> 3대 정일권 ||<width=20%> 4대 송호성 ||<width=20%> 5대 김백일 || ||<rowbgcolor=#dcffed,#003318> 6대 최덕신 || 7대 김홍일 || 8대 이준식 || 9대 안춘생 || 10대 김종오 || ||<bgcolor=#dcffed,#003318> 11대 박병권 ||<bgcolor=#dcffed,#003318> 12대 장창국 ||<bgcolor=#dcffed,#003318> 13대 백남권 || 14대 이한림 || 15대 강영훈 || || 16대 김용배 ||<bgcolor=#dcffed,#003318> 17대 박중윤 || 18대 정래혁 ||<bgcolor=#dcffed,#003318> 19대 이세호 || 20대 김희덕 || || 21대 심흥선 || 22대 최세인 || 23대 최우근 || 24대 정승화 || 25대 백석주 || || 26대 차규헌 || 27대 김복동 || 28대 최연식 || 29대 황인수 || 30대 지일환 || || 31대 최문규 || 32대 장준익 || 33대 민병돈 || 34대 이필섭 || 35대 임인조 || || 36대 김정헌 || 37대 장성 || 38대 김정남 || 39대 장창규 || 40대 한승의 || || 41대 오남영 || 42대 박준근 || 43대 김충배 || 44대 김선홍 || 45대 임충빈 || || 46대 김현석 || 47대 정승조 || 48대 이봉원 || 49대 박종선 || 50대 박남수 || ||<bgcolor=#dcffed,#003318> 51대 고성균 || 52대 양종수 || 53대 최병로 || 54대 김완태 || 55대 정진경 || || 56대 김정수 || 57대 강창구 ||<bgcolor=#dcffed,#003318> 58대 전성대 || 59대 권영호 || ||<-5><bgcolor=#008940> ※ 초대~13대, 17대, 19대, 51대, 58대 : 대령, 준장, 소장 / 14대~현임 : 중장 || ||<-5><bgcolor=#008940> ※ 관련 직위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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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ablewidth=100%><tablebgcolor=#fff,#191919><bgcolor=#ff0000> || || 초대 이형근 || 2대 유재흥 || 3대 강문봉 || 4대 송요찬 || 5대 이성가 || || 6대 오덕준 || 7대 양국진 || 8대 박병권 || 9대 최석 || 10대 최창언 || || 11대 서종철 || 12대 이창정 || 13대 황엽 || 14대 심흥선 || 15대 박춘식 || || 16대 최세인 || 17대 이동화 || 18대 김재규 || 19대 정승화 || 20대 김학원 || || 21대 윤성민 || 22대 전성각 || 23대 이상훈 || 24대 한철수 || 25대 신치구 || || 26대 이진삼 || 27대 박익순 || 28대 편장원 || 29대 김종배 || 30대 이규환 || || 31대 김석재 || 32대 박봉식 || 33대 신일순 || 34대 권영기 || 35대 박흥렬 || || 36대 최용주 || 37대 김일생 || 38대 이성호 || 39대 이용광 || 40대 한동주 || || 41대 나상웅 || 42대 김병주 || 43대 김승겸 || 44대 박상근 || 45대 전동진 || || 46대 신희현 || 47대 김봉수 || || || || ||<-5><bgcolor=#1d2088> 관련 직위 둘러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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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 [ 펼치기 · 접기 ]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 1951 이근석 공군준장 |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 1951 김용식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김용배 육군준장 | 1951 박노규 육군준장 | 1951 김백일 육군중장 | 1951 김홍일 육군중장 | 1951 함준호 육군중장 |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 1951 최용남 해병소장 | 1951 김성은 해병중장 |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 1952 이형근 육군대장 | 1951 권동찬 육군준장 | 1952 김종오 육군중장 |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 1953 장덕창 공군중장 | 1953 최용덕 공군중장 |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 1953 김교수 육군대위 | 1953 김한준 육군대위 | 1953 김용배 육군대장 | 1953 민기식 육군대장 | 1953 임충식 육군대장 | 1953 한신 육군대장 | 1953 김점곤 육군소장 | 1953 이성가 육군소장 | 1953 이용문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 1953 김동빈 육군중장 | 1953 김종갑 육군중장 | 1953 백인엽 육군중장 |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 1953 유재흥 육군중장 | 1953 최영희 육군중장 | 1953 함병선 육군중장 | 1953 최치환 총경 | 1954 김만술 육군대위 | 1954 허봉익 육군대위 | 1954 김경진 육군소령 | 1954 김웅수 육군소장 | 1954 송석하 육군소장 | 1954 엄홍섭 육군소장 | 1954 임선하 육군소장 |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 1954 김옥상 육군일병 | 1954 조재미 육군준장 | 1954 안낙규 육군중사 | 1954 박병권 육군중장 | 1954 이응준 육군중장 | 1954 이준식 육군중장 | 1954 장도영 육군중장 | 1954 최석 육군중장 | 1954 최창언 육군중장 | 1954 박옥규 해군중장 | 1954 김석범 해병중장 | 1955 김창룡 육군소장 | 1955 정긍모 해군중장 |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 1960 미군무명용사 -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 1961 국군무명용사 - | 1964 박정희 대통령 | 1966 이종세 육군상사 | 1966 강재구 육군소령 | 1966 이인호 해병소령 | 1967 송서규 육군대령 | 1967 채명신 육군중장 | 1967 지덕칠 해군중사 | 1967 정경진 해병대위 | 1967 신원배 해병소위 | 1968 최규식 경무관 | 1968 이익수 육군준장 | 1968 최범섭 육군중령 | 1970 이세호 육군중장 | 1972 이무표 육군대위 | 1972 임동춘 육군대위 | 1980
전두환(취소) 육군대장 | 2002 장철부 육군중령 |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 2011 조달진 육군소위 |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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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군인이자 외교관.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 이 시기 같은 학교에 있던 영친왕과 대면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만났을 당시에는 일본어로만 말해서 약간 실망했지만 광복 다음 날에 만났을 때는 일본인 같은 행동거지를 제외하고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놀랐다고 한다. 이전에는 조심해서 처신해야 해서 그랬지만 광복 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그랬던 모양.
포병 대위로 복무하다
태평양 전쟁 종전을 맞았다. 전쟁 말
대륙타통작전 관련 이야기를 회고록에서 한다.
대한민국 국군 군번 제1번으로 유명하며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응준 장군의 사위이다.
이 사항 때문에 필요없이 욕을 먹기도 한다. 참고로 여기서 국군 제1번이란 회고록에 의하면
군사영어학교 등록 번호이고 성적이라는 것인데, 실질적으로 군사 영어 학교에서 군번 취득용 시험은 없었다는 게 오늘날의 기록이고 등록번호 등은
채병덕 등이 앞선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저런 사항을 감안하면 5번대 이후라는 것이
채병덕 평전에서 주장하는 내용.
[3] 채병덕과 군번 싸움으로도 말이 많았지만, 사실 김홍일이나 김석원 같은 원로가 군번 1번을 상징적이나마 받지 못한 것이 당대에도 말이 많았다. 일본군 경력자인 김석원이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김홍일 장군은 광복군 출신이었는데도 말이다.
이형근의 회고록에서는 자신이 번호가 너무 빨라서 미군에게 내가 일본군에서 그들보다 계급이 낮은데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자 "우리는 일본군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다. 국군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과거 일본군에서 보내준 자료를 바탕으로 우리가 결정하였다."라고 하였다(이전에는 '
군사영어학교 시험 성적으로 결정하였다.'라고 하였지만 안 통하니 말을 바꾸었다). 이에 대해 채병덕 평전에서는 이미 망한 일본군에서 무슨 경황이 있다고 복무 성적 등 자료를 보내주는가 하며 비판하였다.
문제는
채병덕과 군번으로 인한 갈등 때문에 국군 탄생과 동시에 파벌이 생겼다. 이 갈등 와중에 채병덕이 육군 참모 총장이 되어 완벽하게 국군을 말아 먹는다. 그리고 이형근은 채병덕이 수상하다며 그의 회고록에서 계속하여 비판한다(채병덕 평전에는 이형근이 장인 백으로 군번 1번을 받았다며 비난한다).
1946년에 조선경비사관학교 교장을 맡았고, 국방 경비대 총사령관 겸 육군사관학교장, 통위부 참모총장,
제8사단장을 역임했다.
6.25 전쟁이 터진
1950년 6월 제2사단장에 부임했고,
1951년 9월 휴전 회담 당시 한국 측 대표를 맡았다.
1956년 9월 제9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으며
백선엽,
정일권과 함께 1950년대 군 주축 세력으로 활약하다
1959년 8월 대장으로 전역했다. 1962년 7월 25일,
김용식의 후임으로 주영대사로 발령, 아그레망이 접수되었으며 11월 7일에 신임장을 제정하였다. 1967년 9월에 귀국, 후임 대사로 1967년 7월 18일,
배의환의 아그레망이 접수되었다.
이후 주필리핀한국대사를 지냈다.
창씨개명 당시의 이름은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이다.
백선엽의 군과 나 이후에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회고록을 월간 중앙에 연재했는데 마지막 부분에 제시한 "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가 아직도 인터넷에서는 유명하다. 오히려 업적보다도 이런 점으로 더 유명한 편.
2000년대
군사지에서 소개한 미 군사 고문단 관련 연구 자료와 미 군사 고문단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전쟁 초기에 주요 침공로인 축석로 방어에 중대한 오점을 남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전 후 오전 8시에 각 부대 지휘관의 원대 복귀를 명했고, 이형근의 고문관도 비슷한 시기에 부대 복귀를 명받았지만 막상 이형근은 오후나 되어서 복귀한다. 그때는 이미 축석령 부분의 방위는 포기한 상태였다. 간첩...론은 아니지만, 38선에서 흔히 일어나는 분쟁 정도로 가볍게 봤을 가능성도 있고 미 고문단 보고서도 이형근의 그런 실책을 암시하는 정도이다.
10대 미스터리는 주요한 떡밥이라서 연구가 되긴 했는데. 2017년 현재는 그렇게 신빙성 있는 의견은 나오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전쟁 연구 학자들이나 군 전문가들의 연구로 인해 부정되고 있는데 대체적으로는 이형근 본인의 판단 오류와, 초창기 한국군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불운으로 해석하는 편이다. 일부 정치적인 논쟁거리로만
[4] 이를테면 유재흥이나, 뉴데일리 같은 데서 나오는 좌빨 암약설. 최근에 조선일보에서는 모태범이라는 국군 장교가 이 10대 미스터리를 뒤에서 획책한 통적분자라고 나왔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그날 동계 올림픽에서 모태범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
나오는 편. 오히려 이형근의 여러 실책들이 묻히는 감이 있긴 하다.
1970년대 초에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아들인 가수 이현 (본명 이헌)이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이현은 '
잘 있어요' 등의 히트곡을 남겼고, 가수 은퇴 후에는 기업인이 되었다.
[5] 노년이 되어 다시 가수로 돌아와 가요무대에 가끔 출연한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군 부문에 선정되었다.